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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21 - 쇼팽의 집을 보고는 나와 걸어서 국립 미술관에서 샤갈을 만나다!
5월 11일 바르샤바 구시가지에 왕궁 Zamek Krolewski 을 구경하고는 걸어서 바르비칸
Barbacan 을 지나 퀴리부인 박물관 Muzeum Mari Curie을 구경한후 성 요한
성당을 보고 대통령궁을 지나 국립 오페라극장 Teatr Wielki Opera Narodowa 을 봅니다.
바르샤바 대학교바르샤바 대학교를 구경한 후에 성십자가 성당 Koscioła Seietego Krzyza 을 거쳐
피자 한판에 생맥주를 시켜 점심을 떼우고는 쇼팽 박물관 Muzeum Fryderyka Chopina
에 도착하여 들어가는데 17세기 바로크 양식 오스트로그스키히 궁전 안에 만들어진 기념관 입니다.
쇼팽이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피아노와 악보등 2천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3층은 콘서트홀
인데....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폴란드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독립운동가인 쇼팽은
낭만주의 피아노 역사상 프란츠 리스트와 함께 최고의 업적을 이룩했으니 폴란드인이 자부심을
갖고 존경하는지라 공항 이름도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며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유명합니다.
쇼팽은 일평생 거의 피아노를 위한 곡만을 작곡했는데 가곡이나 다른 악기를 위한 곡등 다른 장르의 작품도
있긴 하지만 피아노 곡이 핵심이라고 할수 있으며 또한 첼로 소나타나 가곡이라 하더라도 피아노가
들어가는데, 당대는 낭만주의 음악의 시대였음에도 쇼팽은 낭만주의로 평가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초기에는 낭만주의자로도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의 대담한 전조나 당시 절대적으로 기피됐던
불협화음, 생소한 기교 등은 그를 음악사에서 완전한 돌연변이로 만들다시피 했고 심지어
그를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음악가로 오해하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의 음악은 당시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음악이어서 그와 비슷한 곡을 작곡한 몇 사람은 사후
쇼팽과 대등한 명성을 얻기도 했으니 대표적으로 고트샬크와 스테판 헬러가 있지만 오늘날엔
쇼팽이 낭만주의 작품의 대명사 처럼 불리며, 대중들이 가장 잘 아는 낭만주의 피아노 작곡가 입니다.
피아노로 다양한 음색을 구현하기 위해 페달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 장식음이 대부분
기교적이기만 한 악절 정도로 취급됐던 당시 쇼팽은 장식음을 기능적
으로 사용하여..... 선율의 하나로서 취급하여 루바토 기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쇼팽의 생전에는 작품이 대중에게 널리 인기를 끌지 못했으니.... 당시 악보 업계에서 원하던
피아노곡은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아마추어들도 어렵지 않게 연주할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피아노가 중산층 가정에 빠르게 보급되던 시점이었지만 아직 라디오, 전축이 나오기 이전이었고
피아노가 오늘날의 오디오 기기 역할까지 도맡던 상황이었으니, 쇼팽은 당시 악보 업계에서
원하던 종류의 곡을 작곡하기 보다는..... 내면성, 임기응변을 중시하는 비전통적인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동시대 작곡가이자 쇼팽의 동료 리스트의 음악에 비해 난이도 면에서는 어렵다는 평가를 하지않는듯 하지만
피아노를 치다가 피아노를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애매하게, 왠지 모르게 어려운 패시지가
눈에 엄청 자주 뛰는데.... 리스트와는 다르게 왠지 어렵게 들리지는 않으나 상당히 어려운 곡들이 많습니다.
리스트의 작곡 스타일 자체가 웅장한 효과, 화려함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악절들을 상당히 많이 썼으니 나쁘게
말하자면 곡 전체에 있어서 안 써도 될 부분을 남발했다는 점인데, 쇼팽은 그런 악절들을 거의 쓰지 않았고
기교 자체를 중시하는게 아니라 내용적 측면에서 기교적인 악절을 단순히 도구로 취급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리스트 보다는 기교적인 효과를 중시하는 악절들이눈에 덜 띄거나, 어떤 부분은 단순하게 봐선 어려운 악절
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렵게도 쓰여있으니 그런 면에서 슈만이나 쇼팽의 몇몇 곡들은 치기 매우
어려운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악보를 읽고 손놀리는 부분을 익히는 데에서만 어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쇼팽은 관현악에 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서 그런지 오케스트라 부분은 다소 미숙한
면이 느껴지는데,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일부러 피아노 파트를 화려하게 전개한 것으로
보이니 실제로 돈 조반니 변주곡, 2개의 협주곡 등에서 그런면을 찾아볼 수 있으며, 연주회용
알레그로에서도 원래 협주곡 계획이 있었던 만큼 기교적으로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쇼팽은 자신의 일생 동안 바흐와 모차르트를 가장 존경하며 추종했으니 세계 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인 바흐와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의 치밀함과 완성도처럼 쇼팽의 곡도
구조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한 음이라도 틀릴시 틀렸다는 티가 바로 나니 바흐의
완벽한 음악 체계를 자신의 음악으로 끌고 와서 새로운 피아노 테크닉을 만들어냈습니다.
오죽하면 제자들에게 “손가락 연습을 하려면 바흐의 곡을 통해 테크닉을 기르라” 라고 말했을 정도이며,
모차르트의 영향력도 이에 못지 않은데,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 나오는 아리아 내게 손을
주렴 (La ci darem la mano) 이라는 곡을 자신이 피아노 변주곡(Variations) 으로 새롭게 작곡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완벽하고 천재적인 음악성은 쇼팽의 피아노 창작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유명한
쇼팽의 어록 중 하나가 “모차르트는 음악 창작에 있어 전 영역을 아우르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단지 내 부족한 머리로 건반에 손을 대는 것일 뿐이다.” 이다.
또한, 자신의 장례식에 반드시 단 하나의 곡만을 꼭 연주해 달라고 지인들에게 사실상 유언인
부탁을 했는데 그 곡이 바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니, 쇼팽이 죽고 나서 약
3,000여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그 가운데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됐고
그만큼 쇼팽은 음악 창작과 자신의 일생에 있어 바흐와 모차르트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연습곡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의 곡과는 거의 완전히 다른 기법과 기교를 사용했으니 구세대식
교육을 받긴 했지만 훌륭한 예술가였던 모셀레스는 한때 그의 연습곡을
쳐보곤 '기교적으로 어렵고 비예술적인 부분에서 나의 손가락은 돌아가지 않았다.' 라고 썼습니다.
쇼팽은 그의 곡을 자신이 직접 연주하면서 악기로서의 피아노 연주 방식을 고려하지 않아 불가능해 보이는
부분과 비예술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어떤 식으로 가능하게 연주할수 있고 비예술적인 부분이 아니라는걸
증명해 보였으니 모셀레스는 쇼팽이 연주하는 그의 곡을 듣고 다시한번 전적으로 그의 곡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슈만도 그의 음악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평론가와 음악가들은 쇼팽에게로 돌아섰고, 그가 완성하고 제시한
테크닉은 리스트에 의해 보급되고 향상되어 낭만주의의 중추 역할을 하게됐고 그의 스타일은 스크랴빈,
라흐마니노프 등에 의해 응용됐으며 고도프스키는 독자적인 기술과 음악의 세계를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쇼팽이 옷을 잘입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다가....... 동아일보 이은화
미술시간에 나오는 “교양 있는 남자”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메디치 가문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후원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산드로 보티첼리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가장 많이 받은 화가였다.
올해 1월 그의 초상화 한 점이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9220만 달러(약 1089억 원)에
팔려 화제를 모았다. 도대체 그림 속 남자는 누구고, 무엇 때문에 그토록 고가에 팔린 걸까?
초상화 속 모델은 메디치 가문의 젊은 남자로 추정된다. 보티첼리의 또 다른 그림 ‘코시모 데 메디치 메달을
든 남자의 초상’과 구도 및 표현 방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남자가 입은 튜닉은 성직자 옷처럼 단순
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상당히 값비싼 의상으로 푸른색 원단은 당시 피렌체에서 매우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부와 권력을 쥔 메디치 가문 사람이 아니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고급 의상인 것이다. 남자가 손에 든 원형 메달
속엔 14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바르톨로메오 불가리니가 성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메디치가 청년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부를 과시할 수도, 남성성을 강조한 이미지로
권력과 힘을 드러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책을 들고 지식인임을
강조할 수도 있었을 터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그림을 든 예술 후원자 모습이다.
화가는 당시 피렌체 상류사회가 지향했던 아름다운 이상을 이 초상화에 담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술을 아는 교양인만이 피렌체의 지배자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티첼리는 신화나 성경 이야기를 담은 대형 그림을 많이 그렸다. 초상화는 10여 점밖에 남기지 않았다.
이 그림이 비싼 이유는 르네상스 황금기를 대표한 화가의 명성, 그의 초상화라는 희소성, 시대의 이상을 담은
주제, 메디치가의 남자 초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40년 동안 보티첼리 걸작으로 세계 주요 미술관
에 전시되기만 했지, 시장에 나온 적도 없었다. 부호 컬렉터들의 소유욕을 자극하기 충분한 명작인 것이다.
쇼팽이 프랑스에 머물던 2차 세계대전에 자유 폴란드군은 노르망디를 비롯 좋게 말하면 전투의 결정적인
국면에, 다르게 말하면 제일 힘들고 어려운 국면에 투입되곤 했으니.... 노르망디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을 자루 속에 가두었고 독일군은 유일하게 남은 탈출구로 거세게 달려 나갑니다.
압력과 저항이 엄청난 자루의 끝을 묶는 임무에 투입된 부대는 폴란드군 이었으니
그렇게 악착같이 싸웠음에도 폴란드군은 나라를 잃은 상태였기에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없었으니, 이후 자기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지도
못했으며 생존한 폴란드군과 폴란드 국민은 종전 후에 더 큰 비극을 겪게 됩니다!
최근 우리나라가 폴란드에 수출한 K2 전차, K9 자주포 초도(1차) 물량이 도착했을 때 대통령이
바르샤바에서 차량으로 4시간 거리에 있는 항구 부두에까지 직접 나가 환영식(인도식)
을 해서 화제다. 이번에 도착한 한국산 무기는 K2 전차 10대, K9 자주포 24문이다.
우리가 수출하는 전체 물량(K2 전차 1000대, K9 자주포 672문)에 비하면 극히 작은 규모다.
보통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무기체계가 본격적으로 전력화됐을 때 행사에 참석해왔다는 점에서
이런 경우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며칠 뒤 열린 K2 전차의 폴란드
일선부대 (20기계화보병여단) 인도식엔 폴란드 총리와 부총리가 모두 참석했다. 얼핏
보면 다소 과도해 보이는 듯한 이런 모습은 폴란드의 아픈 역사를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때 폴란드인들은 무엇보다 2차 대전 때의 악몽을 떠올렸다. 우크라이나
침공이 강 건너 불이 아니라고 판단한 폴란드는 자국군이 운용 중이던 전차, 장갑차, 자주포 등을
대거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이에 따른 주력 무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무기 도입을
서둘렀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 “수개월 안에 1차 무기를 제공할 수 있다” 며 나선 한국이었다.
그러고는 쇼팽 박물관을 나와 다시 걸어서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으로 찾아가는데 건물
의 담장에는 샤갈 그림 포스터들이 붙어잇어 마음을 설레이면서 들어
가니..... 엉뚱하게도 여기는 전투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 합니다.
그러니까 여긴 폴란드 육군박물관이니 전설적인 폴란드 후사르(윙드 후사르)가 갖추었던 군장
을 전시하고 있으며 폴란드 왕국, 연방, 제2공화국 시절의 무기와 군장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근현대 이전까지 각국의 영향을 받아 서유럽, 러시아와는 확실히 차별화된 특색이랍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후라 박물관 입장 마감시간이 다 되어 가는지라 원래 게획한 국립박물관에
가서 샤갈을 보는게 우선이니 발걸음을 달려 근처에 있는 국립 박물관으로 찾아갑니다.
중후한 건물의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Muzeum Narodowe 은 그리스 로마 비잔틴
미술품과 폴란드 미술을 전시하고 있는데 입장료는 20 즈위티 입니다.
국립미술관으로 들어가니 엄청 넓은 건물에 회랑과 홀이며방마다 많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옛날 그림들이 다수라 구경할만 합니다.
그러고는 밖에 포스터들에서도 보았듯 오늘은 샤갈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고 했으니 물어서 샤갈의 그림을 전시하는 곳을 찾아갑니다.
샤갈은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화가. 밝고 몽환적인 초현실주의 그림들로
유명하며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술은 내적 존재에서 외부로 나온 것이며, 보이는
사물에서 육체적 결과물로 나온 것이라 생각해 실제 사물을 표현하는 입체파와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판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걸작 동판화를 남겼으니 그의
작품은 러시아계 유대인의 혈통에 흐르는, 대지의 소박한 시정을 담은 동화적이고
자유로우며 환상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농부·산양·닭과 같은 제재를 많이 취급합니다.
1887년 7월 7일에 러시아 제국 리오즈노에서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 9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아버지는 청어 상인 밑에서 일을 했고, 어머니는 집에서 야채를 파는
형편이라 이후 샤갈은 "존경받지 못하는 그의 아버지를 " 생선을 등장시켜 표현합니다.
1906년 러시아제국 수도이자 예술 중심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갔으니 그곳에는 유명한 예술학교
들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통행증이 없으면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친구에게서 임시통행증
을 얻어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샤갈은 2년 동안 공부하며 자연주의적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1908년부터 3년간 샤갈은 짜반체바 미술학교에서 레온 박스트에게서 공부를 했으니 실험극장과 폴 고갱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박스트도 유대인이었으며, 장식예술 디자이너 였고, 유명한 발레 무대배경과
의상 디자이너였으니 샤갈은 박스트를 성공한 유대인의 롤모델로 삼았는데 1년 후 박스트는 파리로 이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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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샤갈은 여기저기서 많이 보네요.
감사합니다
퀴리 부인과 쇼팽에
그리고 샤갈을 봅니다!
바르샤바 시내에서.....
내가 웃어야 내 행운도 미소짓고,
나의 표정이 곧 행운의 얼굴이다.
여유를 찾는 행복한 시간 만드시길 바랍니다.
당신에게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지요?
웃으면서 여유를 갖고 살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