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점상 성영재씨가 손님들에게 갓 튀겨낸 도넛을 건네주고 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성씨는 1957년 고향 경북 영천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와서 처음 잡은 일은 숯장사였다. 새벽 4시에 도매상에서 숯을 떼어다 밤 10시까지 숯을 팔러 다녔다. 그는 "종로에서 영등포까지 리어카를 끌고 하루 종일 걸어 다녔다"고 했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자면서 3년을 보내고 동대문 포목 시장에 취직했다.
그는 "동대문에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고 했다. 5년이 지나자 월급 사장이 됐고 또 5년이 지나자 자기 가게를 갖게 됐다. "도매상을 했는데 점원 4명을 부렸어. 장사가 잘됐지. 그때 '새나라 자동차'를 사서 타고 다녔으니까. 그때까지는 뭐든지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았어."
그의 포목점은 1978년 순식간에 망해버렸다. 친구에게 서준 보증이 문제가 됐다. 성씨는 "며칠이고 부탁해서 보증을 서줬더니 그 다음달에 어음을 잔뜩 풀고 도망쳤다"고 했다. 도망간 친구 대신 그에게 빚쟁이가 달라붙었다. 가게를 팔고 빚잔치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빚잔치가 끝나자 그의 손에는 300만원이 남았다. 그 돈으로 용산에 수퍼마켓을 열었다. 하지만 그 역시 2년 만에 망해버렸다. "하루에 수십만원씩 만지다가 '쭈쭈바' 하나 50원에 팔아서 10원 남기고 이러려니 성질나서 미치겠더라고. 매일 같이 술을 마셨지. 하루에 3만원씩 술을 마셨어. 그러니 별 수 있나. 망했지."
1980년 겨울 성씨는 연탄 난로 하나에 밤 한 봉지를 들고 광화문 사거리에 나왔다. 20년 만에 다시 거리로 나선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마흔이었고 큰아들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무작정 시작했지만 답답했어. 먹고살려고 이것저것 다 팔아봤어. 처음에는 겨울에 군밤을 팔았고, 여름에 옥수수를 팔았지. 그러다가 붕어빵을 팔고, 핫도그도 팔았고."
도넛을 팔기 시작한 것은 1987년이다. 그는 "사철 장사할 수 있는 걸 찾다가, 이건 계절 없이 팔 수 있겠다 싶어서 시작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20년째 그는 도넛만 팔고 있다. "처음에는 배운 대로 하다가 이것저것 넣기 시작했어. 반죽에 조금씩 넣어가면서 사람들 표정 보고 그러는 거지. 반응이 좋은 걸로 조금씩 바꾸다 보니까 잘 팔리더라고."
그의 노점 진열대에는 도넛이 쌓이지 않는다. 진열대에 도넛이 가장 많이 있을 때도 8개를 넘지 않는다. 그는 "이게 바로 20년 기술"이라며 "도넛은 기름에 튀긴 거라 기다리게 하는 게 낫지 미리 튀겨놓으면 손님 다 끊긴다"고 했다. 그는 적을 때는 한 솥에 4개씩, 많을 때는 10개씩 도넛을 튀겨내며 숫자를 맞췄다.
오후 4시쯤이 되자 그의 가게 앞에는 줄이 늘어섰다. 주로 서점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들이 한꺼번에 10~20개씩 포장해 가기도 했다. 선 자리에서 4개를 먹은 김형진(46)씨는 "여기 도넛은 달지 않고 따뜻해서 많이 먹게 된다"고 했다. 내년이면 성씨가 노점을 시작한 지 30년이 된다. 노점을 하면서 그는 집도 마련했다. 서울 번동에 있는 대지 100㎡ 크기의 단독주택이다. 자식 둘도 모두 대학에 보냈다. 이제 은퇴할 때가 된 것이 아니냐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친다.
"애들은 이제 그만두라고 해. 특히 딸은 '집도 있는데 무슨 노점상이냐. 부끄러우니까 그만 하라'고 난리지. 30만원씩 용돈 줄 테니까 그걸로 살라고. 하지만 팔다리 다 멀쩡한데 왜 자식들한테 손을 벌리나. 일해야지. 요즘 경기 나쁘다고, 펀드 반 토막 났다고 난리지만 열심히 만 해봐. 진짜로 땀 흘려서 버는 돈은 아무도 못 빼앗아 가."
첫댓글 어느 분을 보는 것 같아 너묻 공감이 가네요. 저 역시 부끄럽지만 자랑스럽습니다. 아니..존경스럽습니다.
그치만 아그들(내 밑으로..;;)~ 공부 열심히 하자~ 부모님들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는건 다 이유가 잇는거드라..
하지만 특기나 취미생활은 열심히..;;
딱히 드럼이라고 말 안해도 아니까..ㅎㅎ;;
근데 말 해버렷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