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란분절은 돌아가신 조상들의 혼을 불러내 제사하는 날로 정착돼 있다. 그러나 이는 우란분절의 근본 취지와는 크게 동떨어진 것으로 조선시대 억불숭유의 정책 속에서 변질된 것이다.”
중앙승가대 김상영 교수는 8월 9일 한국불교연구원이 영천 만불사 만불보전에서 개최한 제1회 만불사세미나에서 “현대의 우란분절은 그것이 갖는 다양한 의미 중 오직 조상천도 측면만 강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란분재(盂蘭盆齋)의 의미와 설행(設行)의 역사’란 주제로 『우란분경』 등 관련 경전의 내용과 함께 역사적인 고찰을 한 김 교수에 따르면 우란분재는 안거를 마친 수행 대중의 자자일에 공양을 올리고 수행대중은 공양을 올린 시주가와 7세 부모를 위해 축원하는 우란분재 재(齋)의 형태가 마련됐으며, 이것이 곧 우란분재가 지니고 있는 근본정신이다. 즉 안거를 마친 성중(聖衆)은 청정한 계와 도를 구족하고 있어 그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 이상의 위신력이 없으므로 그들에게 공양을 올림으로써 현세의 부모와 7세의 부모가 모두 삼도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부처님이 설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우란분재가 중국 양나라 무제 4년인 538년 처음 설해졌으며 『일본서기』에 606년 우란분절 행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시기인 6~7세기에는 이미 우란분절 행사가 정착됐을 것으로 보았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의천 스님이 『우란분경』을 “미혹을 깨뜨리는 앞의 진영이요, 도에 들어가는 요긴한 관문이다”라고 강조했을 정도로 우란분절이 대단히 활성화 돼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우란분재는 지배세력의 억압과 함께 민중의례와의 습합과정을 통해 우란분재 고유의 제의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해갔고 이러한 변질된 우란분절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우란분절은 출·재가자 한 자리에 모여 서로 공양하고 회향하는 자리인 동시에 돌아가신 조상뿐 아니라 살아계신 부모님의 평안함도 함께 발원했던 요즘의 어버이날과도 유사하다”며 “이제는 이를 현대적으로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영 교수의 뒤를 이어 ‘삶과 죽음의 번뇌-불교철학의 사생관(死生觀)’이란 주제를 발표한 정병조 한국불교연구원장은 ‘죽음’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철학적으로 정리했다.
불교에서 죽음에 관한 사색은 교리적 관점에 따라서 혹은 문화적 역사배경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상이한 견해가 도출된 가운데 정 원장은 이를 △정토신앙 등 내세에 대한 확신 △선종 등 죽음을 내세와 결부시키지 않는 견해 △불교의 보편적인 관념인 생명의 영원한 윤회유전(輪廻流轉)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그는 이어 시대별로 석존의 사생관, 부파불교의 입장, 라마불교의 전통, 정토, 선종에 대한 각각의 죽음관까지 세세히 분석하고 이러한 죽음관이 모순된 게 아니라 단계적인 불교 이해임을 밝혔다. 정 원장은 “불교는 내세에 대한 확신이라는 면에서는 자력이어야 하지만 우리는 논리와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면에서는 타력”이라며 “이 자력과 타력의 균형과 조화야말로 불교적 사생관의 키워드”라고 강조했다.
‘업과 윤회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발표한 허남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는 △업과 윤회는 숙명론인가 △업과 윤회는 선악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가 △업과 윤회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등 고찰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업과 윤회의 의미에 대해 돌아보고 “업과 윤회는 불교적인 삶의 방식을 일상적인 의미로 알기 쉽게 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허 교수는 “물론 이에 대한 논의가 오랫동안 있어왔고 불교적 전통마다 약간씩 다르게 해석하는 경향을 잘 알고 있다”며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의 형이상학적 논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대적인 행위원리로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겠는가라는 지적 고민이다”라고 지적했다. 즉 업과 윤회의 원리를 사후의 세계까지 확장하지 말고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 곧바로 적용해 보자는 것이 허 교수의 주장이다.
허 교수는 “그럴 때 업과 윤회라는 사고방식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섭리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며 또한 행위의 선택과 그것이 도덕적 성품의 형성에 미치는 결과도 숙연하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며 “보이지 않는 업력이 언제나 우리 주변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출처 : 법보신문 8월 19일자>
[위 기사는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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