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가능한 시간을 알려주시오(나)" "내일 해도 될까용(예주)"
"넵"(나)
"공주야! 통화하고 싶구나 언제쯤 가능할까요?(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요?(예주)"
"아니요(나)"
"저녁 7시에 걸게요. 오늘 일정이 7시까지 있어서(예주)"
"o ㅋ"(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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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자 마자 에어컨 켰다 껐다를 반복하다가 인터벌 없이 이뿔 킥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았어요. 공주 둘 다 새벽종이 울렸을 것입니다. 스더는 병동의 새 아침을 밝혔을 것이고 예주는 예배 중이지 않을까요? 어제 써 놓은 글을 예주에게 발송하지 않고 있었는데 예주가 긴 시간이 필요하냐고 묻는 걸 보면 아비의 잔소리 낌새를 눈치 챈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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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야 이 지긋지긋한 외로움을 떨쳐낼 수 있을까요? 니체 형님을 소환해야겠네요. 위버멘쉬는 자기 원한과 부정성을 넘어서서 영원회귀 사상이라는 최고의 긍정 형식 속에서 찬연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웃음과 춤을 아는 자, 세계에 위대한 정오라는 선물을 마련한 자예요. 그는 미래의 인간, 예언자, 자유정신의 창조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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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형! '정신과 신체가 하나다' (선악의 저편)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니체가 실제로 "정신이 가장 닮은 것은 위(胃)다”라고 썼대요. 서구에서는 신체가 이성이나 영혼보다 열등한 그 무엇이라고 취급했지만 니체는 신체를 열등하다고 깔보는 생각을 뒤집어버린 겁니다.
“지난날에는 영혼이 신체를 경멸하여 깔보았다. 그때만 해도 그런 경멸이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영혼은 신체가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니기를, 그리고 허기져 있기를 바랐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체와 이 대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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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깨어난 자, 깨우친 자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고.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 그것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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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이성의 부속물로 전락해 있던 신체를 복권시키며 그 의미를 새롭게 새겼어요. (신체가 이성의 도구가 아니라 이성이 신체의 도구) 자아라는 것도 신체가 드러내는 실물로서의 구체성에 견준다면 하나의 유령인 걸요. 나라는 유일성의 존재 근거라고 받아들여지는 자아는 하나의 허상이자 일종의 문법적 가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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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개체적 동일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우리의 자아는 실상 잡다한 작용의 집합일 뿐이다. 열렬히 애써서 얻어진 모방의 결과일 뿐이란 말이다. 우리 안에 본래적이며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느끼고, 바라고, 생각했던 것의 창백한 반영일 뿐이다.”(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 유럽의 붓다, 니체,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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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생성적 주체는 자아가 아니라 신체다. “신체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정신이라는 것이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불멸’이란 것도 한낱 비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체란 무엇인가? “신체는 항상 니체적 의미에서 우연의 산물이고, 가장 놀라운 것, 사실상 의식과 정신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으로 보인다.”(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8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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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신체가 형태화된 인간의 총체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환원될 수 없는 다수의 힘들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어요. 생명은 예외 없이 '힘에의 의지'를 가져요. 신체는 힘의 의지라는 위계의 복합성으로 이뤄집니다. 따라서 ‘자유정신(Der freie Geist)’이 발현하고 작용하는 점도 바로 신체랍니다. 예주야! 이 자유정신은 무엇에 예속됨 없이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그것을 획득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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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의 창조는 새로운 가치 평가요, 아울러 몰락과 파괴를 수반합니다. 에에공! 십자가와 부활의 역설을 기억하시라. 그러므로 자유정신을 가진 자는 ‘가치의 변천, 곧 창조하는 자의 변천’을 타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니체.
2024.8.18.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