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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8일(화)
* 시작 기도
주님...
날씨는 여전히 차겁지만 심령은 주님의 따스한 품안을 기억하여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밤새 오염된 내 영혼을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사모하여 나아가는 이 영혼의 걸음을 주의 강한 손으로 장악하여 주시고 이 하루도 주님의 기뻐하신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거룩한 불구자,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으로 조명하사 주의 말씀을 비춰주소서.
통속적인 신앙체계에서 초월의 신앙으로 올라갈 수 있기 원하여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나이다.
이 종을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욥 40:6-24
제목 : 통속적인 신앙에서 초월의 신앙으로 올라가다.
6.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9.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소리를 내겠느냐?
10.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11.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12.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13.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14.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14.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15. 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고
17.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으며
18.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막대기 같으니
19.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20. 모든 들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21. 그것이 연 잎 아래에나 갈대 그늘에서나 늪 속에 엎드리니
22. 연 잎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그를 감싸는도다.
23.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24.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
* 나의 묵상
욥은 땅에서 난 자 중에서 가장 의롭고 정직한 자이다.
하늘의 하나님이 ‘그의 의’를 인정하시고 자랑하셨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에 대한 하나님의 제한적 허용에 따라 ‘그의 의’는 시험대에 오른다.
그것은 경건한 삶이 현세적인 보상을 가져오는 것인가에 대한 시험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것인가에 대한 시험이다.
욥과 세 친구들이 경험한 통속적인 신앙은 경건과 보상의 관계가 일치한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에게 현세적 복락을 주시고 불경건한 자에게 현세적 재앙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적 공의의 한계치이다.
그래서 의인으로서 재앙을 당하고 있는 욥은 자신이 당한 현실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욥은 심히 번민하며 궁구하며 하나님께 논쟁하며 질문한다.
의인에게 복주시고 악인에게 벌주시는 하나님이 어찌하여 의인인 자신에게 벌을 주시는가?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은 불의한 신이라는 것이다.
사실 욥에게 그가 당하는 상황적인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은 그가 굳게 믿어온 신앙체계가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가 대대로 물려받고 자신의 생애에서 확고히 검증된 보상신앙의 원리가 지금 자신이 당하는 현실과 너무도 모순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철저히 믿고 신앙해 왔던 하나님은 만물 안에서 인간이 제한적으로 경험하는 교리적 하나님이었을 뿐 결코 만물 위에서 공의로 역사하시는 ‘초월의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절대 신앙은 인간이 경험한 하나님, 통속적인 하나님이 아닌 그 이상의 하나님에게 있다(God above God).
폭풍우 속에서 현현하신 하나님은 고통하며 항변하는 욥에게 ‘초월의 지식’을 물으신다.
초월의 하나님은 모든 것이 그 분으로부터 유래되고 모든 것이 그 분에게 의존하고 있는 이른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초월의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욥이 이미 경험했고 지금도 세 친구들에 의해 제기되는 공식화된 신앙원리에 답하지 않으신다.
대신 우주의 방대성, 창조의 신비, 피조물에 대한 섭리를 펼치심으로써 욥의 무지를 드러내시고 그를 냉소와 절망에서 건져내신다.
참된 신앙이란 그것이 현실에서 실증되었을지라도 명백한 신앙체계를 수립하고 변호함으로써 해석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통속적인 신앙과 들어맞지 않고 그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현실’앞에서도 여전히 의로우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너는 아직도 전능자와 논쟁하려느냐? 나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는 대답하여라(2절).
오늘 욥은 통속적인 신으로서 하나님이 아니라 초월의 하나님 앞에 선다.
만물 안에서의 현실적인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인해 불의하다고 여겼던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 선다.
통속적 신앙을 가지고 초월적 신앙의 문턱에서 두려워 떨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침묵한다.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3절).
다시 폭풍우 속에서 현현하신 하나님은 ‘욥의 의’의 부당함을 폭로하신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느냐(8절).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대로 세상의 만물과 생명체를 다스리신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의 공의가 자신에게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자기의 의(자기주장의지)로 하나님의 의를 멸시하고 ‘하나님을 악하다’고 하는 소치이다.
이제 하나님은 욥의 능력을 추궁하시며 시험대에 두신다.
그가 하나님처럼 강하다는 말인가? 그의 목소리가 천둥 같다는 말인가?(9절).
그렇다면 하나님의 속성인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고 영광과 영화의 옷을 입혀주겠다(10절).
이렇게 ‘하나님의 속성’을 떠맡고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해 볼 것이다.
그것은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고 악인을 그의 처소에서 짓밟는 일이다(11-12절).
그들을 진흙 속에 장사지내고 그들을 지옥의 토굴 속에 넣도록 해볼 것이다(13절).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고 그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14절).
하나님은 욥(사람)을 만드실 때 황소처럼 풀을 먹는 베헤못도 함께 만드셨다(15절).
그의 허리힘이 얼마나 센지, 그 뱃가죽에 뻗치는 힘살을 주목할 것이다(16절).
허리는 힘의 본거지로서, 특히 생식력과 성적인 능력에 관련된 남성의 힘을 뜻한다.
뱃가죽의 힘은 여성의 생식력이나 성적 능력에 대한 묘사이다.
베헤못의 생식능력이나 성적능력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리만큼 강하다.
백향목처럼 꼬리를 치는 모습과 힘줄이 얽힌 허벅지 근육을 볼 것이다(17절).
베헤못을 하마로 본다면 꼬리에 대한 묘사는 적절하지 못하다.
하마의 꼬리는 그 육중한 몸에 비하여 터무니없이 작기 때문이다.
그 뼈들은 청동관 같이 단단하고 갈비뼈는 무쇠 막대기같이 강하다(18절).
베헤못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서 으뜸이다(19절).
여기서 ‘으뜸’은 다섯째 날에 창조된 짐승 중에서 순서상 가장 먼저 창조된 짐승을 시사한다(창 1:23).
베헤못은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와야 한다.
칼은 죽이는 것을 의미하는 바,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신 특별한 피조물이라도 그것을 지배하시고 죽이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모든 들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베헤못을 위하여 먹이를 낸다(20절).
그것이 연꽃 아래 누워 늪 속의 갈대 가운데 자기를 숨기면 연꽃잎이 그것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강가의 버드나무도 그를 둘러싼다(21-22절).
강물이 차고 넘쳐도, 요단 강물이 넘쳐흘러 자신을 삼키려 해도,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누가 감히 그것을 잡겠으며, 그것을 끌고 가서 그 코를 꿸 수 있겠는가?(24절).
지금 이 땅에 통속적인 신앙이 왕성하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깨어보니 아득하고 막막하다.
오늘날 교회 안에 널리 퍼진 거짓말이 있다.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 쉽다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고 도리어 복을 받는단다.
만사가 형통하고 재앙이 없단다.
고난 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영광은 멸망으로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환호 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통속적인 신앙이 판치는 세상에서 초월의 신앙은 요원하고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
통속적 신앙에서 초월의 신앙으로 가는 길은 고난의 현실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 초월의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초월의 하나님은 이를 위해 신실한 자에게 고난을 주신다.
왜냐하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에게 세 친구들과 같은 자들, 즉 통속적 신앙을 종용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일에 만물 안에 갇혀 세속화되고 통속적인 신앙을 부추기는 교회와 목사들도 한 축을 담당한다.
하나님이 초월의 신앙으로 이끄시기 위해 주시는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괜찮아질 거야, 잘 될 거야”하면서 위로와 격려에 마음을 쏟아 붓는다.
통속적인 신앙으로 처방하여 작정기도, 금식기도, 충성강요를 통해 현세적 복락을 약속한다.
이는 재앙 중에서 다시 ‘자기 의’를 쌓는 무지한 행태이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래도 응답이 되지 않을 때는 결국 기도를 쌓은 ‘자기 의’로 ‘하나님을 악하다’고 말한다.
수많은 무리들이 고난 중에서 통속적인 신앙 처방을 받고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떠나갔다.
그들은 폭풍우 속에서 현현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한 채 말이다.
통속적인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장사될 때 참되고 사시는 하나님, 초월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오래도록 통속적인 신앙에 열심을 내는 자였다.
하나님께 대한 나의 열심과 헌신은 그 마음에 현세적 복락을 염원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봉사하고 내가 충성한 만큼 하나님이 복주신다는 것이다.
한 때는 그것이 들어맞았고 효용성 있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통합복음을 알기 수년 전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내 인생에 임하였다.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모든 존재물이나 사람과의 관계들이 일거에 몰수되었다.
내가 당한 재앙은 내가 믿고 경험하고 가르쳤던 통속적인 신앙체계와 들어맞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나를 말씀으로 이끄셨다.
광야에서 비참한 자 되어 욥기를 종일 읽어갔다.
욥의 상황은 가장 비참하나 욥의 영혼은 벌거벗겨져 가장 순수하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전히 의로우시고 여전히 선하심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두 마음으로 싸운다.
내 속 깊이 뿌리박힌 통속적인 신앙과 내 안에 심겨진 초월의 신앙과 다툰다.
육신의 생각은 통속적 신앙을 부추기고 영의 생각은 초월의 하나님 앞에 침묵하라고 한다.
육신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잠잠히 영의 생각을 사모한다.
이것이 오늘도 성실함으로 임하시는 초월의 하나님 앞에 내가 드릴 고백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육신적으로는 나약하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나의 신앙이 좋은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응답을 받아야 하고,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 뭐든지 잘 되어야 하며, 목회자의 자녀는 잘 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통속적인 신앙체계 안에서 젖어 살던 자였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평가보다 사람들의 평가가 더 중요한 자였습니다.
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들 앞에 잘 되기를 바라며 살던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나의 지난날의 통속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나에게 심판의 칼을 던지셨습니다.
이 칼은 남들에게 보란듯하고, 성공하며, 풍요와 안락의 3A에 젖어 있는 지극히 통속적인 신앙을 깨트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만물 안에서 통속적인 신앙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초월의 신앙으로 나아가나이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이 신앙 부여잡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