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집착(執着)과 사랑
집으로 돌아온 지수와 선우는 건넌방에 할머니가 머무시는 동안 평안하게 지내시라고 이것 저것 챙겨드리고 저녁밥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세사람은 각자의 고통을 벗어버리고 이제 새로운 해결점을 찾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할머니가 오신 뒤 정신적 육체적으로 안정이 되어서인지 지수의 기억이 많이 뚜렷해졌다. 어린시절의 기억은 차츰 돌아오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작은 일로 다투시던 모습. 그리고 가끔씩 들러던 어머니의 친구이자 새어머니인 정여사, 더문의 중역들.
지수의 기억력이 돌아오면서 선우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연우의 기억이돌아오면 자신과 관련된 기억들도 돌아 올 것이고 그 기억들이 그녀에게 자신을 다시 평가하는 시간들이 될 것임을 알기에 걱정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불안해 하지 않고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아서 선우는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제법 늦은 밤 완연한 봄내음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평상에 커피한잔을 들고 나가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 저녁기운이 퍼지지 시작하는 하늘은 곱고 맑았다. 마치 지수의 얼굴처럼....
“자네, 우리 지수를 많이 아끼는 구먼”
“예. 많이 아껴주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그랬다면 오늘처럼 지수가 저렇게 아파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는 제가 잘못 생각해서 옹졸하게 복수를 하겠다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일세.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에 그래도 자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되돌리려 애쓰고 있지 않은가? 그것으로 되었네.”
“그럴까요?”
“그래.. 그리고 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예. 그런데 지수가 아직 좋지 않아서 아이는 서울 본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여기서 지내는 것 보다 현실에 직면하는 것이 나을듯 한데?”
“무슨..?”
“서울로 올라감세.”
“예?”
“지금 지수의 기억이 사춘기 소녀적일 걸세. 그래서 그에 걸맞는 환경이 오히려 도움이 될거라는 게 내생각이네...”
“그럴까요? 전 지수가 다시 악화 될까봐 걱정이 되는군요”
“아니. 이렇게 멀리 있다고 지수에게 안 좋은 기억이 영향을 덜 끼치는 것도 아니니 정면승부하는 것이 오히려 안전할 것 같네.”
“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럼 내일 오전에 옯기도록 하지..”
“예 준비 해두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이는 다음주 쯤 집으로 데려올 수 있도록 얘기 드리게.”
“예.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자네와 내가 우리 지수를 잘 지켜야 하네.. ”
“예. 할머니.”
지수의 기억이 급속도로 되살아나고 있어 순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성북동으로 옮겨 오게 된 후 할머니와 지수의 완강한 요청으로 회사에 다시 나가게 된 선우는 퇴근시간까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전화도 자주 하지 못하게 하며 자신을 믿어보라는 할머니 때문에 조금은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항사 곁에 있다 안보이니 그렇게 불안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기억이 전부 돌아온 후 자신에게 말도 없이 또다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항상 불안했다.
곤히 잠든 지수를 내려다 보던 선우는 지수가 눈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소리에 그녀를 흔들어 깨우려고 했다.
그러나 지수는 도무지 눈을 떠지 못하고 헛소리까지 했다.
불안한 마음에 얼른 건넌방에 계시는 할머니를 깨우려 가기 우해 침대에서 내려오려 할 때 지수의두려움에 찬 목소리가 선우를 붙잡았다.
“연우야! 안돼... 그러지마... 날 그런눈으로 보지마. 넌 왜 그렇게 웃는거니? 넌 죽어가는 순간에조차 내게 웃음을 보여주는 이유가 뭐니?
지수야! 안돼...
너 왜그래? 네 주변에 핏빛이 가득해 너 다신 나한테 안 돌아 오는거니? 네 오빠 말처럼 나 때문에 네가 죽은 거니? 응?
지수야. 난 이해가 안돼. 왜? 날 사랑한거니? 내가 뭐라고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 한번 하지 않고 왜그렇게 간 거니? 난 알 수가 없어... 정말... 지수야 미안해... 날 용서해...
네 오빠만 보면 내 가슴이 터질 것 같애. 그런데 그사람 내게 울면서 다시는 나타나지 말래. 난 그래. 연우야! 네가 죽은 것 보다 네 오빠가 날 보고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하는 말이 더 슬퍼.. 가슴이 구멍난 것 같애. 학교에 갈 수도 없어.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이상해 내 눈이 핏빛이야. 왜 이러는 걸까? 난 왜이런건지... 무서워 얼굴에도 열꽃이 펴.... 죽을 것 같애... 연우애 날 데려가... 너무 힘들어
연우야... 난 잠도 안와 눈만 감으면 네오빠만 보여. 너는 나를 보고 웃는데 네 오빤 등을 돌리고 얼굴도 안보여. 그런데도 너무 날 미워하는 것 같애... 난 아무것도 할수 없어. 이렇게 있다가 사라지고 싶어. 엄마처럼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고 싶어.....“
그녀의 헛소리는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선우가 몰랐던 세월동안 자신이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헛소리로 계속 떠드는 지수를 보며 선우는 맘이 너무아팠다.
자신이 유학생활 내내 잊을 수없어 괴로워 했던 그시간동안 지수는 아프고 혼자 힘들어 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수의 얘기가 이상했다. 19살 그때 지수는 발현과 비슷한 증세를 앓았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선우는 더 이상 지수가 고통스럽지 않게 흔들어 깨웠다.
온몸이 땀에 흠뻑젖었던 지수는 선우가 깨우자 힘들게 눈을 겨우 떴다.
지치고 힘든 기색이 완연한 지수를 보며 선우는 따뜻한 물을 한잔 먹이고 다시 재웠다. 시원한 물로 지수의 몸을 닦아주며 다독거려 주었다.
다시 악몽을 헤매지는 않는 지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보고 선우는 지수곁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
출근하기전 할머니께 어젯밤 지수가 한 말들을 전했다.
할머니도 선우의 생각처럼 발현증세일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또한 이상했다.
발현증세 후 대개의 경우는 3~4개월후 2차 증세인 식음전폐와 불면증이 생기고 그후 수개월이내 정신을 놓아버린다는 그 증세가 지수에겐 7년이나 지난 후 그것도 1차 발현증세부터 다시 반복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 할머니 조치 들어보지 못한 일이라며 좀 더 알아보겠다고 해서 선우는 출근을 했다.
그렇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걱정스러워 선우는 오늘은 일찍 퇴근을 해야겠다고 나섰다.
아침일찍 할머니가 잠시 다녀 올 곳이 있다며 외출을 하신후 지수는 혼자 뒷마당에 나와 책을 일고 있었다.
점심시간쯤 김천댁이 손님이 왔다며 불러 거실로 들어오니 한신의 한명훈이 앉아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요 며칠사이 점차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 명훈에 대한 기억은 완벽하지 않은 상태라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명훈을 맞았다.
“죄송해요. 제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완전히 기억이 돌아오진 않아서 손님을 맞을 입장이 못돼서요.... 혹시 한명훈씨 맞죠?”
“네, 영광이네요.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무슨 말씀을요. 제 친구 연우의 정혼자 이시잖아요.”
“연우의 정혼자라... 아직 거기 밖에 기억나지 않았나 보군요.”
“예, 죄송해요. 차츰 기억이 나겠지요. 그런데 저와 그이상 무엇인가가 더 있나요? 제가 기억해야 할....”
“글쎄요.. 전 있는데 지수씨는 아니었나봐요. 그런데 강선우회장은 어디 갔나요?”
“아, 선우씨요. 그사람은 지금 회사에 갔죠. 잠시도 안 떨어질려는 것을 억지로 내 보냈어요. 그사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그래요. ”
“혹시 선우씨에 대한 기억은 돌아왔습니까?”
"녜. 아직 전부는 아니구요. 그래도 뭐 좋아요. 돌아오지 않아도 돼요. 그사람을 보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아파요. 그래서 기억이 없을때에도 제 심장은 그를 기억하더라구요. 그를 보면 심장이 터질 것 처럼 뛰긴 그때나 지금이나 꼭 같아요.“
“그래요...”
명훈의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선우만은 알아본다는 그녀의 심장은 자신은 알아보지 못했다.
연우의 정혼자로만 알고 있는 지수를 보며 자신에게는 전부인 지수가 그녀에겐 선우가 전부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 같아 너무 고통스러웠다.
8년전 그의 가슴에 난 지수라는 흔적은 지워지지가 않는데 지수에게는 아무런 것도 아닌 단지 친구의 정혼자일 뿐이라는 사실에 온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맑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가 두 눈동자 가득 자신만을 담을 수 있도록 자신곁에 묶어두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명훈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 그녀를 차지 해야만 이 타오르는 갈증이 사그라 들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