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란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이라고 교회에서 한 번씩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실 성경에 우리말로 ‘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13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그중에 가장 많이 쓰인 것이 ‘하마르티아’인데 이 단어의 뜻이 ‘과녁을 빗나가다’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 정의에 대해 들었을 때, ‘아니, 우리가 무슨 양궁선수도 아니고 과녁을 빗나갔다고 죄란 말인가?’라는 생각만 들고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사실 ‘과녁을 빗나갔다’라는 것의 뜻은 '과녁의 정중앙을 맞추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러니까 타겟(목표물)이 있는데 그걸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타겟이 뭔지 그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과녁의 정중앙, 타겟, 목표는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니까, 쉽게 말해 죄는 하나님의 영광과 반대말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약과를 따먹고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의 그 모든 것이 바로 과녁의 정중앙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가지셨던 뜻,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최선입니다. 실제로 에덴의 뜻은 '기쁨'인데요, joy가 아니라 pleasure로, 사전을 찾아보시면 기쁨과 조금 다른 점이 있는데 pleasure에는 ‘쾌락’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이니, 나쁜 뜻으로서 쾌락이 아니라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 그러니까 '기쁨'보다는 ‘즐거움’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류에게 주신 것으로 과녁의 정중앙, 타겟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벗어나는 모든 것이 바로 ‘하마르티아’, 죄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난 뒤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또 누구라도 볼 때마나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살 필요가 없는데. 더 좋은 것을 누리면서,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그런데 제가 이런 내색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상대는 대부분 상처를 받습니다. 마음 깊이 더 나아질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왜 이렇게 사십니까, 더 큰 일에 부르심을 받으셨는데.’라고 하면 그것을 정죄와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제가 ‘왜 이렇게 사십니까?’라고 표현하진 않습니다/)
사실, 저의 지난 10여 년간의 사역은 이것 때문에 마음 아파했던 시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계획은 너무나 크고 무궁무진한데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그냥저냥 만족하며 살거나 겪지 않아도 되는 문제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면서 (또는 사람들을 보면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아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죄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죄란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신 계획,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그분의 최선, 거기서 벗어난 그 외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선을 제외한 그 모든 것 안에서 안주하든, 괴로워하며 살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 하나님은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며 그 긍휼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를 계속해서 하나님의 최선으로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나를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와 사랑, 긍휼로 대하시다니! 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좀 더 그분께 가까이 가서 그분을 알고 싶다!”
이렇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최선에 더 가까워진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실 때, 우리가 가진 사전으로 죄를 해석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지신 사전으로 해석을 하면 그 지적은 정죄가 아니라 더 좋은 것으로의 초대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그렇게 살지 않아도 돼. 더 좋은 것이 널 위해 준비되어 있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죄를 지적하실 때, (죄의 진짜 뜻을 기억하세요) 내가 정죄감을 느끼며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하라고요!”라고 한다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그 “죄” 가운데서 괴로워하며 고통받는 우릴 향해 긍휼로 가득 차십니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의 ‘그렇게’의 정도, 그러니까 '죄의 비참함'이 크면 클수록 우릴 향한 아버지의 은혜가 더 크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런데, 죄가 더하면 은혜가 더하니까 죄에 더 거하자고 해서 되겠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더 많이 풀어지는 그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최선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이지,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그 비참함에 계속 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한 죄고백이 아닙니다.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좋은 것이구나. 나는 여기서 돌이켜 그곳으로 간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시는 긍휼이 점점 더 줄어드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 저에게 준비하신 하나님의 최선에 점점 더 가까워져서, 그 거리가 멀면 멀수록 커지는 하나님의 긍휼이 점점 더 작아져도 되는 그런 삶, 저는 그 삶을 선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