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방에 대한 의문점 (대륙삼국설?)
질문자: lucifer80
신라방(新羅坊)
8세기 중국 당나라에 있었던 신라인의 거주지역.
750년[경덕왕 9년]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가 다시 가까워지면서 두 나라 사이에 교역이 활발해지고, 많은 신라인들이 당에 가서 거주했다. 그들은 신라와 해상교통이 빈번했던 산동(山東)반도 남쪽의 해안 일대와 회하(淮河) 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주로 거주하면서 신라인 촌락을 형성했다. 이 가운데 상공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주로 초주(楚州)와 련수(漣水) 등의 도시에 모여 살았는데, 당에서는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신라방'이라 하여 자치를 허용해주었다. 이곳에는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라는 관청이 있었으며, 그곳의 장(長)인 총관(總管)이 행정을 관장했다. 그 아래에 교섭업무를 주관하는 역어와 전지관(專知官)이라는 관리가 있어 신라인과 관련된 사무를 전담했다.
한편 산동성(山東省) 문등현(文登縣) 청녕향(淸寧鄕) 적산촌(赤山村)의 신라인 통할 관청인 구당신라소의 장은 압아(押衙)라 하여 초주와 련수에 있는 신라소의 장을 총관이라 한 것과는 다르게 불렀다. 그러나 압아가 총관과 거의 대등한 위계(位階)를 가졌으므로 그들은 같은 지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는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신라 사원인 법화원(法花院)이 있었다. 이 사원에는 승려 42명과 비구니 3명, 노파(老婆) 2명이 항상 거주하고 있었고, 신라인 신도가 250명에 이르렀다. 신라방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은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고, 일부는 그와 관계된 수부(水夫)나 공인(工人)으로 생활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특히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국제무역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양주(揚州)·명주(明州)·소주(蘇州) 등지를 중심으로 아랍·폐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했고, 일본과 신라 본국을 왕래하면서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사료에 나타난 재당 신라인(고구려·백제 유민 포함)의 숫자는 22만여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당나라 인구가 5천만명[9백만호]이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적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산둥반도 등 중국 동해안은 당시 인구밀도가 낮았기 때문에 결코 적은 수치는 아니었다.
여기서 의문가는 점이 있습니다.
당은 신라와 대동강 이남의 영토할양을 조건으로 연합을 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킵니다. 하지만 당은 고구려 멸망 후 일방적으로 그 약속을 파기하고 신라와 전쟁을 치룹니다. 여기서 당은 신라에 패배하고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당이 대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지역을 신라인들을 집단적으로 거주케 하고 또한 자치기관까지 두게 한건 이해가 안갑니다.
의문점 1.
중국의 동해안 지방은 평야지대로써 식량생산이 많으면서 운하가 있어 물류수송도 용이하기 때문에 상업적 가치가 무척 좋은 지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산동지역은 옛부터 소금의 주산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업적 중심지를 자국민이 아닌 외국인에게 이점을 독점하게 했다는건 이해가 안갑니다. 그 이유를 말해주세요?
의문점 2.
위 사료에 나타난 인구분포에 따르면 신라인이 거주했던 지역에 당나라 사람의 분포가 적을 것을 알수 있습니다. 분명 살기에도 좋고 물산도 풍부한 지역인데 왜 사람이 적을까요?
전 대륙삼국설을 전부 믿는건 아니지만 이건 왠지 의구심이 가는 부분입니다. 중국은 늘 자국의 수치스런운 역사를 숨기려는 춘추필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신라가 실질적으로 중국동부를 지배하고 있는데 당은 그런 사실을 숨기기위해 사서에서는 자치허용 쪽으로 서술하고 있는게 아닌가 말입니다.
여러 곳에 올렸는데도 확실한 답변은 없네요. 하지만 신라방이 근대부터 쓰여졌고 확실치 않은 용어라더군요.
출처: 네이버 지식In ▶ 우리나라 역사
첫댓글 하지만 중국 본토에서 최소한 거주한 결정적인 증거들이 여러곳에서 출토되지 않는한 증명하기는 쉽지 않을겁니다... 무엇보다 중국이 먼저 발견한다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겠죠... 발견자도 함께..
흠~ 여기서는 답을 구하기 어려울 듯 합니다. 그나마 역사에 눈뜬 분들이 많은 듯 한데 감히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을 수는 없겠지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