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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公交人(우공교인)
牛:소 우, 公:귀 공, 交:바뀔 교, 人:사람 인.
어의; 소가 사람을 바꾸다. 경남 사천지방에 전해져 오는 옛날이야기에서 유래한 말로, 전혀 뜻밖의 원인으로
상황이 바뀌었음을 뜻한다.
문헌: 한국인 야담집(韓國人 野談集)
경남 사천군(泗川郡) 사남면(泗南面)에 사는 황치우(黃致宇)영감이 기르던 암소를 팔기 위하여 시장에 갔다가 역시 소를 팔러 온 사돈(査頓) 우재영(禹在永) 영감을 만났다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사돈어른께서도 소를 팔러 오셨습니까?”
“예. 암소를 황소로 바꿀까 해서 나왔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저는 황소를 암소로 바꾸려고 나왔는데 그것 참 잘됐습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냥 우리끼리 소를 맞바꾼다면 중개인한테 구전을 줄 필요도 없으니 그 돈으로 둘이서 술이나 한잔합시다.”
두 사돈 영감은 중개인에게 줄 돈으로 술집에 들어가서 권커니잣커니 거나하게 마셨다. 그리고 밤이 이슥해서야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서로 소를 바꾸어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자기들의 운명이 바뀐 줄을 모르는 소들은 평소 자기가 살던 집으로 졸랑졸랑 돌아갔다.
그러니까 시장에서는 사돈끼리 소를 바꾸었는데, 집으로 갈 때에는 소가 사람을 바꾸어 태우고 간 꼴이 된 것이다. 즉 사람이 바꾸어진 것이다.
양가의 안방마님은 그것도 모르고 캄캄한 밤인지라 소는 외양간으로 몰아넣고 바깥양반은 안방으로 모셨다. 그리고 술 냄새가 코를 쏘는 것을 참으면서 꼭 껴안고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양가의 안방마님들은 질겁을 했다. 황당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서로 껴안고 밤을 지새운 영감이 자기의 영감, 마누라가 아니라 바깥사돈, 안사돈이었으니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나! 우째 사돈어른이……?”
눈이 휘둥그레진 안사돈이 질겁을 했다.
“제기랄! 사돈이구 뭐구 지금 우리 집에서는 무슨 난리가 났을꼬?”
사람이 소를 바꾼 것이 아니라 소가 주인을 바꾸어 태우고 오는 바람에 일어난 소동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憂國如家(우국여가)
憂::근심 우, 國:나라 국, 如:같을 여, 家:집 가.
어의: 나라 걱정을 내 집 일처럼 한다는 말로, 조광조가 왕도정치를 실현해서 개혁을 단행한 고사에서 유래했
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연산군(燕山君) 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퇴계(退溪) 이황(李滉),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등과 더불어 오현(五賢)으로 추앙받아 문묘(文廟. 공자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그는 14세 때 희천(熙川)에 귀양 가 있던 김굉필(金宏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때부터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힘써 훗날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首)가 되었다.
사림파가 요직에 있게 되자 훈구파(勳舊派)를 외직으로 몰아내고 전 공신의 사분의 삼을 삭제(削除)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이 일은 훈구파의 결정적인 반발을 유발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신진사류(新進士類)를 무고하는 사태가 생기게 되었다.
조광조는 어려서부터 기개(氣槪)가 남달라서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번은 스승인 김굉필이 제사에 쓸 꿩고기를 하인들을 시켜 햇볕에 말리게 했다. 그런데 말리는 중에 고양이에게 도둑을 맞고 말았다. 김굉필이 크게 성이 나서 그 하인을 사정없이 꾸짖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조광조가 아무리 스승이라 하지만 도가 지나치다 싶자 단호하면서도 공손히 말했다.
“조상의 제사에 정성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웃어른으로서의 말씨 또한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자 김굉필이 무안해 하면서 말했다.
“그래! 나도 크게 후회하고 있는데, 너의 마음도 나와 같구나. 네가 바로 나의 스승이다.”
조광조는 임금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우국충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늘과 사람의 근본은 이(理)에 있다고 믿었다.
“하늘과 사람은 하나의 근본이기에 하늘은 사람에게 그 이치(理致)가 아님이 없고, 임금과 백성도 하나에 근본하니 임금은 백성에게 그 도리(道理)가 아님이 없다. 따라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여 마음속에서 시비와 선악이 모두 그 이치를 얻고 천하의 물(物)이 공평함을 얻으면 이것이 만화(萬化)가 서는 까닭이고 치도(治道)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사람과 하늘이 하나에 근본한 것이 이(理)요. 임금과 백성이 하나에 근본한 것이 도(道)라고 했다.
또 언로(言路)에 대하여서는 이렇게 상소했다.
‘언로가 열리면 나라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 언로가 막히면 어지러워져 결국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왕은 언로를 넓히는 데 힘쓰고 하급관리나 시골의 백성에까지 미쳐져야 비로소 정사를 잘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 했다.
조광조는 대덕(大德)을 펼쳤지만 시대가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제11대 중종(中宗) 때 간신들이 그를 모함하기 위하여 대궐 안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 먹게 한 후, 그 나뭇잎을 따다 임금에게 바치면서 그를 역적으로 모함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마침내 눙주(綾州)에 유배되고, 사약까지 받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임금 사랑하기를 부모 사랑하듯 하였고
愛國如憂家(애국여우가) 나라 사랑하기를 내 집과 같이 하였어라.
天日照丹衷(천일조단충) 저 하늘의 햇빛이 이내 붉은 속을 비추니
昭昭臨下士(소소임하사) 밝은 빛이 이 속마음을 비추어주네.
조광조는 기묘년(己卯年) 11월 15일 홍경주(洪景舟)로부터 밀고를 받아 그해 12월에 38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우국여가(愛國如家)는 이 시에 근거한 성어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牛乘政丞(우승정승)
牛:소 우, 乘:오를 승, 政:정치 정, 丞:도울 승.
어의: 소를 탄 정승이라는 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있으면서도 소탈하게 생활하는 사람, 즉 지위를 내세우
지 않고 부드럽게 처신하는 사람을 말한다.
문헌: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조선 제4대 세종(世宗) 때 좌의정에까지 올랐던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1359~1438)이 온양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길을 떠났다. 그는 워낙 소탈한 성품이라 번거로운 행차 대신에 소를 타고 시동(侍童)에게 고삐를 잡게 하여 단출하게 길을 나서니 영락없이 시골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온양에서 가까운 고을의 사도들이 서울에서 정승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길목에 나와서 차일을 치고 성대하게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가 지났는데도 정승의 행차는 나타나지 않고 소를 탄 한 초라한 노인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짜증이 난 사또들이 형방더러 그 노인을 잡아오라고 했다. 형방이 쫓아가자 소를 탄 노인이 말했다.
“온양 사는 맹고불이라고 하면 사또께서 꾸짖지 않을 걸세.”
형방이 돌아가 노인의 말을 전하자 사또들은 깜짝 놀랐다. 고불은 맹사성의 호였다.
혼비백산한 사또들이 맹사성을 쫓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었으나 맹사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맹사성은 시문에 능하여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찬진(撰進)하였으며, 향약을 정리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황희(黃喜)와는 대조적이었다.
황희가 모든 일에 분명하고 정확하며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그래서 황희가 학문적이고 근엄했다면 맹사성은 유연하고 너그러우며 예술가적인 인물이었다. 때문에 황희가 병조나 이조의 과단성 있는 업무에 능했다면 맹사성은 예조나 공조 등의 업무에 더 능했다.
세종은 쌍두마차와 같은 두 사람의 성향을 고려하여 부드러운 업무는 맹사성에게, 변방의 안정과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일은 황희에게 맡겼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牛治急氣(우치급기)
牛:소 우, 治:다스릴 치, 急;급할 급, 氣:기운 기.
어의; 소를 보고 급한 성격을 다스린다는 말로, 소의 둔중한 행동에서 급한 성질을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문헌: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
유학(儒學)의 영남학파인 조식(曺植. 1501~1572)은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호는 남명(南冥)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식은 문하생들이 글을 다 마치는 필업(畢業), 즉 졸업을 하게 되면 가축을 한 마리씩 주었다.
후에 정승에까지 오른 정탁(鄭擢.1526~1605)이 필업 후 문하를 떠나갈 때 조식이 말했다.
“뒷간에 소 한 마리를 메어 놓았으니 몰고 가도록 해라.”
물론 실제로 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소였다.
“자네는 기(氣)사 세고 급하여 자칫 다칠 것이 걱정되니 행동을 소처럼 천천히 하라는 뜻이네.”
소처럼 둔중하게 처신하여 결함을 교정하라는 교훈이었다. 훗날 정탁은 큰일을 당했을 때마다 마음의 소를 상기하며 처신했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조식은 중종(中宗)에 의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또 명종 때는 현감으로 임명되었으나 역시 고사했다.
퇴계 이황(李滉)도 서신으로 벼슬을 권고 받고 처음에는 듣지 않았으나 상서원(尙瑞院) 판관(判官)을 제수받자 궁궐에 들어가 명종(明宗)을 배알하였다.
그 자리에서 명종이 출사(出仕)를 권유하였으나 완곡하게 거절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그 후 또 선조(宣祖)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고 상소만 올렸다.
남명은 문인(門人)들에게 경(敬)이요, 밖으로 밝은 것이 의(義)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남명문집에서 ‘음식은 식재료가 없으면 만들 수 없듯, 나라를 이끄는 데는 충신이 없으면 다스릴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의 문하생 중에 정인홍(鄭仁弘)은 ‘선생은 천 길 높은 절벽처럼 우뚝 솟은 사표(師表)였다.’고 회상했다.
조식은 성리학자(性理學者)로 태극론에서 無極과 太極은 같은 것으로 보았다. 또 성심론(性心論)에서는 심(心)이 모든 이(理)를 화합하는 창고이며, 본원(本原)에서는 이선기후(理先氣後)로, 유행(流行)에서는 기선이수(氣先理隨)라고 말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右革左草(우혁좌초)
右:오른 우, 革:가죽 혁, 左:왼 좌, 草:풀 초.
어의: 오른쪽은 가죽신이고, 왼쪽은 짚신이라는 말로, 오른발에는 가죽신, 왼발에는 짚신을 신었다는 뜻이다.
선조 때 문인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당파싸움을 비판한 일화에서 유래했다. 인간의 양면성을 꼬집을
때 쓰인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는 선조(宣祖) 때의 대문장가로서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호는 백호 또는 겸제(謙薺)이다. 그는 기억력이 뛰어나 백가(百家)의 시를 하루에 천 마디를 외워 독보(獨寶)라고도 일컬어졌다. 그는 무관 벼슬인 절도사(節度使) 임진(林晉)의 아들로, 전라도 나주 회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뛰어난 무관도 많이 배출하였다.
그 중에는 선조 때 거북선 제작에 참여했던 임충서(林忠恕),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맞아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군량미를 제공했던 임환(林懽) 등 걸출한 동량들이 많았다. 이처럼 시재(詩才)에 뛰어났던 임제는 소년 시절부터 면학에 힘썼다. 그리하여 1577년 문과에 급제했는데 당시는 귀족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격렬하던 때였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기 전, 학자 우계(牛溪) 선혼(成渾)의 눈에 띄었다.
“자네는 어느 가문의 자제인가?”
명망 높은 학자에게 질문을 받았으니 예사 서생(書生)이었다면 감격하여 환심을 사려고 가문을 높여 말했겠지만 임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겸손하게 말했다.
“네. 저는 이름 없는 평민의 자식입니다.”
정의감이 강하고 지조가 곧았던 그는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 종종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예조정랑(禮曹政郞)으로 있을 때 동서(東西) 양당이 싸움을 벌이는 것을 개탄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산천(山川)을 주유하였다.
그가 어느 날 말을 타고 외출하는데 오른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왼발에는 짚신을 신는 것이었다. 말을 끄는 마부가 놀라서 물었다.
“대감마님. 가죽신과 짚신은 제짝이 아닌데, 혹시 술에 취하신 것 아니십니까?”
그러자 임제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르는 소리 마라. 오른쪽에서 본 사람은 내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고, 왼쪽에서 본 사람은 짚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누가 짝이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다고 하겠느냐? 사람들은 그렇게 당장 눈에 보이는 대로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잘못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그러느니라.”
그는 평소 당파싸움을 심히 개탄스럽게 생각했는데 권력파 양반들을 깨우쳐주고 싶어 그런 기행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득세하고 있던 동인(東人)은 가죽신발로, 수세에 몰려 있던 서인(西人)은 짚신으로 비유했던 것이다.
어느 날, 그가 교외에서 젊은이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양반집 자제들답게 시작(詩作)을 즐기는 것을 보고 자기도 끼워 달라고 청했다. 행색이 초라한 모습을 보고 교만한 젊은이들은 ‘시도 제대로 짓지 못할 텐데’ 하고 얕잡아 보면서 마지못해 받아들여 주었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는 무식하여 한시를 지을 줄 모르니 내가 지금부터 읊는 내용을 한자로 받아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젊은이들은 임제가 읊어가는 내용을 한자로 받아 적고 보니 뜻과 음률이 제대로 맞는 훌륭한 한시였다. 젊은이들은 놀라서 물었다.
“혹시 저 유명한 백호 선생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출언세위광(出言世爲狂) 말을 하면 미치광이라 하고
함구세운치(緘口世云癡) 말을 아니 하면 어리석다고 하는 세상
소이도두거(所以掉頭去) 머리 곧추들고 가는 까닭을
개무지자지(豈無知者知) 아는 이 어이 없으랴.
임제는 호방한 기상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아 이이, 양사언 등이 그의 시문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임종할 때 자식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사이(四夷) 팔만(八蠻)이 모두 자주의 나라가 되어 황제라 칭하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중국에 매여 있으니 이 욕된 나라에 태어나서 어찌 죽음을 애석해 하겠느냐, 그러니 내가 죽은 뒤 곡을 하지 말아라.”
그는 <화사(花史)>, <추성지(秋城志)>, <백호집(白湖集)>,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熊謹成人(웅근성인)
熊:곰 웅, 謹삼갈 근, 成:이룰 성, 人:사람 인.
어의: 곰이 몸을 삼가 사람이 되었다는 말로, 단군신화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에 정성을 다하면 뜻하는 바가 이
루어진다는 뜻.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과 상통하는 말이다.
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환인(桓因)이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땅이었다. 이에 뜻이 다른 서자(庶子)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내려가서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했다.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천명하였다.
환웅은 이에 3천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자리를 잡으니 그곳이 곧 신시(神市)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선악 등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여 인간들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다. 환인이 신령한 쑥 한 쌈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근신하면 사람의 모습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정성과 인내를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 환인의 뜻이니라.”
곰은 그 말대로 쑥과 마늘만 먹고 잘 참고 100날을 견디어 여자의 몸(熊女.웅여)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성질이 급하여 그러질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였다.
사람이 된 웅녀는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으나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저를 여자로 환생시켜 주셨으니 환웅님이시여, 이 몸을 보살펴 주십시오.’ 하고 빌었다. 이에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단군왕검(檀君王儉)이었다.
단군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그 후, 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阿斯達)로 옮기고, 그곳을 궁(弓. 혹은 방(方)홀산(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했다. 그곳에서 일천오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雄馬下葸(웅마하사)
雄:수컷 웅, 馬:말 마, 下:아래 하, 葸:자식 사.
어의: 수말이 새끼를 낳다. 즉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헌: 한국인(韓國人)의 민담(民譚)
인간(人間)의 이기적인 욕심(慾心)은 끝이 없어, 만악(萬惡)의 근본이라고 한다. 바로 그런 필부(匹夫)의 이야기가 있다.
논밭 아흔아홉 필지를 가진 부자(富者)가 한 필지(筆地)를 더 채워 백 필지를 만들어 그 고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려고 여러모로 궁리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구할 수 없는 구지부득(求之不得)이었다.
그런데 마침 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듯 만만한 낭중취물(囊中取物)이 나타났다. 같은 마을에 손발이 다 닳도록 괭이질을 하여 자갈밭 한 필지를 일군 가난한 농부(農夫)가 그였다.
그 농부의 자갈밭에 눈독을 들인 부자가 그를 불러 말했다.
“임자를 오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할 일도 없고 하여 심심하니 장기나 한판 두자는 걸세. 헌데 장기란 내기 장기가 아니면 재미가 없는 법이니, 진 사람은 수말이 낳은 망아지를 구해오기로 하세. 만약 그러지 못하면 대신 밭 한 필지를 내놓든지…….”
이건 농부의 밭을 억지로 뺏으려는 수작임이 뻔했지만 권세 있는 부자의 말이라 농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부자의 편을 들어 훈수하는 바람에 농부는 지고 말았다.
부자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져서 말했다.
“자네가 장기에 졌으니 내일까지 수말이 낳은 망아지를 구해와야 하네. 만약 그러하지 못하면 그 자갈밭 한 필지를 내가 갖겠네.”
집에 돌아온 농부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억울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그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슨 일로 그렇게 상심(傷心)하시느냐고 여쭈었다.
농부는 부잣집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글쎄, 암말이 낳은 망아지라면 몰라도 수말이 낳은 망아지를 어떻게 구한단 말이냐? 이젠 꼼짝없이 밭을 빼앗기게 되었구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제게 좋은 방책이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진지나 잡수십시오.”
이튿날 아침, 아들은 일찌감치 부잣집을 찾아갔다. 부자는 농부는 보이지 않고 아들만 나타나자 대뜸 물었다.
“네 애비는 왜 아직 오질 않느냐?”
그러자 농부의 아들이 차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어르신, 우리 집에 경사가 났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어제 저녁에 몸을 풀어 아들을 낳았는데 글쎄 쌍둥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산후조리를 하시느라고 오지 못하셨습니다.”
“예끼, 무식한 놈아!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어디 있느냐? 여편네가 아이를 낳았다면 몰라도 상투 튼 남자가 어떻게 아이를 낳았단 말이냐?”
그러자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농부의 아들이 당차게 맞받았다.
“예. 상투 튼 남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데 수말이 어떻게 망아지를 낳습니까? 그러니 수말이 낳은 망아지를 구해오라고 한 어르신의 말씀이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소리입니다.”
부자는 어린아이에게 곡부득이소(哭不得已笑)로 아얏소리도 못하고 보기 좋게 되치기를 당해 그저 눈만 부라릴 뿐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願納錢(원납전)
願:원할 원, 納:들일 납, 錢:돈 전.
어의: 스스로 원하여 바치는 돈이라는 말로, 자진해서 내는 기부 돈을 말한다.
대원군 시절에 경복궁을 증축하기 위해 거두어들인 돈에서 유래했다.
문헌: 국어대사전(國語大辭典), 한국통사(韓國通史)
조선 제26대 고종(高宗.1852~1919)은 12세에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흥선(興宣) 대원군(大院君. 1820~1898)의 섭정으로 실권이 없는 왕으로 있었다.
대원군이 1865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였다. 나라의 재정이 부족하자 대원군은 그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부호들로부터 거의 강제로 돈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재산을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자
여러 가지 묘책을 짜냈다. 즉 세금의 이름을 뜻있는 백성들이 스스로 원하여 돈을 낸다는 뜻으로
원납전(願納錢)이라 호도하였다.
이에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궁을 짓느냐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민심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먼저 왕실에서 10만 냥을 낸 후 부호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계책을 썼다. 그
리고 거액을 납부하는 자에게는 벼슬을 주었다. 조정에서 대놓고 매관매직을 한 것이다.
이렇게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어렵게 거두어들인 돈으로 경복궁을 건축하기 시작했으나
이듬해 화재가 나서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일만 냥을 내는 사람에게는
상민(常民), 소위 상놈에게도 벼슬을 주고, 십만 냥을 내면 수령이라는 관직을 주었다.
조정에서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매관매직을 공식적으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68년 고종 5년에 공사가 완료되기까지 770여 만 냥의 원납전을 징수했다.
이로 인한 백성들의 원성이 한없이 높아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탄압하여
베르뇌 신부와 많은 교도들을 처벌하게 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함대가 인천에까지 쳐들어와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다.
또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대동강에 들어온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를 소각한 데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다. 이 양란으로 벌레가 움츠려 몸을 도사리듯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그는 쇄국정치(鎖國政治)의 원인이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月沙夫人(월사부인)
月:달 월, 沙:모래 사, 夫:지아비 부, 人:사람 인.
어의: 월사(月沙) 이정귀(李庭龜) 대감의 부인을 이르는 말로,
남편의 지위가 높은데도 검소해서 타의 모범이 되는 부인을 이른다.
문헌: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조산 제14대 선조의 첫째 공주인 정명공주(정명공주.1603~1685) 댁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잔치가 벌어졌을 때의 이야기다.
대갓집 부인들이 저마다 권세와 호화스러움을 자랑하려고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갖은 패물과
의상을 갖추고서 아침 일찍부터 정명공주 댁으로 모여들었다.
“과연 공주 댁의 잔치라서 다르구먼! 장관이야! 저것 좀 보아. 들어가는 부인들마다 모두 눈이 부시잖아!”
사람들은 그 호화로움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보게! 이번 행차는 어느 댁 부인인가?”
“글쎄, 뉘 댁인가는 아직 모르겠네마는 점점 갈수록 태산이구먼! 얼마나 더 호사스러워지는지
자세히 좀 보세. 그려!”
그런데 잠시 후 아주 단출한 가마 하나가 당도했다. 그리고 가마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가는
여인은 뜻밖에도 나이가 지긋한 부인으로 차림이 소탈했다.
“어허, 저 늙은이는 누구기에 저렇게 수수한 차림일까?”
“필시 어느 양반 댁의 하인일거야.”
“예끼. 이 사람! 가마 타고 다니는 하인도 있나?”
“있을 수 있지. 중요한 심부름이면 주인댁 가마를 탈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럴까? 허기사 지금까지는 저렇게 초라한 행색의 부인이 공주 댁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니까…….”
노부인은 수수한 무명옷에 별다른 몸치장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육간 대청에서 요란스런
치마를 끌면서 호기를 떨던 부인들은 보잘 것 없는 노부인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네들끼리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그 노부인이 섬돌 위에 오르자 주인인 공주가 크게 반기면서 맨발로 뛰어 내려와서
영접을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다른 부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수군거렸다.
“어느 집 노파인데 공주께서 저렇게 맨발로 내려가 맞으실까?”
“공주마마도 체통을 좀 차리셔야지. 우리가 들어올 때는 대청에도 안 나오시던 분이 저게
무슨 체모 없으신 행동이람?”
“그렇고 말구요. 공주라는 신분도 생각하셔야지. 원 딱하기도 하셔라. 맨발로 저게 무슨 꼴이실까?”
그러나 공주는 호사가들의 입방아를 아는지 모르는지 노부인을 윗자리에 모시고 극진한 예의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오늘 이처럼 어려운 출타를 하셨는데 음식이 구미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많이 드시지요.”
“천만의 말씀을 다하십니다. 평시에는 별로 나다니지 않았습니다만 공주마마 댁 경사에야
어찌 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여 오기는 했지만 너무나 융숭한 대접에 놀랄 뿐입니다.”
노부인이 겸손하게 사례했다.
멀리 앉아서 그 부인의 행동거지를 깔보던 다른 젊은 부인들은 공연히 입을 삐죽거렸다.
융숭한 대접을 받고 난 노부인은 잠시 공주와 담소를 즐기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오늘 너무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공주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아직 해가 높다란데 왜 벌써 일어서세요? 더 노시다 가시지 않고…….”
노부인이 고마움을 치사하면서 말했다.
“우리 집 도제조(都提調. 승문원, 사역원 등 관청의 정일품 벼슬) 대감께서 새벽에 궐내로 들어가셨고,
이조판서 큰 아들이 정사(政事)로 나갔으며, 둘째 아들이 승지로 있는 것은 공주마마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삼부자가 상감마마를 모시고 있는 까닭에 이 늙은이가
빨리 돌아가야만 저녁 식사를 마련하여 대궐 안으로 보내게 된답니다. 하오니 이만 하직을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옷차림이 수수하여 어느 미관말직의 노모이거나 심부름 온 아녀자쯤으로 여기고
업신여기기까지 하던 젊은 부인들은 노부인의 뜻밖의 말에 그만 몸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러고 보니, 저 부인이 바로 그 월사(月沙) 이정귀(李庭龜) 대감의 부인이셨구나.
난 옷차림이 너무 소탈해서 어느 미관의 노모인 줄로만 알았지 뭐야.”
“나도 몰랐네. 그런 줄 알았더라면 인사라도 올려 둘 것을…….”
월사 부인이 돌아가자 젊은 부인들은 자기네의 지나쳤던 호사를 뉘우쳤다.
월사는 명(明)나라 경약(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요청으로 경서(經書)를 강의할 정도로 박식한 학자였다.
그는 촉나라 태수가 죽자 아래와 같이 그의 비문을 써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충성으로 죽고, 또 아들은 효도를 다하여 죽으니,
마땅히 죽을 곳에서 죽었도다.’
비문을 본 촉나라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여 사례로 비단 한 수레와 황금 백 냥을 주었다.
이 소문이 국내에까지 퍼지자 나라 안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의 이런 행적에는 보이지 않게
뒤에서 내조한 그의 부인의 공이 컸다.
그래서 월사 부인의 공이 월사를 만들었다는 말로 월사부인(月沙夫人)이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자료출처-http://cafe.daum.net/pal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