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3.1절이 돌아오면 이런 저런 생각에 잠깁니다. 우리 나라는 어떻하다가 식민지가 됐으며 또 힘들게 독립을 이뤘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구도속에 또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가 됐을까 하고 말입니다. 또 36년간 일제강점기속에 국민들은 얼마나 힘든 세월을 보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그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들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쳤지만 그 후대들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서울에서 일제 강점기와 관련된 독특한 장소가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송월동에 있는 월암근린공원입니다. 이곳에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고 위했던 영국인 베델선생의 집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 바로 옆에는 친일작곡가로 오명을 남긴 홍난파의 가옥이 존재합니다. 이 근처에 김구선생이 암살당한 경교장이 있습니다. 홍난파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서대문 형무소가 있습니다. 홍난파의 집터가 조금 높아 예전에는 아랫쪽 서대문 형무소가 훤히 내려다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가려져 있긴 하지만 말이죠. 그래서 이 월암근린공원에 가면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먼저 베델선생의 집터부터 보기로 합니다.어니스트 베델은 1872년 영국 출생으로 16살때부터 일본에 거주하며 무역업에 종사했습니다. 이후 일본내에서 분쟁으로 인해 사업을 접었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직에 지원한 뒤 1904년 32살때 조선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당시 세계의 최대 주요 뉴스였던 러일전쟁의 취재를 위해서였지만 베델특파원의 눈에는 일제가 조선을 처참하게 괴롭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일본에 거주했을 때는 발견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정의롭게 살고 싶은 베델 특파원은 일제의 조선 침략상을 고발하기로 굳게 결심합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 양기탁 선생과 함께 <대한 매일신보>를 창간합니다. 당시 조선인들보다는 외국인의 신분으로 신문사를 창간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체결되어 있던 영국과 일본의 동맹을 방패로 삼아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일제의 조선 침략상을 소상하게 보도하게 됩니다. 대한 매일 신보는 국내뿐만 아니라 영국 등 외국에도 일제의 조선 침략을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베델선생이 신문사앞에 개와 일본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까지 내걸었던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일본 정부에게는 베델선생은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영국인이어서 감히 과격하게 대하지는 못했지만 영국정부에 베델을 처벌해 달라는 제소까지 했습니다.베델 선생은 조선과 영국을 오가며 재판을 받으면서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결국 베델선생은 1909년 5월 1일 향년 37살의 나이로 별세합니다. 선생은 유언으로 "내가 죽더라도 신문은 살려 한국을 구하게 해야 한다"고 말을 남겼습니다. 시신은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에 안장됐습니다. 베델선생의 묘비에 장지연선생이 비문을 썼지만 일제는 이 비문을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베델선생이 일본에서 귀국해 조선에 머물면서 살았던 집이 있습니다. 32살에 입국해 37살까지 5년을 살았던 곳입니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서울 종로구 송월동 1~2번지입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한양도성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을 것입니다. 서대문을 지나 당시 외국인들과 조선인 집들이 들어서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베델선생이 사망하고 나자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이 선생의 집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베델선생이 얼마나 귀찮은 존재였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지금은 표지석만이 그곳이 베델 선생의 집터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베델선생의 집터에서 불과 30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일제강점기에서 잊으면 안되는 인물과 관련된 가옥이 있습니다. 바로 홍난파 가옥입니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종로구로 들어서는 입구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적벽돌의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1930년대에 지어셨다고 합니다. 이 주변에는 1900년대 초 독일영사관이 있어 독일선교사들의 집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현존하는 홍난파 가옥도 1930년에 독일인 선교사가 지었습니다. 홍난파는 1897년 생입니다. 1941년에 사망했으니 44년 산 것입니다. 홍난파의 본명은 홍영후이고 난파는 그의 호입니다.
홍난파는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습니다. 1935년부터 사망한 1941년까지 6년동안 이 집에 머문 셈입니다. 물론 베델선생과 홍난파는 이 근처에서 만난 적이 당연히 없습니다. 베델선생이 별세하고 난 뒤 그의 집이 일제에 의해 부셔지고 난 뒤 20년후에 이 집이 지어지고 그 뒤 홍난파는 이곳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집 앞에 있는 홍난파의 동상은 수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원래는 서울 여의도 KBS 본관앞에 당당하게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친일파 행적이 낱낱이 드러나자 KBS는 노사합의로 그의 동상을 제거했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결국 이곳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행적이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죽어서도 명성은 커녕 동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것 아닙니까.
서대문 형무소입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옥 언덕에서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 위치하고 있습니다. 불과 500미터 거리입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1908년 조선통감부가 의병 등 반일세력을 탄압하고 수용할 목적으로 만든 감옥입니다. 건물은 본래 아연판을 붙인 판자로 두른 허술한 형태였습니다. 원래 수용인원은 500여 명이었습니다. 그후 1938년에 수용인원은 2,763명으로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이 서대문 형무소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는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유명을 달리한 분들이 많습니다. 정말 일제 강점기때 일제 잔악상을 상징하는 살아있는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홍난파가 자신의 가옥에 머물던 1935년부터 1941년사이에 특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이 많았습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전쟁에 광분된 그런 시기였기에 독립운동가들을 특히 강하게 압박했고 사소한 일에도 형무소에 가두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당시 홍난파는 그의 집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지금은 아파트 등이 가려 서대문 형무소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생존해 있던 그시기에는 정말로 뚜렷하게 서대문 형무소가 바라다 보였을 것입니다. 누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형무소에 갇혀 언제 죽을 지 모를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누구는 일제하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던 것 아닙니까. 저는 이 홍난파가옥을 지나갈 때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형무소에 갇힌 애국 독립운동가들은 그 좁은 감방안에서 그래도 두다리 뻗고 있었을 것이지만 홍난파는 그 편한 집안에서 편하게 두다리 뻗지 못했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아니지요 확신범일 경우 그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미개한 백성들이 세상 이치를 깨닳지 못해 미련한 짓을 하다 형무소에 수감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요. 해마다 이때가 찾아오면 가슴 한구석이 아파오고 후대 사람들인 우리가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인가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2024년 2월 29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