
책 제목 '춘추(春秋)'는 동양고전 〈춘추〉가 아니라 신라 29대 임금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말한다. 굳이 성(姓)을 떼낸 이유는 신라 당시에는 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에는 '춘추'라고 되어 있다.
춘추는할아버지인 25대 임금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졌지만 왕권과 늘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 용수는 26대 임금 진평왕의 사위로서 한때 왕위 계승자였고, 27대 임금 선덕여왕은 그의 이모였다. 28대 임금 진덕여왕 때 춘추는 이미 왕정을 장악했다. 저자는 춘추가 소외된 귀족이었다는 기존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김춘추는외세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민족의 배반자'라는 부정적 인식도 일제 강점기 '민족'을 강조한 역사학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주장한다. 당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三國)은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춘추는 지성과 배포, 리더십과 판단력, 세계화(중국화) 실현 능력을 통해 한국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인수·합병을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저자에따르면 대신라(통일신라)는 오늘날의 한국과 한국인을 만들었다. 현재 한국인 중에는 단군이나 주몽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씨족이 없는 반면, 많은 사람들이 신라인을 시조 또는 중시조로 하는 김(金)·박(朴)·이(李)·정(鄭)·최(崔)·손(孫) 등을 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저자는 "단군의 자손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현대 한국사학이 발명해낸 이야기"라며 "나를 있게 한 아버지(조선), 할아버지(고려), 증조할아버지(신라) 중 증조할아버지를 심판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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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년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660년 당나라 군대와의 협공으로 백제를 정복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무왕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한통합(삼국통일)을 완성시켰다.
한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사료가 그리 풍부하지 않다. 신라인들에 의해 태종무열왕이라고 추앙받았던 김춘추 역시 마찬가지다. 오는 29일 서강대 총장에 취임하는 이종욱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경주에 머물면서 쓴 이 책에 대해 “신라인 (김)춘추에 대해 다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집대성했다고 자부했다. 부제가 말해주듯 현재의 한국과 한국인은 신라의 ‘직계’ 후손이며, 그 중심에는 천재적인 외교력과 불굴의 의지로 통일신라(대신라)의 계기를 마련한 김춘추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책은 김춘추의 생애를 진지왕의 손자로 왕궁에서 태어나서 생활하다 부모와 함께 출궁하기까지의 기간(출생~10세), 평생 동지인 김유신과 만나고 화랑도에 투신한 기간(10~30세), 선덕여왕의 측근 신하로서 왕의 꿈에 접근하던 기간(30~45세), 진덕여왕의 신하로 국정을 장악하고 몸소 당나라에 가서 파병을 약속받았던 기간(45~52세), 왕위에 올라 백제를 정복하고 이듬해 사망하기까지의 기간(52~59세)으로 구분했다.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정벌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길을 연 김춘추(태종무열왕). 경북 경주 통일전에 걸려 있는 김춘추의 초상화는 후대에 그린 상상도이다.
<삼국사기>는 김춘추의 아버지가 ‘용춘’ 또는 ‘용수’라고 기술했다. <삼국유사>는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고 적었다. 역사학계도 그렇게 봤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용춘과 용수는 형제이며, 김춘추의 아버지인 용춘은 죽으면서 부인과 아들을 동생인 용수에게 맡겼다고 나와있다.
김춘추는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처음부터 진골이었던 것은 아니다. 성골로 태어나 진골로 강등됐다. 이 교수는 이 과정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탄생시킨 최대의 스타 ‘미실’이 크게 개입했다고 분석한다. 진흥왕이 죽자 왕비 ‘사도’는 김춘추의 할아버지를 진지왕으로 세워 자신의 조카이자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미실을 왕비로 만들고자 했다. 왕위에 오른 진지왕이 이를 거부하자 사도와 미실은 그를 3년 만에 내쫓고 진평왕을 세웠다. 이 때문에 김춘추 일가는 진골로 내려왔다. 진평왕을 끝으로 성골 남성의 대가 끊겨 여성인 ‘선덕’과 ‘진덕’이 왕위에 올랐고, 성골여성마저도 끊기면서 김춘추가 즉위할 수 있었다.
김춘추는 왜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려 했던 걸까. 이 교수의 답은 간단하다.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며 존재를 위태롭게 했던 ‘적국’이었기 때문이다. 딸인 고타소가 백제에 의해 죽으면서 개인적 원한까지 겹쳤다. 고타소가 죽자 김춘추는 적국인 고구려에 가서 힘을 합쳐 백제를 치자고 했으나 거절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김춘추가 택한 길은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던 당나라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는 당 태종을 직접 만나 파병을 약속받았다.
이를 두고 신라가 다른 민족의 힘을 빌려 동족의 국가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반민족적 죄악을 저질렀고(손진태), 삼국통일의 결과 만주지역이 민족사의 활동무대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기백)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이런 평가는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일부 반영돼 있다. 이 교수는 이들이 당시엔 있지도 않았던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민족사를 재단하고 현재 한국인의 조상을 욕보였다고 비판한다. 오히려 뛰어난 지략으로 생존을 도모하고 적극적으로 국가의 운명을 도모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다.


경북 경주 서악동의 무열왕릉 앞에 있는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25호로 지정된 이 비는 일부만 남아있으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다.
이 책은 7세기에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의 필사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학자 박창화(1889~1962)가 일본 천황가의 보물창고인 정창원에서 필사했다고 주장되는 이 책은 그간 유추됐던 신라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 위작 논란이 일었다. 김 교수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에 근거했다고 보는 대표적인 학자다.
요즘 신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선덕여왕’의 영향이 크다. 흥미 위주일 수밖에 없는 드라마와 달리 이 책은 김춘추를 중심으로 신라라는 국가의 운영방식, 신라가 처한 상황 등을 진지하게 재구성했다. 그러나 이 교수가 크게 기대고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여부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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