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프로당구경기 중계방송을 본다. 당구를 즐기는 분들이라면 당구방송을 안 보는 분들은 없을 것이다. 당구중계가 활성화되면서 일본어 혹은 일본식 발음으로 일괄되던 당구용어들이 우리말로 변환되었거나 혹은 국제용어(대부분 영어지만)로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도 동호인들 사이에서의 당구용어 사용은 일본식이 대부분이다. 당구를 배울 때 익힌 일본용어들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공사현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아직도 변화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래어화된 용어 사용에 너무 앞서가시는(의식적으로?) 중계진이 있어 방송을 보면서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리버스(Reverse)라는 용어가 그렇다.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리버스라고 해야 하고 그냥 그 말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중계진 중에는 영어 중계도 아닌데 ‘리벌스’라고 발음하시는 분이 있어 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중계는 두 분이 한다. 한 분은 ‘리버스’라고 하고 다른 한 분은 ‘리벌스’라고 한다. 그런데 이리 발음 하시는 분도 다른 말과 섞어 쓰실 때는 자연스럽게 ‘리버스’라고 하면서 그게 의식되었는지 추가 설명에서는 꼭 ‘리벌스’라고 고쳐 말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어를 외래어화 한 것도 아닌데 굳이 ‘ㄹ’자를 더 넣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학창시절에는 사람 이름이건 각국의 지명이건 한자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이 표기한 한자는 그 나라 발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한자의 우리 음으로 읽었다. 방송에서도 그랬고 신문표기도 그랬다. 그래서 지금도 ‘도쿄(東京) 보다는 ’동경‘이, 마오쩌둥(毛澤東) 보다는 모택동이 더 친숙하면서도 우선적으로 발음된다. 이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이런 인물이나 지명이 들어가는 대화를 나눌 때였다. 그들은 해당되는 나라의 현지어 발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는데 반하여 내가 그 말에 응하기 위해서는 한참을 더 생각해야 했거나 아니면 아예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상대편의 보충설명이 이어지면 그 때서야 ’그게 그거였구나‘하고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학교에서도 그리 가르치지는 않는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중요한 위치에 올라있다. 따라서 국제적인 의사소통이 중요한 만큼 한자가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비단 국내용이라도, 평소 우리의 한자음으로 표기하거나 발음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은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 같은 구식 라테세대라고 할지라도.
미국 LA 시내에 OMNI 호텔이 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가 한창 그곳에 출장 다닐 때만 하여도 우리나라 대표항공사와 연계된 호텔이었다. 따라서 그 항공사를 이용하고 이 호텔에 묵으면 숙박비 할인 혜택이 주어져 출장 시에는 종종 이용하곤 하였다. 그 이름은 국내에서도 그렇고 항공사에서도 그렇고 광고도 그렇고 모두 옴니호텔이라고 하였다. 나 또한 그렇게 발음하고 택시를 이용할 때도 그렇게 말하면 잘 데려다 주었다. 어느 날 현지 분이 호텔로 찾아오겠다며 호텔이름을 물었다. 난 그저 늘 하던 대로 옴니호텔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호텔을 알지 못했다. 이름의 영문철자와 주소를 알려주자 그는 “아~~ 암니호텔. 알아요”라고 대답하였다. 미국인들이 알파벳 O발음을 ‘아’라고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유명사인 이름까지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한 것은 국제적으로 누구나 현지 발음을 하는 영국의 Oxford조차도 옥스퍼드라 하지 않고 악스퍼드로 발음하는데는 미국어의 자만심 같은 느낌이 주어져 일종의 거부감마저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미국인을 만나더라도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줄곧 옥스퍼드라 하였다. 그건 이름 같은 고유명사는 현지의 발음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내 고집 같은 것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Drusus Julius Caesar)'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몰랐다. 내 세대에서 역사 공부를 한 사람들은 모두가 ‘쥴리어스 시저’라는 이름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그 때는 그게 그의 현지 이름이 아니라 영어권에서만 그리 부르는 영어 이름이라는 것을 몰랐고 현지어 발음은 아울러 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즈음은 내가 단지 영어로 된 사람이름이나 지명으로만 알고 있던 많은 고유명사들이 현지의 발음으로 수정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 라테는 생소한 사람과 장소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려 보아야 한다.
나는 Vitamin을 ‘비타민’이라고 발음하고 또 그렇게 배운 세대다. 비타민에 대한 우리나라의 외래어 표기는 비타민이고 또한 전 세계 공용어도 아직 ‘비타민’이다. 그런데 언젠가 미국 의학드라마가 국내에서 히트를 치고 나면서부터 (내 기억에) 비타민이 흰옷을 입으신 분들로부터 ‘바이타민’이라 발음되더니 그게 국민들 사이에서도 보편화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더니만 방송에서 조차도 요새는 비타민이나 바이타민을 떠나 ‘바이라민’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비타민의 외래어 표기는 아직 ‘비타민’이다. 미국인들과의 대화라면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방송에서는 미국어 발음이 아니라 우리의 외래어 표기가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고등학생이 된 손녀가 제2외국어 선택을 이야기하다 할아비에게서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에네르기’나 ‘링게르’가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그 단어들의 외래어 표기법은 변했지만 이 할아비는 바이라민 세대가 아니라 라테라 일컬어지는 에네르기 세대인 것을 어쩌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