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바람
금년 解冬되어 날씨가 풀리자마자 나는 서해안의 고향*에서 바닷가를 호젓하게 몇 차례 걸었습니다.
고향에 가지 않은 일요일에는 서울 근교의 산에 이따금 올랐습니다.
내가 오르는 산이라고는 고작 관악구의 관악산, 도봉산역 전철에서 하차하여 오를 수 있는 도봉산, 전철과 버스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우이동(정릉, 불광동, 구기동)의 북한산 수준입니다.
1978년 직장생활로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로 서울 주변의 산에 이따금 올랐습니다.
하루 코스의 등산이 새삼 신비로울 것도 없는데도 산에 오를 때마다 한 가지씩 깨닫는 게 있습니다. 당일 코스의 산이라도 내가 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산입니다. 산 정상에 오르내리는 길이 많다는 것도 하나의 깨달음입니다. 산길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가고자 하는 삶의 구도도 누구의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도 하나의 비유가 되겠습니다.
또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서울시내가 왜 그리 좁쌀만 하게 다닥다닥 붙었습니까? 산상에서 하계를 내려다보면 모두 하찮은 것으로 보일진대 시내로 내려오면 나조차 표독하게 욕심을 부리고 인상부터 달라지는지 그 이유를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산에 자주 올라야 한다는 명분 없는 핑계를 계속 갖고 있습니다.
산에 왜 오르냐고 묻는다면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일요일에 달리 갈 곳이 없기에 산을 탄다고 하면 대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산에 오르면 잠시일 망정 마음이 조금 깨끗해집니다. 산에서는 찬밥 한 덩어리 몇 잎의 김치-짠지로도 배고픔을 달래고, 물 한 컵으로도 목마름을 달랠 수 있고, 산자락과 능선을 가다가 지치면 아무 바위에 걸터앉으면 만사가 편안합니다. 거북스러운 양복이 아닌 자유스러운 복장이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북한산(北漢山 836.5m) 진달래능선에서는 진달래가 피고, 도봉산 진입로의 길섶에는 이름 모를 산풀이 바람에 나붓끼며, 관악산의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는 물소리로도 나는 어린 아해처럼 마냥 행복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산에 오를 적마다 답답한 게 있습니다.
숲속에 가득찬 나무들과 풀의 이름을 내가 제대로 모른다는 이유입니다. 날새와 곤충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핑계로 그들의 이름을 몰라도 누가 내게 묻지는 않겠지만서도 눈에 띄는 나무와 풀들 즉 바위 틈 사이에도 뿌리를 박고 사는 나무와 길섶에 꽃이 핀 잡풀의 이름 정도는 알아서 동행인에게 말해 주어야 산행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도회지로 떠나온 이후로 나는 아직도 나무와 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쉰여섯 살의 나이에도 부끄러웠기에 나무와 풀 이름에 관한 책을 사서 보아도 그들을 식별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덜 사랑한다는 증거라고 면박을 주어도 나는 달리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山의 진짜 주인은 나무입니다.
그런데도 나무가 산길을 막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나무를 잘라내고 뿌리를 파 훼친 탓으로 나뭇등걸과 뿌리가 땅 위로 드러나며, 나무-잔등이 짓밟혀서 반들거리며 죽어간 흔적이 역역합니다. 등산화로 산-흙이 팽개쳐지고 토사가 산 아래로 밀려나면서 점차 산과 계곡이 메말라 갑니다. 토사가 씻겨간 계곡은 너덜바위만 나뒹굴어서 계곡의 가장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식물뿌리가 죽어서 공중에 붕 뜬 잔해도 도처에 많습니다.
또 인파가 많으니 산짐승인들 온전하게 활동하거나 자연번식인들 쉽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니 산짐승과 날짐승의 개체수가 확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최근 나는 산에 자주 올랐습니다.
달리 갈 데가 마땅하지 않다는 이유이었지요. 그러니 내가 산에 해를 끼치는 못난 짓을 덜 하려고 합니다. 야생화를 캔다든지 괴석을 수집한다든지 나무가지를 꺾는다든지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린다는 등의 못난 짓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등산하되 산에 피해를 덜 끼치는 방법은 많다고 봅니다.
산에 오르면 정말로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서 암문으로 오르는 북한산의 줄기에는 승가사(僧伽寺)가 있습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기억하는 이 사찰은 아름드리 고목들이 많아서 고즈넉한 정감을 느꼈습니다만 지금은 값비싼 석재로 온통 사찰을 치장하여서 돈 많은 도량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우람했던 수목을 잘라내고 대신 그 자리에 석재와 시멘트로 처발라서 새로 증축한 절이 크고 융성하다는 것을 과신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수목 바위 등 자연물 本來의 눈으로 보면 거대한 사찰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위적인 외면에 치중하였다고 생각할 겁니다. 심지어는 대형 석탑 속에 갇혀 있는 돌부처도 내가 보기에는 답답합니다. 햇볕 차단되어 음산한 돌 속에서 벗어나고 맨땅으로 내려와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 자연풍광을 감상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깨달음이라고 생각됩니다.
강북구 우이동에서 북한산 용암문에 이르는 길목에 있는 도선사(道詵寺)도 예외가 아닙니다.
박 대통령 시절 육영수 여사가 호국불교도량으로 시주하였다는 이 사찰은 최근에도 계속 증축하여 대형 건물들이 밀집하였습니다. 더욱이 사찰 내의 방생 장소에 설치된 돌항아리가 있는데 멀리서 동전을 던져 돌그릇 속에 요행스럽게 들어가도록 한 소행이 티(흠)가 되었기에 대자대비 부처도 호의호식하는 이를 더 반기는 것 같다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이태 전이던가요? 고교 동문들이 북한산에 오르던 날 자주색깔(보라색)을 참으로 좋아한다는 어떤 여류화가 지인의 말에 나 또한 덩달아 자주색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봄철 담장 밑과 양지바른 밭두둑에 핀 앙증맞은 제비꽃잎에서 이런 색깔을 눈여겨볼 수 있습니다.
들풀과 야생화가 주는 아름다움과 포근함은 아무나 갖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들풀이라도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작은 내음새이기 때문입니다.
봄이 다 가기 전에 다음 주말에 시골에 내려가면 고뿌래(花望마을) 뒷동산이나 무창포 바닷가를 거닐면서 또 하나의 게으른 나를 되찿고 싶습니다.
글 쓸 수 있다는 이유로 비 내리는 봄날도 좋습니다.
2003. 4. 20. 바람의 아들
* 서해안의 고향 : 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조선시대, 일제시대에는 화계(花溪)로 불렸으며, 2개 마을(고뿌래, 장마)로 분리되었으며, 새로 개편된 행정구역은 구룡1리(花望마을), 구룡2리(장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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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 3. 21. 목요일이 시작되었다.
내 고교 여자친구의 카페에서 뒤적거리다가 위 글을 발견했다.
내 글이기에 퍼서 여기에 올린다.
이 글 쓴 지도 벌써 21년 전이다. 그 당시에는 서울 용산구 삼각지 직장생활을 할 때다.
어머니는 멀미를 심하게 하셨기에 서울 올라오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기에 아들이 혼자뿐인 나는 주말에는 대부분 고향으로 내려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어머니한테로 가지 않는 주말에는 서울 근교의 산에 올랐다.
지금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오래 된다.
그럼 내가 서울 근교로 등산을 자주할까?
전혀 아니다. 지금은 무릎뼈가 아파서, 욱씬거려서 장거리 여행이나 등산을 하지도 못한다.
아쉽다. 지나간 시절이....
일기로 남은 위 글을 다시 읽으면서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자자.
또 귀에서 웅웅거린다.
피곤하면 들리는 소리...
첫댓글 추억은 늘 아름답죠?
이제 살살 몸을 달래가면서 집 주변의 낮은 산을 오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어쩌다보니 많은 세월이 흘렀지요.
무릎이 고장이 나서 조금만 걸으면 통증이 오대요.
예전 직장 다닐 때 현역장교와 축구시합을 하다가 왼쪽 다리가 접질러서 고생 많이 했는데
늙은 지금은 오른쪽 무릎이 많이도 시큰거립니다.
중장년 때 산행을 많이 다닌 탓일까요?
등허리뼈도 굳어져서 휘어지고... 나이가 많아질 수록 ... 아쉽기만 합니다.
특히나 서울로 올라와서 사는 지금은 더욱 고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