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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두고 가기 좋은 보물의 땅, 국립중앙박물관
220919. 송혜영
캄보디아 패키지 여행으로 앙코르와트를 갔을 때였다. 정교한 세공에 놀라고 그림과 조각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하나라도 놓칠세라 가이드를 바짝 좇고 있었다. 다음 공간으로 이동을 위해 길다란 복도 같은 곳을 지나는데 유럽 남자 한 명이 손에 아주 두꺼운 책을 들고 앉았는게 보인다. 몇시간을 허락받은 나는 종종거리며 주요 포인트를 돌아다니는데 아예 등을 기대앉아 편해 뵈는 이 분에게선 시간은 상관없는 듯 더워도 괜찮은 듯 몸에 베인 여유가 풍겨져 나왔다. 책의 제목은 '동남아시아'도 아니고 '캄보디아'도 아닌, '앙코르와트'였다. 내 마음을 살핀듯 가이드가 말했다. 반나절만 여길 들렀다 가는 사람은 한국인밖에 없다고. 보통 이삼일씩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벌써 십수년 전 이야기가 되었지만 앙코르와트에서의 기억은 나에게 참으로 즐기는 것이란 무엇인지를 두고두고 생각하게 한다.
이번 추석 연휴에 시댁 가족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나의 픽은 대성공. 실외인 열린 마당에서 공연을 보는데 돌쟁이 막내와도 관람이 가능했고 내부 관람까지 일석이조였다. 그리고 서은이가 이 공연에 꽂혔다. 이번 '다올소리와 함께 떠나는 제주 음악여행'이 끝이 아니다. 9월 9일부터 25일까지 '위대한 유산 오늘과 만나다' 행사가 진행되는데 프로그램북을 보며 다음주 공연도 예약해 달라는 거다. 그래서 이번 주말까지 열흘 안 되는 기간 동안 박물관을 세 번 들렀다. 마지막 공연을 보고는 또 공연장 의자를 붙잡으며 집에 가기 싫다 할 만큼 -공연이 너무 좋았을 때 나오는 서은이의 반응이다- 공연이 좋았고 이후 박물관 관람으로 더 풍성했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1. 9월 9일(일), 사유의 방,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그룹 다올소리- 우리네 민요를 발굴하여 현재적 색채를 입혀 소개하는 일을 한다는데 보컬 세 명의 하모니가 좋고 흥에 겨워 듣기 즐겁다. 파도 치는 소리를 따서 만들었다는 곡 '수이처'는 공연이 끝나도 수이처 수이처! 흥얼거리게 된다.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발걸음이 자연스레 왼편 박물관 정문으로 향했다. 사유의 방과 메소포타미아 관을 가봐야겠다 벼르던 터였다.
사유의 방 입구에 적혀 있는 글귀가 좋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어둠에 익숙해지며 복도같은 공간을 돌아 들어가면 어둡고 널찍한 공간에 반가사유상 두 점이 덩그라니 놓여져 있다. 국보 83호인, 머리에 산처럼 생긴 관을 쓴 반가사유상은 3층 불교미술관에 있을 때 본 적이 있다. 그 때도 상대적으로 작은 공간이긴 했지만 구별된 공간이었고 은은한 조명 아래 비춰진 불상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미술교과서에서 본 유명한 불상을 실물영접했다는 뿌듯함도 컸었다. 그 불상에게 짝이 생겼다. 작년 11월부터 최욱 건축가와의 협업으로 새로 공간을 만든 것이다. 두 점을 함께 전시하고 나와 불상 사이를 막고 있던 유리도 없앴다. 거리를 두고 보고 가까이도 보며, 앞 뒤 좌 우, 위와 아래 마음껏 둘러볼 수 있다. 마치 미술관에 온 것 같다.
상설전시관도 테마전이 있다. 지난 번 이집트전이 내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주제로 한 전시가 시작되었다. 세계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공동 기획하여 24년 1월까지 18개월간 전시를 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기록을 먼저 시작한 나라답게 각종 기록들이 새겨진 진흙판이 많았다. 곱셈구구 5단을 표기해 놓은 진흙판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는데 해석해 놓은 것을 참고하니 빗금/ 모양은 1을, 기울어진 ㄱ자 모양 꺽쇠 하나가 5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규칙을 파악하니 수천년전 기록이 이해되는 것이 신기하다. 이제 구구단을 뗀 서은이도 여기 갔다 저기 갔다 놀며 다니더니 구구단 점토판은 관심이 드나 보다. 한참 들여다 본다.
원통형의 도장도 아이디어가 귀엽다. 한바퀴 굴리면 신전과 그 앞에서 손을 씻고 제물을 데리고 오는 사람 3명이 찍힌다. 당시 신전 앞 풍경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그냥 점 같은데 찍은 모양을 보니 사람 두명이 마주앉아 항아리를 빚는 형태다. 꼭 마스킹 테잎처럼 반복되는 문양으로 길다란 직사각형으로 계속 찍을 수 있다. 이외에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정교하게 세공된 그릇과 인물상들을 보며 신에 대한 정성과 경외감을 느껴본다. 그리고 기록에의 열정이 왠지 친근하다. 때마침 도슨트 시간이라 해설이 진행되어 잠시 옆에 섰다가 자유영혼 아이들이 포로록 나서는 바람에 함께 나왔다.
#2. 9월 17일(토), 경천사 십층석탑 빛으로 수놓다 '하늘 빛 탑'
오늘은 아빠 없이 학교 친구네와 동행이다. 서은이는 S와 같이 가서 신났고 가은이도 Y언니가 익숙해졌는지 언니랑 앉는댄다. 차가 막혀 5분 정도 늦게 어둠을 더듬으며 용극장에 들어서다. 국악인이 어른 팔꿈치까지의 길이만한 인형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판소리를 하는데 연극요소가 가미되어 귀맛에 서툰 초보자가 좀 더 집중해 볼 수 있었다. 첼리스트가 한 편에 앉아 장면이 바뀔 때쯤마다 조용한 곡을 연주하여 여운을 더하는 것도 특색있다. 오는 길에 멀미한 가은이는 옆자리에서 고급BGM을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서은이는 나중에 그 말을 듣고는, "그리 시끄러웠는데 어떻게 잤어?"라 했다. 생각보다 재미없었다며 한 마디 감상평을 내면서도 내일 공연에의 기대감은 식지 않나보다.
공연이 시작된지 꽤 오래 된 것 같은데 이제사 인당수 장면이니 언제 끝나나, 이게 한시간이 아니고 두세시간 짜리였나? 참을만큼 참았는지 어린아이 들쳐업고 간간이 나가는 가족들을 보며 우리의 운명을 가늠해보는데 공연이 급 마무리 태세다. 멀리 바다 건너 시집 보내준다는 땡중의 간교한 속임수로, 착한 심청이는 바다에 빠져 죽었고 심봉사도 눈을 뜨지 못한채 살았다는 슬프면서도 현실적이면서도 예상 못 한 엔딩이다. 우리더러 " 뭘 기대하셨수? 이게 인생이라오." 맞네요. 쩝.
공연을 마치니 6시. 8시에 하는 경천사 10층석탑 미디어 파사드까지는 두 시간이 남았다. 박물관 식당에서 오늘도 서은짬뽕 가은짜장면으로 배불리고 전시장으로 슬 가본다. Y가 벽 쪽 의자에 그저 앉아 있길래 이모가 좋아하는 장소 있는데 가볼래? 하며 실감영상관으로 이끌었다. 태블릿으로 책가도 꾸미기 하다가 영상관에서 발 주욱 뻗고 '강산무진도' 속에 빠져들다. 온 몸을 덮는 하얀 별빛인지 반딧불이인지를 터치하다 S는 바닥에 깔리는 물길 따라 오리걸음 걷는데 가은이도 합세했다. 야간개장의 한가한 사유의방은 어떨까 2층으로 이끌어 머물며 보다가 서화관 들르니 벌써 8시가 다 되어간다.
경천사탑의 다양한 조각에 담긴 이야기를 영상으로 비추는 '하늘빛 탑'은 야간관람을 하는 수,토요일 저녁에 볼 수 있다. 매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밤에만 허락된 것이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기다려져서 책도 읽고 왔다. 탑 앞에서 서은양이 꼬마해설사가 된다. "경천사에 있던 이 석탑을 일제강점기에 한 일본인(다나카 미쓰아키)이 자기 집 마당에 두려고 가져갔어요. 탑을 다 분해해서 손수레 10개에 실어서 가져갔는데 미국인 선교사(호커 헐버트)와 영국인 한 명(어니스트 베셀)이 신문에 이 사실을 알려서 11년만에 우리 나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너무 심하게 망가져서 경복궁에 두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이 세워지는 2005년에 여기 같이 두게 되었어요.(중간에 탑을 보수해 경복궁에 세워둔 시기가 있었던 부분 설명은 빼먹음)" S에게 퀴즈도 낸다. "이 탑이 어떻게 십층이 되게?" 기단까지 포함해서 세면 언뜻 보기에 13층짜리 석탑이다. 이번에 지붕 같이 생긴 옥계석의 갯수를 세면 탑 층수를 알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8시가 되자 불이 꺼지고 잠시 침묵이다. 이어서 12분동안 탑 위로 연꽃도 피고 손오공과 삼장법사 이야기가 나왔다가 사계절도 지나간다. 탑에는 층마다 정교하게 조각이 되어 있어 이를 바탕으로 영상을 만들었다 한다. 몽툭하게 닳은 조각, 담백하게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리석 탑이 멋스럽다. 그리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몸의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주는 밤의 탑도 볼만하다. 그 의미를 알고 아껴야 할 우리네 소중한 보물이다.
#3. 9월 18일(일), 서울도보해설관광과 함께 한 야외정원에서 보물찾기
박물관 야외로 나가면 한글박물관도 있고 용산가족공원으로도 이어진다. 와서 한바탕 놀았던 곳들이긴 하지만 야외 정원에 국보급의 유물들도 있다 하고 전체를 둘러보지는 않아서 맘 먹고 가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마침 남편이 '서울도보해설관광' 사이트를 공유하였다. 우와, 여기 다 가보고 싶다며 보다가 눈에 띈 하나- 국립중앙박물관 정원 관람 코스! 희망일 3일 전에는 신청을 해야 하고 3인 이상이 되어야 출발할 수 있대서 3시로 미리 신청을 해 두었더랬다.
박물관 중앙에는 거울못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연못 한 쪽에 박물관 건물을 바라보며 팔각정이 하나 있다. 그 정자의 기와는 여느 기와와 다르다. 경희궁에 처음 세워졌던 한국의 박물관 100주년을 기념하여 청자로 기왓장을 하나 하나 구워 올렸다고 한다. 청와대의 그 기와인 셈인데 설명을 듣고 가까이 가서 보니 짙은 남청색이 아니라 옥빛으로 은은하게 반짝이는 청자가 맞네. 그래서 이름도 청자정인데 여기서 바라보이는 풍광이 시원하니 좋다.
사실 불상은 석가모니 사후 500여년이 지나서야 중요하게 여겨졌고 그 전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던 인도식 무덤인 탑이 신성시 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 한국 일본 등 불교가 성행한 곳에서 탑을 많이 지었다는 것이다. 정원에는 석탑과 승탑이 여러점 있었는데 신라탑의 전형이라 하는 석가탑보다 7년 뒤에 지어진 갈항사 삼층석탑 쌍탑과 장중한 고려탑의 전형인 남계원 칠층석탑이 대표적이다. 쌍탑은 국보 99호, 고려탑은 국보 100호인데 석탑 기단 한 쪽에 언제, 누가 이 탑을 시주했는지 적혀 있었다. 이렇게 적혀 있으면 탑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한다. 석탑공원을 지나 미르폭포에서 무지개를 보고 용산 가족공원을 둘러 다음 코스로 걷는다.
9월 중순을 넘어섰는데도 태양의 열기는 뜨거워 30도를 웃돈다. 더울 것을 배려한 해설사님이 다소 긴 설명이 필요한 경우 꼭 그늘과 앉을 곳을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9세 7세 아이들이 듣기에 좀 어려운 내용이 많아 둘 다 아빠엄마 양발 위에 앉기도 하고 물달라, 언제 끝나냐 재차 묻는다. 엄마가 생각해도 이 코스는 아빠엄마가 즐거운 코스라 더운 날 크게 칭얼대지 않고 동행해주는 것만도 고맙다. 탐방이 끝나고 물었다. 그래도 평소에 너희들 놀 곳에 가면 우리가 할 것 없어도 있어주잖아. 어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한번씩 신청해도 되지? 서은이가 설명할 때 집중하지 않으면 엄마가 뭐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 부담이 있나보다. 그래서 오늘같은 날은 그저 옆에 있어주면 된다고. 옆에서 너희 놀아도 된다고 했다.
시원한 옛 보신각종 바로 앞 계단에 서은 가은이 편히 앉았다. 입에 젤리를 쏙 넣고 당충전을 하며 한결 여유로와 보인다. 이 때쯤 되자 해설사님도 시선을 어른들에게만 맞추어 현재 탑골공원 위치에 있던 원각사 종이 종루로 옮겨와 보신각 종이 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인도 아소카왕 조부 찬드라 굽타의 코끼리부대에 이르기까지 썰을 푸셨다. 그 박학다식함에 감탄하며 흥미진진하게 듣다가 종종 엄마는 보신각 종을 배경으로 앉은 사랑스런 두 아이를 본다. 오늘 좀 더웠던 것도 너희들에게 아빠엄마와 함께 했던 하나의 추억으로 남길 바라. 숲길을 거닐며 이야기를 듣고 석탑을 보았던 이 모든 공기가 달콤하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세포 속에 저장되길 바라. 그래서 해설사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바로 박물관 식당으로 갔다. 거기에는 아이들의 수고를 당장 보상해 줄 구슬 아이스크림이 있다!
# 닫으며
오후 공연은 부설극장 용에서 한다. 가은이는 이번에 챙겨본 네 편의 공연 중 방금 것이 가장 재미있었다고 하네. 박물관은 단순히 문화재를 모셔놓은 딱딱한 진열장이 아니라 이렇게 공연도 하고, 정원에서 뛰어놀 수도 있는 즐거운 곳이다. 박물관 내부도 얼마나 잘 해 놓았는가, 사이사이 넓은 탁자와 편안한 의자에서 쉴 수도 있고 재미있는 영상들도 있다. 까페와 식당에서 요기를 하고 또 돌아다니다 앉았다 그림그리다 글 썼다 정말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에 재미를 본 나는 다시 책자와 공식홈페이지를 뒤적인다. 보물찾기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역시나! 다음주 21일부터 '20대가 방문하고 싶은 박물관'을 위해 15명의 대학생이 기획한 프로젝트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또 와야겠네! 다음엔 서은가은을 위해서는 어린이박물관을, 아빠엄마를 위해서는 상설전시관 한 곳의 도슨트 해설을 듣기로 합의하였다.
휴직 전에 나는 고학년을 주로 맡았는데 수학여행은 내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가장 기대하는 행사이다. 나는 거기에 약간의 긴장이 더해지긴 했는데 바로 멀미가 심했기 때문이다. 어찌나 이동이 잦은지, 어디 내려서 조금 구경하다 또 버스를 타러 간다. 그리고 또 한참을 가다 내린다. 그 사이 버스에서 나는 쪽잠을 자며 멀미와 싸웠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최고이자 최종의 목적지는 에버랜드인데 그 전후로 해서 들르는 곳이 국립과천과학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이다. 과학관에 내려 두어 시간 주고 몇시에 여기서 만나자 주의사항을 이를 때마다 나는 아쉽다. 두세시간은 아이들이 뭔가를 진득히 만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어느 코너이든 친구들로 바글거리지 않는가, 재미있어 보이는 코너 몇 군데 체험하면 그나마 성공이고 이것 저것 조금씩 건들어보다 밖으로 나와 뛰어놀기 마련이다. 지금은 부산에도 국립과학관이 생기고 다른 박물관도 많으니 이젠 과학관, 박물관은 가까운 곳에 충분한 시간을 두어 가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다. 부모님과도 여러 번 갈수록 재미가 있을터다. 각 지역의 어린이들이 두고두고 가고 소풍가듯 가서 갈 때마다 보물찾는 기쁨을 누리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