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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봉헌 축일
✠ 루카복음 2,22-40
오늘 기념하는 봉헌 축일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기념하는 연중 시기에 맞이하는 첫번째 주님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주님 안에서 세례로 축성되고 봉헌된 우리 모두의 축일이기도 하지만 교회는 특히 봉헌을 자신의 신분, 신원으로 삼고 증언하는 삶을 선택한 축성생활자들을 위한 날로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시는 이야기와 성전에서 만난 두 예언자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시메온'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란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과연 그의 바램은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가 성령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25-27절에 3번이나 성령을 언급한 사실에서 알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두번째 인물은 한나라는 여예언자입니다. 그시대에 여인들, 더구나 과부의 존재는 인정, 보호받지 못하는 가장 가난한 이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한나의 성덕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37)
축성생활자란 성령께 사로잡힌 자여야 하고 늘 기도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자여야 함을 배웁니다.
끝으로 이해인수녀님의 시 '수녀' 전문을 올립니다.
누구의 아내도 아니면서
누구의 엄마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여인아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부끄러운 조바심을
평생 혹처럼 안고 사는 여안아
표백된 빨래를 널다
앞치마에 가득 하늘을 담아
혼자서 들꽃처럼 웃어보는 여인아
때로는 고독의 소금 광주리
머리에 이고 맨발로 흰 모래밭을
뛰어가는 여인아
누가 뭐래도
그와 함께 살아감으로
온 세상이 너의 것임을 잊지 말아라
모든 이가 네 형제임을 잊지 말아라.
(천 사비나 수녀님)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 2,22-40
구원에 이르는 봉헌은 오직 하나뿐: 용서를 위한 봉헌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아프지 않으면 봉헌이 아닙니다.
예언자 시메온은 성모님께서 장차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프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구약에서의 봉헌과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봉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 봉헌의 목적은 첫째, ‘저는 당신 것이고 제가 가진 것도 당신 것입니다.’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바쳤던 제물이 번제와 곡식 제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친교를 위해 바치는 화목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오고 가는 것이 없다면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세 번째는 ‘속죄’입니다.
빚을 진 상태로는 친교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탕감해주더라도 그분을 바보로 만들지 않으려면 자신도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속죄제나 보상제가 이것입니다.
만약 이런 봉헌으로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신약의 봉헌은 반드시 ‘용서’가 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타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봉헌하시며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문신을 한 신부님’(2019)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다니엘이라는 청년입니다.
그는 소년원 겸 교정시설에서 생활하던 중, 우연히 본당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돕게 되면서 ‘사제의 길’을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살인 및 폭력 전과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없다.”라는 답을 들었고, 결국 다른 직업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출소 후 노동 현장으로 파견되던 중, 다니엘은 시골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고, 우연히 그곳 본당 신부님을 만나야 할 상황이 생깁니다.
다니엘은 내면에 깊은 갈망과 불안, 그리고 죄책감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누군가가 “본당 신부님 맞나요?” 하고 묻자, 그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예, 제가 신부입니다.” 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그리고 빈 사제관에 머무르게 되면서, 그 마을의 임시 ‘신부’ 역할을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의외로 진솔한 그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입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에는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끔찍한 교통사고가 발생해 여러 주민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운전자’ 역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사고 당시 운전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운전자를 철저히 미워했습니다.
마을 곳곳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표시가 있지만, 정작 그 ‘가해자’였던 운전자는 묘지에조차 들어오지 못한 채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다니엘은 처음에는 이 사건에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용서받지 못함의 고통”을 잘 아는 그였기에, 점점 그 가족과 죽은 운전자를 묻지 못한 채 애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신경 쓰였습니다.
다니엘은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이 운전자를 위한 장례를 제대로 치러 주자.”
모든 마을 사람이 반대하고, 심지어 다른 사제나 경찰관도 “장난질이 너무 심하다.”라며 그를 몰아세우지만, 다니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장례식 당일, 분노로 가득 찬 마을 주민들은 장례식장에 몰려와 고성을 지릅니다.
이즈음에 그의 신분도 조금씩 들통이 나기 시작합니다.
“가짜 신부가 무슨 장례를 치른단 말이야!”
“이딴 식으로 저 인간까지 구원받게 해 줄 순 없어!” 다니엘은 위축되면서도, 용기를 내어
운전자의 관이 놓인 곳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들어 모두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 저 역시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게 된 건,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회를 주셨고, 저도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고 싶다는 겁니다.
이 사람에 대한 증오가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죽은 이에 대한 복수나 증오는 우리 모두를 갉아먹을 뿐입니다.”
다니엘은 장례식을 시작하며 조용히 기도문을 읊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묵주기도(또는 해당 지역 미사 의전)를 이어 갑니다.
이 순간, 관 앞에서 울부짖는 운전자의 가족을
보고 몇몇 주민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사제가 아닌 저 사람(다니엘)이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까지 마음 돌리게 하나…” 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미 그의 진심을 느꼈던 사람들은 묵묵히 참여하기 시작하지요. 장례식을 마치고 다니엘은
신자들 앞에서 사제복을 벗고 문신이 새겨진 몸을 드러낸 채 그들을 조용히 떠나갑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그가 먼저 사제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하지 않은 우리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곧 에덴동산에서의 가죽옷을 선물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죽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 그분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제복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위한 봉헌을 의미합니다.
그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 합당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용서하고 덮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봉헌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봉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기 자신을 대신 감옥에 갇히도록 내어놓겠다고 말한 장면(창세기 44,33 참조)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모습을 예표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했지만, 되레 그들을 살리기 위해 양식을 베풀었고(창세기 50,19-21 참조),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벌주시는 대신 가죽옷을
입혀 주십니다(창세기 3,21 참조).
누군가의 죄를 덮어 주기 위해 다른 생명이 희생된 것은 최초의 봉헌을 상징합니다. 신약에서는 의로운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깨닫고도, 세상의 조롱 속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려고 몰래 파혼하려 했습니다(마태오 1,19 참조).
구약의 유다와 요셉이 살아 낸 봉헌과 희생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완성해 주신 속죄와 사랑으로 이어지며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의 봉헌은 더 이상 의무적 제사가 아니라 서로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봉헌’이 됩니다.
이 봉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롭고 영원한 봉헌입니다.
나는 이웃의 죄를 덮어주는 봉헌을 하며 미사에 참례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참다운 신약의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복음: 루카 2,22-40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인 축성 생활자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인 동시에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시고 올라가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축성 생활자들, 수도자들을 각별히 사랑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 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들이 더욱 신원에 맞는 걸맞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자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들이 각자 부여받은 고귀한 성소와 카리스마를 기쁘고 충만하게 실현하도록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축성(祝聖, consecration)되다’ 라는 말의 의미는 성화(聖化)되다, 성(聖)스럽게 변화되다, 거룩하게 되다,
신성하게 되다, 봉헌되다, 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오늘 축성 생활의 날은 맞아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이 아기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과 미래, 삶 전체를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선별되고 축성된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걸맞게 하루하루 모든 순간을 거룩하고 향기롭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도 중요하겠습니다만, 그에 앞서 한 작은 수도자로서, 주님의 겸손한 종으로서, 기도 안에 기쁘고 환한 얼굴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도자들이 자신이 발한 삼대 서원이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교회를 위해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거룩하고 맑게 살아 존재 자체로
교회와 세상 앞에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존재’ ‘신원’은 마치 날카로운 날이 서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매일 가슴을 치면서 거듭 자신을 갈고닦으며, 주님의 종이라는 수도자로서의 신원에 걸맞게 살고자 발버둥 칠 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위한 멋진 이기(利器)로 변모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망각한 채, 흥청망청, 빈둥거리며 살아갈 때, 세상의 고통과 절규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우리끼리만 희희낙락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과 교회 앞에 그 어떤 증거도 되지 않고, 그저 놀림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수도자라는 존재 자체, 신원 자체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해치는 흉기(凶器)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봉헌 축일 강론>
(2025. 2. 2.)(루카 2,22-40)
<‘봉헌’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바치는 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2-32)”
1) ‘주님의 봉헌’을 겉으로만 보면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한 일로, 즉 예수님이 ‘봉헌되신’ 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또는 신앙의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께 ‘바쳐진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또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아기 예수님이 자라서 나중에 메시아가 된 것이 아니라, 메시아께서 아기 예수님으로 오셨는데,
그 일은, 또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사신 것은, 당신이 원해서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봉헌’도 수동적으로 ‘봉헌되신’ 일이 아니라, 당신이 원해서 능동적으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봉헌’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세례와 마찬가지로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2) ‘봉헌’은 내가 나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남이 나를’ 바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남을’
바치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에 남의 목숨이나 남의 재물을 바친다면,
그것은 봉헌이 될 수 없고,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에,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간청하면서, 자기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판관 11,30-31).
자기 목숨이 아니라, 남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 서원은 옳은 것일까?
식구들과 하인들을 모두 자기 재산으로 생각하던 당시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원천적으로 무효인, 잘못된 서원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간 입타를 맞으러 처음 나온 사람은 바로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습니다(판관 11,34).
그때 그는 자기가 잘못된 서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즉 잘못된 서원을 취소하고 올바른 서원으로 바꿨어야 했는데, 그는 한 번 서원한 것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서 딸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판관 11,39).
잘못된 서원으로 인한 잘못된 봉헌이니, 그것은 결코 봉헌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고, ‘큰 죄’를 지은 일입니다.
3) ‘봉헌’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바치는 일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를 다시 생각하면,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람의 목숨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입타의 서원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한 마디도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입타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예물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서 ‘남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는 ‘선한 예물’만 바쳐야 합니다.
만일에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해서 마련한 것을
예물로 바치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으실까?
도둑질이나 강도짓도 큰 죄이지만,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는 더 큰 죄입니다.
4) ‘봉헌’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나의 목숨과 나의 인생 전부를 봉헌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원래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봉헌을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습니다.
5) ‘봉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뭔가를 많이 바치면 하느님께서 복을 많이 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봉헌이 아니라 하느님과 거래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거래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생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