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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_ 강혜원 / 어떤 소믈리에
어떤 소믈리에
강 혜 원
모든 라벨은 사심이 없지
한결같이 청렴하다네
나 또한 사심 따윈 없으나 무료한 나의 혀는 미지의 회오리를 원하네
이를테면 미 개봉 중고를 견디며
숙성과 산화와 변질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누설하지 않은 갸륵한 맛
누대에 걸쳐 고단한 오크통을 미워하면서, 미워하지 않으면서
절치와 부심을 곱씹은 병속의 태풍
태풍 속 부릅뜬 외눈 같은 맛
제품명- 언젠가는
생산년도- 잊힌 지 오래
원산지- 산비알 자드락 젖은 눈시울 밭
맛- 대대로 농축된 옹이 깊은 맛
특징- 어딘가에 스밀 수만 있다면 드라이하게 굴욕을 견딜 수 있음
맨 아랫간 먼지 쌓인 와인 병의 바디를 껴안듯 닦아 주었네
이윽고 마개가 열리고
아 적빈의 이토록 깊은 빛깔에 사로잡힌 사이
시큼을 벗고, 놓쳐버린 새콤과 상큼을 회복하려는 눈물겨운 심호흡
나는 가장 전문가다운 표정으로
펑펑 축포를 쏘듯 두서없이 웃는 17번 테이블의 브이아이피
오래 묵은 귀빈에게
함부로 묵혀진 이의 비밀을 청아하게 따르려하네
세상의 모든 단맛으로부터 격리된
빈 달빛 비탈진 귀가길
자꾸만 들러붙는 허기의 잔가지를 쳐내며
수도 없이 외치고 삼켰을 형언할 수 없는 이 맛을
* 소믈리에 : 손님이 주문한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주는 와인 감별사.
<당선소감>
큰딸의 발걸음 응원해주세요
큰딸 구두 680원, 콩나물 50원, 두부 30원……, 30년을 살아낸 늙은 한옥을 떠나오면서 어머니는 책장 서랍 속 몇 권의 가계부와 일기장, 빛바랜 편지 뭉치를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당신 속에 일렁이던 뜻 모를 불꽃을 십 원 한 끝 틀림없는 셈법과 쓸쓸한 몇 줄의 일기로 다독였을 어머니.
사라져 버린 그 뭉치 속에는, 성긴 눈송이 같은 밥을 먹고 도무지 펴질 것 같지 않던 가계도를 주머니에 구기고 다니던 청년의 아버지가 삼동의 골목에서 최초이자 최후로 말한 사랑의 고백도 함께 있었다.
귀한 말씀처럼 간직하며 이따금 꺼내 보고 싶었던 그것들을 조용히 태우시던 어머니의 남모를 회한이 오래도록 마음을 에었다. 그러나 그 불길은 꺼지지 않고 그날 이후로 뜨겁게 울고 있다. 때로는 그을음을 피워 올렸고 때로는 꺼질 듯 위태로웠지만 ‘시’의 얼굴로 나를 찾아와 넘실거린다.
겨울은 여전히 깊고 소용돌이를 품고 있는 강물 위로 튼튼한 다리를 놓을 재간이 내게는 없다. 이렇게 더듬거리며, 왜 그렇게 멀고 야속하냐고 악을 쓰며 걸을 것이다. 길이 아득해지는 날엔 모닥불을 피워 놓고 어머니가 내 핏줄 속에 흘려보내주신 눈물 어린 화법으로 곱은 손마디를 녹여 세상에다 대고 오래도록 연애편지를 쓸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건강하세요. 서툴겠지만 행복할 큰딸의 발걸음을 오래도록 지켜봐 주세요. 떨고 있는 어깨를 두드려 일으켜주신 심사위원님과 광주일보사에 감사드린다. ‘푸른 시의 방’ 강인한 선생님, ‘시인회의’와 강정숙 선생님, 정윤천 선생님, 고성만, 조성국, 김행란 선생님, 김재준 선배, ‘터앝문학동인회’와 매서운 나의 독자 은주에게 감사드린다.
▲ 강혜원 / 1972년 광양 출생. 조선대 국문과 졸업. 논술학원 강사.
<심사평>
본심에 열여덟 명의 시가 올라왔다. 10대에서 60대까지 각 연령층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지방도시에서 시골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자기의 방에서, 시에 골똘했을 모습을 떠올리니 뭉클했다. 본심에 오른 만큼 언뜻 보기에 다 근사했다. 그 중, 시상(詩想)은 기발하지만 아직 밑그림 단계인 시,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진 시, 말을 대폭 줄여야 할 중언부언 시들을 추려냈다.
이효정, 오정순, 권명호, 강혜원 이 네 명의 시편들이 남았다.
이효정의 ‘손잡이의 시간’은 신선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은하수를 횡단하는 한 무리의 맘모스를 만나면’이나 ‘그리고 오래된 인류의 분실물을/하나 둘 태우고 싶어’ 같은 맥락에 있어서 뜬금없고 표현에 있어서 상투적인 구절이 걸렸다. ‘고서(古書)’는 완성도가 높았다. 판타지가 겉돌지 않고 현실에 고즈넉이 배어들어 있다. 판타지가 주조인 시는 체험이 받쳐줄 때 설득력이 생긴다.
오정순의 시편들은 풍경으로 정서를 풀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매끄럽게 잘 읽힌다. 그런데 좀 늘어진다. 말을 압축하면 탄력이 붙을 것이다. 권명호의 ‘남일상회’는 시골서민의 풍취가 잔잔하고도 유머러스하게 그려진 서정시다. 당선작과 끝까지 겨눠보다가 아쉽지만 놓았다.
강혜원의 ‘어떤 소믈리에’는 소재도 독특하고 표현도 기발하다. 화자인 소믈리에의 삶과 와인의 삶을 포개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기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올린다.
〈심사위원 이성부 ·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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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_ 강정애/ 새장
새장
강정애
나무 밑 떨어진 이파리들은 모두
누군가 한 번쯤 신었던 흔적이 있다
낡은 그늘과 구겨진 울음소리가 들어있는 이파리들
나무 한 그루를 데우기 위해
붉은 온도를 가졌던 모습이다
저녁의 노을이 모여드는 한 그루 단풍나무 새장
새들이 단풍나무에 가득 들어 있는 저녁 무렵
공중의 거처가 소란스럽다.
후렴은 땅에 버리는 불안한 노래가 빵빵하게 들어 있는
한 그루 새장이 걸려 있다
먼 곳을 날아와 제 무게를 버리는 새들
촘촘한 나뭇가지가 잡고 있는 직선의 평수 안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후드득, 떨어지는 새들의 발자국들
모든 소리를 다 비운 새들이 날아가는
열려 있으면서 또한 무성하게 닫혀 있는 새장
허공의 바람자물통이 달려 있는 저 집의
왁자한 방들
잎의 계절이 다 지고 먼 곳에서 도착한 바람이
그늘마저 둘둘 말아 가면
새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새의 혀들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의 혓바닥들만 부스럭거릴 것이다
모두 그늘을 접는 계절
간혹, 지붕 없는 새의 빈 집과
느슨한 바람들만 붙어 흔들리다 간다
한 그루 단풍나무가 제 가슴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저녁
후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나무의 귀
누군가 새들의 신발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다.
강정애 / 1959년 전북 장수 출생. 부산여자대학 수료.
[심사평] 살아있는 생각과 언어의 결
응모작들이 기성 시단의 어떤 흐름에 깊이 감염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말과 말 사이의 공간이 너무 커서 완전한 독해가 어려운 시들이 적지 않았고, 유행하는 소재를 검증 없이 끌어다 쓰는 안이한 시도 여럿 있었다. 감동을 생산하려는 의지보다 시를 잘 만들려는 욕망이 비대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시의 리얼리티에 대한 배려가 전반적으로 부족해 보였다.
당선작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신성희씨의 ‘신발들이 날아간다’는 가장 읽을 만한 시였다. ‘벌판에 버려진 신발이 하나 있다/그 외발을 벌판의 창문이라고 혼자서 불러보았다’는 첫머리부터 시선을 사로잡았다. 현란하고 강렬한 이미지들이 시 읽는 재미를 배가시켰다. 다만 지나치게 궤도를 이탈한 몇몇 불안한 표현에 꼬투리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아깝다. 머지않아 좋은 시인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강정애씨는 시적 대상을 객관화하면서도 충분히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시인이다. 당선작 ‘새장’은 생각과 언어의 결이 살아 있는 시다. 자칫하면 상투성의 늪으로 빠질 수 있는 나무나 새와 같은 소재를 붙잡고 묘한 긴장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감정을 자제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대상을 자기 안으로 바짝 잡아당겨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방증이다. 앞으로 서정의 지평을 크게 넓히는 시인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 심사위원 본심 : 백무산·안도현, 예심 : 유성호·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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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_ 강은진 /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강은진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 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
강은진 / 1973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수료.
[심사평] 삶의 건강한 구체 다뤄… 한국 시단 큰 재목되길
예년에 비해 투고된 작품량은 늘었으나 수준은 비슷했다. 윤지문의 '새와 흙', 강은진의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석상준의 '뚜껑', 김후인의 '결치(缺齒)' 등 네 편의 작품이 최종심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먼저 '뚜껑'은 '그냥 썩게 놔두는 것보단 나중에 상하더라도 누군가 퍼먹을 수/ 있도록 열어두는 게 인생이란 걸 알기 때문에'에서 알 수 있듯이 산문성이 지나치다는 점 때문에 제외되었다. '결치(缺齒)' 또한 빈 집이 늘어나는 시골 풍경을 결치의 이미지와 결부시킨 점은 높이 살 만 하지만 조금 낡은 감이 있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남은 두 편 중에서 '새와 흙'은 기성시인의 시를 인용한 점이(인용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신인으로서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과, 또 다른 투고작 '새와 구름'에서 구체성이 부족하고 한껏 멋을 부린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결국 당선작은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으로 결정되었다. 이 시는 '눈썹 문신'을 하는 우리 삶의 독특한 한 현상을 발견한 시적 눈의 신선함에 일단 호감이 갔다. 특히 눈썹 문신을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에 빗된 점이 해학적이고 애절하다. 그러나 이 시에 존재하고 있는 '이만호 할머니'가 시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음으로써 대표성을 잃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이만호 할머니가 누구인지 암시가 있었으면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자폐적 상상력이 판치는 한국시단에서 삶의 건강한 구체에서 꽃핀 이만한 작품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이 시를 당선작으로 밀 수 있는 이유였다. 당선자가 앞으로 한국시단의 큰 재목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황동규(시인)·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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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_ 홍문숙/ 파밭
파밭
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
홍문숙 / 1958년 경기 용인에서 태어나 수원에서 성장. 2009년 계간 ‘차령문학’ 등단, 동 문예지 편집위원. ‘석수 서예’, 평택도서관 등에서 한문학 강사로 활동.
[심사평] 경직돼 있지 않고 자연스럽고 신선
예년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은 없었다. 오늘의 한국시가 갇혀 있는 프레임을 과감하게 깨트리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소리를 중언부언하는 시는 눈에 띄게 줄었다. 아주 뛰어난 작품은 많지 않으면서도 당선작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은 적지 않아 선자들은 마음을 놓았다.
특히 다음 네 분의 시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다. 홍문숙의 ‘파밭’ 등은 시를 쓴다는 경직된 포즈가 안 보이면서, 자연스럽고 신선하게 읽혔다. 속도감도 있는 데다 요즘의 유행과도 한 발 떨어져 있는 것도 미덕이었다. 그러나 투고한 작품들의 편차가 심해 쉽게 신뢰감이 가지 않았다.
종정순의 ‘개나리는 왜’ 등은 기지도 있어 보이고, 밝고 환한 분위기의 시여서 심사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 시가 가진 청승과 궁상이 없는 것도 호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화문석’ ‘현대방앗간’ 같은 산문투의 시들은 시의 맛을 반감시킨다.
유명순의 시 중에서는 ‘내통’이 가장 뛰어났다. 부부 간의 관계,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자못 설득력이 있다. 한데 시들이 전체적으로 숨통을 조일 듯 답답한 것이 흠이다. 게다가 ‘뫼비우스의 띠’ 같은 흔해빠진 이미지가 일부 그의 시를 상투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최인숙의 시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표현도 큰 무리가 없고 자연스러웠다. 한데 어쩐지 시창작교실의 냄새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시는 쓰는 것이지 쓰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위한 시가 가지는 감동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상 네 사람의 시를 놓고 많이 얘기한 끝에 결국 홍문숙의 ‘파밭’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심사위원은 합의했다.
신경림(시인), 유종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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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_ 박송이/ 새는 없다
새는 없다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
박송이/ 30세. 전북 순창군 동계면. 한남대 국문과와 대학원 과정 수료.
[심사평] 새의 존재에 대한 통찰 돋보여 앞으로의 가능성에 낙점
예심 없이 모든 투고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숙독과 합평으로 심사가 진행됐다. 시국 탓인지 꽤 많은 작품에서 유행처럼 죽음을 서슴없이 다루는 것이 우려스러웠다. 또한 빈번한 외래어의 사용과 심지어 영어를 그대로 시에 사용하는 것은 21세기 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죽음보다는 희망을 가진 작품에 기대를 걸며 '가족의 탄생'(팽샛별), '감독의자'(지석현), '새는 없다'(박송이)를 최종심에 올렸다. '가족의 탄생'은 영화를 보듯 선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눈에 시를 들어오게 하는 힘이 좋았다. 하지만 당선작이 되기에는 시가 가지고 있는 강한 산문성이 문제였다. 그런 산문성이 시가 가지는 독특한 맛을 잃게 해 아쉬웠다. 앞으로 가벼워지는 것에 대해 노력해주길 부탁한다.
'감독의자'는 신선한 소재의 참신한 작품이었다. 산문시였으나 시의 흐름도 부드러웠다. 하지만 투고한 다른 작품이 그와 같은 무게를 보여주지 못했다. 앞에서 밝혔듯이 모국어로 쓰는 시에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한다.
'새는 없다'는 새의 존재와 상징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였다. 다른 시들에 비해 긴 길이의 시인데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감에 좋은 점수를 얻었다. 투고자들이 흔히 가진 애매모호함을 극복하는 선명성도 좋았다. 하지만 감동으로 가기에는 힘의 결락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새는 없다'는 좋은 작품이라는 것보다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로 대성을 바란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투고자들에게는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는 격려의 말을 전한다.
● 심사위원= 신경림(시인) 정호승(시인) 정일근(시인ㆍ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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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_ 정창준/ 아버지의 발화점
아버지의 발화점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 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 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예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잖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를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 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 거예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버릴 집을 지은 걸까요.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 조세희 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함.
————
정창준/ 36세. 울산 대현고 국어교사.
[심사평] “실종된 현실인식의 발견… 뭉클하다”
스무 분이 겨룬 이번 본심에서는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보수 정부가 들어선 뒤 일상화한 사회경제적 위기의식이 예비시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고이면서, 불안을 나누고 싶은, 나아가 희망을 찾고 싶은 연대의식, 소통 욕구가 발현된 것일 수도 있겠다.
최종심에 정창준(‘아버지의 발화점’ 외 4편), 김유미(‘삼거리식당 지나 명랑슈퍼’ 외 4편), 김영진(‘도끼발’ 외 4편), 류성훈(‘밤의 도플러’ 외 4편), 한주연(‘슬리퍼를 밟는 순간’ 외 4편) 이 다섯 분의 시가 올랐다.
김유미의 시편들은 글 다루는 솜씨, 이야기를 꾸미는 솜씨가 돋보인다.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그런데 특별히 새롭지가 않고 고만고만하다. ‘고백’은 김유미의 장점이 생기있게 모인 시다. 다른 시들과 ‘고백’은 백지 한 장 차이지만, 그 백지는 얼마나 두꺼운가? 한주연의 ‘슬리퍼를 밟는 순간’은 슬픈 얘기를 담담하게 그려 독자로 하여금 고즈넉이 귀기울이게 한다. 잔잔한 매력이 있는 자기만의 화법이다. 류성훈은 시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능력이 빼어나다. 그런데 그 시적인 순간을 자기화하지 못한다. 늘 최종심에 오르지만 결국엔 내려놓게 되는 시들이 있다. 언뜻 아주 시적이나 공허하고 생명감이 없는 시들. 경험이 내재화돼 있지 않은, 육체가 없는 시들.
김영진의 시들은 ‘새만금’이나 대학생들의 취직 문제, 세습되는 가난 등 오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소재도 주제의식도 상상력도, 다 좋다. 그런데 목적의식이랄지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작위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끼어 있어 시가 덜그럭거린다.
정창준을 당선자로 내세우게 돼 뿌듯하다. 응모한 다섯 편의 시 가운데 어느 작품 하나 모자람이 없지만, 제일 앞장에 놓은 ‘아버지의 발화점’을 당선시로 올린다. 정창준의 시들은 우선 신선하다. 우리 시단에서 꽤 오래 실종됐던 현실인식이나 생활감각을 가진 시를 보게 된 것도 반갑지만, 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발성이 새롭고 독창적이어서 더 반갑다. 정창준의 시들은 감동적이다. 뭉클하다. 심금을 울린다.
이시영(시인), 황인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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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_ 권민경/ 오늘의 운세
오늘의 운세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
권민경 / 1982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심사평]
예심을 통해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작품은 네 사람의 것이었다. 임춘자 씨의 ‘주유소의 형식’ 등 6편은 안정된 표현력과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한연우 씨의 ‘그늘의 위대한 고집’ 등 6편은 언어에 대한 수사적 능력에서 장점을 보여주었다. 류성훈 씨의 ‘저녁의 진화’ 등 5편은 어법의 상대적인 참신함이 인정되었다. 권민경 씨의 ‘대출된 책들의 세계’ 등 5편은 시적 언어의 능력과 상투성을 비껴가는 감각이 돋보였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작품들 사이의 편차가 적었던 임춘자 씨와 권민경 씨의 시들이었다. 임춘자 씨의 작품들이 가진 안정감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들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으나, 설명적인 부분들이 감상적인 의미 안으로 시를 가두었다. 권민경 씨의 시는 묘사와 표현의 감각이 청신했다. 당선작이 된 ‘오늘의 운세’라는 작품의 경우, 개인적 운명과 삶의 시작을 둘러싼 시적 해석이 세밀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으며, 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심사위원들은 시간의 아이러니에 살아있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능력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이시영(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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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_ 신철규/ 유빙(流氷)
유빙(流氷)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심사평]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눈 돋보여
신춘문예 투고 시는 한국 현대시의 미래를 밝히는 작품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을 찾긴 힘들었다. 최종심에 남은 작품은 임여기의 ‘면접관’, 정승기의 ‘실종’, 이재흔의 ‘스파이더맨의 후예’, 이도은의 ‘아주 식물적인 꿈’, 신철규의 ‘유빙’ 등 5편이었다. ‘면접관’은 면접관과 면접인 간의 관계 대립을 긴장되고 설득력 있게 고조시켜나갔으나 결구 부분이 너무 안이했다. ‘스파이더맨의 후예’는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삶의 현장을 선명하게 나타냈으나 ‘제각기 다른 일상의 벼랑 끝에서 한 번씩은 실족했던 사연들이’ 같은 표현이 산문적이고 진부했다. ‘실종’ 또한 현대인의 실종의식을 진지하게 추구한 작품이었으나 전체적으로 산문의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아주 식물적인 꿈’은 식물적인 꿈과 연결된 우리 삶의 구체적 양상이 불명확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돼 결국 당선작은 ‘유빙’으로 결정되었다. ‘유빙’에는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개성적인 눈이 있다. 현대사회의 개체적 삶을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에 은유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시 본래의 내재적 리듬감을 살려 유연한 속도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신인다운 내면적 사고의 흐름도 알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과장된 이미지나 허장성세가 없고 기성의 어떤 억지스러운 틀에 갇혀 있지 않아 자유분방하다. 한국시단의 대들보가 되길 바란다.
문정희· 정호승 시인
첫댓글 풍낙산 님, 좋은 자료를 한데 모아 놓으셨군요.
수시로 드나들며 꼼꼼하게 음미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