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52
9월18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연중 제2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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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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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6571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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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불현듯 다가올 ‘마지막 날’을 위해, 지금 당장 신속하게 회개의 결단을 내리십시오!>
예수님의 비유로 들어하신 말씀들은 당대 ‘가방끈’이 짧은 사람들이나 가난한 백성들의 귀에도 쏙쏙 들어올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율법 교사나 지도자들의 고리타분하고 난해한 가르침과는 달리,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하고 흥미로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도 환호하고 박수를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신 ‘불의한 집사’ 혹은 ‘약은 청지기’의 비유 말씀은 꽤나 난해합니다. 몇 번을 되새김질하며 읽어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특별한 비유를 통해 강조하시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사실 불의한 집사의 행동 하나 하나는 명백한 범법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재판에 넘겨져야 마땅합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 관리를 총 책임지는 담당자였습니다.
집사가 주인 허락도 없이 재산을 낭비했으니, 절도죄에 해당되겠습니다.
비리가 주인에게 발각되자,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 문서를 위조했으니, 공문서 위조죄에 해당되겠습니다.
불의한 집사는 갖은 비리의 종합선물셋트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특별하게도 주인은 불의한 집사가 영리하게 대처했다며 칭찬합니다.
이 비유 앞에 많은 분들이 ‘이게 대체 무슨 말씀인가? 이렇게 알아듣기 힘들어서야! 대체 주장하시는 바가 무언인가?’하고 고민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집사의 비리와 위법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불의한 집사의 민첩하고 슬기로운 처신, 신속 정확한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를 칭찬하셨습니다.
긴박하고 다급한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탈출구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불의한 집사가 현명하게 처신했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비리와 불법 행위가 용서되거나 의롭게 되는 것을 절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편법적인 행동으로 인해 끝까지 불의한 집사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과 관련해서 불의를 저지를 것이 아니라, 불현듯 다가올 ‘마지막 날’을 위해, 지금 당장 신속하게 회개의 결단을 내릴 것을, 그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세상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현세적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면서, 할 짓 못할 짓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들 역시 자신들 영혼의 유익을 위해, 불의한 집사처럼 목숨을 걸 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이 순간, 신속히 결단을 내리라는 요청이 불의한 집사 비유의 핵심입니다.
초고령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불과 4~50년 전만 해도 60세까지 살았으면 장수했다고 잔치까지 벌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80에 세상을 뜨시면 살짝 아쉬을 정도입니다.
다들 길어진 노년기에 대비해서 걱정도 많고, 또 각자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하십니다. 재취직 계획, 넉넉한 연금 수령을 위한 준비, 정기적인 건강검진, 적당한 운동, 철저한 식단 관리...
그러나 그러한 육적인 준비에 비해 영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 하고 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90퍼센트, 100퍼센트 육적인 준비에만 몰두하고 계시다면, 10퍼센트, 아니면 20퍼센트 정도 ‘뚝!’ 떼어 영적인 준비에 할애해보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현세적 재산은 엄청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불완전한 것입니다. 지금은 죽기살기로 꽉 움켜쥐고 있지만, 불과 10년, 20년, 30년 뒤면 고스란히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세의 재물로는 조만간 반드시 다가올 죽음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사심없는 자선과 희사는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 가장 좋은 증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부당하다 해도, 우리가 지상에서 행한 자선과 희사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대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물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 배로 보상받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땅의 재물을 가진 사람들이여,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엽시다.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 줍시다. 우리 것이 아닌 물질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이가 됩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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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kG4UQQv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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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잔도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믿음이 순교까지 이르게 한다>
개그맨 김준호 씨가 예전에 도박에 중독됐던 당시의 심정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김준호는 지난 도박과 관련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푹 빠져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도박을 시작했을 땐 결혼한 상태였다. 당시 아내가 외국에 있어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며 도박에 빠져들었다”라며 “누구 하나 제어해줄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 중독이 많이 된 상태였다”라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피눈물 흘리신 뒤로 두 번 다시 안 하게 됐다”라며 “연예인은 외로운 직업이다. 외로워도 그걸 풀 방법이 별로 없다. 그래서 술이나 도박, 마약, 프로포폴, 여자 등 여러 문제에 휩싸이게 되는 것 같다”라고 털어놨습니다.
우리가 삶의 질을 이야기할 때 김준호 씨가 도박에 빠져있었을 때가 삶의 질이 좋았다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삶의 질은 아무래도 목표를 향해 내어 디딜 때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고통을 잘 견뎌내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인생은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는 보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김준호 씨는 다른 것들로 자기가 치러야 하는 고통에 보상을 주었습니다. 이 보상 덕분으로 삶의 질이 추락했습니다.
켈리 최 회장과 같은 사람은 나이 마흔이 되어 빚만 10억을 진 상태였고 죽고 싶었습니다. 삶의 질이 매우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때문에 죽지는 못하고 삶의 질을 변화시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 방법은 자신이 받아야 하는 고통에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보상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술을 끊고, 쓸데없는 모임을 끊고, 드라마와 게임을 끊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참아내야 했던 고통에 대한 보상이었고 이것이 실제로는 그녀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후 그녀는 10년 만에 연 매출 6,000억에 이르는 회사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능력을 ‘만족 지연 능력’이라고 합니다. ‘마시멜로 실험’이란 1960년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진이 3~5세의 아이들, 653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던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 마시멜로를 놓아두고 먹지 말라고 하면서 15분 정도 기다리면 하나 더 주겠다고 하고 아이들이 그것을 지킬 수 있는가 보는 실험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에 그 실험에서 15분을 기다려서 먹은 아이들과 바로 집어먹은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추적해본 결과, 기다려서 하나 더 받았던 아이들이 사회적 지위가 더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추적 검사의 결과, 우리 삶에서 인내와 절제심이 있는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결론이 도출되어 화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2018년, 캘리포니아 대학과 뉴욕대 신경과학 연구진이 다시 아이들의 환경까지 조사해 보니 15분 이상을 기다린 아이들의 집안이 대개 중산층 이상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자주 먹었거나 먹고 싶다고 하면 어른이 얼마든지 사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라서 기다리고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집어 먹었던 아이는 그냥 놔두었다간 다른 형제에게 뺏기거나 나중에 다시 먹을 기회가 없다는 경험치를 갖고 있었던 가난한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잘 참아낼 수 있는 능력은 그 고통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에서 온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2012년 심리학 잡지 코그니션(Cognition)에 록펠러 대학의 키드(C. Kidd) 팀이 발표한 마시멜로 실험에서 마시멜로를 눈앞에 두고 기다릴 수 있는 아이와 기다릴 수 없는 아이를 만드는 요인은 신뢰감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실험은 1차와 2차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차에서 아이들에게 몇 분만 기다리면 컵을 예쁘게 꾸밀 수 있는 재료를 더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참여한 아이들 14명 중의 반은 실제로 기다리면 미술 재료를 주었고, 반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재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후 기존의 마시멜로 실험을 진행했을 때 신뢰 환경에 있었던 아이들은 평균 12분을 기다렸고 많은 아이가 15분 동안 마시멜로를 먹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비신뢰 환경에 있던 아이들은 평균 3분을 기다렸고 15분까지 기다린 아이는 전체 14명 중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실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삶의 질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에 따르는 것은 맞지만 그 능력은 “보상에 대한 신뢰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이 신뢰 수준이 곧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보상 없이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오늘은 한국의 순교성인과 복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고통을 즐겨 받았습니다. 사실 생로병사의 모든 고통은 결국 죽음이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죽음이 모든 고통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인들은 이 죽음의 고통까지도 즐겨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 뒤에 오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살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진취적으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고 질 좋은 삶을 산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도 사실은 순교로 나아간 사람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기는 하지만 실제로 보상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랑으로는 그런 경지까지 오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르 9,14)
사람들은 뭐 그런 것을 바라고 고통을 감내하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도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셨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지옥에 가면서까지도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모든 고통에는 보상이 따르고 우리는 그 보상 때문에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보상에 대한 확신이 우리를 순교의 사랑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질 좋은 삶을 살도록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어야 합니다. 부모님은 아픈 자녀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안 죽어!”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어떠한 보상도 약속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로는 죽음의 고통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보상을 바라는 것이지 거짓말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이성적인 접근입니다. 살아있으면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으면 알 수 없으니 굳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죽음 뒤에는 고통이 없이 인간이 사라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진화론적인 사고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면 얻을 수 있는 어떤 보상도 약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세상은 즐기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종교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가 주는 믿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먼저 불교를 들 수 있습니다. 불교는 원래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애초에 부처님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얼음을 주고 놀이를 하라고 했는데 얼음이 녹아버렸습니다. 아이는 얼음이 소멸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어른은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이 다시 얼음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얼음이 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죽음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때 얼음을 물로 만드는 에너지, 물을 다시 얼음으로 만드는 에너지를 주는 절대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을리 없습니다. 신을 전제하지 않으면서 죽음은 소멸과 생성의 순환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만 줄 뿐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워하고 산 삶이나 그렇지 않은 삶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인격적 신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인격적 신이 있다고 믿는 종교는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천국과 지옥이 존재합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 만든 의도가 있을 것이고 그 의도대로 쓰이지 않으면 영원한 소멸로 가는 것이고 그 의도대로 쓰이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기에 창조자가 원하는 대로 쓰이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창조자의 의도대로 산다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괜찮아, 괜찮아. 죽어도 돼, 죽어도 돼! 아니, 죽어야 살 수 있어!”
죽어야 살 수 있음을 보여주신 분들이 순교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상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는 삶이 순교입니다. 순교자가 무슨 삶의 질이 좋았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많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삶의 질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많으면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인생을 항해하는 것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에 떠 있으면 노를 저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이 항해를 통해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지에 대한 명확한 신뢰가 없다면 물에 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우리는 파견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삶에 의미를 갖고 그래야 보상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고통의 보상에 대한 믿음은 선택입니다. 이 선택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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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평화방송을 운영하는 동창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동창 신부님입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샘솟는 동창입니다. 팬데믹 기간에 많은 분들이 평화방송 미사를 통해서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방송을 시청하면서 번호를 누르면 후원금이 들어오는 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평화방송에도 번호가 있었는데 익숙하지 않은 번호였다고 합니다. 번호를 천사(1004, 5004, 9004)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천사는 1000원, 오천사는 5000원, 9천사는 9000원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방송을 보던 많은 분들이 후원번호를 통해서 후원금을 보냈다고 합니다. 방송국은 그 후원금을 모아서 가난한 이들, 어려운 기관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적극적인 아이디어와 성실함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동창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매주 직원미사를 하는데 참석하는 직원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고 합니다. 출근 시간은 9시인데 직원미사가 8시 30분에 있었습니다.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직원미사 시간을 9시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미사도 엄연한 근무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미사시간을 바꾸었더니 직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전문기관에 의뢰해서 직원들의 만족도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직원들은 모두 평소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 고쳤으면 좋은 것들을 적었다고 합니다. 동창 신부님은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들어주었고, 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를 구했다고 합니다. 유흥식 추기경님의 서임식에는 직접 기자를 로마로 파견했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성지순례에도 기자를 파견하겠다고 합니다. 비록 비용은 들겠지만 직접보고 체험한 기사를 위해서, 직원들의 견문을 넓히는데도 필요하기에 결정했다고 합니다.
저는 신학생 때, 재정과 관련된 일을 하였습니다. 학교 판매부에서 봉사자를 뽑는다고 해서 자원했습니다. 신학교에 학생 자치 신협이 있었고, 신학교에서는 신협의 학생들이 매점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매점을 운영하는 거였습니다. 매점의 운영시간은 저녁 먹고 묵주기도 시간까지 대략 30분이었습니다. 판매 물품은 음료수, 담배, 과자, 학용품이었습니다. 방학 때는 과자는 식당과 빨래를 담당하시는 자매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3년 동안 매점 운영을 했고, 기억나는 물품은 당시에 등장한 ‘불티나’라는 라이터와 직접 제작한 학교 편지지와 노트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었고, 유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신학교 매점 운영은 어렵지 않았는데 신문사의 운영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저도 동창신부님처럼 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홍보를 다니려고 합니다. 좋은 지면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재물은 감정이 없습니다. 재물은 발이 없습니다. 재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재물은 하늘은 나는 연과 같습니다. 연은 연을 날리는 사람의 손에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손이 왼쪽으로 움직이면 연은 왼쪽으로 움직입니다. 사람의 손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연은 오른쪽으로 움직입니다. 연의 줄이 끊어지면 연이 땅에 떨어지듯이 사람이 재물에 마음을 내려놓으면 재물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재물을 땅에 쌓으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친구와의 우정을 잃어버립니다. 가족과도 담을 쌓게 됩니다. 함께 한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난한 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듭니다. 불의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싸우고, 돈이 헤어짐의 이유가 되고, 돈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이유가 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으려는 사람은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장학 재단은 힘들고 어려운 학생에게는 희망의 빛이 됩니다. 선교지에 보내지는 돈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난민에게 지원되는 돈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줍니다. 가난한 이에게 전해지는 돈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세속의 욕망을 위해서 쓰이는 재물은 심한 악취가 날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이는 재물은 아름다운 향기가 날 겁니다. 지금 우리의 지갑에는 어떤 향내가 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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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13: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오늘 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관한 것이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인간이면 누구나 피하기 어려운 재물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재물 사용법에 대해 몇 가지 권고를 하고 있다. 재물을 잘 사용하여 진정 하늘나라에 자신을 개방하고 준비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계시다. 아모스 예언서의 내용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전형적인 착취 형태로서, 이 같은 상황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하다. 수많은 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는 착취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아모스의 외침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을 거슬러, 자신들이 압박의 도구가 되지 않고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형제애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지상 재화의 의미를 재조명하라고 하는 촉구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청지기는 어떻게 그런 부정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주인에게 들켜 큰 벌을 받을 수 있는 나쁜 짓이 틀림없다. 당시의 청지기는 넓은 토지를 관리하고 주인에게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땅에서 나오는 결실을 높은 이자로 빌려주고 자신들의 보수를 챙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지기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여 빚진 자들의 빚문서를 허위로 기재한다. 기름을 빚진 사람에게는 50%를 감해주고, 밀을 빚진 사람에게는 20%를 감해준다. 이렇게 이 약은 청지기는 빚을 삭감해줌으로써 개인적인 이익을 거둘 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의 환심도 산다.
주인은 이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했다고 칭찬을 한다.(8절) 청지기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이익을 얻고 있다. 우선은 개인적인 벌이를 할 수 있었고, 또 그 빚진 사람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집주인은 이 두 번째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하고 있다.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8절)는 것이다. 세속의 자녀들은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는데 어째서 착한 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려울까? 아마도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의 재물을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9절) 이 비유는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 재물을 사용할 줄 알라는 권고로 맺고 있다. 여기에서 친구들이란 누구를 의미하는지 막연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루카의 사상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3-34)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로 사귀어야 할 친구들이란 구체적으로 우리가 은혜를 베풂으로써 나중에 우리의 중재자가 될 모든 사람이며, 추상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베푼 모든 자선 행위 및 선행을 의미한다.
이것이 루카가 볼 때 재물의 소유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하게 번 재물이라고 해도 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세속의 제물이 되고 만다. 재물은 나눔이 있을 때 사랑과 우정의 공간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던가, 아니면 이기적으로 사용되어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을 일으키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저주만이 있게 된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6,24) 오직 이 세상의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때만이 참 재화를 풍성히 얻을 수 있다. 그 재화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며 하늘나라의 재화이다. 참고로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12절) 하시는데, 여기서 남의 것이라고 하는 말은 재물이 혼자서 즐기는 데 쓰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 말씀은 재물의 모든 정당성을 배제하고 있는 내용이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13절) 재물은 사람의 모든 관심을 당겨 인간을 노예로 삼으려 하므로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재물에 대한 집착은 버릴 수 있으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같이 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재물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기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 재물이 동참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적 폐쇄와 원한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자신의 태도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재물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는 우리가 재물을 만들어 간직하거나 소유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해 쓸 경우이다. 교부들도, 교회도 이렇게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재화의 대부분이 인류의 1/3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쥐어져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대개가 곤궁에 처해있다.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자 함으로써 복음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에도 달린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티모테오 전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권고하듯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1티모 2, 2)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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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구든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3-26)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은, 누구나 예외 없이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누구나 예외 없이 ‘순교’를 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십자가’는 박해와 순교를 포함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당신을 따라야 한다는 명령이고, 당신을 따르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굴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순교’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닙니다. 신앙을 증언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물로 그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에서 ‘순교’는 최고의 증언입니다.) 또 순교하고 싶다고 아무나 순교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순교는 은총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박해’는 신앙생활을 하면 ‘무조건’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데, 평생 박해를 받는 경우도 있고, 박해를 적게 받거나 안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박해도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교를 하는 것과 박해를 받는 것 자체가 은총이라는 뜻이 아니라,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언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큰 상’을 얻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순교와 박해를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박해가 아예 없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주 편안하고 쉬운 일이라면? 그것 자체는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그런 상황이 나중에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각 개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박해가 없는 평온한 상황이어서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면 복이 될 것이고, 너무 편안해서 마음이 풀어지고 자만심에 빠진다면 화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박해도 없고 십자가도 없고 평화롭기만 한 상황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박해 때에는 신앙의 순수성을 잘 지켰는데, 박해가 없을 때에는 타락하고 부패했습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는 일들 가운데에는 분명히 필요하고 중요한 일들이 있고,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 가운데에도 분명히 필요하고 중요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필요하고 중요해도 결국에는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집착과 욕심을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허무한 것들을 버려야 할 때가 오면 과감하게 그것들을 버리는 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말씀은, “온 세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온 세상을 차지한 사람은 없습니다. 알렉산더, 징기스칸, 나폴레옹, 진시황, 히틀러 같은 자들이 온 세상을 차지하겠다고 덤볐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허무’뿐이었습니다. 혹시라도 “그래도 그들은 사는 동안 하고 싶은 일을 다 했고,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닌가?”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은 그자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불행을 겪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서 하는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불행 속으로 몰아넣고서 차지하는 부귀영화는 부귀영화가 아니라 그냥 ‘악’일 뿐입니다. (세속에서 그런 자들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온 세상’이라는 말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루카 4,5-7)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들의 권세와 영광을 사탄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라는 사탄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데도 세속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은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사탄을 섬기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그 권세와 영광을 얻지도 못하면서 사탄이 멸망할 때 사탄과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구원을 받으려면, 지금 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무시하지 말고, 잘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요한 6,68). 말씀을 믿고, 말씀 안에서 사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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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약은 집사의 비유’ 속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무능한 종이고, 자신의 잘못이 발각되자 주인의 채무자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며 제 살길을 찾은 ‘횡령범’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고 칭찬받을 만하다고 하시며 제자들의 본보기로 삼으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집사의 불의한 처신에 대한 윤리적 평가가 아니라,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재산을 사용하여 임박한 위기에 신속히 대처하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땅이 오직 하느님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땅에서 거둔 것들 모두 하느님께서 주셨다고 믿었기에, 재산의 일부를 하느님께 봉헌하거나(십일조) 곤경에 놓인 이웃을 구제하는 데 쓰는 일에(자선) 익숙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비유에서, 내 재화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입니다. 내가 가진 재화는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그분께서 잠시 내게 맡겨 두신 것이니, 그것을 잘 활용하여 하느님 나라에 “영원한 거처”를 마련해야 합니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재물조차 올바로 쓸 줄 모르는 인색한 자는 구원의 몫을 바라지 못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보이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속여서 이득을 챙기는 자를 향한 아모스의 경고와, 하느님께서 이웃을 위한 기도와 전구를 가장 기뻐하신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기억합시다. 또한 복음의 비유 속 집사의 예지와 기민함을 묵상하면서, 이웃을 배려하며 베푸는 자선과 기도로 하느님 나라에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는 나날을 이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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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신정호 모세 신부님]
<나는 무엇을 남길까?>
사제의 장례식을 마치면, 저는 신부님들을 기억할 수 있는 자료들과 교구의 역사에 남겨두어야 할 자료들을 정리합니다. 주인이 떠난 빈방을 찬찬히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신부님들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가신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신부님은 각종 성물을, 또 누군가는 수많은 책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성물과 책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누군가가 이 세상을 떠나며 남기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부님들이 이곳에 남기려고 하신 것은 책이나 성물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바르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노력했습니다. 또 사제로서 그 '신앙'을 여러 교우에게 전해 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신부님들의 '하느님 사랑'은 주님 대전에 봉헌되었고, 교우 여러분께 전해준 '신앙'은 바로 이곳에 남긴 유산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 곁으로 떠나신 신부님들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바르게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분들이 남겨 주신 신앙을 잘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교자 성월을 보내며 우리는 순교자들의 삶을 돌아보고, 그들의 신앙과 주님을 향한 사랑을 묵상합니다. 그런데 간혹 순교자들의 삶이 아닌 순교 장면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도 있고, 순교자들의 신앙에는 무관심하면서 남겨진 유해만 공경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순교자 성월을 제대로 보내고 순교자를 올바로 공경하기 위해서는 그분들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남기신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또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교자들이 처형당하실 때, 바로 옆에서 죄목은 다르지만 같은 방식으로 처형당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처형을 당했으니 죽음 자체만으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은 전혀 다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순교의 핵심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중요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순교의 '원인'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증언'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시선은 그리스도를 위한 증언을 가능하게 했던 순교자의 신앙으로 향해야 합니다. 또 그러한 신앙을 지녔던 이들이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성인과 복자. 그리고 시복시성 운동 중인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이제 이분들에 관한 책과 강의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순교자 성월 동안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바라보며 그분들이 남겨주신 신앙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스스로 물어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생의 마지막에 어떤 신앙을 남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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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해윤 루도비코 신부님]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가을로 접어든 9월, 우리는 순교자 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순교자 성월은 천주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한국 순교성인들과 함께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모든 순교자를 기리며,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 순교 정신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거룩한 달입니다.
제가 지내고 있는 이곳 죽산 성지는 병인박해 시기 용인, 양지, 그리고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 등지의 천주교 신자들이 압송되어 죽음을 맞이한 순교 터입니다. 그나마 행적이 알려진 스물 다섯분의 순교자 외에도 이름 모를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신앙과 얼이 깃든 거룩한 장소입니다. 조선의 국법상 한 가족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처형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부와 가족이 함께 순교한 순교 터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정황과 당시 신앙 선조들의 하루 일상에 대한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순교자들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하느님과 함께 일상을 살아갔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두렵고,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신앙을 지켰던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성경을 필사하고,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묵상한 것을 삶으로 얼마나 진지하게 실천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 순교자들의 삶에 사변적 요소보다는 실천적이고, 수덕(修德)적인 요소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오랜 세월 전, 순교자들은 홀로 고독 속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모습에서 깊은 영적인 슬픔과 동시에 진리와 희망을 발견했고, 주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관상과 묵상 속에서 하느님의 진리와 십자가의 거룩한 어리석음이 결국 세상을 이겼다는 확신과 기쁨을 굳건히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코로나 상황이 조금 나아졌던 지난 5월, 많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 내용의 대부분은 “성지에 장미가 이제 폈나요?”였습니다. 장미가 피는 시기에 맞추어 엄청나게 많은 질문과 관심 그리고 순례와 방문이 증가함을 체험하며, 이곳이 순교 성지인지, 장미 성지인지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솔직히 많은 순례에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한 동시에 가슴 한편에서는 무언가 아쉽고 씁쓸한 마음도 공존했었던 것 같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삶의 진리로 믿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삶으로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갔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예수님과 그 가르침을 소중한 추억으로 체험한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전달되었고, 전달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전해질 것입니다.
순교자 성월, 단순한 의례적 기념을 넘어 순교자들의 삶과 기억 안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시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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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사제 서품을 앞두고 서품성구를 정할 때였습니다. 성경 구절 가운데 앞으로의 제 사제 생활에 있어 결심과 나침반이 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저울질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 말씀 전례의 화답송인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였습니다.
“시온의 귀향을 풀어 주께서 돌려보내실 제 우리는 마치 꿈만 같았나이다.”라는 구절도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시편의 이 두 구절 가운데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신학교 생활이 마치 눈물 철철나는 귀향살이 같았는데 ‘이제 나는 해방이다.’ 하고 외치는 듯한 오해를 살 수도 있어서였지요. 저만의 기우였을까요?
오늘은 우리 한국천주교 신자들에게 자랑스러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경축 이동)’입니다. 103위 성인의 순교록을 보면, 그들은 칼날 아래 쓰러져 가면서도 기뻐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한 생을 바쳐 거둘 수 있는 것을 모두 거두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저에게는 우리 교구 외곽지역의 자그마한 성당의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농사일을 배울 기회가 두 차례 있었습니다. 봄에 가장 먼저 심는 작물은 감자였습니다. 그리고는 냉해를 입지 않을 무렵이 되면 고추, 호박, 오이, 가지와 여러 쌈 채소들 모종을 내었지요. 지지대를 세워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고 넝쿨들이 잘 뻗어갈 수 있도록 고정해주면, 작물들은 신나게 자랐고 때마다 결실을 내주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아침, 할머니 신자들과 한바탕 김매기를 하고 뒤돌아보면 작물들은 좋아라 벙글벙글하였지요. 땅강아지처럼 땀 흘리면서도 이 맛에 농사짓나 싶었습니다.
농사 가운데 만만치 않은 농사가 ‘사람 농사’인 줄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부터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신자들을 살피고, 원망하고 불화하던 이들과 더불며 웃음꽃 피어나는 공동체를 일구어가는 일은 농사일보다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사람 농사보다 힘든 농사가 있구나, 생각되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농사’입니다. 하느님 농사는 나를 씨앗으로 심어 하느님을 거두는 신비로운 농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2독서에서 하느님을 수확하는 농부의 노래를 듣습니다. 우리가 오늘 공경하는 순교자들의 노래이기도 하겠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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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과 나>
2022. 09. 18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9,23-26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그분과 나>
그분 앞에 나서니
오로지 나만 보이고
그분 뒤를 따르니
비로소 그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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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현대의 순교>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1요한4,10-12)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바로 이 사랑을 증거 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로 왔고 또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천상에서 누리는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차지하는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순교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천상행복이라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이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시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성령께 기도합니다.
천주교는 238년 전 초기에는 ‘사교’, 곧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단정되었고 이 사교를 뿌리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우리 선조들은 천상의 기쁨을 생각하며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며 지냈습니다.
옛말에도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풍요로운 수확을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지혜3,1-5)는 말씀이 바로 그들을 두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 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감옥생활의 비참함을 보겠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회장(솔뫼출생, 1816년 대구에서 참수)은 감옥에서 형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냥 있어도 아픈 상처가 감방이 너무 비좁기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서로 부딪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면 움직이고 싶어도 참아야 합니다. 또 온몸에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이 없는데 그 상처마다에 온갖 벌레들이 덤벼 옵니다. 이걸 집어내려고 손을 들면 상처를 건드리니까 고통스럽고 안 집어내자니 이 또한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내 방에 깔린 멍석은 내가 고문을 받을 때마다 흘린 피와 고름으로 썩는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 중에서 내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굶주림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 피고름으로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멍석자락을 뜯어 씹으면서 이 배고픔 때문에 주님을 배반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김길수, -하늘로 가는 나그네-) 이 가문에서 김대건 신부님이 탄생했습니다.
감옥생활 안에서도 너무도 당당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서 감옥을 지키는 포졸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그 감옥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웃으며 살고, 나는 돈까지 받으며 바깥에서 편히 있는데도 불평이 가득하다. 그러니 옥 속에 있는 그들이 죄인인지 옥 바깥에 있는 내가 죄인인지 모르겠다.”
순교자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보면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자수가 늘어갔습니다.
100여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신자수가 늘어가고 감옥에 갇히고 처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박해가 심할수록 믿음도 커갔고, 형제애는 더 깊어졌습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자유를 줍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238년 전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성당도 가까이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신앙을 갖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타협도 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기 보다는 세상을 선택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크게 구별이 없습니다. ‘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바보소리 듣는데’하면서 합리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주님의 모습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비춰지지 않으니 어떻게 믿는 이들이 늘어나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24)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덜어내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를 버려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마련됩니다. 자기중심의 삶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들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하느님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은총과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지혜3,9)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들이 물려주신 신앙을 땀의 순교로 지켜야 할 때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분명히 ‘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하면서 주님을 과감히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자, 제가 한 마디 하면 ‘그래도 사랑하여라’ 하고 답하십시오. 그가 원수 같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나를 욕하고 다닌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기만 하면 상처 받는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말을 함부로 한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너무 이기적이고 안 보면 편하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보면 정말 밥맛이 떨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하십시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날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인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여러분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일상의 삶의 온전한 봉헌을 통해 땀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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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6월에 코를 수술받았습니다. 코 안에 물혹이 생기면서 냄새를 맡지 못한 지가 자그마치 6년이나 되었지요. 그러다가 코를 수술하고서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제 방에서 그렇게 좋지 않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얼른 향초를 계속 켜 놓고, 매일 아침 방 청소를 깨끗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좋지 않은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며칠 뒤에 아는 지인들이 사제관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곰팡내가 나요.”
사제관 건물에 이상이 생겨서 비가 내리면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졌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빗물이 제대로 마르지 않아서 곰팡이가 피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냄새를 맡지 못했기에 곰팡내를 알아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원인을 알게 되니 해결책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비가 새지 않도록 지붕에 비닐을 덮었고, 제습기를 계속 틀어서 습기를 제거했습니다. 얼마 뒤에 이상한 냄새는 사라졌습니다.
방법은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모르면 방법은 찾을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상황의 극복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은 집사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의 집사가 의무를 게을리하고 부정한 일 처리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인은 해고를 통보하지요.
그러자 관리인은 빚진 사람의 빚을 줄여주는 간교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릅니다. 이상한 것은 이 사실을 알고도 책망은커녕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약삭빠르게 일 처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집사는 앞날의 생활을 도모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당한 수단까지 동원하는 약삭빠른 꾀를 썼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돈을 다루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능수능란합니다. 그 수법과 재주를 천상 보화를 얻는 데 쓴다면 얼마나 거룩한 일이겠습니까? 그 재주를 발휘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남을 돕는 일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동원해서 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얻어내야 할 목표라는 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요점입니다. 방법이 없다면서 주님의 일 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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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하느님 중심의 삶과 기도, 그리고 지혜와 사랑 -
지난 9월4일 주일,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聖下에게 시복된 제263대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1세를 기억하시는 지요? 너무 감동적이라 오늘 새벽 기사를 자세히 읽고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재위기간은 놀랍게도 1978년 8월26일-1978년 9월 28일, 겨우 33일이었지만 감동적인 일화는 차고 넘칩니다.
‘미소의 교황’이라 불리는 요한 바오로 1세 교황님의 사목표어는 ‘겸손(Humilitas)’이고, 고 김수환 추기경은 “바오로 6세가 사람들을 위해 혼자 운 교황이었다면, 요한 바오로 1세는 사람들을 많이 울린 교황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의 마음을 그대로 담은 자기 고백적 내용의 편지(가톨릭평화신문, 9.18일 15면)가 길다 싶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드디어 간절히 원하던 사제품을 1935년 7월7일, 제 나이 23세에 받았습니다. ”앗숨!(Ad sum, 예, 여기 있습니다)“ 힘차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온전히 저를 하느님께 바치며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항상 제 사제직의 중심 모토로 삼았습니다. 아 나중에 주교, 추기경, 교황이 되었을 때까지 저는 사목표어를 겸손이란 한 단어만 선택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이 선종하시고 콘클라베에서 제가 263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요한 23세 교황님처럼 현명한 마음도, 바오로 6세 교황님처럼 준비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그분들의 자리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와 함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두 분 교황님의 이름을 제 교황명으로 선택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1세로요. 아, 교황직 33일 동안, 저는 수요 일반 알현을 매주 4번을 했습니다. 겸손,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을 주제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누군가는 저를 ‘하느님의 미소’ 혹은 ‘교회의 미소’, ‘9월의 교황’이라고 말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혼란속에서도 교회는 의연하게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미소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미소를 잃지 마세요. 2022년 9월4일 주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주례로 저의 시복이 있었습니다. 부족했지만, 저는 평생 제 가슴에 그리스도를 품고 살았습니다. 그 힘으로 여러분을 위해, 우리 성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1978년 9월27일 수요 일반 알현 때, 저의 마지막 지상의 삶에서 여러분을 만나며 했던 기도가 생각나나요? 저는 지금도 이 기도를 바칩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가 담긴 이 기도는 제가 어렸을 적부터 가르쳐 주신 제 어머니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나의 하느님,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당신은 영원한 선이시고,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위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제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오 주님, 제가 더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가상적이지만 정말 감동으로 와닿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자기고백적 편지입니다. 얼마나 철저히 완벽히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어제 40대 초반의 자매로부터 받은 편지도 충격으로 마음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받은 글과 답신을 소개합니다.
“신부님, 저 안나예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척박할 것 같아 절망이 찾아왔어요. 어쩌죠. 신부님 더 외롭고, 더 가난하고, 더 아프고, 피려다가 활짝 피어 보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린 꽃처럼--- 모든 게 끝나나보다 지금도 시시한데 지금보다 좋을 날이 없겠구나 싶어서 슬퍼요.”
아마 꿈과 희망을 잃고 절망하는 이런 심정의 젊은이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마침 위의 내용을 비슷한 나이의 자매에게 보여 줬드니 바로 자기 심정도 그러하다 했습니다. 제가 즉시 드린 답신입니다.
“사랑하는 안나 자매님!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두고 최선을 다해 힘차게 사시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내일이 아닌 오늘부터 웃으며 활짝 핀 꽃처럼 행복한, 아름다운 삶을 사세요! 행복도 선택입니다. 사랑하는 안나 자매님! 화이팅! 오늘 사랑하는 안나 자매님 위해 생미사 봉헌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절실, 절박한 작금의 시대입니다. 어제 오늘 공동전례중 내용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롭게 하는 말마디들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수 없도다.”
- 주일 성모 후렴
“어서와 하느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목청 돋우세. 알렐루야.”
- 아침 초대송 후렴
“가난한 이들, 일으키시는 하느님을 모두들 찬양하라.”-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
벌써 30년 전 1992년 왜관 수도원에서 피정지도 후 종신서원 미사 때 한 강론 제목을 잊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절실한 물음입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요 그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쁨이십니다. 하느님의 우리의 감사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위로이십니다.
하느님 대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넣어도 무방합니다.
바로 이 하느님 중심 자리에,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 자리에 그 누구를, 그 무엇을 놓을 수 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택하여 살려고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말은 생명을, 사랑을, 희망을, 평화를, 기쁨을, 감사를 선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 탓없이 타고난 것들, 바꿀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여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지옥체험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선택하여 지옥과도 같은 세상 우상의 노예살이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주님은 이점을 강조합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수는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 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할 때 행복에로의 천국문이, 재물을 선택할 때 불행으로의 지옥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재물로 인해 부자지간, 부부지간, 형제지간이 풍비박산 원수가 되는 경우, 주변에서 많이 목격하지 않습니까?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하느님 믿음임을, 하느님 중심의 삶임을 절감합니다..
둘째, 기도의 선택과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기도와 삶의 일치가 바로 답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의 기도가 날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바로 여기 수도자들의 삶을 보면 단박에 드러납니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하느님으로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끝나는 기도와 하느님은 수도자는 물론 모든 믿는 이들의 존재이유입니다.
기도없는 삶은 눈먼 맹목의 무지의 삶이고, 삶이 없는 기도는 공허할 뿐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둘중 하나입니다. 주님을 닮은 기도한 얼굴인가, 주님을 닮지 않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일 것이며 그대로 그 얼굴로 심판과 구원이 결정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권고도 온통 기도에 집중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하나하나를 향한 당부처럼 들립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서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매일, 평생 저녁 성무일도시 독서후 응송 다음 아름다운 계응송이 생각납니다.
“주님께 올리는 나의 기도 분향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제사같게 하옵소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참으로 향기롭고 아름다운 분향같은 삶으로, 저녀제사같은 삶으로 변모시켜주십니다.
셋째, 지혜로운 삶입니다.
기도의 열매가 사랑과 회개요 지혜와 겸손입니다.
기도할 때 탐욕에서 해방되니 무욕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약은 집사의 비유가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이 됩니다. 그의 사기수법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했을 때 민첩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에도 신속 민첩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 지혜도 빛납니다.
삶의 위기에 처한 그의 미래에 대한 대책에 주인도 내심 묵인하며 흡족해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할 수는 없고, 약은 집사는 스스로 알아서 눈치 빠르게 살길을 타개하여 주인인 자신의 부담을 덜어줬으니 내심 고마운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불의한 집사가 미련하여 해고당한 후의 미래 대책이 없었다면 주인의 마음도 몹시 불편했을 것입니다. 묵상하건데 이 약은 집사는 하느님으로 상징되는 주인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을 깊이 알고 믿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상징하는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했으니 그가 영리하게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니, 빛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의 분발을 촉구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지혜롭게 관리할 것을 조언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맏아들에게 하여라.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불의한 재물을 잘 관리하여 가난한 이들이나 불우한 이들과 자선의 나눔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충고며, 바로 이것이 참 지혜로운 사랑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부자라면 구원의 천국문은 자연스럽게 통과할 것입니다. 바로 1독서에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가 개탄하는 부자들, 탐욕에 눈먼 참 회개가 절박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이어 주님은 부자들의 만행을 지적한 후 이들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예나 이제나 우리의 절박한 물음은 동일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과 기도, 그리고 지혜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특히 없는 이들,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사랑입니다. 바로 날마다 바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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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16,8)
<영리한 대처!>
오늘 복음(루카16,1-13)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어떤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주인이 집사를 불러 말합니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루카16,2)
그러자 집사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자기 마음대로 탕진해 줍니다. 집사가 그렇게 한 것은 주인으로부터 쫓겨난 후에 살기 위한 처사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주인으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아도 부족할텐데, 주인은 오히려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이유는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인 약은 집사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영리한 대처'입니다. 오늘 복음은 불의한 집사가 살아남기 위해 행한 '약은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이제와 영원히 천국에 들어가려면 약은 집사처럼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그렇게 영리하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이제와 영원히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살기 위해 영리하게 대처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두의 구원을 위해 영리하게 대처하고 있는가?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모두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을 내어 놓고 있는가?
"그러나 사랑은 소금처럼 자기를 녹이는 아픔이 있네. 그러나 사랑은 촛불처럼 자기를 태우는 슬픔이 있네."('봉헌' 노랫말 中에서)
율법의 완성인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지금 여기에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 소금이 되는 사랑, 촛불이 되는 사랑을 하는 것!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영리한 대처'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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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dLbvJn8n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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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오곡백과 영그는
이 계절에
순교자들 대축일을
감사로이
맞이한다.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이 땅을 물들인다.
간절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만나는
시간이다.
순교는
자기혁명이다.
자아 중심에서
벗어나는
가장 뜨거운
혁명이다.
이기적인 욕망을
하느님 중심으로
바꾸어 놓는
가장 위대한
순교이다.
실천성과 만남은
이렇듯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신앙이 응집되고
결집된 결정체가
바로 이 땅의
순교자들이
보여주셨던
신앙의
삶이었다.
이렇듯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궁극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우리들의 삶을
이끌어주는
십자가를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
배우게 된다.
왜 사느냐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배우게 된다.
참된 진리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다.
이 땅에
거룩한 사랑이
우리 선조들을 통해
실현되었다.
이 땅의 소중하신
순교자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선물은
올바른 실천이다.
참된 양심의
실천이다.
믿는 우리들의
삶으로
드러내야 할
사랑의 실천이다.
정신적 자유를
향한
신앙의 여정은
소요돌이 치는
그 한가운데를
아프게 지나왔다.
이 땅의 순교는
닫힌 믿음이 아닌
하느님과
사람에게 활짝
열려있는
실천의 횃불이
되셨다.
오늘을 사는
가톨릭 신앙인들은
어떠한 복음의 실천을
후손들에게
남겨줄 것인가를
묻게된다.
삶의 변화
존재의 변혁이
필요한 시대이다.
기도와 실천으로
탄생되는
일상의 순교이다.
하느님을
위하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한 실천이
되었다.
작은 실천들이
모여 완성되는
참된 사랑
뜨거운 순교이다.
이 땅의
순교자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 자신부터
새로워지기를
다짐하며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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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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