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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20 - 바르샤바 대학교를 보고 나와 걸어서 쇼팽의 집을 찾아 구경하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구시가지 짐코바(잠코비) 광장 Pl. Zamkowy 에 왕궁 Zamek Krolewski을 보고
걸어서 바르비칸 Barbacan을 지나 퀴리부인 박물관 Muzeum Mari Curie 으로 들어가 구경합니다.
성 요한성당 Katedry sw. Jana 으로 입장해 구경하고 나와 예전에 리지비우 궁전 Pa łac Radziwiłłow
이었다는 대통령궁을 보고는 걸어서 국립 오페라극장 Teatr Wielki Opera Narodowa 을 봅니다.
걸어서 근처에 1816년에 찰립되었다는 바르샤바 대학교바르샤바 대학 (Uniwersytetu Warszawskiego)
에 도착하는데 바르샤바 대학교는 마조비에츠키에 바르샤바에 위치한 폴란드의 공립대학교 입니다.
그러고는 시내지도를 보며 다시 걸어서 쇼팽의 집을 찾아가다가 성십자가 성당 Koscioła
Seietego Krzyza을 발견하는데.... 바로크 양식의 성당으로 쇼팽의 심장이
묻혀있으며, 독일군이 교회를 폭파한 후에는 그의 이름이 조각된 기둥 안에 있다고 합니다.
폴란드는 유서 깊은 가톨릭 국가로 바르샤바에는 성 요한 대성당, 성 플로리아노 대성당,
성 십자가 성당, 성 마리아 성당 등 가톨릭 성당도 관광객에게는 훌륭한 명소입니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성 마리아 막달레나 대성당과 성 요한 클리마쿠스 정교회 성당이 있으니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굴욕의 상징이며, 러시아인 관광객 입장에선 조상들이 남긴 정교회 문화재가
있는 곳이고 다른 정교회 문화권(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그리스, 불가리아 등) 관광객들에게는 익숙한 곳입니다.
그러고는 이미 점심때가 지난지라 배도 고프고 또 아침 부터 강행군을 해서 몇시간을
걸으면서 여러 건물들을 본지라 다리도 아프니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대로변에 내놓은 탁자에 앉아 피자 한판에 생맥주를 시켜서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그러고는 드디어 쇼팽박물관 Muzeum Fryderyka Chopina 에 도착하는데 17세기 바로크양식
오스트로그스키히 궁전 안에 만들어진 기념관으로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피아노와
악보등 2천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3층은 콘서트홀인데 생가는 서쪽 50km
젤 젤라조바 볼라에 있으며..... 입장료는 22즈위티라지만 왠일인지 오늘은 받지 않습니다?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폴란드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독립운동가인 쇼팽은 낭만주의 피아노
역사상 프란츠 리스트와 함께 최고의 업적을 이룩했으니 폴란드인이 자부심을 갖고
존경하는지라 공항 이름도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며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유명합니다.
프레데리크 쇼팽은 1810년 3월 1일 프랑스인 아버지 니콜라 쇼팽 폴란드 귀족의 딸인 테클라 유스티나
크시자노프스카 사이에서 1남 3녀중 둘째로 태어났으니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으며,
8살 때는 작곡을 했을 정도라 귀족들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고 폴란드 언론이 "천재는
독일 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 줄 알았지만...... 우리나라에도 태어났다." 라고 극찬했습니다.
1816년 체코계 폴란드인이었던 보이치에흐 지브니 라는 피아니스트에게 배우게 됐는데 훗날
쇼팽이 말하기를, "지브니 선생님 앞이라면 노새도 천재가 될 겁니다." 라고 했으며
1818년에 아달베르트 기로베츠(Adalbert Gyrowetz)의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쇼팽을 보고, 지브니는 더 이상 가르칠게 없다면서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해줍니다.
1825년 중학생 때는 러시아 황제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었으며 이후 피아니스트 바츨라프 빌렘
뷔르펠 (Václav Vilém Würfel) 을 사사하며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후, 1828~29년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빈으로 가서 피아니스트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30년 그를 위한 고별 연주회에 연모했던 콘스탄치아 그와트코프스카
(Konstancja Gładkowska) 가 찬조 출연했는데..... 그의 곡 중 에튀드 3번 '이별의 곡'
과 협주곡 1, 2번은 사실 그녀를 위해 작곡한 곡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빈에 다 가서 카를 체르니, 요한 네포무크 훔멜 등과 교류했지만, 빈의 청중들은 쇼팽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로베르트 슈만은 비평에서 그에게 "모두 모자를 벗어라. 천재가 등장했다." 라는 표현을 써며
쇼팽을 극찬했는데.... 정작 쇼팽은 "슈만은 나를 천치로 만들고 있다." 라고 말하며 마뜩잖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중 폴란드에서 러시아에 대항해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빈을 떠나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을 때 러시아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으니 이때 겪은
분노와 조국과 집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등이 뒤엉켜서 쓴 곡이 에튀드 '혁명'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쇼팽의 집도 러시아군의 약탈로 사라졌고, 러시아군은 피아노까지 도끼로 작살내 땔감으로
썼다는데..... 이를 보고 쇼팽은 자신의 일기에 "하느님, 당신은 러시아인이십니까?"
라고 적으며 울분을 토로했으며 같은 시기에는 술집에서 러시아인들이 하던
"하느님의 최대 실수는 바로 폴란드인을 창조한 거야." 라는 말을 듣는 수모도 겪었습니다.
이후 쇼팽은 프랑스 파리에 갔는데 쇼팽은 폴란드 출신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냈으니 파리의
예술가들과 교류하였으나, 신통치 않은 결과만 얻었고, 당대 최고 피아니스트로 불리던 프리드리히
칼크브레너에게 피아노를 더 배울까 생각했지만 칼크브레너의 피상적인 연주 스타일 때문에
쇼팽이 개성을 상실할까 우려한 친구 프란츠 리스트와 펠릭스 멘델스존, 힐러 등이 만류를 했습니다.
파리에서도 별 소득이 없자 쇼팽은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는중에 귀족들과 유명인사들이 드나
드는 살롱에 소개됐고, 살롱에서의 연주회로 호평을 받아 파리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후대에 널리 알려진 많은 피아노곡을 작곡하게 됐으며, 쇼팽은 꽤나 베스트 드레서
였다고 하며 이따금씩 건반에 피아노 헝겊을 덮고 연주를 하는 묘기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1836년, 드레스덴을 여행하던 중 바르샤바에서 사귀었던 친구의 여동생인 마리아
보진스카 와 다시 만나게 된 쇼팽은 그녀와 비밀리에 약혼했지만, 쇼팽의
건강이 나쁜 것을 눈치챈 보진스카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결국 파혼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마리아 다구 백작부인이 주최한 파티에서 당대 화제의 인물이었던 소설가 조르주
상드 (1804~1876)를 만나 사랑에 빠져 수년간 사귀게 되는데... 상드는
당대에 성공한 소설가로서 문학계에서 상당히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여성 인권 옹호자였고, 남장을 하고 살롱에 출입하며, 남편 외에도 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벌인 여러가지 일로 화제가 되던 인물이었는데, 보수적인 성향이 있던 쇼팽은 그런
상드를 보고 처음에는 싫어했지만, 점점 마음을 열게 됐고 병으로 인해 성적인 능력은
상실한 쇼팽이었지만..... 상드의 헌신적인 돌봄 덕분에 10여년 동안 연인 관계를 지속합니다.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의 관계는 상드의 일방적인 헌신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고 작곡, 연주와 레슨
으로 얻는 수익의 대부분이 상드와 자식들에게 돌아갔으며 반대로 정열적인 팜므파탈 상드가
순진한 쇼팽을 갖고 놀다 찬 듯한 이미지도 널리 퍼져 있는데, 사실 상드도 쇼팽을 많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몸이 약한 쇼팽이 죽을 뻔했을 때 헌신적으로 간호해 살려놨으며 마요르카 섬에서는 피아노를
들여오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생필품을 구입하는 등 생활 일체를 감당했고 수줍음을
타는 쇼팽이 큰 연주회를 앞두고 긴장할 때 격려해주기도 했으니 실제로 상드를
몇년동안 제대로 본 적도 없던 쇼팽의 가족들마저 상드에게 쇼팽을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쇼팽의 건강이 나쁘니 둘은 요양차 1838년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으로 가게 됐으니 그들은 버려진 발데모사
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집에서 지냈는데, 하필 그때 유례없는 추위가 몰려온 탓에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고 말았고 이뿐만 아니라 오두막의 환경이 지하실 내지 다락을 방불케 했을 정도로 최악이었습니다.
심지어 사육제에 코스튬을 한 사람들을 보고 진짜 괴물로 착각했을 정도라는데.... 그런 중에도 쇼팽은
파리에서 마요르카까지 피아노를 옮겨와 수도원에서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했지만 결국
더 못 버티고 이듬해인 1839년 그들은 마르세유를 거쳐 상드의 고향인 프랑스의 노앙으로 옮겼습니다.
노앙으로 옮긴 둘은 그제서야 안정을 찾았으며, 파리와 노앙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지만 그러나 상드와의
관계는 악화됐으니 자유분방한 상드는 쇼팽과의 연애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을
무시했으나, 쇼팽은 그러지 못했고 더군다나 점점 몸이 약해져가는 쇼팽은 갈수록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데, 10년중 자그마치 7년 간 병약해져 잠자리도 같이 못하고 지루한 병 구완에 상드는 점점 지치게 됩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점점 안 좋아지던 시기에 상드는 쇼팽과의 결혼생활을 다룬 소설을 집필했고,
그걸 쇼팽과 지인들에게 낭독했으니 당시 지인들은 쇼팽을 겨냥한 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정작 쇼팽 자신은 몰랐다는데.... 그런 와중에 매달 의사가 왕진을 오고
매년 한번씩 의식불명이나 위독한 지경으로 한 번은 그릇된 부고기사가 나갔을 정도였습니다.
상드의 딸 솔랑주는 조각가 장바티스트 오귀스트 클레쟁제르와 결혼했는데 이 부부는 신혼초
부터 흥청망청 돈을 써면서 탕진하고 빚까지 지게되자 솔랑주 부부는 뻔뻔하게
상드에게 아첨을 떨면서 돈을 요구했는데 상드가 거절하자 갈등이 생겼으며
솔랑주는 상드가 수양딸로 삼았던 여성보다 더 지참금을 적게 줬다고 폭력까지 행사합니다.
결국 솔랑주와 그녀의 남편은 노앙 별장에서 내쫓겼는데, 솔랑주는 당시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흔들림이 심한 일반 마차로 파리까지 가기는 어려웠으니 여관에 머무르면서 노앙 저택에
있는 쇼팽의 고급마차를 빌려달라고 했지만 상드는 거절하자 솔랑주 부부는 절박한 심정
으로 쇼팽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런 정황을 전혀 몰랐던 쇼팽은 마차의 사용을 허락합니다.
상드는 쇼팽이 솔랑주 부부의 편에 섰다고 생각해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고, 쇼팽을 비난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낸후 쇼팽을 떠났고,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나고 말았는데,
쇼팽은 죽기 직전까지 상드와 주고받은 편지를 상드의 머리카락과 함께 보관
했지만 상드는 쇼팽의 편지를 불태워 버렸으며 쇼팽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의 쇼팽의 입지도 좁아져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사정이 좋지 않아 쇼팽은 제자 제인 스털링의 초청을
받아 영국과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가게 됐는데 영국 왕과 귀족, 명사들이 참석한 파티에서 연주를 하게
됐지만, 쇼팽 혼자 어두운 옆방에서 연주해야 했고, 왕과 귀족들은 쇼팽의 연주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쇼팽 정도의 음악가가 한 마디로 배경 음악 취급을 받은 굴욕을 당한 셈인데.... 더욱이 영국의 기후는
쇼팽에겐 치명타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런던에서 어렵게 사는 폴란드인
들을 위해 열린 자선 연주회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는 쇼팽이 대중 앞에서 한 마지막 연주회였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개인교습 말고는 일절 다른 연주 활동도 못할 만큼 중병에 걸려 있었으니 침대
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것도 힘들었고, 누군가 업어주지 않으면 2층으로 올라가지도
못했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면도와 옷매무새만큼은 단정히 했다고 합니다.
쇼팽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첼로 소나타 도입부를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채 다 듣기도
전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연주를 중단시켰고 이후 자신의 아버지가 두려워하던
것과 똑같이 살아있는 채로 묻히는 것을 막아달라는 육필 메모를 남겼으며, 결국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어머니...나의 어머니..." 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쇼팽의 소망대로 지인들은 쇼팽의 장례식 때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려 했지만, 쇼팽의 장례식이 치러질
예정이었던 성 마들렌 성당에서 여가수가 성당 안에서 연주할수 없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됐고..... 다행히 쇼팽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라는 지인들의 설득 끝에 2주만에 성당 측이 양보합니다.
그렇게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는 가운데 쇼팽의 장례식이 치러졌으니 쇼팽의 묘에는 그가
폴란드를 떠나기 전 은잔에 담아온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고, 후에 쇼팽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그의 누이에게 인도되어 나중에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됐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1944년 8월 바르샤바 봉기때 이 성당은 폐허가 될 정도로 포격을 받았으나, 이전에 심장은
무사하게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쇼팽의 심장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도록 한 장본인
은 나치 친위대의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였다는데, 사실은 쇼팽의 심장을 약탈한후 바르샤바 시민
들의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반환한 것이며 전쟁이 끝난 뒤 쇼팽의 심장은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됐습니다.
2014년에 쇼팽의 정확한 사망원인을 연구하기 위해 학자들이 심장을 꺼냈는데 일반적으로 쇼팽이 결핵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부검서에 따르면 의외로 폐보다 심장의 상태가 더 나빴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토대로 쇼팽의 사망 원인이 결핵이 아니라 심장 질환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기 때문 입니다.
성당 측에서는 심장의 보존 문제 때문에 공개를 거부하다가, 결국 심장이 담긴 병을 공개했지만
본격적인 심장 해부 및 조직 검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대신 육안 및 촬영 장비로
겉을 관찰하는 것만 허용됐으니 학자들은 심장에 발생한 심낭염이 쇼팽의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발표했는데..... 하지만 심낭염이 발병하는 원인 중 하나가 결핵 입니다.
그의 연주에는 근본적으로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훌륭해서 그는
정말 완벽한 거장이라고 불릴 만한 무언가가 있다. ― 펠릭스 멘델스존
음악은 정서 영역을 표현하는 신성한 언어. 고향의 뮤즈는 그의 노래를 지시하고 폴란드의 고통스러운 절규는
그의 예술에 신비롭고 정의하기 힘든 시를 선사한다. 이 시는 진정으로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는 그 무엇
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최고 수준의 헌신을 지휘하는 주목할 만한 사람이다. ― 프란츠 리스트
쇼팽은 대단한 인물이다. 피아노만으로 모든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 클로드 드뷔시
쇼팽, 리스트, 탈베르크 중 파리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던 것은 탈베르크였을 것이다. 탈베르크의 연주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노력을 통해 도달할수 있는 경지지만, 나머지 두명은 그렇지 않으니까. ― 찰스 할레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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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거운 시간되세요
쇼팽.............. 옛날부터 많이 들었던
이름이고 또 파리의 묘지에서 그의
무덤을 보았는데 오늘에사 찾아 보았습니다.!
37살에 결핵으로 요절
하아..... 그참! 일찍 갔네요?
하기사 조선의 이상(김해경)은
27살 꽃다운 나이에 죽었습니다만.....
@바이칼3 허난설헌과 남이도 27살에 갔어요
@삼광빌라 아???? 저런.....
아까운 청춘들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