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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數十萬, 騎兵軍團을 궤멸(潰滅)시키다 [제4편-2-1, 南齊書: 百濟]
〔107주년(周年) 3·1절(節)을 맞아〕
2,026년 03월 01일
〔‘남제서(南齊書) 백제(百濟)’ 편(篇)은, “1, 2”편(篇)으로 나누어 게재(揭載)합니다.〕
○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말은,
「“국가(國家)와 그 구성원(構成員)들인 국민(國民)”들에게 불행(不幸)한 과거사(過去事)【과거지사(過去之事)】를 떠올리게 하며,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를 경계(警戒)하고, 한편으로는 모두가 각성(覺醒)해야 하는 책무(責務)를 지고 있다」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大韓民國)과 그 부속도서(附屬島嶼)에서, 《「조선(朝鮮)」【‘반만년(半萬年)을 이어왔다’라는 모든 왕조(王朝)를 칭(稱)】이란 「옛 봉건왕조(封建王朝)는 존재(存在)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卽), 「옛 조선왕조(朝鮮王朝) 반만년(半萬年)을 이어왔지만, 그 무대(舞臺)는 반도(半島) 땅이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세력(土着勢力)이었기 때문이다.」
☛ 「황궁(皇宮)」이란 무슨 말일까? 바로 “황제(皇帝)의 궁궐(宮闕)”을 뜻하는 말로 “황궐(皇闕)”이라고 하는데……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황(皇) 또는 제(帝)”자(字)만 보아도 “중국(中國) 곧 중조(中朝), 황조(皇朝) ∼나라”를 말하는 것이라고 앵무(鸚鵡)처럼, 약속(約束)이나 한 듯, 연습(演習)한 듯, 달달 외운 듯 말한다.
그렇다면 : 그 중국(中國)에서는 ‘황궁(皇宮)’이란 문자(文字)를 어떻게 발음(發音)하고 있을까? ➠ 바로 「우리가 늘 말하는 “황궁(皇宮)”」이라고 말한다. ‘이게 말이 된다’라고 생각하시나? 중국(中國) 말과 우리나라 말은, 전혀 다른 풍속(風俗), 사회(社會) 속에서 체계화(體系化)되었기 때문에 같을 수 없는 것이다.
현재(現在)의 중국(中國) 말속에서 우리나라 말과 똑같은 발음(發音)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 그럼 중국(中國) 사람들이 “한글”의 우수(優秀)함을 미리 알아채고, 발음(發音)까지 똑같게 만들어 놓았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어리석은 질문(質問)이요, 짐작(斟酌)이다.
➥ 「바로 “우리의 역사(歷史)가 곧 중국(中國)의 역사(歷史)”이기 때문이다」 「중국(中國) 역사(歷史) 반만년(半萬年)은, 바로 우리의 역사(歷史)요, ‘조선족(朝鮮族)=한족(韓族)’의 역사(歷史)다」 이걸 빼앗아 간 자(者)가 바로 “서세(西勢)와 왜(倭)”요, 왜(倭)로부터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전수(傳受)【기술(技術)이나 지식(知識) 따위를 전(傳)하여 받음】한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21세기(世紀) 작금(昨今)의 시대(時代)에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정책(政策)이 100% 그대로 계승(繼承), 발전(發展)되어 가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아주 간단(間斷)한 문제(問題)다. 관심(關心)이 없거나 특별(特別)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것뿐이다.
☛ 곧, 「‘반만년(半萬年)이란, 그대로 5,000年’을 말하는 것이다. 말이 5,000年이지… …상상(想像)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라는 것은 짐작(斟酌)되는 일이다.
‘봉건왕조(封建王朝) 반만년(半萬年)’, 백성(百姓)들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졌던 “군주(君主)”【제(帝)=왕(王)=임금】의 권능(權能 : 權威)은, 하늘로 치솟을 정도(程度)였다는 것으로 볼 때, 사후(死後) 묘지(墓地)인 “왕릉(王陵)”은 상상(想像)을 불허(不許)할 정도(程度)의 규모(規模)로 만들어졌다.
더불어 사후세계(死後世界)를 믿었던 당시(當時)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 묘지(墓地)에는 생전(生前)의 것과 왕비(王妃) 또는 후궁(後宮), 그리고 노비(奴婢) 등을 살아있는 채로 묻는 소위(所謂) 순장제도(殉葬制度)가 있었을 정도(程度)니 더 무엇을 말할 수 있겠나!
【오죽하면, ‘조선(朝鮮) 땅에서 선발(選拔)’된 궁녀(宮女)‘가 제왕(帝王)의 총애(寵愛)를 받고, 후궁(後宮)이 되었다가 제왕(帝王)이 죽자, 순장(殉葬)될 처지(處地)에 놓이자, “제발 나를 나의 고향(故鄕)으로 돌려보내다오”라고 애절(哀絶)하게 호소(呼訴)했으나, 기어코 목숨을 빼앗아 순장(殉葬)시켰다고 전(傳)해진다. 그 궁(宮)에 살고 있었던 많은 후궁(後宮)과 궁녀(宮女)들은 그 후 몇 달 동안 그 애절(哀絶)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 후일담(後日譚)으로 전(傳)해졌는데, 그 궁녀(宮女)의 가족(家族)들은 본국(本國)에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렸으니… …참 애달픈 인생사(人生事)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 그렇다면 :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는 “왕릉(王陵)” 때문에 국토개발(國土開發)은 고사하고 보존(保存)하기에도 벅찰 정도(程度)의 수많은 “왕릉(王陵)” 때문에 아주 골치를 썩여야 정상(正常)일 것이다.」
➥➥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반도(韓半島) 땅을 보자. 단 하나의 왕릉(王陵)조차도 : “발굴(發掘)되어 확실(確實)하게, 명백(明白)하게, 왕릉(王陵)이라는 고증(考證)이 되었거나, 또는 그러한 증거(證據)가 발굴(發掘)된 곳이 한 곳도 없다”라는 것이 이를 증명(證明)해주고 있다.」그저 여기저기에 “왕릉(王陵)으로 추정(推定)된다”라는 팻말만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다.
단군조선(檀君朝鮮) 약(約) ‘2’ 천년(千年)
기자조선(箕子朝鮮) 약(約) ‘1’ 천년(千年)
한국(韓國) 약(約) ‘3’ 백년(百年)
삼국(三國) 약(約) ‘1’ 천년(千年)
고려(高麗) 약(約) ‘470’ 년(年)
조선(朝鮮) 약(約) ‘500’ 년(年)
◈ 이렇게 보았을 때 : 도대체 얼마나 많은 왕릉(王陵)이 존재(存在)하고 있어야 할까?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그곳 묘지(墓地)가 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 462~523)의 묘지(王陵)이었다는 증거(證據)가 무엇이냐?” 「솨 꼬챙이로 갈겨 쓴 것 같은 묘지석(墓地石)도 있더냐?」 그렇다면 : 여기서 그대들【반도사학(半島史學)과 식민사학계(植民史學界)】에게 한 번 물어보자.
㈠ 백제(百濟)를 별칭(別稱)으로 ‘택국(澤國)’이라고 불렀다는데 : 별칭(別稱)으로 불릴 만큼 많았다던 ‘택(澤)이나 하천(河川), 호수(湖水)’ 등은 어디로 사라진 건가?
㈡ 그 땅은 낮아 습도가 높고 기후(氣候)는 온난(溫暖)하여 백성(百姓)들은, 산(山)에 집을 짓고 산다는 곳이 어느 곳의 땅인가?
㈢ 백제(百濟)의 서(西)쪽에 있다던 주호국(州胡國)은 어디에 있었다는 건가?
㈣ 신라(新羅) 동(東)쪽에 있었다던 ‘휴인국(休忍國)’을 백제(百濟)가 병합(倂合)했다고 하는데, ‘휴인국(休忍國)’은 어디에 있는 건가? 열도(列島) 땅이 ‘휴인국(休忍國)’이었는가?
◈ 《이러한 것들은 “반도조선(半島朝鮮)과 조선팔도(朝鮮八道)에 모두 해당(該當)되는 이야기다.” “지”가 살아가고 있는 땅(地)의 지세(地勢), 기후(氣候), 특이지형(特異地形), 토산물(土産物), 방위(方位)도 제대로 모른대서야… …?》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진정(眞正)한 정체(正體)【참된 본디의 형체(形體)】는 무엇일까? 그게 의심(疑心)스러운 것이다.
➥ 「다른 것이야 실력(實力)이 없고, 아는 것이 없다」라고 하더라도 : 「최소한(最小限) 곡창지대(穀倉地帶)로 핵심요지(核心要地)였다는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 곧 ‘하삼도(下三道)’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들도 모른대서야… …?」
“지”가 살아가고 있는 땅의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조차 모른다면 : 「이 땅의 구성원(構成員)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격(資格)도 없는 셈이다.」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에는,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사학자(史學者)들이 있고, 강단(講壇)에 서있는 선생(先生)님들이 있다.
☛ 이렇게 많은 숫자의 사학자(史學者)들과 선생(先生)님들이 있지만 : 누구 하나 기성(旣成) 학계(學界)의 사부(師父), 선배(先輩), 동료(同僚)들에게 반론(反論)을 제기(提起)하고 답변(答辯)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 반면(半面)에 : “함부로 날뛰다가는 밥줄 떨어진다”라는 소리는 어디 가든 있다」라고 전(傳)해진다. 말 그대로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카르텔은 철저(徹底)하게 조직(組織)되어 있다」라는 것은 어디에서든지 확인(確認)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반도사학(半島史學) 카르텔」을 깨뜨려야 “이 나라가, 이 민족(民族)이 살아남을 수 있다” 언제까지 조종(操縱)당하며, 사육(飼育)당하며, 비웃음당하며 살 건가? 이제는 선택(選擇)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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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서(南齊書)의 ‘백제(百濟)’
○ 남제서(南齊書) : 남제(南齊)의 종친(宗親)이자 사학가(史學家), 문학가(文學家)였던 “소자현[蕭子顯 : AD 487∼537]”에 의해 “AD 510∼526”年間에 저술(著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 “백제(百濟)” 편(篇)에서는, 다른 사서(史書)에 보이지 않는 백제(百濟)와 관련(關聯)된 기록(記錄) 그대로 전(傳)해지고 있는데… …「백제(百濟)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세력(土着勢力)으로 제국(帝國)을 이루고 있었으며, 반도(半島) 땅 서남(西南) 모퉁이 땅에 없었다」라는 것을 1,500년(年)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후세(後世)들에게 전(傳)해주고 있다.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 「본국(本國)은 반도(半島) 땅에 있으면서,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동해연안(東海沿岸) 일대(一帶)를 분국(分國)으로 두고 경략(經略)했다」라는 어디에도 근거(根據)가 없는 이야기 수준(水準)의 주장(主張)을 한다. 주장(主張)이든 이야기든, 논거(論據)가 필요(必要)하고, 고증(考證)이 되어야 함은, 필수적(必須的) 조건(條件)이다.
반대(反對)로, 「본국(本國 : 本土)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요충지(要衝地) 땅이며, 반도(半島)의 서남(西南) 땅에 제후(諸侯)를 보내 다스렸다」라는 것쯤도, 발상(發想)의 전환(轉換)쯤도 필요(必要)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당시(當時)의 백제(百濟)는 여러 제후(諸侯)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뇌(洗腦)되어 망가진 뇌세포(腦細胞)를 깨워야 하는 것이다.
「구태여 꼭 반도(半島)여야 하는 이유(理由)가 뭘까? 왜 꼭 반도(半島) 여 만 하는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이건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학계(史學界)가 답(答)해야 할 문제(問題)다.
• 남제서(南齊書) : 【南齊書 : 蕭子顯(487年∼537年),字景陽(一作景暢),南齊宗室,齊高帝蕭道成孫,豫章文獻王蕭嶷第八子。南朝史學家及文學家。蕭子顯幼時聰慧,深受蕭嶷的寵愛。齊武帝永明十一年(493年),封寧都縣侯。天監元年(502年),梁朝建立,降封寧都縣子。歷任太子中舍人、國子祭酒、侍中、吏部尚書等職。後遷仁威將軍、吳興郡太守,至郡未幾即卒,時年五十一歲。博學能文,好飲酒、愛山水,不畏鬼神,恃才傲物。見九流賓客,不與交言,只是舉起手中扇子,一揮而已,諡曰「驕」。著作 : 撰有《後漢書》《晉史草》《南齊書》《普通北伐記》《貴儉傳》等歷史著作。但除《南齊書》外,均佚。】
• 남제서(南齊書),【《南齊書》,梁朝蕭子顯撰的紀傳體史書,記載自齊高帝建元元年(479年)至齊和帝中興2年(502年)的南齊歷史,成書於510年∼526年之間。》 梁武帝天監年間吳均曾請求撰寫《齊史》,未獲准許,後蕭子顯自告奮勇承擔了這個任務。經過幾年的努力,書成上奏,梁武帝下詔付秘閣收藏。《南齊書》在體例上「本(檀)超、(江)淹之舊而小変之」;蕭子顯多取材自前史家檀超和江淹奉詔修未成的齊史體例。還參考了熊襄的《齊典》、沈約的《齊紀》、吳均的《齊春秋》和江淹著的《齊史》十志等等。
《南齊書》部帙不大,年代又短,居然也撰寫八篇志,這無疑是江淹的首創之功。《南齊書》同《宋書》,宣揚神秘的思想、佛法的深遠,過分講究華麗的辭藻,這是《南齊書》的缺點,也是那個時代的文風使然。 後人也曾增補此書,陳述撰《補南齊書藝文志》4卷,清人萬斯同《歷代史表》中有〈齊諸王世表〉1卷、《齊將相大臣年表》1卷、《齊方鎮年表》1卷。由於蕭子顯是蕭道成之孫,對南齊政權有所庇護,但《南齊書》還是保留了較多原始資料。[出處 : 維基百科 自由的百科全書]】
南齊書, 卷 五十八 【梁, 蕭子顯, 撰】/ 百濟
○ 南齊書, 百濟 : 《前缺… …《報功勞勤實存名烈假行寧朔將軍臣姐瑾等四人振竭忠効攘除國難志勇果毅等威名將可謂扞城固蕃社稷論功料勤宜在甄顯今依例輙假行職伏願恩愍聽除所假寧朔將軍面中王姐瑾歴贊時務武功竝列今假行冠軍將軍都將軍都漢王建威將軍八中侯餘古弱冠輔佐忠効夙著今假行寧朔將軍阿錯王建威將軍餘歴忠款有素文武烈顯今假行龍驤將軍邁盧王廣武將軍餘固忠効時務光宣國政今假行建威將軍弗斯侯.牟大又表曰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逹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行宣威將軍兼參軍臣㑹邁等三人志行清亮忠款夙著徃太始中比使宋朝今任臣使冐渉波險尋其至効宜在進爵謹依先例各假行職且𤣥澤靈休萬里所企况親趾天庭乃不䝉頼伏願天監特愍除正逹邊効夙著勤勞公務今假行龍驤將軍帶方太守茂志行清壹公務不廢今假行建威將軍廣陵太守邁執志周密屢致勤効今假行廣武將軍清河太守詔可竝賜軍號除太守為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使兼謁者僕射孫副䇿命大襲亡祖父牟都為百濟王曰於戯惟爾世襲忠懃誠著遐表滄路肅澄要貢無替式循彛典用纂顯命徃欽哉其敬膺休業可不慎歟制詔行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今以大襲祖父牟都為百濟王即位章綬等五銅虎竹符四王其拜受不亦休乎.是歳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觧禮昆木干那率衆襲撃虜軍大破之.建武二年牟大遣使上表曰臣自昔受封世被朝榮忝荷節鉞剋攘列辟徃姐瑾等竝𫎇光除臣庶咸泰去庚午年獫狁弗悛舉兵深逼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宵襲霆擊匃犁張惶崩若海蕩乗奔追斬僵屍丹野由是摧其鋭氣鯨暴韜㓙今邦宇謐靜實名等之畧尋其功勲宜在襃顯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贊首流為行安國將軍辟中王觧禮昆為行武威將軍弗中侯木干那前有軍功又拔臺舫為行廣威將軍面中侯伏願天恩特愍聽除.又表曰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行揚武將軍陳明在官忘私唯公是務見危授命蹈難弗顧今任臣使冐渉波險盡其至誠實宜進爵各假行署伏願聖朝特賜除正詔可竝賜軍號.》
南 齊 書, 百 濟
(1) 《前缺 … …앞부분 누락(漏落), 報功勞勤, 實存名烈. : 공(功)에 대하여 보답하고 부지런히 힘씀을 위로하는 것은 실로, 그 명성과 공업을 보존하는 것이다. 假行寧朔將軍臣姐瑾等四人, 振竭忠効, 攘除國難, 志勇果毅, 等威名將, 可謂扞城, 固蕃社稷 : 가행영삭장군(假行寧朔將軍) 신(臣) 저근(姐瑾) 등 ‘4’명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나라의 환란을 물리쳤으며, 뜻과 용기의 결단성과 굳셈은, 위엄이 이름난 장수와 같으니, 나라의 든든한 성이요, 사직의 튼튼한 울타리라 할 만하오. 論功料勤, 宜在甄顯. 今依例輙假行職. 伏願恩愍, 聽除所假. : 공을 논하고 노고를 헤아리면 마땅히 환히 드러나는 자리에 있어야 하므로 지금 전례에 따라 잠시 임시직을 가수(假授)하였소. 엎드려 바라건대 은혜로움을 베푸시고 가엾이 여기시어 가수(假授)를 제(除)하여 주시오. 「➊ 寧朔將軍·面中王姐瑾, 歴贊時務, 武功竝列, 今假行冠軍將軍·都將軍·都漢王. : 영삭장군·면중왕 저근(姐瑾)은, 중요한 일을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을 열거할 만하니, 금(今) 가행관군장군(假行冠軍將軍)·도장군(都將軍)·도한왕(都漢王)으로, ➋ 建威將軍·八中侯 餘古, 弱冠輔佐, 忠効夙著, 今假行寧朔將軍·阿錯王. 건위장군(建威將軍)•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는, 젊은 나이부터 보좌하여 충성이 일찍부터 드러났으므로 금(今) 가행영삭장군(假行寧朔將軍)•아착왕(阿錯王)으로, ➌ 建威將軍餘歴, 忠款有素, 文武烈顯, 今假行龍驤將軍·邁盧王. : 건위장군(建威將軍) 여력(餘歴)은, 본바탕이 충성스럽고 정성스러우며 문무가 매우 뛰어나므로 금(今) 가행용양장군(假行龍驤將軍)•매로왕(邁盧王)으로, ➍ 廣武將軍餘固, 忠効時務, 光宣國政, 今假行建威將軍·弗斯侯. :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는, 중요한 일에 충성을 다하고 국정을 빛내고 선양했으므로 금(今) 가행건위장군(假行建威將軍)•불사후(弗斯侯)」라 하였소.”」【《前缺 … …報功勞勤實存名烈假行寧朔將軍臣姐瑾等四人振竭忠効攘除國難志勇果毅等威名將可謂扞城固蕃社稷論功料勤宜在甄顯今依例輙假行職伏願恩愍聽除所假寧朔將軍面中王姐瑾歴贊時務武功竝列今假行冠軍將軍都將軍都漢王建威將軍八中侯餘古弱冠輔佐忠効夙著今假行寧朔將軍阿錯王建威將軍餘歴忠款有素文武烈顯今假行龍驤將軍邁盧王廣武將軍餘固忠効時務光宣國政今假行建威將軍弗斯侯.》】》
➊ 「영삭장군(寧朔將軍) 면중왕(面中王) 저근(姐瑾)을, 가행관군장군(假行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도한왕(都漢王)」이라고 하였는데… …,
• 영삭장군(寧朔將軍) : 【寧朔將軍,中國古代武官名,歷代品秩多為四品,為雜號將軍的一種,最早為三國時曹魏所設立,其後一直設立到隋代,隋煬帝大業三年(607年),廢除此官職。[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에서 보다시피, ‘중원대륙(中原大陸) 왕조(王朝)’의 관직(官職) 이름이다. 4품(品) 장군직(將軍職)이라고 하였다.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관군장군(冠軍將軍) : 역시(亦是)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의 관직(官職) 이름이다. 【冠軍將軍 : 冠軍表示軍功卓越勝於其他的人。也是古代將軍的名號。冠軍一詞源於中國秦朝末年,各國起事,楚國大將宋義獲楚義帝封為上將軍,又名「卿子冠軍」。冠軍從此成為了大將軍的代名詞,意思是所有將領當中的第一人。現代則將競賽中獲得第一名的優勝者稱為冠軍,意思是第一名。】 ‘관군장군(冠軍將軍)’이란 ‘대장군(大將軍)’을 다르게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 면중왕(面中王), 도한왕(都漢王) : 백제왕(百濟王)이 임명(任命)한 “면중왕(面中王)이나 도한왕(都漢王)은 제후(諸侯)였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지명(地名)인지 또는 특별(特別)한 직명(職名)인지를 판단(判斷)할 수 있는 자료(資料)가 없다.
☛ “여기서 조금 빗나간 이야기이지만” : 고구려(高句驪)가 요동(遼東)에 있을 때,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를 점령(占領) 진평(晉平) 2군(郡)을 경략(經略)하였다」라고 여러 정사(正史)에서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問題)가 되는 군상(群像)들은,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다.
즉(卽), 「요동(遼東)•요서(遼西)를 구분(區分)하는, 가르는 분기점(分岐點)이 어디냐?」 하는 것인데,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는 말하기를 「현(現)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서(西)쪽 근교(近郊)를 흐르는 하천(河川)을 “요수(遼水)=요하(遼河)”」라고 굳세게 믿으며, 철옹성(鐵甕城)을 쌓아 놓고, 누가 뭐라든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다.
이런 ‘요수(遼水)=요하(遼河)’를 도하(渡河)하는 군대(軍隊)를 책임(責任)지는 총사령관(總司令官)의 직책(職責)이 바로 “도요장군(渡遼將軍)=도요장군(度遼將軍)”이며, 이들이 ‘도요(渡遼)=도요(度遼)’하여 주둔(駐屯)하고 있던 주둔지(駐屯地)가 바로 “도요영(渡遼營)”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요수(遼水)=요하(遼河)’를 건넌 도요장군(渡遼將軍) 휘하(麾下) 수만(數萬)의 보기(步騎)【보병(步兵)과 기병(騎兵)】는,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에 도요영(渡遼營)을 설치(設置)하고 주둔지(駐屯地) 곧 진지(陣地)를 구축(構築)해 놓고 있었을까?
천만(千萬)의 말씀이시다. 오늘날의 심양(瀋陽)으로부터 ‘5∼7’ 천리(千里)쯤 떨어져 있는 황하(黃河)【북하(北河)】북안(北岸)의 내몽고(內蒙古) 오원(五原) 북방(北方)에 “도요영(渡遼營)”의 진지(陣地)가 구축(構築)되어 있었다. 이게 뭔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이야긴가?
오죽하면 : 「중국어(中國語) 위키백과인 “維基百科 自由的百科全書”」에서조차도 「度遼將軍:兩漢設置,主要負責北方守衛」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卽), 【度遼將軍:兩漢設置,主要負責北方守衛 / 度遼將軍是西漢漢昭帝元鳳三年(前78年)設置的將軍名號,當年漢昭帝派遣范明友渡過遼水進攻烏桓,並任命其為度遼將軍。漢宣帝時一度廢除。東漢漢明帝永平八年(65年),漢朝為阻止南匈奴與北匈奴勾結,於五原郡設置度遼營,並任命吳棠為行度遼將軍事[2]。漢安帝永初元年(116年),度遼將軍成為常設官職,品秩為二千石。東漢末年,一度設置左度遼將軍和右度遼將軍。此將軍稱號沿用至曹魏和北齊[4]。《後漢書》卷2:遣越騎司馬鄭眾報使北匈奴。初置度遼將軍,屯五原曼柏。】
곧 당시(當時)의 “요수(遼水)=요하(遼河)”는, 남북(南北)으로 흐르는 하천(河川)이 아니라 「➠ 서(西)쪽에서 북(北)쪽으로, 다시 동(東)쪽으로 흐르는 하천(河川), 곧 ‘하(河)=황하(黃河)’【남하(南河)+북하(北河)】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먹여 주여도 못 받아먹는 사학계(史學界)가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하루라도 빨리 갈 길로 가야 하는 것이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위한 길이다.
➋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 ➠ 가행영삭장군(假行寧朔將軍) 아착왕(阿錯王)」으로 :
• 팔중후(八中侯) : 「후(侯)」 : ‘侯爵,爵位, 諸侯’를 일컫는 말이다. 곧 백제왕(百濟王)은, 공(功)이 있고, 충성(忠誠)하는 신하(臣下)를 제후(諸侯)로 봉(封)했다는 증거(證據)다. 다만 “팔중(八中)”이 무엇을 뜻하는지, 지명(地名)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유추(類推)해 볼 수 있는 것은 “팔중(八中)”은 지명(地名)이 아닐까? 하는 것인데, 오늘날의 광서성(廣西省)에 “팔중하(八中河)”라고 부르는 하천(河川)이 있다. ‘주강(珠江)’의 지류(支流)이다. 【八中河,位於中國廣西壯族自治區田林縣西北部,是‘馱娘江’左岸支流】
• 아착왕(阿錯王) : 지명(地名)으로 판단(判斷)되는데, 그 위치(位置)는 알 수 없다.
• 건위장군(建威將軍) : 【建威將軍:漢武帝任命的韓安國、王晏;漢光武帝任命的耿弇、鄧尋;曹魏賈逵、杜恕、郭淮;東吳呂範;晉代王戎、周處、魯充、趙胤、司馬勳、王緒、劉裕、劉懷肅、朱齡石、司馬緝。】
• 영삭장군(寧朔將軍) : 【寧朔將軍,中國古代武官名,歷代品秩多為四品,為雜號將軍的一種,最早為三國時曹魏所設立,其後一直設立到隋代,隋煬帝大業三年(607年),廢除此官職。[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➌ 「건위장군(建威將軍) 여력(餘歴) ➠ 가행용양장군(假行龍驤將軍) 매로왕(邁盧王)」으로 :
• 건위장군(建威將軍) : 【建威將軍:漢武帝任命的韓安國、王晏;漢光武帝任命的耿弇、鄧尋;曹魏賈逵、杜恕、郭淮;東吳呂範;晉代王戎、周處、魯充、趙胤、司馬勳、王緒、劉裕、劉懷肅、朱齡石、司馬緝。】
• 용양장군(假行龍驤將軍) : 수군(水軍)을 지휘(指揮)하는 장군(將軍)이다. 【龍驤將軍,兩晉南北朝的將軍稱號。晉武帝伐孫吳,因為吳國童謠「阿童復阿童,銜刀浮渡江。不畏岸上獸,但畏水中龍」,拜益州刺史王濬(小字阿童)為龍驤將軍,派他造船備戰。龍驤將軍的稱號從此時開始。南北朝沿用,地位高下不一,北魏、北齊都是第三品,南朝梁有將軍名號二百四十位以上,龍驤將軍在次位一百七十以後,隋朝廢除。[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매로왕(邁盧王) : 역시 제후왕(諸侯王)을 일컫는다.
➍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 ➠ 가행건위장군(假行建威將軍)·불사후(弗斯侯)」 :
• 광무장군(廣武將軍) : 《晉書‧王敦傳:惠帝反正,敦遷散騎常侍、左衛將軍、大鴻臚、侍中,出除廣武將軍、青州刺史。》 이러한 예(例)로 보면 : 「백제(百濟)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왕조(王朝)였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호태왕비(好太王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현재(現在)의 위치(位置)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까? 곧,
☛ 위 “광무장군(廣武將軍)”이라는 직명(職名)은,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사용(使用)했던 이름으로 섬서성(陝西省) 백수현(白水縣)에서 발견(發見)된 “광무장군비(廣武將軍碑)” 판독(判讀)을 보면 : 「AD 368年 전진(前秦) 건원(建元) 4년에 건립(建立)되었다」라고 하는데… …비문(碑文)의 특색(特色)에 대해 말하기를, 「碑文書法風格古樸稚拙,筆畫細長均勻,線條瘦勁凝練,結字平直寬博。同三老忌日碑、好太王碑相近。: 비문(碑文)의 서법(書法)의 격(格)은 단순하고 유치하며, 획은 가늘고 균일하며, 선은 가늘고 응축되어 있고, 매듭은 곧고 넓다. 이 비문(碑文)은, 삼노기일비(三老忌日碑), 호태왕비(好太王碑)와 유사하다(相近).」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문(疑問)은, 과연(果然) “호태왕비(好太王碑)【AD 414年 추정(推定)】”의 본래(本來) 건립(建立)된 장소(場所)가 어디였느냐?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전진(前秦) 당시(當時)에 고구려(高句驪)는 서법(書法)까지도 전진(前秦)과 같았느냐? 하는 것이다.
【Naver 검색(檢索) : [Ai] : 광개토대왕비문 서법은 중국의 ‘예서·해서’ 서체를 수용한 뒤, 고구려가 창안한 ‘고구려 고예(古隸)’ 계열의 독창적 서풍으로 설명됩니다.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필체로 고구려의 독특한 비문 서법을 보여 중국 비문과 차별화된다는 평가가 제시됩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남북조의 예서·해서 서체를 수용한 뒤 고구려가 창안한 고구려 서예의 독창성을 반영한다고 정리됩니다. 고구려는 중국과는 별개로 진행된 장의(葬儀) 문화와 비석 양식을 통해 고유의 서체를 발전시켰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당시 유행한 신체(新體)의 영향은 거의 없고, 전서 필의 예서 파책이 적은 ‘고예(古隸)’를 사용했다는 주장입니다. 이 서체는 복고수구(復古守舊) 성향이 강하다고 설명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즉(卽), 「AD 368年 전진(前秦) 건원(建元) 4년에 건립(建立)되었다」라고 하는데… …비문(碑文)의 특색(特色)에 대해 말하기를, 「碑文書法風格古樸稚拙,筆畫細長均勻,線條瘦勁凝練,結字平直寬博。同三老忌日碑、好太王碑相近。: 비문(碑文)의 서법(書法)의 격(格)은 단순하고 유치하며, 획은 가늘고 균일하며, 선은 가늘고 응축되어 있고, 매듭은 곧고 넓다. “이 비문(碑文)은 삼노기일비(三老忌日碑), 호태왕비(好太王碑)와 유사하다(相近).”」라고 하였다.
그러나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즉(卽),
☛ 《Naver 검색(檢索) : [Ai] : 광개토대왕비문 서법은 중국의 ‘예서·해서’ 서체를 수용한 뒤, 고구려가 창안한 ‘고구려 고예(古隸)’ 계열의 독창적 서풍으로 설명됩니다.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필체로 고구려의 독특한 비문 서법을 보여 중국 비문과 차별화된다는 평가가 제시됩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남북조의 예서·해서 서체를 수용한 뒤 고구려가 창안한 고구려 서예의 독창성을 반영한다고 정리됩니다. 고구려는 중국과는 별개로 진행된 장의(葬儀) 문화와 비석 양식을 통해 고유의 서체를 발전시켰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당시 유행한 신체(新體)의 영향은 거의 없고, 전서 필의 예서 파책이 적은 ‘고예(古隸)’를 사용했다는 주장입니다. 이 서체는 복고수구(復古守舊) 성향이 강하다고 설명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대체 뭔 말인가?
➊ ‘대륙(大陸) 측(側)’에서는, 「碑文書法風格古樸稚拙,筆畫細長均勻,線條瘦勁凝練,結字平直寬博。同三老忌日碑、好太王碑相近。: 비문(碑文)의 서법(書法)의 격(格)은 단순하고 유치하며, 획은 가늘고 균일하며, 선은 가늘고 응축되어 있고, 매듭은 곧고 넓다. “이 비문(碑文)은 삼노기일비(三老忌日碑), 호태왕비(好太王碑)와 유사하다(相近).”」라고 하는데,
➋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고구려가 창안한 ‘고구려 고예(古隸)’계열의 독창적 서풍으로 설명됩니다.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필체로 고구려의 독특한 비문 서법을 보여 중국 비문과 차별화된다.」라고 하였으니, 「분명(分明) 둘 중의 하나는 역사(歷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➌ ‘결과적(結果的)’으로 보면 : ‘호태왕비(好太王碑)’는, 「오늘날의 “길림성(吉林省)”에 없었다」라는 것으로, 「누군가가 오늘날의 길림성(吉林省)으로 옮겨놓았다」라는 의심(疑心)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덧붙이면 : 「고구려(高句驪)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왕조(土着王朝)였기 때문이다.」 백제(百濟) 역시(亦是) 똑같다.
「호태왕비(好太王碑) 비문(碑文)」 자체(字體)를 놓고 보면 : 반도학자(半島學者)들과 대륙학자(大陸學者)들은, 전혀 다른 각도(角度)에서 말하고 있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廣武將軍碑 / 地址 : 陝西省白水縣[時代 : 十六國前秦] : 廣武將軍碑,十六國前秦建元四年(AD 368年)立於今陝西省白水縣史官鎮彭衙村倉頡廟寒崇寺塔下,又稱《廣武將軍□產碑並陰側》、《立界祠碑並陰側》、《張產碑》。碑為圭形,尖首,方座。高174厘米,寬73厘米,文17行,因字有剝落,每行字數已不可知,約31字,隸書。此碑四面刻字,碑額隸書「立界山石祠」,碑文內容主要記述廣武將軍的世系、政績及統轄吏民的數目, 還記述了當時渭北的行政區劃、官職設置和部族的分布。《平津讀碑記》認為是紀功立界之碑。碑陰刻文18行,行36字,碑側刻部將的姓名。此碑內容是研究五胡十六國時期陝西關中地方歷史的重要實物資料。前秦碑刻存世甚少,僅此碑與《鄧太尉碑》兩例。陽文字似經心鑿刻,有規有矩。碑文書法風格古樸稚拙,筆畫細長均勻,線條瘦勁凝練,結字平直寬博。同《三老忌日碑》、➥➥➥ 《好太王碑》 相近。行筆恣肆,氣象朴茂。康有為在此碑的題跋中稱「北碑近新出土,以此為古雅第一」、「此碑在陝,亦為關中楷隸冠。」北京故宮博物院藏此碑舊拓本。碑原立於白水縣。後埋入土中,清朝乾隆年間出土,其後石佚,清末民國拆除倉頡廟前影壁時被雷召卿發現。1972年移置陝西省西安碑林至今。[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불사후(弗斯侯) : 「후(侯)」 : ‘侯爵,爵位, 諸侯’를 일컫는 말이다. 곧 백제왕(百濟王)은, 공(功)이 있고, 충성(忠誠)하는 신하(臣下)를 제후(諸侯)로 봉(封)했다는 증거(證據)다. 다만 “불사(弗斯)”가 무엇을 뜻하는지, 지명(地名)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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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牟大又表曰 : 모대(牟大)【牟大 : 百濟 24代, 東城王(在位 AD 479~501年】가 또 표문(表文)을 올려 아뢰기를 : 「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逹, 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清亮, 忠款夙著. 徃太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 冐涉波險, 尋其至効, 宜在進爵, 謹依先例, 各假行職. : 신(臣)이 파견한 「➎ 행건위장군(行建威將軍)•광양태수(廣陽太守) 겸(兼) 장사(長史) 신(臣) 고달(高逹), ➏ 행건위장군(行建威將軍)•조선태수(朝鮮太守) 겸 사마(司馬) 신(臣) 양무(楊茂), ➐ 행선위장군(行宣威將軍)• 겸(兼) 참군(參軍) 신(臣) 회매(會邁)」등 3명은 뜻과 행동이 깨끗하고 밝으며, 충성과 정성이 일찍부터 드러나 지난 태시(太始) 연간【AD 465~471年】 나란히 송(宋) 조정에 사신으로 갔었고, 지금은 신(臣)의 사신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 지극한 공로를 생각하면 마땅히 관작(官爵)을 올려주어야 하니 삼가 선례에 따라 각각 임시직을 가수(假授)하였소. 且玄澤靈休, 萬里所企, 况親趾天庭, 乃不蒙頼. : 또한 천자의 은택은 영험하고 아름다워, 만 리 밖까지 미치는 법인데, 하물며 천자의 뜰을 친히 밟으면서 신뢰를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伏願天監特愍除正. :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어여삐 여겨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해주시오. ➑ 高逹邊効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驤將軍· 帶方太守, : 고달(高達)은 변경에서의 공적이 일찍부터 드러났고 공무에 부지런히 힘썼으므로 금(今) 가행용양장군(假行龍驤將軍)•대방태수(帶方太守)로, ➒ 楊茂志行淸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將軍·廣陵太守 : 양무(楊茂)는 뜻과 행동이 맑고 한결같으며 공무를 놓지 않으니 금(今) 가행건위장군(假行建威將軍)•광릉태수(廣陵太守)로, ➓ 㑹邁執志周密, 屢致勤効, 今假行廣武將軍·淸河太守. : 회매(㑹邁)는 뜻을 가짐이 주도면밀하여 여러 차례 근면한 공을 세웠으니 금(今) 가행광무장군(假行廣武將軍)•청하태수(淸河太守)로 하였소.」 詔可, 竝賜軍號, 除太守.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아울러 장군호(將軍號)를 주고, 태수(太守) 직을 제수하였다.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으로 하였다.
【牟大又表曰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逹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行宣威將軍兼參軍臣㑹邁等三人志行清亮忠款夙著徃太始中比使宋朝今任臣使冐渉波險尋其至効宜在進爵謹依先例各假行職且𤣥澤靈休萬里所企况親趾天庭乃不䝉頼伏願天監特愍除正逹邊効夙著勤勞公務今假行龍驤將軍帶方太守茂志行清壹公務不廢今假行建威將軍廣陵太守邁執志周密屢致勤効今假行廣武將軍清河太守詔可竝賜軍號除太守為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
➎ 「행건위장군(行建威將軍) 광양태수(廣陽太守) 겸(兼) 장사(長史) 신(臣) 고달(高逹)」➠ 가행용양장군(假行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로 :
• 건위장군(建威將軍) : ‘➏’ 참조(參照)
• 용양장군(龍驤將軍) : 【龍驤將軍,兩晉南北朝的將軍稱號。晉武帝伐孫吳,因為吳國童謠「阿童復阿童,銜刀浮渡江。不畏岸上獸,但畏水中龍」,拜益州刺史王濬(小字阿童)為龍驤將軍,派他造船備戰。龍驤將軍的稱號從此時開始。南北朝沿用,地位高下不一,北魏、北齊都是第三品,南朝梁有將軍名號二百四十位以上,龍驤將軍在次位一百七十以後,隋朝廢除。】
• 광양태수(廣陽太守) : 광양군(光陽郡)은, 엣 군(郡)의 이름으로, 오늘날의 북경(北京)이다. 또는 사천성(四川省)에도, 또 안휘성(安徽省)에도…… 왕조(王朝)에 따라 두었기 때문이다.
【廣陽郡,古代郡名,今北京市一帶。[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廣陽縣 (西晉),西晉時設置,在今四川省阿壩藏族羌族自治州境, ➠ 廣陽縣 (東晉),東晉時設置,在今安徽省池州市境】
• 대방태수(帶方太守) : 「대방군(帶方郡)」 :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요동(遼東)에 의거(依據)하여 낙랑(樂浪)의 속현인 둔유(屯有) 이남(以南)의 황폐(荒廢)한 땅을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와 장창(張敞) 등을 보내서 유민(遺民)을 거두어 모았다〉라고 하였다.
곧 : 〈三國志云: 漢時,韓屬樂浪郡。: 삼국지(三國志)에서 말하기를, 한(漢)【전한(前漢)】때에 한(韓)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하였다. 桓、靈之末,韓、濊疆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 환제와 영제【후한(後漢) 말(末)】때 한(韓)과 예(濊)가 강성해져서 군현(郡縣)이 다스려지지 않자 한국(韓國)으로 유입되는 백성들이 많아졌다. 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 건안(建安) 중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을 나누어, 그 남(南)쪽 황무(荒蕪)한 땅에 대방군(帶方郡)을 두고,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보내 군대를 일으켜 한(韓)과 예(濊)를 치니, 이전에 살던 백성들이 차츰 쫓겨났다. 이 뒤로 왜(倭)와 한(韓)이 마침내 대방(帶方)에 속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위의 글 속에서 당시(當時)의 “대방군(帶方郡)”의 성격(性格)이나 존재(存在)에 대해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왜왕(倭王)”이 대방군(帶方郡)에 사신을 보내고, 왜(倭)를 가려면 “대방군(帶方郡)”에서 출발(出發)하며, 그 거리(距離)를 표시(標示)한 것이다.
◈ 따라서 〈반도(半島) “대방군(帶方郡)으로부터 12,000 여리(餘里)”는 「오늘날의 열도(列島)의 ‘구주(九州)’ 또는 ‘근기(近畿)’ 땅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明白)한 사실(事實)이 된다.
이러한 설명(說明)을 ‘역(逆)’으로 : 「열도(列島) 땅의 ‘근기(近畿), 구주(九州)’에서 12,000리(里) 떨어진 곳에 대방군(帶方郡)이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성립(成立)된다. : 따라서 이 모두는 「반도(半島) 땅도 아니요, 열도(列島) 땅도 아니었다」라는 뜻과 같다. 곧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요충지(要衝地)에 있었다.
➏ 「행건위장군(行建威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겸 사마(司馬) 신(臣) 양무(楊茂) ➠ 가행건위장군(假行建威將軍) 광릉태수(廣陵太守)」로 :
• 건위장군(建威將軍) : 【周玘(258年—313年),字宣佩,義興陽羨(今江蘇宜興)人。周玘出身江南豪族義興周氏,父親是晉建威將軍周處。周玘在晉官至建武將軍,因有三定江南之功勳而獲封爵並為此建義興郡,然而後來因與僑姓士族的矛盾而圖謀起兵,失敗而憂憤而亡。】
• 조선태수(朝鮮太守) : 반도(半島) 땅엔 없다. 「백제(百濟) 당시(當時)에도 “조선군(朝鮮郡)”은 유지(維持)되고 있었다」라는 뜻이다.
• 광릉태수(廣陵太守) : 반도(半島) 땅엔 없다. 「광릉군(廣陵郡)의 광릉군(廣陵君)」이 바로 광릉태수(光陵太守)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장강(長江)의 하류(下流)의 남북안(南北岸) 곧 양주시(揚州市)와 그 주변일대(周邊一帶)」를 말하는 것으로, 수당(隋唐)의 강도군(江都郡) 땅을 말하는 것이다.
【➠ 廣陵郡,中國古代郡、國名。西漢始置,故址在今揚州市。三國時,江淮之間為吳魏兩國爭鬥的甌脫之地,魏遷郡治於淮陰,吳廣陵縣仍於今揚州市。其地在今江蘇省境內長江、淮河之間。隋朝時廢,後為江都郡。唐朝以後廢。➠ 東陽郡與江都國 : 秦時廣陵為東海郡南部一縣。漢初,析東海郡南部的東陽縣(治所在今天安徽省天長市西北[1],一說今江蘇省盱眙縣東陽鄉)一帶置東陽郡。漢景帝三年(前154年)平定七國之亂後,封皇子劉非為江都王,以東陽郡、故鄣郡(一說為鄣郡)置江都國。漢武帝元狩二年(前121年),江都王劉建謀反,江都國除,改東陽郡為廣陵郡。此為廣陵郡建置之始。[出處 : 維基百科 自由的百科全書, 光陵郡]】
➐ 「행선위장군(行宣威將軍) 겸(兼) 참군(參軍) 신(臣) 회매(會邁)」➠ 가행광무장군(假行廣武將軍)·청하태수(淸河太守)」로 :
• 선위장군(宣威將軍) : 【文成帝南巡碑(或稱皇帝南巡之頌碑)[1]是一塊以漢文書寫於西元五世紀中葉的紀念碑,碑文內容紀念了北魏和平二年(461年)文成帝拓跋濬南巡以及其與群官仰射山峰的情景[2]。 ➠ 碑陰 / 第7列 / 宣威將」宣威將軍」宣威將軍」宣威將軍」威□將軍斛洛真」斛洛真□□」斛洛真□叱」斛洛真紽紇□」[宣威]將軍斛洛真」斛洛真[𥿨]直」斛洛真□賀賴內□□」斛洛真□□□」】
• 광무장군(廣武將軍) : 【廣武將軍碑 / 地址 : 陝西省白水縣[時代 : 十六國前秦] : 廣武將軍碑,十六國前秦建元四年(368年)立於今陝西省白水縣史官鎮彭衙村倉頡廟寒崇寺塔下,又稱《廣武將軍□產碑並陰側》、《立界祠碑並陰側》、《張產碑》。碑為圭形,尖首,方座。高174厘米,寬73厘米,文17行,因字有剝落,每行字數已不可知,約31字,隸書。此碑四面刻字,碑額隸書「立界山石祠」,碑文內容主要記述廣武將軍的世系、政績及統轄吏民的數目, 還記述了當時渭北的行政區劃、官職設置和部族的分布。《平津讀碑記》認為是紀功立界之碑。碑陰刻文18行,行36字,碑側刻部將的姓名。此碑內容是研究五胡十六國時期陝西關中地方歷史的重要實物資料。前秦碑刻存世甚少,僅此碑與《鄧太尉碑》兩例。陽文字似經心鑿刻,有規有矩。碑文書法風格古樸稚拙,筆畫細長均勻,線條瘦勁凝練,結字平直寬博。同《三老忌日碑》、➥➥➥ 《好太王碑》 相近。行筆恣肆,氣象朴茂。康有為在此碑的題跋中稱「北碑近新出土,以此為古雅第一」、「此碑在陝,亦為關中楷隸冠。」北京故宮博物院藏此碑舊拓本。碑原立於白水縣。後埋入土中,清朝乾隆年間出土,其後石佚,清末民國拆除倉頡廟前影壁時被雷召卿發現。1972年移置陝西省西安碑林至今。[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청하태수(淸河太守) : 반도(半島) 땅엔 없다. 산동성(山東省) 지명(地名)이다.
【房景伯(478年∼527年),字長暉,又作字良暉,祖籍清河郡繹幕縣(今山東省平原縣西北),南北朝北魏官員。高祖父房諶避亂東渡黃河,移住齊州東清河郡繹幕縣(今山東省淄博市博山區)。祖父房元慶,為南朝宋官員、被沈文秀殺害。其父房愛親,率領鄉里的部眾攻打沈文秀。因功受到宋明帝的嘉獎,最初被任命為龍驤將軍。北魏平定山東後,房愛親被遷移到北方,成為平齊郡的百姓。由於房元慶死於非命,房愛親終身都穿著白色的喪服。二弟房景先(字光胄),三弟房景遠(字叔遐)】
방경백(房景伯) 【AD 478~527】 : 북위(北魏) 청하(淸河) 역막(繹幕) 사람. 자는 장휘(長暉)다. 어려서부터 효(孝)로 이름이 높아 이충(李冲)이 관리를 선발할 때 발탁되어 봉조청(奉朝請)에 올랐다. 거듭 승진하여 제주보국장사(齊州輔國長史)가 되었다. 청하 땅에 도적들이 난리를 일으켰을 때 “청하태수(淸河太守)”가 되어 난을 평정하여 공을 세워 사공장사(司空長史)가 되었다. 뒤에 어머니가 병이 들자 벼슬을 그만두고 간호했으나 결국 돌아가셨다. 상을 지내는 기간 동안 소금과 나물을 먹지 않아 수병(水病)이 심해져 세상을 떠났다. [출처(出處)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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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使兼謁者僕射孫副䇿命大襲亡祖父牟都爲百濟王. 曰 : 알자복야를 겸한 손부(孫副)를 사신으로 보내 명을 내리기를, (모대)를 작고한 할아버지 모도(牟都)를 이은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으면서 말하기를 : 「於戱. 惟爾世襲忠懃, 誠著遐表, 滄路肅澄, 要貢無替. : 아! 생각건대 그대들은 대대로 충성하고 근면하여, 그 정성이 먼 곳에서 드러나니, 바닷길이 고요하고 맑아져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式循彛典, 用纂顯命, 徃欽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 이에 이전(彛典)에 따라 귀한 관작을 잇게 하였으니, 가서 공경할지어다. 경건하게 아름다운 사업을 이어받을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制詔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牟大, 今以大襲祖父牟都爲百濟王. :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 모대(牟大)에게 조서를 내리니, 이제 모대에게 할아버지 모도(牟都)의 작위를 잇게 하여 백제왕으로 하였다. 即位章綬等五銅虎竹符四. 王其拜受, 不亦休乎. : 왕위에 오름에 인장과 끈 다섯, 동호죽부(銅虎竹符) 넷을 주니, 왕(王)은 이를 공경하여 받으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하였다.」【使兼謁者僕射孫副䇿命大襲亡祖父牟都為百濟王曰於戯惟爾世襲忠懃誠著遐表滄路肅澄要貢無替式循彛典用纂顯命徃欽哉其敬膺休業可不慎歟制詔行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今以大襲祖父牟都為百濟王即位章綬等五銅虎竹符四王其拜受不亦休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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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⓫ 是歳,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觧禮昆•木干那率衆襲撃虜軍, 大破之.【是歳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觧禮昆木干那率衆襲撃虜軍大破之】 : 이 해에 위로(魏虜)가 또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을 동원(動員)하여 백제(百濟)를 공격(攻擊)해 그 나라 경계(境界)에 들어오니, 모대(牟大)가 장수 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 등을 보내 무리(衆)를 이끌고 오랑캐 군사를 습격(襲擊)하여 크게 깨뜨렸다.》라고 하였다.
⓫ 「是歳,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 이 해에, 위로(魏虜)가 “또”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을 동원(動員)하여 백제(百濟)를 공격(攻擊)하였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記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 「위로(魏虜) 곧 ‘북위(北魏)=후위(後魏)’가 기마(騎馬) 수십만(數十萬)을 출정(出征)시켜 백제(百濟)를 쳤는데, ➠ 이게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에 걸쳐 있었다」라는 것이다. 즉(卽) 「위로(魏虜)가 또(又) 수십만(數十萬) 기병(騎兵)을 발(發)하여 백제(百濟)를 공격(攻擊)했다.」【이때가 AD 488년, 동성왕(東城王) 10年, 齊, 世祖武皇帝, 永明 6年】라고 했기 때문이다.
‘수십만(數十萬)’이라면 ‘삼십만(三十萬)∼사십만(四十萬)’ 정도(程度)를 일컫는 말인데… …이 숫자가 체감(體感)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기(步騎)라면 모르되, 「기(騎) 수십만(數十萬)」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즉(卽), “말을 탄 병사(兵士)가 30∼40만(萬)”이라는 것이다.
이 규모(規模)는, 인류(人類) 역사상(歷史上) 유일무이(唯一無二)하고,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大) 기병군단(騎兵軍團)”을 일컫고 있기 때문이다.
➥ 더 놀라운 사실(事實)은, 이게 한 번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또 우(又)”자가 있으니, 두 번이나 세 번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百濟)는 「북위(北魏)의 30∼40만(萬)의 대(大) 기병군단(騎兵軍團)의 공습(攻襲)」에 맞서, 은밀(隱密)하게 매복작전(埋伏作戰)을 펴, 이들을 궤멸(潰滅)시켰다》라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역사(歷史)인가!
➥ 그러나 ‘역사교육(歷史敎育) 현장(現場)’에서는, 누구도 이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모르는 척, 또 진짜 모르는 자(者)도 있지 않겠나! 그래서 ‘반도사학(半島史學) 곧 식민사학(植民史學)’을 가리켜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보다 더 나쁜 집단(集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백제(百濟)를 치기 위해 「기마(騎馬) 30∼40만(萬)이 출정했다」라면 : 이들을 수송(輸送)해야 할 수송선(輸送船)은, 대체 몇 척(隻)이나 띄었을까? 당시(當時)의 형편(形便)으로 보면 : 이게 과연(果然) 가능(可能)하기는 한 건가?
「한마디로 말해 : ‘이건 미친 짓이다’ 곧, “백제(百濟)가 황해(黃海) 건너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에 있었다”라는 주장(主張)이 바로 미친 짓이다」라는 이야기다. “반도사학(半島史學)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이제는 “반도사학(半島史學) 스스로 묘지(墓地)로 들어가야 할 때다.” 「그렇지 않나? 얼빠진 반도(半島)의 식민사학계(植民史學界)!」
• 資治通鑑 136, 齊紀 / 《世祖武皇帝上之下永明六年(戊辰,公元 四八八年):《魏遣兵擊百濟, 為百濟所敗 : [세조무황제(世祖武皇帝) 영명(永明) 6년(AD 488)에, 위(魏)【위로(魏虜)=북로(北虜)=북위(北魏)】가 군사(軍士)를 보내어 백제(百濟)를 쳤으나, 백제(百濟)에게 패(敗)하였다. 【陳壽曰:三韓凡七十八國, 百濟其一也。據李延壽史, 其先以百家濟海, 後浸強盛以立國, 故曰百濟。晉世句麗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 晉平二郡地. : 진수(陳壽 : 233年∼297年, 三國志, 魏書 著者이다)가 이르기를 : 삼한(三韓)은 모두 78개 나라로, 백제(百濟)는 그 하나이다. 이연수(李延壽)의 사서(史書)에서, 그 선조(先祖)는 百家가 바다를 건넜는데, 뒤에 점점 강성해져 나라를 세웠다. 진(晉)나라 때에 구려(句麗)【고구려(高句驪)】가 요동(遼東)을 경략(經略)할 때,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 진평(晉平) 2군(郡) 땅에 웅거(雄據)하였다. 】
➥ 이런 기록(記錄)을 대할 때마다 : 「도대체 반도사학(半島史學)은, 누굴 위한 사학계(史學界)인지 의심(疑心)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백제(百濟)가 ‘3’세기(世紀)에, ‘한강(漢江) 이남(以南)의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땅에 있으면서 수군(水軍)과 강습상륙전단(强襲上陸戰團)을 보내어 요서(遼西) 땅을 점령(占領)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요서(遼西), 진평(晉平) 2군(郡)’의 땅은 도대체 어딘가?」 ‘두우(杜佑) 통전(通典)’에서는 “북평(北平)과 유성(柳城) 사이였다”라고 기록(記錄)하였다. 【“오늘날의 북평(北平 : 北京)과 유성(柳城) 간(間)이 아니었다”라는 뜻이기도 하며, 당시(當時)의 이곳은 “하서(河西)” 땅의 “요서(遼西)” 땅에 있었다는 것이다.】
• 송서(宋書) : 《其後, 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 그 후(後)에, 고려(高驪=高駒驪)가 요동(遼東)을 경략(經略)하였고, 백제(百濟)는 요서(遼西)를 경략(經略)하였는데, 백제(百濟)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晋平郡), 진평현(晋平縣)이라고 한다.》 【진(晋)은, 진(晉)의 속자(俗字)다】
• 양직공도(梁職貢圖) : 《晉末, 駒麗畧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 : 진(晉) 말(末)에, 구려(駒麗=高句驪)가 요동(遼東)을 경략하였는데, 낙랑(樂浪) 또한 요서(遼西) 진평현(晉平縣)을 다스렸다.》【梁 元帝 在位 연간(年間)에, 백제(百濟) 사신행차(使臣行次)를 그림으로 그려 놓았는데 그곳에 백제(百濟)에 대한 기록(記錄)이 함께 수록(收錄)되어 있다.】
➥ 양직공도(梁職貢圖)에 의하면 : ‘백제(百濟)를 낙랑(樂浪)’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南朝梁蕭繹的《職貢圖》為傳世最早的職貢圖,原作創於526年-539年間,現存為宋人摹本的殘卷。右到左:滑嚈噠人、波斯、百濟、龜茲、倭、狼牙脩、鄧至、周古柯、呵跋檀、胡蜜丹、巴伊提、且末。】
• 양서(梁書) : 《晉世, 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 진(晉)나라 때에, 구려(句驪=高句驪)가 이미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다스렸는데,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 진평(晉平) 2군(郡)의 땅(地)을 점거하고, 이곳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 남사(南史) : 《晉世,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 진(晉)나라 때에, 구려(句驪=高句驪)가 이미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다스렸는데,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 진평(晉平) 2군(郡)의 땅(地)을 점거하고, 이곳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 두우(杜佑) 통전(通典) : 《晉時,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 今柳城北平之間 : 진(晉) 때에, 구려(句麗=高句驪)가 이미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다스렸는데,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를 진평(晋平) 2군(郡) 점거(占據)하고 차지하였는데,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이다.》
• 通典 百濟 : 《後 魏 孝 文 遣 眾 征 破 之。: 후위(後魏)》 효문(孝文)이 무리를 보내어 백제(百濟)를 쳤으나 패배(敗北)하였다.》
• 太平寰宇記 卷172 百濟國 : 「百濟國, 中略, 時, 句麗旣畧有遼東, 而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 今營·平二州之間也. : 때에 구려(句麗)가 요동(遼東)을 다스릴 때,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 진평(晉平) 2군(郡) 땅을 점거하고 있였다. 祭天及五帝之神, 後魏 孝文帝遣衆征破之. : 하늘(天)과 오제(五帝)【㈠ / 史記·白虎通義·大戴禮記·五帝德 : 黃帝、顓頊、嚳、堯、舜. ㈡ / 尚書 序·帝王世紀 : 少昊、顓頊、嚳、堯、舜. ㈢ / 孔子家語, 五帝·呂氏春秋·禮記 月令·淮南子·天文訓 : 太皞、炎帝、黃帝、少皞、顓頊.】의 신(神)에게 제사를 지낸다. 후위(後魏) 효문제(孝文帝)가 무리를 보내 쳤으나, 패배하였다.」라고 하였다.
• 《蕭繹(傳)《職貢圖》,縱26.7公分、橫200.7公分,現藏北京中國國家博物館。右到左:滑/嚈噠人,波斯,百濟,龜茲,倭,狼牙脩,鄧至,周古柯,呵跋檀,胡蜜丹,巴伊提,且末。》
위의 양직공도(梁職貢圖) 3번째 “백제(百濟) 사신도(使臣圖)”을 보면 : 「晉末, 駒麗畧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이라는, 곧 “낙랑(樂浪)”이라고 기록(記錄)된 것을 볼 수 있다.
☛ 우리 냉정(冷靜)하게, 이성적(理性的)으로 판단(判斷)해보자.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의 백제(百濟)가 :
㈠ 「서해(西海)를 거슬러 올라가 발해(渤海)를 도해(渡海)하여 북경(北京)이나 산해관(山海關) 등지(等地)에 기습상륙(奇襲上陸)하여 점거(占據), 이곳에 ‘진평(晉平) 2개(個) 군(郡)’을 설치(設置)하고 통치(統治)하였다.」
‘두우(杜佑)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 「당시(當時)의 핵심(核心) 거점(據點)인 북평(北平)과 유성(柳城) 사이의 땅이었다」라고 한다. 이게 정말 가능(可能)하다는 뜻일까?
㈡ 「백제(百濟)의 특수부대(特殊部隊) 기습상륙병단(奇襲上陸兵團)과 수백(數百)∼수천(數千) 척(隻)의 상륙함(上陸艦)들이 서해(西海)를 날렵하게 건너뛰어 “산동성(山東省), 강소성(江蘇省), 안휘성(安徽省), 강좌(江左), 절강(浙江)”등지(等地)를 기습상륙(奇襲上陸)하여, 용감무쌍(勇敢無雙)한 효기(梟騎)로 번개같이 치고 나가 점령(占領)하고, 여러 태수(太守)와 제후(諸侯)를 두고 다스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根據)가 있느냐? 하는 문제(問題)다.
㈢ ‘양서(梁書)와 양직공도(梁職貢圖)’에서 말하는 ‘22담로(擔魯)’는?
㈣ 「백제(百濟)가 왕성(旺盛)한 시기(時期) 가능(可能)한 일이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問題)는 “바다(海)를 건너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問題)는,
• 북위(北魏)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십만(數十萬) 기마(騎馬)를 동원(動員)’, 백제(百濟) 침공(侵攻)하였으나 매번(每番) 궤멸(潰滅)당했다는 것,
• 백제(百濟)가 ‘요서(遼西)’ 땅을 점거(占據), 통치(統治)하였다는 것,
• 또 “산동성(山東省), 강소성(江蘇省), 안휘성(安徽省), 강좌(江左), 절강(浙江)”등지를 점령(占領)하고, 분국(分國)을 두고 다스렸다는 것,
• 소정방(蘇定方)의 13만(萬) 병사(兵士)가 서해(西海)를 건넜다는 것,
• 김춘추(金春秋)가 ‘우이도(嵎夷道) 행군총관(行軍摠管)’이 되어 경상도(慶尙道) 땅에서 남해(南海)를 거쳐 서해(西海)를 건너, 서(西)쪽 4∼5 천리(千里)에 있는 장안(長安) 서(西)쪽의 ‘우부풍〔(右扶風 屬縣 : 郁夷, 嵎夷〕’으로 달려갔다는 것 등(等)이 먼저 해결(解決)되어야 하는 문제(問題)다.
• 백제(百濟)가 왜 ‘오제(五帝)’에게 제사(祭祀)를 지냈을까? 바로 ‘백제(百濟)의 시조(始祖)’였기 때문이다.
➥ 이러한 여러 문제(問題)는 곧 「백제(百濟)는 반도(半島)가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세력(土着勢力)이었다」라는 것이다. 백제(百濟)가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에 있었다고 하면 : 「모든 옛 기록(記錄)은 불가능(不可能)한 일이 되어 버린다」라는 것이다.
☛ 그러나 『옛 기록(記錄)은, ‘2,000年 전(前), 1500年 전(前), 1,000年 전(前)’의 임금(王) 명(命)에 의해 학자(學者), 관리(官吏)들에 의해 저술(著述)된 것이다.』 이를 어찌할까!
그렇다면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과거(過去)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자신(自信)이 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로, 동물(動物)의 세계(世界)에서 불가능(不可能)한 사안(事案)이요, 조물주(造物主)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하소연해도 불가능(不可能)하다.
「백제(百濟)」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으니, 3천(千) 궁녀(宮女)가 당군(唐軍)에게 더럽힐까봐 낙화유수(落花流水)할 일도 없었다. 다음 “2”편으로 계속(繼續)되는데,
“2”편에서는 : 「백제(百濟)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土着) 봉건왕조(封建王朝)였다」라는 결정적(決定的),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묘지석(墓地石)에 새겨진 명문(銘文)】를 근거(根據)로 해설(解說)하고자 합니다. ‘남제서(南齊書) 백제(百濟) 2편(篇)’으로 이어집니다.
2026년 03월 01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다음편으로는 ; 조선(朝鮮)영토의 평안도와 함경도 변경지방은,
['사막(沙漠)과 이웃했다거나 사막으로 가는 입구라든가, 사막(沙漠)과 이어지는 곳'이라는 등의 역사기록의 서지적 증거 "3"편입니다.]
옛 조선왕조는 중원대륙의 요충지 땅에 있었으며, 이곳의 토착왕조였다는 서지적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문제는,
반도 곧 한반도의 학계(學界)입니다.
만약, 중원대륙의 토착왕조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 AD 1945년 8.15 이후의 모든 역사교육은 허구로 밝혀지며, 그와 연관된 대한민국 정부와 정권 자체가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5,000년을 이어 온 조선족(한민족)의 중원대륙 역사를 외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한족(漢族)은 어디에도 그 기원이나 근원이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존재한다면 "주(注), 주석(註釋)등에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설명되어진 것들 뿐입니다.
특히 '오제본기'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염제를 시조를 삼고 있는 것이 한족(漢族)이며, 이들은 패배후 비주류로 전략한 소수민족으로 근근히 연명한 종족이자 부족들이었습니다.
그랗다면 중원대륙의 토착세력은 누구였는가?
바로 이곳 땅이 "동방(東方)의 땅'으로, 동이(東夷), 구이(九夷)들의 땅이었습니다.
이것을 말도 안되는 "동방(東方)의 땅은 반도(半島)"라는 식의 어불성설 논리는 : 그렇다면 왜 열도 땅은 동방이 안되는 것일까?"라는 웃기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쉽게 말해 : 구라파는 서방(西方)이요, 조선(朝鮮)은, 동방(東方)이요, 그 중간지대가 바로 중아(中亞)입니다.
서방과 동방이 부딪치는 완충지대가 바로 중아(中亞) 땅입니다.
* 반도 땅의 식민사학계는 :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언제까지 허구의 역사를 진실로 둔갑시키며, 속일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반도왕조를 주장할 수록 우리 민족 자체가 초라해지며, 이웃나라들부터 비웃음 당합니다. 도대체 5000년을 이어왔다고 하면서, 그 땅을 지배해 온 군주들의 왕릉(王陵) 하나도 없는... 웃기는 나라라고 말이죠. 이건 팩트입니다.
관광객들이야 팻말이 있으니... ..여기가 왕릉인가 보다 하겠지만... ...자국민들을 언제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반도 사학계는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역사적 사실 곧 사실(史實)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107주년 삼일절"을 맞아,
더더욱 옛 조선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사실(史實)대로 밝혀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고조선이 문 닫은 해는 B.C.E 238년 입니다
그러나 반도 사학자는 연대 표를 조작하여 B.C.E108년에 망했다고 연대 표를 조작 했습니다.
한사군은 한 나라 땅에 사군이죠 조선 땅에 사군이면 조선 사군이라고 해야 합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땅에 일본총독부로 왜 일본총독부라고 안하고 조선총독부라고 합니까
조선 땅에 총독부라 조선총독부 한 것을 안다면 한사군도 한 나라 땅에 사군이라 한사군 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한사군은 우리에 역사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고조선 B.C.E 2333 ~ B.C.E238존속기간, 한 나라 B.C.E206 ~ C.E9년 존속기간 역사의 장에서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역사 입니다
고조선 문 닫은 후 32년 지나서 한 나라가 세워 집니다
한무제 때 자국장수 들을 육시하여 죽였다는 짧은 기록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육시는 머리 팔 다리를 잡아 당겨 찢어 죽이면 몸이 6토막 난다고 하여 육시 입니다
그럼 한 두명도 아니고 자국에 장수 수십명을 육시로 죽이는 한무제는 뭐때문 일 까요,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자국 땅에 사군을 당하여 보복으로 찢어 죽이는 것이죠
한 나라와 크게 전쟁한 나라는 북부여 입니다
그러니 북부여가 승
ㅡ> 리하여 북부여의 승리 기록을 조작하여 조선사군을 한사군이라고 역사서 조작 입니다
만약 한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사군을 두었다면 육시가 아니고 포상으로 상을 줍니다
그러나 자국 장수에게 포상이 아니고 육시는 북부여가 한 나라 땅에 사군을 설치하여 한사군으로 승리한 북부여 역사 입니다
북부여의 승리사를 편수회에서 조작하여 반대로 해석 한 겁니다.
* 안녕하세요 "태양해'님!
늘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주시는 "태양해"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댁내 평안하시고 늘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