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0 대림제2주간 토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0-13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다볼산의 '거룩한 변모 사건'(마태 17,1-9)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셨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셨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리고 오늘 복음말씀에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재림한 엘리야'임을 보여주신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로 엘리사벳과 즈카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루카 1,5-25;57-66 참조)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카 1,80) 그는 유다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는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며,'(마태 3,4)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그런 그가 헤로데 영주에 의해 옥에 갇혔다. 그리고 영주의 가족에 의해 말도 안되는 죽음을 당하였다.(마태 14,3-12 참조)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죽음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룰 때 일어나는 말도 안되는 죽음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죽음을 지금 이세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영화 '오징어 게임'이 지금 이세상에 만연한 이런 말도 안되는 죽음들을 보여준다. 게임에 지면 죽는다. 그 게임들은 사람들이 어릴때부터 해오던 너무나 익숙한 게임들이다. 게임에 지면 죽는다. 어쩌면 어릴때부터 죽음의 게임을 학습받아 온 것같다. 우리 밥집 식구들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살이와 죽음을 보면 이 영화를 슬로우 비디오로 보는 것같다.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마기적들과 치유기적들과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통해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선포한다.
우리 생태복지마을 식구들은 한국의 둘레길을 따라 걸으며(caminare), 동반하며(accompagnare. 공감과 연대와 나눔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adorare). 특별히 초대 교회 공동체를 따라 하느님 나라의 비유로서의 삶을 사는 수도원들과 공소들을 찾아 걸으며, 동반하며, 하느님을 찬미한다. '좋은 이웃 고마운 마음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인생'을 찾아 걷는다.
지금 우리는 해파랑길 속초 양양 구간 41-45 코스를 걷고 있다. 설악산과 동해바다가 어우러져 참 아름다운 이 구간에는 역시 아름다운 설악동 성당과 물치 성당과 도문공소와 현북공소와 인구리공소가 있다. 그리고 부소치리 관상수도원과 낙산수도원과 오상영성원과 작은형제공동체가 있다. 그리고 우리 밥집, 무료급식소 작은형제의집과 디모테오 꿈마을 요양원과 까리따스 마태오요양원이 있다. 이 초대교회 공동체들, 특별히 수도생활이 아름다운 것은, 믿는 이들, 특히 수도자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