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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제5주일
✠ 루카복음 5,1-11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은 읽어보시면 금방 알수 있듯이 부르심과 파견입니다.
1독서에서는 이사야예언자의 부르심과 "저를 보내십시오."란 응답하는 장면이 나오고
2독서에서는 바오로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그 은총으로 사도가 된 얘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 야고보와 요한의 부르심과 응답이 나오고요.
세 독서의 내용마다 한결같이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 부당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1독서 5절)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사도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2독서 8-9)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복음 8절)
하느님의 체험은 우리의 나약함, 부당성을 확연히 보게해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 하느님의 치유, 권능을 체험하게 되고, 그 은총의 체험은 다른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는 일꾼으로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아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저 받은 선물임을 자각할 때 우리는 그분 도구가,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복음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배 두 척을 보셨다."(2)
단순히 배를 보셨을까요?
배가 두척만 있었을까요?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들, 그러나 고기는 한마리도 보이질 않고 ᆢ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마리도 잡지"(5) 못한 그들의 실망, 피로를 보셨겠지요.
마치 성전에서 헌금하는 이들 중 유독 과부의 헌금에 눈길을 주셨듯이 ᆢ
군중을 가르치시다 말고 그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부탁합니다.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3)
삶의 고달픔, 실망에 찬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가르치려 하거나 해결사로서가 아니라 도움을 청하면서 다가가십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말씀에 배고픈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 위에 오르시고 먼저 말씀으로 듣는 이들에게 믿음의 불씨를 놓으십니다.
그 다음 베드로에게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십니다.
이미 밤새을 새워서 고생하며 애썼던 그입니다. 아마도 낮에는 고기잡이가 잘 안되는 곳이어서 밤에 일을 했던 것 같아요.
한데 전문 어부도 아닌 분이 그것도 낮에 그물을 던지라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를 느끼던 베드로는 그 말씀대로 던지지요.
이때 베드로의 말은 우리에게 모범이 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
'우리의 경험으로는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는 말씀에의 순종이 기적을 보게 해줍니다.
기적의 체험은 하느님 현존을 알아차리게 하지만 동시에 그분 앞에 있기에 부당한 죄인임을 절감하게 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
과거의 내가 어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초라한 모습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ᆢ되어가고 되어갈' 나를 신뢰하며 보십니다.
그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비결은 "예수님을 따랐다."(11)에 있습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2월9일 [연중 제5주일]
루카 5,1-11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이 십일조를 내라는 뜻이라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겸손함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께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권유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는 순종합니다.
그러자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베드로는 놀라서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지상에서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게 행복하겠습니까, 사람을 낚는 존재가 행복하겠습니까?
행복은 자존감에 의해 결정됩니다.
종이배를 만드는 어린아이가 행복할까요, 우주 비행선을 만드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할까요, 인간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하다면 먹는 것만 찾는 짐승처럼 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짐승은 짐승을 낳고, 인간은 인간을 낳습니다.
개 팔자가 아무리 상팔자라지만, 강아지를 부러워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인간을 낳고 기를 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더 높은 차원의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약 하느님의 자녀를 낳는다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느끼시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 끝에 매번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에 에덴동산에서부터 잘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하느님 자녀를 낳으라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파견하십니다.
‘옥씨 부인전’에서 노비 구덕이는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양반에게 갖은 고초를 겪습니다.
특별히 그녀의 주인들은 더 악랄한 존재들입니다. 구덕이가 그렇게 고난을 받는 이유는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탈출하여 한 주막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그 집에 옥태영이라는 외국에서 살다 온 양반이 묵게 됩니다.
그녀는 외국에서 살아서인지 양반임에도 구더기처럼 살라고 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덕이에게 동무처럼 잘해 줍니다.
구덕이는 그동안 양반에게 당해온 것에 비해 큰 사랑을 받으며 가당치 않은 꿈을 꿉니다.
옥태영의 집에서 동무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산적 떼가 주막에 불을 질러 옥태영이 죽습니다. 죽으면서 옥태영은 구덕이에게 꼭 꿈을 이루라고
그녀의 목숨을 구합니다.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를 손녀딸로 착각합니다.
구덕이는 옥태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잠시 옥태영의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산적들에게 벌을 받게 한 이후 다시 떠나려고 합니다.
이때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에게 옥태영으로 계속 살아줄 것을 권합니다.
구덕이는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옥태영으로 삽니다.
그러면서 옥태영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과 같은 억울한 처지에 있는 노비들을 변호하며 그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옥태영이 된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예수님은 구덕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의 인권을 신권으로 들어높여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필요할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면 전념하며 불쌍한 이들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멕베스가 그러한 예입니다.
멕베스는 마녀들이 하는 예언을 믿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다는. 그래서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다 결국 자신이 미쳐버립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왕의 권위를 합당하지 않았지만, 왕 자신이 우리에게 승계한다면 어떨까요?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처지가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리에 앉게 하셨음을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선악과를 바쳐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이 선악과를 바치라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순종하면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일조를 바치면서 내가 누구이고 그분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주신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도 그분을 이기고 나에게 주신 것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축복을 멜키체덱 대사제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받았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악과를 반드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덕이가 자신이 구덕이였음을 잊으면 옥태영으로 살아도 소용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9일 [연중 제5주일]
복음: 루카 5,1-11
우리 내면을 주님으로 가득 채울 때!
물때가 좋을 때면 근처 수로로 밤낚시를 나갑니다.
낮에는 잔챙이들이 활개를 치지만, 희한하게도 밤이 되면 씨알 좋은 녀석들이 슬슬 활동을 시작하지요.
밤바다의 고즈넉한 분위기도 참 좋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풍어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허사일 때도 수두룩합니다.
미끼를 싱싱한 것으로 갈아도 끼워보고, 수심도 바꿔보고, 자리도 옮겨보고, 움직임도 줘보고,
별의별 짓을 다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인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시몬 베드로의 심정이 백이십퍼센트 이해가 갑니다.
시몬과 다른 제자들이 딱 그랬습니다.
큰 기대를 안고 밤새도록 애썼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거듭 반복된 헛그물질에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괜히 말 걸었다가는 큰일 날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딱 한 마디 건네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 말씀을 들은 시몬은 속으로 웃었을 것입니다.
고기잡이의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전문가인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신 것이 참으로 고깝게 들렸을 것입니다.
‘포크레인 앞에 삽질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그의 내면의 표현이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참 착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전문가적 판단에서 도저히 안 될 것이라는 것,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결과는? 인생 한방이라고, 초대박이 터졌습니다.
그야말로 긴 연장전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 역전 만루 홈런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그물질에 오랜 실패가 만회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비참한 내 인생,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외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열어주십니다.
‘철저한 실패로구나. 쫄딱 망했구나.’라며 좌절하고 울부짖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저 함께 현존하십니다.
딱 한 말씀으로 그간의 어려웠던 국면을 180도 전환시켜 주십니다.
다 끝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조금 기다려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주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희망해야겠습니다.
전문직 어부였던 시몬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씀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부도 아닌 예수님, 고기잡이에는 전혀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분야만큼은 프로인 시몬에게 전혀 설득력 없는 방법으로 고기를 잡아보라고 권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기존의 사고방식, 개인적인 야욕,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에서
탈피하라는 말씀이겠지요.
과도한 욕심, 사사로운 감정에서도 벗어나라는 권고이겠지요.
예수님이란 너무나 큰 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크게 버려야 가능한 일이니만큼 모든 것을 다 바꾸란 말씀이겠지요.
그릇은 무엇이 담기냐에 따라 그 그릇의 품위까지 달라집니다.
아무리 멋진 그릇이라 할지라도 애완견 사료를 담아놓으면 개밥그릇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투박한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보물이 담기면 보물단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질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로 여겨질지라도, 우리 내면을 예수님으로 가득 채울 때 우리는 이 세상에 가장 값진 존재가 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5주일 강론>
(2025. 2. 9.)(루카 5,1-11)
<신앙생활은 ‘허무’에서 해방되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4-11).”
1) 여기서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부들의 상황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의 허무함을 상징합니다.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이 시편은, 단순히 ‘인생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없는 인생은 허무하다.” 라는 뜻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인생은 목적지가 없는 ‘유랑’이고, 그래서 허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목적지가 분명히 있고,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허무한 유랑이 아니라 ‘본향’으로 가는 ‘귀성 여행’입니다.
신앙생활은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누구든지,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그 허무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어부들은 ‘인생의 허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또 벗어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로 그분이 인간을 허무에서 해방시켜 주실 ‘메시아’ 라고 믿었습니다(요한 1,41).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때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 사이에는 적어도 몇 달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고,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부르심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응답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2)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라는 말씀에서 ‘깊은 데’는 ‘허무하지 않은 인생’, 즉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인생’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는 일은 인간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알려 주시고, 그 나라에 가는 길을 알려 주시는 일까지만 해 주시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내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이곳에서 그곳으로 들어 옮겨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은 기적”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어부들만 체험한 기적입니다.
그래서 그 기적은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위한 기적인데, 기적 자체가 ‘부르심’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3) 그런데 만일에 어부들이 밤새도록 애썼는데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이 아니라, 몇 마리 정도 잡은 상황이었다면?
또는 그럭저럭 생계에 도움이 될 정도로 고기를 잡았다면?
그래도 ‘허무’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3-14).”
세속적으로 성공을 거둔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 더 큰 허무감에 사로잡힐지도 모릅니다.
사실 세속의 성공과 출세는 허무하게 사라질 먼지 같은 것이고, 먼지는 아무리 많이 모아도 먼지일 뿐입니다.
4)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라는 말은, ‘주님의 권능’에 압도된 인간이 주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한 말입니다.
동시에 이 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신의 희망을 반어법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어부 시몬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불렀는데, 8절에서는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경외심’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두려운 분이 아니라, ‘사랑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들을 사도로 뽑으시겠다고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린 것은, 단순히 가지고 있던 소유물들을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옛 인생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새 인생’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