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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 산행기를 쓰려니 막막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합니다.지리의 이곳저곳에서 느꼈던 각별함은 어디론가 사라진 듯 합니다.하지만 어디 한 번 풀어보렵니다.
6월20일 성삼재에서 벽소령까지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강주형네 정자 마루로 나가봅니다.아직 두 형은 자고 있는 듯했습니다.노고단과 멀리 천왕봉이 한 눈에 바라보이는 곳입니다.어제 참 많은 술을 먹었다 생각하고는 무거운 머리를 시원한 바람에 놓여봅니다.강주형 형수가 마당에 나오셨다가 팬티 바람으로 나온 저를 민망하게 만듭니다.지리 동네에는 검은 구름이 가득합니다.산 주변에 온통 구름이 잔뜩 내려앉았지만 그렇다고 비가 금세 퍼부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아침입니다.오늘 산행 별 문제 없겠다,이렇게 생각하고 마루에 그냥 정신을 한참 놓고 앉아있었습니다.
밥 먹고 얼른 감자 수확하는 데 나가보아야 한다며 강주형은 빨리 법먹자고 성화입니다.도토리묵에 무청 시래기를 넣은 된장국 등으로 맛있게 아침을 들었습니다.그리고 서두르는 강주형 출근하는 것을 보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이들과 대충 시간을 맞추며 여유있게 성삼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전날 들러 고기를 샀던 유정정육점에 가 고기와 김치를 챙겼습니다.성삼재에 도착해 짐을 챙기고 있었더니 정확히 5분도 안돼 일행이 도착해 반갑게 조우했습니다.날은 꾸무룩하고 비가 금세라도 들이칠 것 같았지만 정작 시작하지는 않은 상황이었고 지리종주에 맞춤인 이때 성삼재가 이토록 고즈넉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하고 대견하고 했습니다.
마포나루 형과 돼지엄마가 먼저 출발하고 사진 찍기 좋아하는 컴불 형의 성화로 나머지 멤버가 출발 전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오늘 산행의 새 얼굴은 규갑이 형.
노고단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에서 규갑이 형의 숨소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더욱이 제 몸에서 나는 술찌기 냄새 또한 만만치 않은 모양입니다.도대체 술을 얼마나 퍼마신 거야,이런 표정이 진합니다.규갑이 형은 혈압이 높아서 그렇지 별 문제 없다고 하는데 전,솔직히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
노고단,돼지평전,임걸령을 통과하는데 모두 상당히 페이스가 빨라졌다는 것을 실감하며 진행했습니다.임걸령 옆에 있던 인부들 컨테이너 숙소가 말끔히 치워진 것을 보고 알아챘습니다.이 구간 산행 정비 작업이 마무리돼 길이 훨씬 편해졌다는 얘기지요.제가 생각했던 예상보다 10~20분씩이 당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반야봉 올라가는 노루목 근처도 말끔히 정비된 모습이었습니다.지난해 종주때 노루목 근처에서 작업 인부들을 만났던 것 같은데 올해는 이틀째 총각샘에서 영신봉 오르는 구간에서 인부들을 만났으니까 그만큼 작업이 많이 진척됐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지요.
연하천 산장에 잘하면 오후 1시쯤 들어갈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해서 일행들을 바짝 속도를 높이려 하는데 생각처럼 싶지 않더군요.아무래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침을 해결한 본대 분들의 힘이 떨어지는 것 같아 빗방울이 조금씩 후드득대는 토끼봉 오르는 구간에서 점심을 해결했습니다.김밥 몇 줄과 빵,떡 등으로 해치우는 조악한 식사였습니다.만,다들 잘 먹었습니다.이미 마포나루 형은 임걸령 이후 헤어진 상황이라 형에게 먹을거리를 나눴다고는 하지만 잘 따라오는지 걱정이 많았습니다.중간에 규갑이 형이 다리에 쥐가 가볍게 난다면서 처지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으나 제가 그럼 안 된다고 채근해 이날 산행 중 가장 힘들었던 토끼봉 구간을 함께 올랐습니다.
이 구간은 예전에는 그렇게 힘든 줄 몰랐는데 이날 보니 전반적으로 길들이 많이 좋아져 유독 이 구간이 힘들었던 구간으로 기억되지않나 풀이됩니다.
연하천이 가까워지면서 빗줄기가 굵어집니다.컴불 형과 나란히 연하천 내려가는 계단의 맨아래쪽을 밟는데 고즈넉이 안개비에 둘러싸인 연하천 모습이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오후 2시가 조금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시간에 연하천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했습니다.컴불 형이 매점에서 사서 나눠준 연양갱으로 허기를 때우고 한 30분쯤 기다리니 일행이 모두 모였습니다.
사진 찍고 다시 길을 나서 저랑 멍게랑 벽소령 들어가는데 2시간이 조금 안 걸렸습니다.역시 예전에는 한참 멀게 느껴진 길이었는데 이날 가뿐히 끊었습니다.벽소령 산장을 찾을 때마다 약 500m 전방에서 들리는 바람개비 소리는 이날 그리 크게 들리지 않았습니다.그만큼 비가 많이 뿌리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산장 취사장으로 곧장 향했더니 5~6개 팀 정도가 취사를 준비하고 있더군요.딱 1년 전 악다구니로 들끓던 그곳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지만 술취한 것이 분명한 경상도 아지매와 아자씨들이 큰 소리로 떠들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조용한 산행객 그룹이었습니다.물을 떠와 쌀을 앉히고 찌개를 준비했습니다.이렇게 한 시간쯤 지나자 경상도 아자씨 팀이 자리를 뜨길래 가장 안쪽,다른 팀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우리끼리 오붓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으로 옮겼습니다.오후 6시가 조금 안 돼 지리산 흑돼지 고기를 익혀 먹으며 밥을 먹었습니다.더 많은 인원이 취사장에 가득 찼지만 지난해와 비길 바는 아니었습니다.정신줄 놓고 담배 피우는 인간들,제가 몇 명 제압하고 댓병 소주 바닥을 볼 요량으로 달려드는 것도 제어하고 해서 마포나루 형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포나루 형이 다리를 다쳤다는 연락이 왔고 누구를 내려보낼까 생각해보니 사니 형이 가장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2초면 결론이 나는 문제였습니다만,선배들은 왜 후배들이 나서지 않느냐 불만인 듯 했습니다.그러나 한 달 뒤인 지금 생각해도 그때 제 판단이 옳았습니다.사니 형은 아까보다 훨씬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나간 지 한시간이 훨씬 넘어서 마포나루 형과 함께 돌아왔습니다.형이 맛있게 저녁을 먹는 것을 보고 대충 설거지하고 짐 챙겨 산장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6월 셋째주 지리 종주를 위한 벽소령 1박.쾌적합니다.비가 엄청 쏟아질 것이라는 일기예보 덕분이었습니다.속으로 그래 이런 날씨 예보 때는 반드시 지리를 찾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물론 저희 방이 다 안 찬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현관이었습니다.속에 열불을 지니고 사시는 분들은 현관에 나와 잠을 자곤 하는데,우리 팀원 가운데는 두 분이 그런 경우였습니다-보통 발디딜 틈 없이 북적인 그곳이 훨 헐거워보였기 때문입니다.
6월21일 벽소령~백무동~당진~서울
눈을 뜨니 새벽 3시15분이었다.한번 눈을 뜨면 다시 붙이지 못하는 나쁜 습성 탓도 있었고 묵직한 아랫배를 덜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일어났다.현관 문을 열고 나오니 전날 밤과 달리 안온한 느낌이 그득했다.그래,오늘 날씨 괜찮겠다 느낌이 왔다.
예전보다 훨씬 럭셔리해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산장에 다시 돌아와 짐 챙겨 취사장으로 향했다.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그리고 전날 우리가 식사했던 곳에 자리잡은 두 구(?)의 등산객.산장에 빈 자리 널렸는데 웬 청승?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섬주섬,최대한 큰 소리 안나게 코펠을 챙겨 식수장으로 향했다.사위가 칠흑같은데 위태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오연한 느낌이 있었다.그래 이 맛이야,난 생각했다.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고 코펠 3개에 물을 가득 담아 올라오는데 바지가 흠뻑 젖었다.시나브로 한 두명씩 일어나 거들었다.미역국을 끓였는데 산에서 먹는 즉석 미역국은 역시 달라 이런 느낌이다. 5시45분쯤 아침을 들었다.아침을 먹고 나서 커피를 끓일 즈음 사위를 깨치듯 아침이 밝아왔다.이어 벽소령 아래에서 밀려오는 구름들의 향연.
그리고 명선봉 쪽에서 밝아오는 아침 햇살.
벽소령에서 맛보는 아침은 항상 이런 느낌이다.전날 비바람과의 전투같은 다툼,이튿날 한없이 안온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산행의 첫 발자국.
전날 부상으로 안타깝게도 하산을 결심한 마포나루 형을 음정으로 향하는 길로 떠나보내면서 예의 맨마지막으로 떠나는 이의 발자취를살피는 이는 사니 형이다.
씩씩하다.전날 밤 벽소령 산장의 헐거운 투숙률은 상쾌한 발걸음으로 연결됐다.잠을 푹 이룬 덕분인 듯했다.또 전날 비교적 과음하지 않았으며 코곯이 손님도 평소보다 적었던 덕분인 듯하다.
그렇게 깨치듯 나아갔다.앞에서 얘기했듯 이 구간 공사도 거의 끝나 길은 더욱 널찍해졌고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풀잎들이 서걱이며 우리를 반겼다.벽소령을 떠난 지 50분이 안 돼 난 선비샘에 도달했던 것 같고 혼자서 수건에 물을 묻혀 땀으로 뒤범벅이 된 등쪽을 닦아줬다.이맛인 거다.
그리고 컴불 형이 도착해 등목을 해줬다.아예 수도관 아래 엎드려 뻗쳐를 하게 한 뒤 물을 끼얹었다.양치도 하고 기분전환을 한 뒤 우적우적 나아갔다.
모든 구간을 나 혼자 앞서 나아가고 일행이 도착한 뒤 내가 먼저 떠나는 식으로 해봤다.내가 지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간이 이곳 명선봉에서 영신봉까지 구간이다.전체를 조망하는 맛에다 온전히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지리 자락을 느끼기 위해선 역시 혼자 걷는 것이 좋다.이 점을 다시 확인하면서 혼자 뿌듯했다.
명선봉에서 여러 차례 이어지는 길끗한 조망을 마음껏 즐겼다.어느 정도 휴식할 장소로 점찍은 장소에 이르면 웃옷을 벗어제끼고 일광욕을 즐겼다.이후 일행의 소리가 들리면 옷을 챙겨입고 길을 재우쳤다.이런 식이었다.
멀리 천왕에,멀리 덕유가 보였다.하지만 이날은 왠지 남쪽으로 광양 백운산 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11시가 훨씬 안돼 세석에 들렀다.다짜고짜 산장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설탕을 달라했다.그 친구,순진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친구였는데 매점에서는 안 팔지만 부엌에서 쓰던 것 있으면 달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인지 부탁인지 헷갈리는 내 말의 톤에 질렸는지 한 컵 가득 설탕을 건넸다.
멍게는 미숫가루가 오래 된 것 같다고 투덜댔다.집 냉장고에 있던 것을 꺼내왔으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이태쯤 됐을 것이다.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여하튼 미숫가루를 맛있게 먹고 장터목 쪽으로 향했다.역시 기온이 무섭게 치솟고 있었다.수풀 쪽에 들어오면 괜찮지만 볕에선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제석봉 쪽을 바라보니 구름이 심상찮다.그때 오늘 천왕 오르기는 어렵겠다 싶었다.
비지땀을 쏟으며 장터목에 도착해 라면을 끓이는 데 좋은 자리-맨 안쪽이다.계곡에서 바람이 올라와 시원하다-는 다들 벌써 차지했다.멍게와 뙤약볕 탁자에 앉아 라면을 끓이고 있는데 늦게 도착한 컴불 형이 한마디."야 시원한 자리 없냐." 난 그때 툭 튀어나온 멍게 입술을 보고 쟤를 잘라야겠다고 결심했다.
여튼 라면을 먹는지 더위를 삼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가운데 라면을 먹었다.이열치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장난이 아니다.제석봉~천왕봉은 포기하기로 했다.
내가 먼저 백무동으로 내려가 마포나루 형과 합류,성삼재에 주차해둔 차를 찾아 백무동으로 돌아오기로 했다.전투적으로 내려갔다.길이 넓어지고 커다랗고 편평한 바위들이 깔렸으니 정말 거짓말처럼 속도가 났다.여느 해 2시간이 걸렸던 참샘까지 50분이 안 걸렸던 것 같다.이 속도라면 마포나루 형과 약속했던 오후 3시 이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샘에서 잠시 한 숨 돌리고 내처 내달리는데 왼쪽 무릎이 시큰거렸다.속도를 잠시 늦췄다.어깃장 놓듯 발의 각도를 넓혀 무릎에 충격을 줄이느라 노심초사했다.그 바람에 참샘에 도착할 때만 해도 1시간30분에 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결국 백무동 아래 맨 첫 번째 가게 앞에서 시계를 봤더니 1시간50분이었다.지난해 2시간 30분 걸렸는데 40분 정도 단축한 셈이다.내 체력이 좋아진 게 아니라 그만큼 길이 편해진 덕이려니 생각하니 조금 씁쓸했다.
마포나루 형은 백무동의 거의 입구 쪽에 있었다.내려가면서 어떤 아주머니가 호스를 이용해 도로에 물을 뿌리고 있길래 한 바가지 퍼서 내게 뿌려달라고 했다.물이 정말 포말을 날리며 날아와 온몸을 적셨다.
마포나루 형을 만나 가게에 짐을 맡긴 뒤 5분 만에 택시가 왔다.출발하는데 곧바로 웬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조기축구 회원 같은 인간들 둘이 손짓을 했다.성삼재까지 함께 타고 가기로 했다.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9시간30분에 돌파했다우.
와,대단하다.그런데 왜 그렇게 하세요.
당신들 오늘 종주 했잖느냐.그거랑 똑같다.재미있어서 하는 거다.
그래도 너무 힘들지 않나.
뭐 니들도 해봐라.되게 재미있다.
정읍에서 직장을 다니며 소를 키운다 했다.하는 일마다 잘 되는데 산에서 받은 은덕 덕이란다.전북산악연맹과 인연이 있어 에베레스트갈 때 자기를 끼어주기로 했단다.
그렇게 이바구하고 가다 깜박 졸았던 것 같다.어느 순간 확 놀라 깼는데 성삼재 바로 아래였다.
오던 길을 밟아 가게에 다시 들어갔는데 당연히 빙 둘러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 팀이 보이지 않았다.한참 뒤에야 우두망찰 앉아있는 멍게를 발견했다.맥주를 마시며 앉아 있었는데 참 별볼 일 없이 앉아있었다.
10분 남짓 뒤에야 일행이 모두 모였다.백숙에 닭볶음탕에 폭탄주 말아 마시는 걸 보면서 난 입맛만 다셨다.한 팀은 당진을 거쳐 서울로 가야 하니 어떤 차에 누가 탑승할 것인가가 조금 망설여지는 대목이었는데 컴불 형님이 일언지하에 교통정리를 했다.
내 차에는 돼지엄마,항상 자상한 사니 형,멍게가 탔다.이상하게 전에 조계산에서 올라올 때보다 훨씬 졸립지 않았다.당진에 도착하니 9시가 조금 넘어있었고 서해대교를 건널 때 엄청난 안개가 엄습해 차량들이 비상등을 점멸하며 달렸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집에 돌아오니 밤 11시 남짓이었다.
아내는 이날의 내 족적을 잠시 캐묻더니 딱 한마디 한다.'사서 고생이네'
그래 나도 안다.그런데 이 짓 은근히 재미있다. (계속)
첫댓글 속편은 또 한 달 뒤에?....설마 아니시겠지요?!
아 오솔길 땜에 미치겠다.염장을 질러 게으름을 쫓으려는 이 노력,이 분발.눈물 겹다.멍게는 몰래 카페 운영자 등급 이메일 들이밀고.83땜에 미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