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본기를 보면 1세기 5대 파사이사금 이후 약 80년 동안 백제와 전쟁이 없다가 8대 아달라이사금 때인 167년에 갑자기 백제가 신라를 공격합니다. 신라본기에는 공격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백제본기를 보면 이유가 나옵니다. 166년에 초고왕이란 이전과 전혀 다른 성격의 왕이 출현한 것입니다.
백제사에서 2~3세기 약 70년(166~234)에 이르는 초고왕과 구수왕 시대는 여타 시대에 비하여 아주 특별한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 직후인 3세기 초반(230년대)과 중반(260년대)의 한반도를 기록한 후한서 및 삼국지 동이전의 한조와 비교가 가능한 시기입니다. 즉 권위있는 참고사료가 존재하는 시기입니다.
후한서와 삼국지는 3세기 백제의 국명이 百濟가 아니라 伯濟였다고 하고 있고, 삼국사기도 초기에는 국명이, 큰 집을 뜻하는 百濟가 아니라, 작은 집을 뜻하는 十濟였다고 하고 있어, 양 사서가 일치합니다. 하지만 중국사서는 百濟의 국명이 건국기에 百家濟海하여 百濟였다고 하고는, 이후 3세기 중반에는 百濟가 아니라 伯濟라고 하여 모순이거나 국명이 변경된 듯 보입니다.
이 초고-구수왕 시기가 백제사의 다른 시기에 비해 무엇이 특별한지 살펴보겠습니다.
1) 외교가 없다.
백제는 국초부터 4세기 사이에 낙랑군(낙랑국이 아님), 마한, 신라, 말갈, 대방국(대방군이 아님), 왜 등과 외교를 하는데 이 시기에는 사신을 보낸다든가 받는다든가 하는 외교 행위가 전혀 없습니다. 신라와 전쟁이 대부분인데 사신은 단 한 번도 오지도 가지도 않습니다. 신라가 70년 동안 백제의 공격을 받는데 망명한 길선 돌려보내라고 한 것 외에는 단 한 번도 백제에 사신을 안 보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국가를 운영하려면 주변국들과의 외교는 필수인데 외교를 안 했을 리는 없고, 그러면 백제의 외교는 누가 했습니까?
[참고] 왜국이 동성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6세기 말까지 대중원 왕조 외교를 못 하는데 백제가 외교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인사가 없다.
왕이 단 한 번도 고위직 인사를 못합니다. 국가를 운영하려면 각료들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백제본기에 성주가 있고, 진과라는 장수도 있는데, 누구를 무엇으로 임명했다는 인사가 없습니다. 그러면 백제의 각료들은 누가 임명했습니까? 백제본기에 백제와 전투를 하던 적국인 신라 장군들 이름은 잔뜩 써놓은 반면에 정작 자신들의 백제 장군 이름은 단 한 명도 안 써놓아 이게 백제본기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제사가 없다.
백제는 국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또 시조인 동명조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자신들이 모든 세력 중에 정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동명조 사당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제사를 단 한 번도 못 지냅니다. 흉년이 들자 왕이 동명조에 가서 딱 한 번 빈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제사를 지내는 정통 세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4) 사냥을 못 한다.
삼국 중 왕이 가장 많이 사냥을 가는 나라는 백제입니다. 횟수에 있어서 압도적입니다. 백제는 맨날 왕이 사냥만 하는 나라로 보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초고-구수왕 시기에는 왕이 사냥을 안 나갑니다. 이유가 무엇입이니까? 70년 동안 유일한 사냥은 초고왕 말기인 229년에 말갈군의 매복에 걸려 대패하기 직전입니다. 사냥을 안 가던 구수왕은 왜 하필 이때 사냥을 갑니까? 229년에 말갈에 대패한 후 더 이상 말갈과의 전투는 없는데, 백제를 궤멸시킨 말갈군은 어디로 갔습니까? 왜 말갈과의 전투가 더 이상 없습니까?
[참고] 이 직후인 3세기 중반부터 석촌동을 비롯한 한강변에는 고구려식 적석총이 축조되는데 이전에 있던 고분군을 쓸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 축조됩니다. 그런데 이는 정복자의 특징으로 3세기 중반에 한강유역의 지배자가 고구려계통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풍납토성도 이때 축조가 중단되고 거주민의 교체가 일어납니다. 이 한강변에 축조되는 고구려식 고분군은 백 몇 십 년 축조되다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이 시작되며 사라지는데, 광개토왕비문에 백잔은 과거 우리의 속민이었다는 구절이 고고학적으로 보면 맞습니다. .
5) 전쟁의 결정권이 없다.
삼국시대에 백제가 가장 빈번하게 신라를 공격하는 시기가 초고-구수왕대입니다. 기록의 거의 절반이 신라와의 전쟁입니다. 전쟁터는 초고왕 초기 딱 1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 주변인 진한지역에서만 벌어집니다. 백제는 말갈의 공격을 받아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인데도 무리하게 신라를 공격합니다. 신라를 공격하던 초고왕은 말갈과의 전투에서 죽습니다. 흉년이 들어 군대를 동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신라를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기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공격합니다. 결국 전쟁의 결정권이 왕에게 없습니다. 왕은 그저 명령을 받으면 군대를 동원할 뿐이고 명령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백제군에 대한 명령권자가 누구입니까?
6) 신라의 1/10에 불과한 군사력으로 신라를 무차별 공격한다.
아달라이사금조를 보면 2세기 중반에 신라가 최대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은 2만 8천으로, 이로 추산되는 당시 신라 인구는 약 백만으로 삼한 80국 중에 최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제의 군사력 2~3천 명 정도로 신라군의 1/10에 불과하여, 이로부터 추산되는 백제의 인구 또한 신라의 1/10인 10만 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초고왕 초기에 신라의 공격을 한 번 받은 이후로는 백제가 초고-구수왕 시기에 신라를 무차별 공격하고 신라는 방어에 급급합니다.
전쟁의 상식은 공격군이 방어군보다 군사력이 커야 합니다. 하지만 공격군이 방어군의 1/10에 불과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데 후한서와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목지국 휘하에 엄청나게 많은 소국들이 있어 목지국이 신라를 공격할 때 마한 수십 국을 동원한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백제 1국의 기록만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백제가 3천 명의 군사를 가졌을 경우, 목지국이 신라 공격에 백제 규모의 소국 10국을 동원하면 전체 군대 규모는 3천 x 10국=3만 명이 되는 것입니다.
백제는 1세기 온조왕 때만 하더라고 영토가 경기도와 황해도 남부와 강원도 서부를 포함하는 한강유역 전체인데, 초고-구수왕 시기에는 이를 마한 10여국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어서, 백제는 한강유역에서도, 서울에서도, 강남 일부 지역만을 차지한 소국이 되었습니다.
신라가 초고-구수왕에게 사신을 안 보낸 이유도 명확합니다. 목지국이 신라 공격에 백제를 포함하여 마한소국 10국을 동원했을 때, 아무런 자기 결정권이 없는 10국에 각각 사신을 보낼 필요가 없이, 모든 결정권을 가진 목지국 1국에만 사신을 보내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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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국사기에서는 백제가 온조왕대에 마한을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2.3세기 초고왕대 백제가 한강유역만 장악한 소국이라고 보기가 어렵지요 목지국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에 안나와서 목지국의 실체에 신중해야 될것 같네요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외국측 기록이라 무조건 신뢰성있는 것도 아니지요
서기 9년에 비류가 미추홀에 세운 미추국(목지국)과 온조가 위례성에 세운 위례국이 합심하여 마한을 멸망시켰습니다. 목지국은 금강유역을 여러개 소국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담로제를 채택하였고, 위례국은 한강유역을 통합하여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다 165년에 길선의 망명 후 위례국이 멸망하고 목지국이 한강유역을 인수하여 금강유역처럼 여러개 소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습니다. 이로서 목지국만 百濟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삼국사기를 보면 멸망한 지 10년 째 되는 해에 국명을 변경하므로, 위례국은 초고왕 10년인 175년에 伯濟로 국명을 변경하였습니다. 금강유역은 서기 9년 직후, 한강유역은 166년 직후, 영산강유역은 3세기 초에 목지국 통치하에 들어가며 마한 소국명이 결정됩니다. 이것이 후한서와 삼국지가 기록한 마한소국명들입니다. 목지국은 30명의 진왕이 7백년 통치하다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나라입니다. 삼국사기는 5세기 이전 목지국사를 삭제한 후 위례국 왕력으로 백제사를 채웠습니다. 삼국지 동이전의 한조와 삼국사기는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므로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무너집니다.
1) 삼국지 동이전의 한조에는 마한 50여국명과 변진한 24국+2국 국명이 나옵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이런 70여 소국이 만들어졌고, 또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이 많은 소국들이 사라졌는지를 삼국지는 적지 않아서 알 수 없고, 당사자의 기록인 삼국사기를 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2) 또 삼국사기를 보아야만 변진한에 26국을 적어놓고 24국이라고 숫자를 명시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3) 거기에 246년에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했다는 마한의 신분고국의 국가운영방법 및 통치구조나, 왜국과 접했다는 변진한의 변진독로국의 국가운영방법 및 통치구조를 알 수 있습니다.
4) 후한서는 목지국이 삼한을 모두 통치한다고 하고는 삼국지에서는 마한과 진한만 통치한다고 한 이유도 삼국사기를 보아야만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하여 왜 그렇게 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5) 3세기 후반에 중국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에 마한주(마한왕)와 진한주(진한왕)은 여러번 사신을 보내는데 변한주(변한왕)은 사신을 안 보낸 이유도 삼국사기에 자세히 나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3세기 후반에 변한왕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미래 165년에 온조가 세운 위례국이 멸망하고 목지국이 백제라고 주장하시면서 목지국 중심의 백제가 7세기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했다고 하시는데 온조가 세운 부여씨의 위례국이 2세기에 멸망했다면 삼국사기에만 목지국의 성씨는 기록되지 않고 위례국의 부여씨만 남을수가 있는지 의문이잖아요 역사의 승자의 기록이라고 승자들만 중점적으로 부각하여 전체적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은데 목지국이 위례국을 멸망시킨 승자라면 목지국의 왕실 성씨가 기본적으로 많이 전해질게 아니겠어요 그런데도 목지국의 성씨는 전해지지 않고 위례국의 부여씨만 전해질수가 있는 것인지요 아무리 삼국사기 백제에 적대적인 신라중심적으로 편찬한다 해도 자국에 멸망된 목지국의 성씨를 기록하지 않고 천년전에 목지국에 멸망되어 사라진 위례국의 부여씨를 부각한다는 합리적인 논리상 납득하기 힘든 법입니다
삼국사기로서는 연도가 먼저 오래된 위례국의 역사보다 연도가 얼마 되지 않은 목지국의 역사를 우선적으로
접하여 목지국의 왕실 성씨만 부각 기록할게 아니겠어요
@과거와 미래 수서와 구당서 수당 시대의 역사 기록에선 백제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확실하게 못박아 기록할 정도로 백제가 위례국이었다고 사실들을 증명해주고 있고 성왕이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를 부여계승을 의미하는 남부여라고 바꾼 것을 보면 목지국이 백제라는 주장이 문제가 많음을 알수가 있지요
@공실불 시간이 나면 다시 설명을 할 예정인데 ... 백제 왕성에 대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한 군데가 다릅니다.
1) 백제왕성은 부여에서 나와 부여로 성을 삼았다. - 삼국사기
2) 백제왕성은 부여에서 나와 해로 성을 삼았다. - 삼국유사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우리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이 삼국사기의 한 글자를 고쳤다는 것은 당시에 충분한 근거 사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 서술은 둘 다 맞는 것으로 위례국 왕성이 해씨고, 목지국 왕성이 부여씨입니다.
부여씨는 여신이 407년(영락 17년) 2월에 삼국사기에 최초로 출현하는데 이는 정확합니다. 407년 1월에 남해안에서 목지국(왜국)과 고구려 5만 대군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목지국의 패배로 변진한이 해체되고 남가야가 재건국됩니다. 그래서 후기 남가야 건국자인 좌지왕의 원년이 407년입니다. 즉 407년 2월에 후퇴하던 고구려군을 따라 북상하던 왜병의 지휘부가 위례국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즉위해도 공립하기 전까지는 대외적으로 왕세자를 칭해야 하는 것이 목지국 방식인데 사서에 3번 나옵니다. 칠지도의 백제왕세자. 여휘의 백제왕세자, 왜국왕세자 흥입니다.
@과거와 미래 부여씨는 고구려 부여계의 성격이 강한 성씨일수밖에 없기 떄문에 위례국 온조 왕실의 성씨로 유력할수밖에 없는 법이라 남방 토착계인 목지국의 성씨가 될수 없지요 목지국의 성씨가 부여씨라는건 북방계적 성격이 강한 부여씨의 기본 성격과 남방 토착계가 중심인 목지국의 실체와 목지국의 남방 지리적 위치를 성급하게 무시한 주장일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고대에는 성씨가 유동적인 경우가 많아서 고려 조선시대 같이 본관제로 고정적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위례국의 왕성이 해씨였다 해도 목지국의 부여씨설의 증거로 인용하기에 부족하지요 해씨가 나중에 부여씨로 표현법이 바뀔수가 있고요 부여씨라는게 부여 고구려 같은 북방계적 성격이 강한 성씨라 남방 토착계인 목지국의 왕성으로 쓰기가 부적합하고
목지국이 백제라고 여긴다면 목지의 왕실 성씨가 부여씨인지 다른 성씨인지 주요 논란거리겠네요 고대사 전체가 뒤흔들 문제이겠지만 충분한 사료가 없어서 목지국의 왕실 실체를 확실하게 단정짓기가 어렵지요
목지국 7백년사 쓸 수 있을 정도로 사료 충분합니다. 요서에서 건국하여 한반도 중부(금강유역)로 건너오고,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왜국으로 천도했다가, 다시 한반도 중부로 돌아와 나당연합군에게 망했습니다. 왕력도 30명 중에 2대~11대만 없고 나머지 20명이 다 있습니다.
百濟와 伯濟의 해석 차이입니다.
白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白는 가장 밝은 태양입니다. 단군이 있는 곳입니다.
단군이 있었던 아사달은 대동강 유역입니다.
백두산은 아사달의 머리에 위치한 산이고, 백강은 대동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대 백제 온조왕이 어라 지역의 땅 100리를 빌렸는데 그곳이 바로 요동반도 대련 쪽입니다.
위치를 보시면 아실 겁니다. 白 위에 짝대기 (一)
반면 伯은 아사달을 지배하는 사람입니다.
위례성은 온조가 마한왕에게 변방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며 예를 올린 성이란 뜻입니다.
한성은 변방을 지키던 장수였던 온조가 마한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거처한 성이라는 뜻입니다.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사냥의 의미.
고대 국가의 근간은 주변 국가와의 교역입니다.
그래서 교역이 막히면 나라 살림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냥을 한다는 것은 레저가 아니라 교역로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짐승이 많아졌다.
도적이 발생했다.
그래서 사냥을 다니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갈은 나라가 아닙니다. 지역을 할거 하는 무장 단체입니다.
작은 마을 여러 개가 자기들끼리 뭉쳐서 사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형적으로 험준한 산이나 외진곳에 위치해 있어서 통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초고왕때 사냥을 다니지 않았다는 것은 나라 안에 큰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대동강 유역 지역이 신라에게 넘어간 바람에 뱃길로 운송하던 교역로가 막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초고왕 해결 못하고 구수왕도 해결을 못합니다.
초고왕 말기 말갈까지 발생했다면.... 초고왕은 참 힘든 나날을 보냈겠구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