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세기 3장 1~24절 (NO3)(톰슨 후쿠마를 중심으로)
주제 :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말씀한다.
1~5 사단의 유혹을 경계하라고 말씀한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성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갖가지 술수로 하나님을 불신하도록 유혹하고 미혹하며 겁박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성도는 하나님의 법(말씀)에 순종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임을 드러내야 한다.
▷불의(不義)로 유혹할 때 -> 하나님의 의(義)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
▷다투며 미워하며 분리를 조장할 때 -> 하나님의 사랑(愛)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
▷실패(失敗) -> 믿음과 및 천국에 대한 소망(所望)을 확신(確信)할 수 있는 기회다.
이 때 성도들이 진정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순종의 기회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오히려 하나님을 불신하고 배반하는 불순종의 기회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이나 혹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자의지(自意志)를 가진 책임(責任)있는 존재(存在)이자 발전(發展) 진보(進步) 성숙(成熟)해가는 인격체(人格體)로 만드셨다.
이 같은 인간에게 사단은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인간의 지위와 명예를 왜곡된 교만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부추기면서 유혹함으로 범죄하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사단의 유혹의 배후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작정적 허용이 전제되었겠으나, 인간이 순종과 신뢰의 기회를 저버리고 불순종으로 범죄한 데에는 하나님의 명령(2:17)을 무시한 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인간의 교만이 주요인이었다(약1:15).
여기서 우리는 시험과 유혹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시험에는 인간을 성숙시키려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자리잡고 있으나, 유혹에는 인간을 타락시키려는 사단의 악의가 도사리고 있다. 즉 하나님은 아담을 더욱 성숙한 인격체로 만드시기 위해 시험을 허용하셨으나, 아담은 그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를 선한 하나님의 뜻에 두지 않고 사단의 뜻에 동조함으로서 유혹에 말려들고 말았다. 육체적인 탐심과 교만에 사로잡혀 의지를 그것에 동조함으로서 인간에게는 죄로 인한 타락과 고통과 죽음의 역사가 펼쳐지게 되었다.
죄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법(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다(롬8:7 요일3:4). 이 죄는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롬5:12 고전15:21), 그가 인류의 대표자라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그와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온 인류는 아담의 불순종과 부패의 성향을 상속할 뿐 아니라, 죄를 향한 적극성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가 빚어낸 고통과 죽음을 맛보아야만 한다(요5:42 롬7:18,24; 8:7,8).
죄의 본질을 요약하면 첫째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 아래 두는 특별 악이다. 둘째 절대성을 갖는다. 즉 선과 악에는 회색 지대가 없으며 항상 한쪽으로의 절대적 편향성을 갖는다. 다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사단의 계책을 따라야만 하는 존재들이다(마10:32,33). 셋째 죄는 하나님의 의지(말씀)에 대한 부조화를 의미한다(요일3:4). 넷째 죄는 반드시 죄에 대한 책임과 죄가 가져다주는 오염을 동반한다(2:17 롬6:23 엡2:3; 4:17-19). 다섯째 인간의 전인격(마음)에 자리하여 그의 전 삶에 영향을 미친다(잠4:23 렘17:9 마15:19 히3:12). 여섯째 죄는 비단 외형적 행위뿐만 아니라, 그 행위 이전의 것(죄악된 성향, 사고, 습관 등)을 모두 포함한다(마5:22,28 갈5:24).
6~13절 죄를 범했을 때 변명하지 말고 통회 자복하라고 말씀한다.
말씀을 멀리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깨어지면 인간의 모든 것(人格, 關係, 心性, 리듬 등)이 깨어지고 만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 죄를 범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 회복시켜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버린 타락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묘사된 장면이다. 즉 본문은 수치, 공포, 핑계로 점철된 추잡하게 일그러진 인간상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때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실로 모든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희망과 사랑이 넘쳐났던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는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의 즐거움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서로 간의 반목과 책임 회피 및 왜곡된 성(性)의식만이 남게 되었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과 인간 간에 이루어진 아름다운 창조질서 및 위계를 불신과 교만으로 깨뜨려 버린 인간에 남겨진 악의 부산물들이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삶을 깨뜨릴 때 인간 상호간의 조화 및 인간과 피조계의 조화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18절). 또 하나의 비극은 회개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9절) 진실한 고백과 통회하는 눈물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저주를 부른 더 큰 요인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가장 큰 소망을 가져다주는 구원과 생명의 문임을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14~21절 형벌을 자숙의 기간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신다.
인류와 자연계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범죄한 자들은 각자를 합리화하며 하나님의 징벌(2:17)을 모면하려 하였으나, 모든 만물의 깊은 것까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히4:13). 하나님은 만유 주재요 심판자로서 범죄한 자들의 행위와 수량과 정도에 따라 정확하게 심판하셨고, 이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롬11:36).
형법에 집행유예(執行猶豫)가 있다. 요즘은 무죄처럼 여겨져서 법 본래의 뜻이 훼손되고 있지만, 형을 유예한다는 말의 본래의 뜻은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일정기간 제공하여 자신과 삶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저지른 죄는 연약함에서 넘어진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기회를 부여하시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롬6:12 벧전1:14 딤후4:3 골3:5) 형벌을 당한 인간은 형벌의 내용 그대로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이것은 땀 흘려 일함에 있어서 요령피우지 말고 성실하게, 맡겨주신 가정을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돌보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 뱀을 가장 먼저 미천한 존재로 전락시키시고, 여자의 후손으로 일컬어지는 메시야와 영원한 원수 관계가 되게 하셨다. 따라서 이후 전개되는 역사는 두 세력간의 영적인 전쟁사이고 최후의 승리는 이미 예고된 그래도 메시야의 승리로 귀착된다(고전15:20-28).
사실 출산은 본래 인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이었으나(1:28), 죄로 인해 여자에게는 임산의 고통을 더 하셨으며 남편의 권위아래 있게 하셨다(엡5;22). 아담에게는 고통스러운 노동의 수고와 수고한 만큼의 소산물을 얻지 못하게 하였고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형벌이 주어졌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창세기 3:15절을 가리켜 원시복음(原始福音) 즉 최초의 복음이라 한다. 자세히 통찰하지 않으면 이 메시지는 축복이 아닌 저주와 파멸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단의 세력이 종내 파멸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기에 이 구절은 분명 복음 중의 복음이다(요16:8-14). ‘뱀의 후손’이란 종국에는 멸망하게 될 사단과 그 추종세력들을(요8:44), ‘여자의 후손’이란 남성의 씨 없이 순수한 동정녀에게 잉태되어 인류의 대속자로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마1:18,23). 이 두 후손(세력)은 항상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고 그 뱀은 그 적대 세력의 머리인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고 끝까지 해(害)를 끼칠 것이나, 마침내 여자의 후손은 이 땅에 독생하시고 뱀의 머리 ‘그 뱀’ 즉 사단을 이기게 될 것이다. 3장 15절의 언약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에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서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요19:18-24). 이로 인하여 아담이래로 사단의 노예가 되어 죄악된 삶을 살아야했고 끝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던 우리들에게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과 자유의 새 생명이 주어지게 되었다(롬7:24-8:2). 그러므로 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서 영광된 삶을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22~24 잃어버린 낙원, 관계, 형상, 광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말씀한다.
인간에게 허용된 최초의 낙원은 에덴동산이었다(2:8-14). 그곳은 인간에게 최고 최적의 장소로서 의식주를 걱정할 필요 없는 말 그대로 낙원이었다. 더구나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이 교제하는 신인(神人)의 만남의 장소였다. 인류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실체였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법(말씀)을 어기므로 말미암아 그 낙원에서 쫓겨나고 만다.
말씀을 떠난자의 비극의 시작이다. 본향을 잃어버린 사람(실향민의 설음), 본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네가 어쩌다 그렇게 되었니 ㅠㅠ), 본래의 영광을 잃어버린 것(예루살렘의 영광)이다. 즉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단의 말을 따른 인간은 죽음과 낙원의 상실, 도덕성의 부패 및 하나님이 제공하신 모든 행복들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서 존재의 가치, 존재의 이유,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原)낙원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실(失)낙원이 되고 말았다(3:24). 즉 사단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들은 짐승의 피를 흘려 만든 가죽 옷을 입고 슬피 울며 쫓겨난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잃어버린 지상 낙원 에덴을 더 이상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 그 옛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시온을 기억하며 날마다 통회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던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스라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그 백성들처럼(시137:1), 이곳 지상의 강가에서 낙원을 잃어버린 죄악을 통회하면서, 제2의 에덴 즉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낙원을 소망해야 한다. 그곳은 다시 유혹이 없으며(계20:2,10), 온갖 영적 보화가 풍부한(계21:17-23) 생명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계22:1)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이다. 메시야 왕국 묘사에서도 부분적으로 계시된(사11:6-9) 이 하나님의 나라 에덴에 참석할 소망을 가진 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자신의 죄와 허물을 씻어 정결케 한, 흰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이다(계7:13,14).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주님의 영광이 되게 하셨다. 지금도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알고, 닮고,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가도록 도우신다. 그리고 그 형상을 회복한 성도들을 위하여 영원한 낙원(주님께서 계신 천국)을 예비하고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