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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22 - 국립박물관에서 샤갈을 만나 규슈 유후인의 샤갈 미술관을 떠올리다!
5월 11일 바르샤바 구시가지에 왕궁을 보고 바르비칸을 지나 퀴리 부인 박물관을 거쳐
성 요한성당과 대통령궁을 지나 국립 오페라극장을 보고는 바르샤바 대학교를
구경한 후에 걸어서 성십자가 성당을 거쳐 피자 한판에 생맥주를 시켜 점심을 떼웁니다.
그러고는 쇼팽 박물관 Muzeum Fryderyka Chopina 을 구경하고는 나와 다시 걸어서
중후한 건물의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Muzeum Narodowe 에 들어가니
그리스 로마 비잔틴 미술품과 폴란드 미술을 전시하고 있는데 입장료는 20 즈위티 입니다.
거리의 담장에서 포스터를 보았듯 오늘은 샤갈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고 했으니 물어서
샤갈의 그림을 전시하는 곳을 찾아가는데...... 샤갈은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화가로, 밝고 몽환적인 초현실주의 그림들로 유명하며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판화에도 재능을 보녀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걸작 동판화를 남겼으니 그의 작품은 러시아계
유대인의 혈통에 흐르는, 대지의 소박한 시정을 담은 동화적이고 자유로우며 환상적인
특색을 보이며 농부·산양·닭과 같은 제재를 많이 취급하며 1906년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자 예술의 중심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해 짜반체바 미술학교에서 공부합니다.
샤갈은 1910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는데, 고향 근처의 비텝스크를 갔다가 벨라
로젠벨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으니, 샤갈은 "나의 삶"이 라는 글에서 그녀와의 첫만남
을....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내 어린 시절과 부모님,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수 있는 것 같았다."
1910년에 샤갈은 미술을 배우러 파리로 갔는데 당시 파리는 입체파가 지배적이었으며, 19세기풍의
그림이 유행하고 있었지만 샤갈은 이미 러시아에서 잘 익은 색채 재능과 신선하고 대담한
반응, 시에 대한 느낌, 그리고 유머를 갖춘 채였으니 입체파와는 상반되는 예술 철학에
주류에서 벗어나 당대의 시인들에 비추어 평가받았고, 다른 아방가르드 유명 인사들과 교류합니다.
파리에서 우수한 화가들이 가르치는 <라 팔레트> 에 등록을 했으며, 또한 다른 아카데미
에서 작품들을 찾기도 했으니 여유 시간이 있으면 갤러리나 살롱, 그리고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렘브란트, 르넹 형제, 샤르댕, 반 고흐, 르노와르, 피사로, 마티스,
폴 고갱, 쿠르베, 밀레, 마네, 모네, 들라크루와 그리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합니다.
그는 종종 몽마르뜨를 방문했고, 파리지앵으로 숨쉬는 것을 행복해 했으니 샤갈은 파리에서 예술가로서의
꿈을 이룰 수 있었지만 도시의 외로움과 언어의 장벽에 괴로워했고 얼마간은 다시 러시아로 돌아갈
고민도 했으며, 그림을 그리면서도 러시아 민속과 유대인으로서의 삶, 가족 그리고 벨라를 그리워했습니다.
벨라를 그리워하던 그는 마침내 베를린에 있는 유명한 예술 딜러의 작품 전시 초대를 받아들여 1913년
9월 베를린에서 개인전시회를 열어 《내 약혼녀에게》, 《골고다》, 《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를 전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14년 6월 허바스 발덴 슈트름 갤러리에서 작품을
선보이고는 화가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니 . 이 전시회는 성공적이었고 독일 평론가들은 호평했습니다.
전시회가 끝난 후 1914년 러시아로 가서 벨라와 결혼을 위해 비텝스크에 머물게
되는데..... 그러나 몇 주 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아의
국경이 봉쇄되어 버렸으며 1915년 벨라와 결혼하고 그해 첫 딸 이다를 가집니다.
결혼전 샤갈은 부유한 유대인인 그녀의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애를 먹었는데 그녀의 부모는 가난뱅이 출신
의 화가가 그들의 딸을 부양할수 있을 지를 염려하였으며, 하지만 결혼으로 인해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샤갈의 정신은 대단히 안정되었으니 당시 그림에는 몽환적인 젊은 연인들을 화폭에 담고 있습니다.
1917년의 10월 혁명은 역시 예술가로서 위험한 시기였으니.... 샤갈은 소련이 세워진 1922년에
고향을 포기하고 벨라와 함께 베를린을 통해 파리로 온후 야수파의 색채를 자기 나름대로
이용해 아름답고 아담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선명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이며 신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1939년 샤갈은 카네기 상을 수상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1년에는 나치의 탄압을 피하여 미국으로
갔으며 1944년 9월 2일, 아내 벨라가 갑작스런 감염으로 죽게되니 몇 달 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
하게 되고 그가 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는 아내를 회고하는 작품을 가장 먼저 시작하게 됩니다.
1947년, 샤갈은 프랑스로 돌아와 사랑과 기쁨에 넘치는 명작을 계속 그렸으니.... 1952년,
60세의 샤갈은 딸에게서 소개받은(!) 유대인 여성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와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샤갈은 그녀와 그리스 여행을 다니면서 다시 활력을 찾습니다.
1960년, 샤갈은 에라스무스 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당시 프랑스 정부 내에서 샤갈도
친분이 있었던 앙드레 말로는 가르니에 궁의 천장화를 샤갈에게 요청했고
이것은 1964년에 완성되었으니 나는 저 작품을 보면서 그저 놀랄뿐 이었습니다.
1966년, 샤갈은 17점 연작 《성경의 메시지》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고 1973년, 86살
생일에 니스 시는 〈샤갈미술관〉 을 개관하였으며, 1985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무덤은 이후 주변 생 폴의 유대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히브리 자음과 라틴 모음을 섞어서 שAגAל 로 적은 서명을 볼 수
있으니 흑백의 세로 줄무늬가 들어간 마치 죄수복 처럼 생긴 옷을 즐겨
입었는데 바로 수용소나 유대인 구역에서 강제로 입히던 옷의 패턴이라고 합니다.
유대 혈통이라고 다 유대교도는 아니나, 샤갈은 열성적인 유대교 신자였으니 만년에는 더욱 유대교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아 생전 수많은 구약의 인물과 사건을 그림으로 남겼으며, 이스라엘 정부의
주문을 받아 관공서나 유대교당에 대규모의 태피스트리(걸개그림),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남겼습니다.
회화 작품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판화 작품도 많으니 볼록판(릴리프)은 드물고 대부분이 요판화인
드라이포인트와 평판화인 리소그래프 작품인데, 원판이 살아 있으면 얼마든지 다시 찍어낼수
있다는 판화 작품의 특성상, 사후에 찍어낸 샤갈 재단 공인 판화의 경우에는 매우 저렴하게
구입할수 있으니 A1 크기의 판화가 액자 포함 70만원 선이며 노년에는 도자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벨라루스 태생의 러시아계 유대인 출신 프랑스 화가였던 점 때문에, 벨라루스·러시아·프랑스 3국
에서 서로 자기 나라 위인이라고 주장하며 심지어 이스라엘의 몇몇 극우 인사들조차
샤갈을 자기네 위인이라고 주장하는데.... 독일·스위스·미국에서 서로 자기나라
위인이라고 주장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도 비슷하니 공교롭게도 이쪽 또한 유대인입니다.
그의 그림에는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가의 이미지가 종종 보이는데....
1971년 영화 로도 나온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그 제목과 작중 등장
하는 관념적 존재 '피들러(바이올린 연주자)' 의 이미지를 여기서 따 왔다고 합니다.
이전 세대 대부분의 화가들이 요절하면서 단명한 것과 다르게, 100살 가깝게 장수한 사람
이니 심지어 장수한 대표적인 미술가인 파블로 피카소 보다도 오래 살았는데,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텝스크는 벨라루스의 도시인데, 샤갈은 죽을 때까지
고향을 방문하지 못하고 그 곳을 그리워하며 고향의 풍경을 작품에 담았다고 합니다.
오늘 여기도 샤갈의 그림들이 많이 보지만 몇 년전에 일본 규슈 유후인(湯布院)을 찾았
을때 몽미술관 (夢 美術館)을 구경하고 몇 걸음을 걸어서 마르크 샤갈 유후인
긴린코 미술관 マルクシャガ-ルゆふいん 에서 샤갈의 그림들을 본게 떠오릅니다.
이 미술관에는 샤갈의 작품 38점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꿈, 여자, 개, 새, 괴물, 말,
서커스.... 사실 나야 그간 수십차례 세계여행에 미술관을 100여곳 훨씬
넘게 들렀지 싶은데, 워낙 미술에 대해 기초가 없는 탓에..... 그림 보는 눈이 낮다 보니!
처음에는 샤갈이라는 선입견 이 없다면.... 이건 초등학생들이 낙서 했나 싶은 데!!!
궂이 이해를 할려고 노력하자면.... 꿈과 서커스 가 가장 큰 소재인 듯 싶네요!
당시 그림들을 보면서 김춘수 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을 떠올렸습니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
이 시는 1980년대 군부 독재의 그 암울한 시절에 이국의 어느 마을을 동경하며
“이룰 수 없는 꿈”을 “샤갈의 시”에서 보았다고 느껴진다고 합니다.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은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에서 태어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의 황실 미술학교를 다녔으며 이후 프랑스에 유학해 피카소와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으니
20세기 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작품으로 오랜동안 사랑을 받아온 작가라고 합니다.
20세기초 유럽 미술계에서는 표현주의, 입체파, 야수파, 추상주의, 초현실주의등새로운 사조
들이 정립되는 데 그는 야수파의 색채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했으며 이후
1922년에는 파리로 돌아와서 프랑스에 귀화하고는 선명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이며 신비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샤갈 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원근법 탈피와 화면의 통일성 등 그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독창적이면서 환상적인 작품 을 창작해 왔다고 하는데...
마르크 샤갈은 현대인들의 정서에 꿈과 환상을 안겨주는 작가로서 삶의 즐거움,
성공, 행복한 꿈을 그려내는 화가로 평가 받게 됐다고 합니다.
나야 뭐 허영심 은 있는지라.... 지금껏 여행시 으례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수없이
미술관을 들락 거렸건만 워낙 눈이 어두우니, 그저 아이들 그림 만 같으니!!!
그러고는 국립 박물관을 나와 네거리에 잠시 망설이는데..... 원래 계획으로는
여기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서 와지엔키 공원을 찾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걸어서 그 남쪽에 자리한 빌라누프 궁전을 보는 것이었는데.... 궁전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당시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자신의 왕비를 위해 지은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오후 늦은 시간인지라 사람들에게 물어서 버스를 타고 어렵게 찾아
간다고 해도 이미 입장시간이 늦어 들어갈수는 없는지라 포기합니다.
그러고는 오른쪽 대로를 걷는데 여긴 바르샤바의 신시가지로....
신세계 거리 Nowy Swiat 라고 불리는 현대적인 거리 입니다.
여기 신세계 거리는 이름 그대로 최고급 부띠크가 밀집된 쇼핑가로 파스텔톤의 산뜻한 건물들
앞에 가로등과 꽃으로 장식된 거리에는 고전풍의 17세기에 레스토랑도 있다고 합니다.
20여분을 걸으니 드디어 저만치 하늘 높이 치솟은 문화과학궁전이 보여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저긴 어제 본
곳이라 그 옆에 자리한 쇼핑몰 Złote Tarasy 에 들를까 하니 마눌은 여긴 비쌀 것이라며 소매를 잡아 끕니다.
그러고는 다시 10여분을 더 계속 걸어서 내려가서는 대로를 건너서 어느 가게로
들어가 선물할 물건들을 고르는데..... 그러고는 나와서 우리 호텔로 돌아와
하룻밤을 자니 텔레비전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기사가 도배하다 시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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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겸손(謙遜)과 배려(配慮)와 사랑으로 사는 삶속에
화가 날 때나, 언행을 조심해야 할 때,
참아야 할 때, 기다려야 할 때,
"삼세번 을 생각하고,
3초, 3분, 3시간, 3일, 3개월, 3년이 지니는
존재의 힘을 활용해 지혜롭게 살아가는 삶이면 좋겠다.
고맙습니다.🎋🎋🎋🎋🎋🎋🎋🎋
화가 날때 참는다는게.....
지나고 나서 보면 그게
옳았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규슈 유후인 온천에서도 샤갈을 만날수도
있으니..... 그럼 그리 멀리 있지는 않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