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교육의 씨앗을 움틔우다 1917~1945
1-1 식민 지배의 설움 속에 개교한 대전분교
일제 식민통치 하인 1917년 4월 1일, 대전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중학교 대전분교실’이 개교하였다.
보문산 기슭을 깎아 조성한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자리 잡은, 충남도내 첫 중학교였다.
첫 신입생은 1학급 50명이었으나 미처 학교 건물을 마련하지 못해 대전심상소학교의 건물 일부를 나누어 사용하였다.
개교 1년이 지난 1918년 4월 1일 분교라는 이름을 떼고 ‘관립 대전중학교’로 정식 출범하였으며,
1921년 4월 1일에 도립으로 이관되어 ‘대전공립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0년부터 2학급 100명을 모집하였으나 한국인 학생은 정원의 5% 정도에 불과하였다.
1-2 선우회(鮮友會) 결성과 민족의식의 배양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문화운동이 전개되자
한국인 재학생 17명은 1922년 7월 10일 대전소년회 임시회관에 모여 선우회(鮮友會)를 결성하였다.
선우회는 한국인 학생들의 상호친목과 상부상조를 통해 덕지체(德智體)를 길렀다.
그러나 선우회는 대전지역에서 발생한 동맹휴학을 빌미로 불과 3개월만인 1922년 9월 학교 당국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1928년에야 ‘조선인 학생회’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게 된다.
1932년 10월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1937년 한국인 학생을 위한 학급증설이 이루어져 본교의 학급수는 10학급에서 15학급으로 정원은 500명에서 75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때부터 한국인 학생이 정원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듬해 전시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학생들은 각반을 치고 전투모를 썼으며, 책가방도 가죽으로 된 군인용 배낭을 메야 했다.
또 학생들은 대전비행장 건설공사 등 근로봉사에 동원되어 5년간 노동에 시달리다 졸업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1-3 독립운동에 헌신한 동문들
한국인 학생들이 안고 있던 시대의 아픔은 졸업 후 민족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우국지사로 장암 지헌영(藏菴 池憲英, 10회) 선생을 들 수 있다.
그는 1931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후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이듬해 2월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대전으로 내려와 대전지역 독립운동의 지주 역할을 하였다.
올곧은 교육자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장암 선생은 대전중학교와 본교의 교가를 작사한 인물이기도 하다.
남곡 권용두(南谷 權容斗․ 12회) 선생 역시 보통학교에 다니던
1926년에 6․ 10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한 후 대전중학교에 입학하여 조선인 학생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대전지역의 동맹파업을 지원하다가 검거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
이때 함께 활동했던 오명근(吳明根, 13회), 서재윤(徐載潤, 14회), 박병배(朴炳培, 14회) 등은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들 동문 외에도 이재기(李在祺, 2회), 송도용(宋道用, 11회) 등 여러 동문들이
선우회 등을 통한 민족운동에 연관되어 활동을 하였다.
남곡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교정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