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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우리 교회의 모델이 되는 안디옥교회 사도행전 13:1-3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z4Gc54DdWOM
본문의 말씀은 안디옥 교회가 주를 섬겨 금식하다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최초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내용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는 개척교회였습니다. 자기 교회 하나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그것도 비리비리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이 아니라 안디옥교회에서 가장 실력 있고 영향력 있는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한 것입니다.
저는 안디옥교회를 교회의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주의 음성을 들어보겠습니다.
1. 복음 안에서 하나 된 교회
2001년 9월 11일에 알카에다의 테러로 인하여 쌍둥이 빌딩이 폭발되었습니다. 그때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직후에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두 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새뮤얼 헌팅톤이 쓴 [문명의 충돌]입니다. 문명이 다르면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서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책은 하랄트 밀러가 쓴 [문명의 공존]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달라도 사람들은 공통분모를 찾아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공존해야 한다는 책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견해가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갈 3:28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 당시에는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종과 자유인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다른 문화 속에 있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문명의 공존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하나 될 수 없는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공존했습니다. 1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던 다섯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나 다른 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되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의 서로 다른 점 몇 가지를 보겠습니다.
①사회적인 위치가 달랐습니다. 귀족과 노예 혹은 노예 출신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 되었습니다.
②혈통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도 있었고 이방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되었습니다.
③인종이 달랐습니다. 3개 대륙에서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④학벌이 달랐습니다. 사울은 그 당시 최고의 학부인 가말리엘 문하 출신입니다. 노예출신들은 공부를 못했을 것입니다. 학벌의 차이가 큰데 하나 되었습니다.
⑤경제적 수준이 달랐습니다. 귀족과 노예 출신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되었습니다.
⑥신앙의 경력이 달랐습니다. 바나바는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고,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되었습니다.
⑦신앙의 스타일이 달랐습니다.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에 민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사들은 특성상 이성적인 냉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되었습니다.
⑧나이가 달랐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지도자 다섯 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학자들은 나이순으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안디옥교회는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하나 되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안디옥 교회의 다양성을 한마디로 가슴이 넓은 교회라고 표현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민족과 국가와 인종과 나이와 모든 문화의 벽을 무너뜨린 교회였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배경과 상관없이 함께 사랑으로 연합되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복음의 수용성 때문입니다. 복음은 어떤 사람도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안에 거하면 넓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복음 안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조선은 본래 양반과 상놈이 철저하게 구분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1885년 기독교가 들어오자 복음의 능력으로 이 구분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마팻이 서울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학교는 양반, 상놈 다 받았습니다. 그 당시 정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박동열이란 백정의 아들이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백정의 아들은 그 당시로는 사람으로 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팻 선교사는 자기 친구 의사에게 급히 연락해서 박동렬이를 살렸습니다. 그 의사가 애비슨이라는 당시 고종황제의 주치의였습니다. 여러분, 황제의 주치의가 백정의 아들을 고치러 급히 가방 들고 왕궁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그것이 100년 전 한국교회 모습입니다. 결국 박동열은 애비슨의 치료를 받고 건강해졌고, 그 가족은 감동받아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박동열은 1907년에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축복받아 사업가가 되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은 교회, 누구나 품는 교회, 그것은 한국교회 자랑스런 전통입니다.
인사동에 가면 승동교회가 있습니다. 승동교회의 초대 목사님 중에 왕손이 있었습니다. 이 왕손은 말을 타고 유람을 다니는 게 취미였습니다. 그의 마부는 엄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중화동에 있는 경동제일교회의 영수였습니다. 영수는 한국교회가 자리를 잡기 전에 있었던 직분이었습니다. 엄영수는 기도할 때 이마를 마루바닥에 찍으면서 기도를 하였는데, 기도를 하도 많이 해서 이마에 혹처럼 굳은 삶이 박히신 분이셨습니다. 엄영수는 유람을 하며 왕손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나으리 예수 믿으시지요?” 왕손이 자기 마부에게 핀잔을 줍니다. “예수를 믿으면 너 같은 상놈이 양반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나으리, 예수 믿는 도리는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마부 노릇을 더 잘해야합죠”
왕손의 집이 인사동 승동교회와 같은 담벼락을 하고 있었는데 왕손이 유람을 다니는 동안 그 부인과 딸들이 인사동교회의 교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왕손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승동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왕손도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왕손이 부흥회에 참석하여 보니 예배당 앞쪽에 자기 마부 엄영수가 와 있었습니다. 왕손은 반가운 마음에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자기 마부에게 “형님”하고 불렀습니다. 엄영수가 돌아다보니 자기가 모시는 왕손 나으리였습니다. 엄영수는 기겁하며 “제게 형님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왕손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는 같은 형제인데,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형님이라고 부르는 게 옳지 않습니까?” 지금과 같은 사회 속에서도 사람 차별이 심한데, 그 당시는 양반과 상놈이 분명히 구별되는 반상문화였습니다. 그런데 보통 양반도 아닌 왕손이 상놈인 자기 마부에게 ‘형님’이라고 불렀다는 건 정말 천지가 개벽할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 당시 승동교회에는 사회에서 가장 천민이었던 백정들이 많이 모였었습니다. 승동교회의 최초의 장로도 백정이었습니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사람이 교회의 리더쉽이 된다는 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게 당시 교회의 문화였습니다. 사람을 깔보고, 차별하고, 업신여기는 당시 반상문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주 탁월하고 우월한 문화였습니다. 복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복음 위에 섰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끄는 힘이었습니다. 그 복음의 힘이 우리 한국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비전교회는 한국 초대교회의 이런 면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집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확장성을 가진 것은 복음의 수용성 때문입니다. 성막의 문은 가로가 20규빗입니다. 약 9m입니다. 왜 성막의 문이 그렇게 넓은 것일까요? 누구든지 오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품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하나 되게 합니다.
2. 섬김이 있는 교회
안디옥 교회는 아름다운 섬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2절을 보면 그들은 주를 섬겨 금식하였습니다. 여기서 ‘섬겼다‘는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1) 예배한다는 의미의 섬김입니다.
주를 섬겼다는 말은 ‘주님을 경배한다. 예배한다’는 의미에서의 섬김을 말합니다.
행 11:19입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여기보면 안디옥교회가 세워진 배경이 나옵니다.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 중에서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했던 사람들이 전혀 생소한 곳에 가서, 아는 사람도 없고, 먹고 살길도 막막하니, 미래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피난 온 사람들의 급선무는 무엇입니까? 빨리 돈 벌어서 집도 마련하고, 잘 정착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것이 우선이 아니라 신앙생활이 우선이었습니다. 주님께 예배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예배를 드리는데 금식까지 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배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냥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금식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먹을 것 먹지 않고 마실 것 마시지 않고 주님께 기예배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배에 목숨 걸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펜데믹, 코로나, 방역 등의 수준에서 볼 때가 아닙니다. 온 지구상에 지금까지 없었던 영적인 어둠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수백만 개의 교회가 한꺼번에 예배를 중단하고, 기도를 멈추고 있는 시대입니다. 지금은 엄청난 영적 격동기입니다. 영적으로 잠든 사람들은 시대를 따라가며 예배를 중단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시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그들이 교회로 돌아올까요? 저는 부정적입니다. 지금은 엄청난 영적 격동기입니다. 자신의 믿음은 자신이 지켜야 합니다.
믿음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공식적인 프로그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할만큼 예배가 중요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들은 말씀이 지금도 생각난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느 집에 초등학교 다니는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났고 새엄마가 들어왔습니다. 새엄마는 그 아이와 나이가 같은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차별이 심했습니다. 새엄마는 자기가 데리고 온 아이에게는 필요한 것을 다 주면서 그 아이에게는 잘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못 가게 했습니다. 새엄마는 주일이면 교회 못가도록 꼭 무슨 일을 시켰습니다. 어느 토요일 저녁에 새엄마가 또 일감을 주었습니다. “너, 내일 고추밭에 있는 고춧대 다 뽑도록 해라” 그 아이는 교회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들이 다 자는 시간에 일어나 고추밭으로 가서 고춧대를 뽑았습니다. 그래야 주일날 교회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고춧대를 뽑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잡아당기면 쏙쏙쏙 빠지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어른들도 쉽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고춧대를 뽑고 또 뽑았습니다. 손에서 피기 났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고추밭에 쓰러졌습니다. 주일 아침에 아이가 보이지 않아서 가족들이 찾아보니 고추밭에 쓰러져 죽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새엄마는 회개하였고 온 가족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쉽게 포기할 일이 아닙니다.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예배입니다.
2) 봉사한다는 의미의 섬김입니다.
지난 금요일 김행조목사님 장례 때문에 제가 몸살이 났습니다. 아내도 함께 다니느라고 힘들었는지 몸을 좀 주물러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나도 아파요”라고 했더니, 아내가 농담으로 “봉사하면 나서요. 어서 주물러요”라고 해서 제가 빵터졌습니다.
주를 섬겼다는 말은 ’하나님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에서의 섬김을 포함합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배에 목숨을 걸었을 뿐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섬겼습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나 성도들이 자기 존재감을 나타내려고 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서로 섬겨야 평안한 교회가 됩니다. 저희 교회와 가까운 곳에 있는 어떤 교회는 장로님들이 두 파로 나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쪽 편에서 무슨 의견을 내놓으면 저쪽 편이 반대하고 저쪽 편에서 의견을 내놓으면 이쪽 편에서 반대를 해서 교회 일이 잘 진행이 안 된답니다. 그 말을 들은 김상만 장로님이 교회 일을 하다가 자기 맘에 드는 일은 협력하고 자기 맘에 안 들어 협력을 못하겠으면 조용히 있으면 되는데 꼭 자기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라고 하시더군요. 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느냐면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처럼 섬기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섬길 때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다.
광림교회 김선도 원로목사님이 공군군목으로 군 교회를 섬길 때, 그 부대에서 제일 높은 사단장님을 전도했습니다. 그 장군은 세례를 받던 날 스스로 양주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습니다. 세례 받은 후 목사님께 “이제 세례 교인이 되었으니 제가 봉사할 일거리를 맡겨주십시오”하니 목사님은 그 장군에게 주일날 예배 전에 예배당 앞에서 예배순서지를 나눠 주며 안내하는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장군이 그대로 하였습니다. 주일날 장군이 번쩍이는 별을 단 정장을 하고 인사를 하고 주보를 나눠주니 부하장병들이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고 합니다. 사단장은 교회에서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부대에서 제일 높은 분이 제일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것을 보고 그 부대 전체가 복음화 되었습니다. 그분이 내가 ‘누군데 이런 일을 해’라고 생각하고 봉사하지 않았다면 부대 복음화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섬기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교회 밖에서도 주님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신앙이란 삶이다.”라고 말하더군요. 삶이 무엇입니까? 밥 짓고, 청소하고, 직장에서 일하고, 운전하고, 공부하고 이런 것들이 다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섬겨야 합니다.
3. 성령 충만한 교회
성경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기름부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아서 사역을 했던 것처럼 성도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오리를 키울 수 있는 작은 사육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양계장에 달려가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사서 물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오리가 물통 속에 죽어있었습니다. 그는 오리를 이리 저리 뒤척여 보았지만 짐승에게 물린 흔적이 없었습니다. 수영이 전문인 오리가 물에 빠져죽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오리를 판 양계장에 가서 따졌습니다. 양계장 주인이 자초지종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오리는 양계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입니다. 그래서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게다가 이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을 바르지 않아 물에 뜨지 못합니다.” 원래 오리는 날개 밑에 기름샘이 있어 수시로 기름을 날개와 털에 바릅니다. 그래서 물속에 들어가면 기름이 묻은 털이 물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물위를 떠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오리는 편안한 환경에서 자라서 날개와 털에 기름을 바르지 않아서 날개가 물에 젖었고 결국 물에 뜨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는 교인은 이 오리와 같습니다. 겉모습은 오리이지만 물위에 뜰 수 없는 오리처럼, 겉모습은 교인이지만 실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교회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령충만한 면을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목회자나 교인들이 주인이 아닙니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잖아요. 그러니까 교회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움직여야 합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교회였습니다. 2절에서는 ‘성령이 이르시되’라고 말씀합니다. 4절에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지키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가 성도의 본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말씀을 전해주실 선교사님은 파라과이에서 사역하시는 최한준선교사님이십니다. 최선교사님은 성령님의 인도로 파라과이에 가셔서 사역 중이십입니다. 선교사님은 처음에는 키르키즈스탄에 나가셔서 편하게 사역을 하시려고 했습니다. 섬기셨던 교회에서 키르키즈스탄에 선교센터를 세웠고, 그리고 선교를 나가시면 그곳에서 생활을 하시면서 사역하시면 되고, 그 교회에서 전적으로 후원을 약속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파라과이 선교사님을 만난 후 하나님께서 파라과이로 이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한 주간 집중기도를 하는데 모든 가족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파라과이로 가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파라과이로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본교회에서 파송도 해주지 않았고 후원도 전혀 해주지 않았습니다. 기아대책본부 선교사로 선교지로 가기로 했지만 조건이 파송교회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기도원에 가셨습니다. 기도원에 오르는 길에서 어느 여자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여자 목사님이 환상 중에 선교사님과 만났던 그 자리에서 한 부부를 만나는 환상을 봤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선교사님 부부를 보는 순간 환상에서 본 부부 얼굴이 생각나더랍니다. 그 부부가 최한준 선교사님 부부였습니다. 그 목사님 교회에서 최선교사님을 후원하고 파송하게 되어서 최선교사님이 파라과이 선교사로 나가게 되셨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성령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도자이십니다. 성령님은 교회의 인도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2) 하나님께 순종하는 교회
하나님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말씀하셨고 교회는 성령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교회의 기둥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시작 된지 1년 조금 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디옥교회는 아직 어린 교회 교회입니다. 가르침이 더 필요합니다. 돌봄이 더 필요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이때 교회에 가장 필요한 두 사람은 바나바와 바울입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는 성령님께서 지시하시자 주저함 없이 순종하여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평양에 김씨라는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식도 없이 혼자 살았는데 재물에는 여유가 있어 복섬이라는 여종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40이 넘어 혼자 된 후 예수 믿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교회에서 마태복음 18:18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김씨 부인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자기가 여종을 부리고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한 후, 여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보니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 자매라고 했소. 그런데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복섬이를 부리는 것은 마치 땅에 매는 것과 같은즉, 그러고서야 어찌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겠는가?” 그리고 김씨 부인은 종문서를 가져다가 불태우고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종이 아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내 집을 나가도 좋다” 그러자 복섬이가 말했습니다. “마님, 제발 저를 떠나라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래서 김씨 부인은 그를 양녀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부인이 죽은 후 딸에게 많은 재산을 상속했습니다. 그 후 복섬이는 너무 김씨부인에게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가 받은 재산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중에는 땅도 있었는데 그 땅이 바로 평양신학교의 부지였습니다. 훗날 그 땅에 신학교가 세워져 수많은 영혼들을 살린 영혼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손해 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으나 그것이 복이 됩니다. 인생은 길게 봐야 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알아지면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기도 응답을 누리는 것은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알아졌을 때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적이 일어나고 기도 응답을 누립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모세는 홍해 앞에서 지팡이를 내밀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세는 그 음성대로 순종했습니다. 마라의 쓴물을 만났을 때는 하나님께서 한 나뭇가지를 지시하셨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 나뭇가지를 쓴물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쓴물이 단 물이 되었습니다. 여리고 성 앞에서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돌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음성대로 순종해서 날마다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여리고가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알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는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라고 확신이 들면 담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은 “현대교회의 모델이 되는 안디옥교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1. 복음 안에서 하나 된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공존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어떤 사람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2. 섬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주를 섬겨 금식했습니다. 여기서 주를 섬겼다는 말은 1) 예배한다는 의미의 섬김입니다. 안디옥교회는 피난민들이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들의 급선무는 빨리 돈 벌어서 집도 마련하고, 잘 정착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배는 쉽게 포기할 일이 아닙니다.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예배입니다. 2) 봉사한다는 의미의 섬김입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섬겼습니다.
3.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령충만한 면은 두 가지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1)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였습니다. 2) 하나님께 순종하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순종 잘하는 복된 신앙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을 들고 믿음의 고백을 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만들겠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과도 복음 안에서 하나 됨을 힘쓰겠습니다. 나는 항상 섬기는 자세로 살겠습니다. 나는 목숨 걸고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나는 몸과 시간과 물질로 주님께 헌신하겠습니다. 나는 성령님을 인정하며 범사에 성령님의 인도를 받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이 알아지면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