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를 겪은 이들 중에 일본군이나 만군의 장교를 지낸 이들이 우리 육군의 핵심이 된다.
특히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를 나와서 장교가 된 이들은 군국주의 국가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었다.
사람들은 당시 태어났을 때 부터 일본이 지배하던 나라였기에 선택의 길은 있을 수 없었으며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간 것인데 비판을 하면 안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오늘날 사관학교나 학군장교에 입대하는 이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는 식의 논리가 있다.
그러나 당시는 군국주의 국가였고 군인 특히 장교의 입지는 대단했고 전쟁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평시보다 진급이 빠르고 일본인과의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던 시기였고 어떤 이들은 일본인이 되고자 적극적이었다.
차별이 심했고 사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는 건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상이 본토의 일본인 보다 투철해야 했고 선발되는 조선인은 인구비례로 따져도 일본인과 조선인의 숫자 차이는 너무나 컸다.
그러나 전쟁의 규모가 커지자 일본은 사관학교나 군관학교 출신 뿐 아니라 중등 교육과 고등교육을 마친 청년들을 입대 시켜 병이나 장교로 훈련을 시킨다.
이들은 사관학교 출신들 처럼 출신성분이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루어 졌다기 보다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일본군이 된다.
이들 중에는 해방이 되자 초기 군사영어학교나 육사에 들어가서 임관을 하여 지휘관이 되어 6.25 당시 일본육사나 만주군관 출신들을 능가하는 전공을 세운 이들도 있다.
그리고 중국의 전쟁터에서 탈출을 하여 광복군이 된 이가 여렀 있었는데 그 중 장준하, 김준엽등은 훗날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이름을 올린 이들도 있다.
장준하선생과 김준엽선생의 경우는 문화계와 학계에서 활동을 하지만 '장철부 중령'은 대한민국 군대에서 다시 군인이 되어 6.25동란 큰 공을 세우고 운명을 한다.
장철부 중령의 본명은 '김병원'이며 평안북도 용천출신이고 아버지는 지역의 유지로 보성여고(과거 선천에 있다가 현재 서울에 있음)와 오산학교 등의 사립학교를 후원했으며 김병원은 민족학교였던 오산학교를 나와 일본으로 중앙대로 유학을 했다.
일본 유학중 학병으로 입대 중국의 전선에서 탈출을 하다 자신의 아저씨 뻘이었던 친구(김여현)를 잃고 일본군에 다시 잡히나 또 탈출을 하여 조선의용군에 입대 일본군과 싸우다 자신의 정치와 사상의 차이로 중경의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으로 먼길을 걸어 찾아 가는데 당시 의용군 동료들은 여비를 마련해 준다.
훗날 이들을 6.25 동란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 후 광복군이 되어 일본군과 격전을 하고 해방이 된 후 국내에 바로 오지 않고 황포군관학교의 생도가 되어 정규군사교육을 받고 기병장교가 되며 국군이 만들어진 우리나라에 귀국 육사 5기로 입교 후 졸업 육군장교가 되고 육사의 교관으로 후배들을 지도 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기갑부대의 기병대대장으로 말을 타고 전투훈련을 한다.
6.25가 발발하자 신출귀몰한 전술로 밀리는 상황에서 북한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금강방어선에 포위된 미군들을 구출한다.
하지만 청송전투에서 긴 방어선을 담당하고 어렵게 버티는 중 북한군의 압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부하들을 살리려고 힘을 기울이다 항복하지 않고 자신의 총으로 운명을 한다.
보통 시대가 바뀌면 변신을 잘하고 기회를 틈타 출세를 하는게 세상의 모습이지만 '고 장철부 중령'은 고난의 길을 걷다가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지 않기 위해 먼 타국에서 만리 가까운 길을 걸어 광복군이 되었고 자신의 이름 '김병원'이 알려지면 가족이 위험해 질까? '장철부'란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다.
적국 일본과 목숨을 걸고 싸운 이가 있기에 자신의 출세를 위해 친일의 길을 걸었던 이들의 변명은 설득력이 없으며 이들을 편드는 건 잘못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