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 留別王維(유별왕유)/留別王侍御維(유별왕시어유) - 孟浩然(맹호연)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 권3 오언율시 131. 留別王維(유별왕유)/留別王侍御維(유별왕시어유) - 孟浩然(맹호연) 〈왕유와 이별하며〉 |
留別王維(유별왕유)/
留別王侍御維(유별왕시어유)
孟浩然(맹호연)
寂寂竟何待(적적경하대),朝朝空自歸(조조공자귀)。
欲尋芳草去(욕심방초거),惜與故人違(석여고인위)。
當路誰相假(당로수상가),知音世所稀(지음세소희)。
秪應守索寞(지응수삭막),還掩故園扉(환엄고원비)。
<원문출처> 留別王侍御維/ 作者:孟浩然 / 全唐詩·卷160-37 留別王侍御維
本作品收錄於:《唐詩三百首》 留別王維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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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히 지내며 끝내 무엇을 기대하랴
날마다 부질없이 홀로 돌아왔네
꽃다운 풀 찾아 떠나려 하니
친구와 헤어짐이 안타깝구나
벼슬길에 있는 그 누가 도와줄꼬
지음(知音)은 세상에 드문 것을
다만 응당 삭막함을 지켜서
옛 집으로 돌아가 문을 닫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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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釋] 날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는데, 이 쓸쓸한 구직생활에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제 꽃다운 풀이 있는 자연으로 돌아가 은거하려고 하니, 오랜 벗 왕유와의 이별이 안타까울 뿐이다. 벼슬길에 있는 어느 누구도 나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으니, 세상은 원래 진정으로 알아봐주는 이가 드문 법이다. 앞으로 옛 집에 돌아가 세상과의 문을 닫고, 다만 적막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려 한다.
[解題] 이 시는 맹호연이 장안을 떠나 왕유와 이별하면서 지은 작품으로, 개원(開元) 22년(734)의 가을이나 그 이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구에서 4구까지는 관직을 구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은거를 결심하면서 왕유와의 이별을 슬퍼하고 있다. 왕유와의 이별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사환과 은거에 대한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다. 앞의 네 구가 시인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면, 이어지는 5·6구는 떠날 결심을 하게 된 이유를 말하면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벼슬에 대한 욕망이 표출되어 있다. 마지막 7·8구는 ‘安分(안분)’으로, 고향에 돌아가 은거하려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도연명과 달리 맹호연의 은거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므로 시 속에는 세상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다.
이 시에서 3구와 4구는 전혀 대(對)가 되지 않는데, 이는 성당시(盛唐詩)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만당(晩唐)으로 넘어가면 대구가 더욱 정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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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留別王維(유별왕유) : ≪全唐詩(전당시)≫에는 제목이 ‘留別王侍御維(유별왕시어유)’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四部叢刊(사부총간) ≪孟浩然集(맹호연집과)≫과 장섭본(章燮本)을 따랐다. ‘侍御(시어)’는 관직명으로, 왕유가 시어에 임명된 적은 있으나 저작시기를 고려할 때 맞지 않다. ‘留別(유별)’은 이별할 때 상대는 남아 있고 나만 떠나오는 것을 이르는 말로, ‘送別(송별)’과 대비된다.
○ 寂寂(적적) : 외롭고 쓸쓸함
○ 欲尋芳草(욕심방초) : 꽃다운 풀을 찾겠다는 것은 산림으로 돌아가 은거하겠다는 뜻을 비유한 말이다.
○ 朝朝(조조) : 매일아침。
○ 違(위) : 헤어진다는 뜻이다.
○ 當路(당로) : ‘當道(당도)’, ‘當朝(당조)’와 같은 말로, 당시 조정에서 권력을 잡은 자들을 의미한다.
○ 假(가) : ‘빌리다’는 의미로, 여기서는 도와주다, 즉 추천해주는 것을 말한다.
○ 知音世所稀(지음세소희) : ‘지음’은 세상에 드물다. 지음(知音)은 지기지우(知己之友)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와의 고사(故事)에서 비롯된 말이다.<열자 탕문편>
<참고> 지음/백아절현
○ 祗應(지응) : 다만. =只應
○ 索寞(삭막) : ‘寂寞(적막)’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적막하고 청빈한 생활을 뜻한다.
본 자료의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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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연(孟浩然, 689년 ~ 740년)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다. 이름은 호이며, 자는 호연이며 호(號)는 녹문거사(鹿門處士)이다. 양양(襄陽) 사람으로 절개와 의리를 존중하였다. 한때 녹문산(鹿門山)에 숨어 살면서 시 짓는 일을 매우 즐겼다. 40세 때 장안(지금의 시안)에 나가 시로써 이름을 날리고, 왕유·장구령 등과 사귀었다. 그의 시는 왕 유의 시풍과 비슷하며, 도연명의 영향을 받아 5언시에 뛰어났다. 격조 높은 시로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어 왕유와 함께 ‘산수 시인의 대표자’로 불린다. 맹양양(孟襄陽)으로도 불리며 저서에 ‘맹호연집’ 4권이 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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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왕웨이, 王維, 699년 ~ 759년)는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로서 자는 마힐(摩詰)이다. 그의 시는 친교가 있던 맹호연을 닮은 데가 많으나 맹호연의 시보다 날카롭다. 또한 불교신자로서 관념적인 '공(空)'의 세계에의 동경을 노래한 것이 있다. 한때 관직을 물러났을 때 망천(輞川=지금의 허난성)에 별장을 짓고, 그 별장의 경물을 소재로 하여 노래한 〈죽리관(竹里館)〉이나 〈녹시(鹿柴)〉(모두 5언절구)는 특히 유명하다. 왕유는 또한 화가로서도 뛰어나서, 남송화(南宋畵)의 시조(始祖)로서 추앙된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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