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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일단상(秋日斷想) 안성열
작년 이맘때 쯤 이었던 것 같다. 멋모르고 따라 나섰던 백두대간의 첫 산행이. 흥분과 걱정으로 설레었던 첫 산행의 기억을 이제는 잔잔한 미소로 반추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느긋해진 나를 보고 스스로 놀라게도 된다.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 일년이라는 인간 역사의 바퀴를 돌렸지만 자연은 변함이 없었다. 인간들의 세계만이 변했을 뿐. 너무도 정확히 제 갈 길을 찾는 자연의 순리 앞에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면 과장일까? 아닐 것이다. 진시왕도 알렉산더도 엄격한 자연의 법칙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지 않았던가?
이번 산행 구간은 속리산을 경유하는 갈령~늘재 구간이었다. 토요일 밤 11시에 강릉을 떠난 버스는 다섯 시간의 밤길을 달려 갈령 어귀에 도착하였다. 새벽 4시 가느다란 백금 실반지 같은 그믐달이 소슬한 가을 바람에 씻기우고 있었다.
밤에 산을 오르는 것은 묘한 매력이 있다. 헤드랜턴의 불빛에 의지하여 한발 한발 산을 오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주변의 경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앞사람의 발꿈치만 보며 걷든지 아니면 자신의 발 밑만 보며 혹시 돌부리에 채일까 나뭇가지에 걸릴까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걷다 보면 다른 곳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러면 정신 통일이 절로 되며 때로는 여러 가지 상념이 스치기도 하는 것이 마치 명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여러번 받았었다. 그리하여 나는 밤 산행을 ‘명상’이라 생각하고 있다.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올라 등줄기에 땀이 촉촉이 배일 무렵 나뭇잎을 할퀴는 바람 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하더니 겨울 냄새가 나는 바람이 온 몸을 휘감았다. 낙엽은 발목을 덮을 정도로 쌓여 그 두께만큼이나 가을도 깊어졌음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한참 명상에 빠져 걷고 있는데 사람들의 탄성 어린 함성이 나의 명상을 깨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산이 붉은 해를 토해내고 있지 않은가? 한 낮에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그토록 거부하던 태양이 그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마도 하루에 한 번 있는 이 때가 아닌가 싶다. 그 모습은 우리에게 언제나 신비감과 황홀감을 동시에 주곤 한다. 그리고는 동시에 주변의 경치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일출이 선사한 가을 속리산의 풍광은 가히 명불허전임을 실감케 했다. 옛날 신라 시대 때 진표라는 승려를 따라 사람들이 속세를 떠나 입산수도 하였다는데서 ‘속리’란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떠나 그곳에 서 있는 나 자신이 속세를 떠난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이루어 내는 색채의 하모니, 가을 산은 자연의 교향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땅에 떨어져 온 세상을 뒤덮다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이전에 꾸며내는 황홀한 빛깔의 마술을 그 누가 흉내낼 수 있을까?
나는 가을을 좋아한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 좋고,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라 좋고, 아름다운 단풍의 계절이라 좋다. 하지만 무엇 보다 내가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는 가을이면 웬지 모를 허허로움이 느껴지고 그럴 때 나 자신을 겸허히 반성해 보게 되기 때문이다. 정말 진실되게 살아왔는가? 내 감정에 치우쳐 남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가? 내 행동은 정당하였는가? 등등…… . 이러한 반성의 계절이 바로 가을이라 생각된다. 모든 식물도 자연의 이치에 맞게 순리대로 살아야지만 제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듯이 우리 인간들도 성실히 순리를 따라 노력했을 때 풍요롭고 아름다운 인생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가을은 우리에게 삶의 순리와 성실의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속리산의 문장대에는 가을산의 정취를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서로 부딪히지 않고는 빠르게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붐볐다. 오래전 내가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와 법주사에서 문장대까지 한달음에 올랐던 일을 회상하며 다음 코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덧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9시간 30분 목적지인 늘재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회원들은 하산주를 앞에 놓고 단풍잎처럼 붉은 얼굴을 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나를 박수로 맞아주는 회원님들께 인사를 하며 나도 마주 웃었다. 나는 이런 회원들의 모습 때문에 가을이 더 좋아진다. |
첫댓글 안선생님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완주하시는 날까지 여유로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간직하시길 바라며 자주 좋은글 많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좀 더 자주 글을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좀 더 많이 느끼는 산행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저두 가을을 좋아합니다.자신을 돌아보기에 딱 좋은 계절인것같습니다. 산행을 하며 자신을 돌아볼시간이 많아져서 참 좋네요.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가을을 좋아하는 아침이슬님, 고맙습니다. 내일은 많이 춥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산행은 걸으면서 경험하는 지성의 한 형태로서 산행기를 쓴다는 것은 산행을 정신으로 완성하는 행위라 합니다. 육체의 습관이 아닌 항상 지적인 만족감을 찾으시는 산행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햇빛바람님 너무 어려운 주문은 하지 마세요. 능력 부족인 내가 어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저 걸을 따름이죠. 추운 날씨 씩씩하게 이겨 냅시다.
누가 그러더군요....어느산을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구여....많은것을 느끼는 말입니다...약수님!! 산행기 잘보고 갑니다..^.~
아이리스님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화나셨어요?
추일단상--- 안선생님 좋은산행 축하드립니다. 저는 삶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좋은산행을 같이 못했답니다. 늦가을 많은 사색과함께 삶의 풍요가 함께하길빕니다.
회장님! 산행은 같이 못해도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일을 하고 계시잖아요. 회장님이 하시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건강 유의하시며 열심히 일하시길 바랍니다. 나로 인해 주변이 밝아지는 삶이 되시길.......
많은 생각들을 글로 토해낸다는 것은, 몸에 박힌 종기를 뽑아 내듯 아픔이 아닌가 합니다. 좋은그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총무님 그런데 가벼운 마음으로 써서 그리 아프지는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