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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 스피노자
(Benedict Spinoza, 1632-1677)
1. 연구동기
2. 시대적 배경
3. 스피노자의 성장배경
4. 시대적 배경과 스피노자의 성장과정 속에 나타난 사상
5. 맺는 말
6. 참고도서
1. 연구동기
아기는 처음 보고 자주 보는 것을 기억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유대인 출신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에 미친 인간"이란 별명이 있다. 그는 신에 대한 무한한 궁금증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시대적 상황이 스피노자에게 왜 그런 생각을 갖게 하였는지 그 성장 과정속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봄으로서 인간의 사상에 미친 영향을 시대적 배경과 성장과정에 두고 알아 보려 한다. 그리하여 현 시대를 조명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며 나아가는 방향을 알 수 있다고 본다.
2. 시대적배경(16전후)
(1) 르네상스 시대 경제상황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처럼 흑사병이라고 하는 재앙으로 인해 당시의 경제적 상황이 일순간에 침체된 것은 아니었다. 흑사병 이전에 유럽 각지역에서는 기후 변화로 인한 기근 현상이 14세기 초반부터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제 13세기에 누렸던 경제적인 팽창은 침체 상태로 말려들어 갔다. 1314년에 유럽 전역에서 몰아닥쳤던 대홍수는 곡물 수확에 악영향을 주었으며 때문에 물가가 유럽 전체에서 앙등해 갔다. 1315년의 기후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어 기근 현상은 뚜렷해 졌으며 지중해의 몇몇 지역들을 제외한 모든 유럽은 심각한 식량난에 접해야만 했다. 때문에 1316년에는 모든 식량이 고갈 상태에 놓여 있었다. 평균 기온의 저하와 같은 기후 변화로 중세 성기에 폭넓게 개간되었던 토지들은 황폐화 되었으며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이 이에 부과되면서부터 인구 감소가 시작되었다. 이와같은 기후 변화로 인한 위기는 1317년까지 지속되었다.1 미스키민은 당시의 경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314년 5월과 1315년 11월 사이에 파리의 밀 가격은 핵토리터(hecto litre)당 0.322리브르에서 1.613리브르까지 다섯 배 뛰어 올랐으며 1314년 7월부터 1316년 4월까지 영국 쿡헌(cuxhan)에서의 밀 가격은 쿼터당 8쉴링(shilling)으로부터 23쉴링으로 폭등하였다. 1316년 5월에서 10월 사이에 이프르(Ypres)에서만 2,794명이 사망했는데 이것은 대략 총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비율이었다. 굶주림의 상태는 너무나 극심한 것이었기 때문에 식인 풍습이 몇몇 연대기에 기록될 정도였다.]2
1314년에서 17년까지 지속된 기근은 14, 15세기에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이것으로 인해 식량 생산과 인구 사이의 균형은 무너지게 되었는데 1300년 경 서유럽에서 태어난 거의 모든 아이들은 그들의 평균 수명 30내지 35년 동안에 적어도 한두번은 극심한 굶주림을 겪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경제 상황으로 인하여 나타난 심각한 사회 문제는 출생률의 저하였다. 14세기 초반의 위기는 특히 갓난 아기의 사망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인구의 평균 연령을 극도로 저하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총 생산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큰것이었다. 그러나 굶주림으로 발생하였던 직접적인 결과 중에서 출생률 못지 않게 사회적인 위기를 조성시킨 것은 인구의 可變性(mobility)이었다.3 이상 기후로 인하여 일상적인 식량 공급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의 사람들이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보다 기회가 많이 주어지며 식량 공급이 보장되어지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생존에 위협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식량 공급이 원활한 거대한 도시나 인구가 집중하고 있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게 된 것은 기근의 시대에 있어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이주 현상은 오히려 도시의 식량 상태를 악화시켰을 뿐 아니라 농촌의 생산 노동자들이 부족해 짐으로서 그들의 농업 노동이 진정으로 필요하게 되었을 때에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제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농민이나 농업 노동자들이 보다 나은 지역이나 도시로 이주하여 갔다.
식량을 얻으려고 일어났던 이주 현상이 빚어낸 또 하나의 결과는 소규모 마을이나 농촌 공동체(commune)의 고립 상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중세에서부터 이어져 왔던 마을이나 농촌 공동체의 자연적인 격리 상태가 이주로 인해 붕괴됨에 따라 이것은 이미 굶주림으로 허덕이던 대중들 사이에 전염병을 쉽게 전파시켜 주는 경로를 마련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14세기의 유럽이 극심한 전염병에 시달렸던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14세기 이전에도 전염병은 존재했었지만 이때의 병원균은 고립 상태의 공동체 상호간을 전파해 갈 수 없었는데 14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공동체의 벽이 무너짐으로서 병원균은 쉽게 지방에서 지방으로 전파해 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14세기 초반에 말라리아가 극성을 부렸고 1348년과 그 이후에 흑사병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14세기 초반의 기후변화와 기근으로 인하여 궁핍해진 대중들이 공동체를 떠나감으로서 사회의 경제적인 기반이 무너지고 그러한 환경 하에서 흑사병이 발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후변화로 인해 중세 성기의 경제적인 풍교가 무너진 것에 덧붙여 염병이라고 하는 전염병, 특히 흑사병이 발병하므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경제 상황은 더욱 침체 상태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사건이었다고 간주되고 있는 흑사병은 1347년 크리미아 해안에서 처음 발생한 후 그해 겨울에 콘스탄티노플에 정박하고 있던 제노아 상인들의 배에 옮겨져서 이탈리아로 전엽되었다. 1348년에 들어서자 이 병은 유럽의 각 지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여 1350년에는 북부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까지 휩쓸었다.
흑사병으로 인하여 나타난 직접적인 현상은 인구의 감소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에 의해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히 추정될 수 없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그 희생의폭이 최소한 전체 인구의 25%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4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당시의 자료에는 이것을 작성한 연대기 작가들이 당시의 상황을 과대 평가한 경향이 많았는데 이는 그들 자신이 희생의제물이 되기도 하는 데서 오는 심리적인 작용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때때로 한 도시의 총 인구 보다도 더 많은 수의 희생자를 연대기에 기록하기 까지 하였다.5 아무튼 흑사병으로 인해 대규모의 인구감소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흑사병으로 인하여 농촌의 인구 역시 큰 폭으로 감소하였지만 이보다 더 극심한 피해를 본 곳은 큰 도시들이었다. 농촌과는 달리 많은 인구로 밀집되어 있었던 도시는 전염병의 전파를 보다 용이하게 하는 요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경제적 상황을 악화시켰던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전쟁은 어느 시대에나 발생했던 것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전쟁은 그 어느 시대의 그것보다도 오래 끌고 파괴적인 것이었다. 흑사병이 자연적인 재난이었다고 한다면 이 시대의 전쟁은 인간이 스스로 일으킨 재난의 본보기 였다. 흑사병이 출현하기 11년 전에 시작되었던 백년 전쟁(1337-1453)이 그 대표적이었으며 카스틸레(Castile)와 남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내전이나 그 밖의 각 지역에서 일어났던 알력들은 9세기와 10세기 초반에 동방 민족이 마지막으로 유럽을 침략하였던 것보다도 더 파괴적이고 오래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쟁은 질병과 마찬가지로 인구를 감소시키는 요인이었으며 전쟁 그 자체로 인한 인구 감소보다는 전쟁이 질병의 전염을 용이하게 함으로서 일어나는 인구 감소의 원인으로서 지적되고 있다.
흑사병이나 전쟁으로 인해 전체 인구가 대폭적인 감소를 겪게 되자 이에 따르는 여러가지 결과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노동력의 부족이었다. 13세기가 끝날 무렵의 서 유럽은 최고로 인구가 증가했던 시대였다. 이 때문에 농민이나 도시의 노동자들은 농토의 빈곤이나 일자리의 부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싸ㄷ. 그러나 14세기 중엽에 인구가 대폭적으로 감소하자 농민과 노동자들의 지위는 급격히 상승하였다. 생존한 노동자들은 노동력의 부족을 이용하여 예전에는 단지 소수의 특권층만이 향유하였던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쟁취하려고 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보다 많은 농민들이 莊園을 떠남에 따라 도시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는데 이것은 상업과 도시민들의 시야를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화폐 경제의 성장에 공헌하였다.6
농민들은 점차 영주의 직영지에 속한 토지들을 차지하게 되었고 인플레이션에 의한 각격 상승에 따라 결과적으로 소작료가 줄어들어 예기치 않은 이득을 얻기도 했다. 또한 높은 사망률은 자동적으로 1인당 화폐의 양을 증가시켰고 인력의 부족을 야기 시키므로서 봉급자들은 보다 높은 봉급을 요구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채무자들 과 소작인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지불하는 것이 더 용이해 졌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므로서 새로운 사회적인 불평등이 나타났다. 인플레이션과 인구의 감소로 인하여 나타난 이같은 번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유행병의 재발과 전쟁의 지속 및 재발은 일시적인 번영을 종식시켰다. 지주들은 그가 보호하고 있는 농민에게 새로운 부담을 주었는데 보다 과중한 세금같은 것들이었다. 또한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하에서 어쩔 수 없이 노동계급에게 많은 양보를 했던 지주나 기업가들은 어느 정도 노동력이 확보되자마자 임금을 큰 폭으로 떨어뜨렸다. 노동자들과 소작인, 그리고 농민들은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그 흐름을 바꾸어 놓지 못했다. 농민들은 적어도 개인적인 자유를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특히 도시의 하층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력이 흑사병 이전보다 더 악화되어 갔음을 보았다.
무엇보다도 인구 감소로 인하여 일어났던 경제적인 손실은 경작지의 황폐화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땅값이나 지주들의 소득은 수세기 이래 가장 낮은 퇴보 상태에 있었다. 10세기로부터 14세기 초반가지 활발했던 토지 개간이나 식민화 운동은 끝이 났다. 13세기에 이미 서유럽 각국의 지주들은 토지를 개간하여 목양지를 조성하였었다. 국제 무역이 성행하였던 그 시기에 양털은 수지맞는 현물 수확이었으며 이것은 특히 적인 인력만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데에 접어들면서 무역이 침체하게 되자 예전의 목양장은 황무지로 되돌아 갔다. 중세에 개척되었던 토지들은 이제 더 이상 경작되지 않았다. 땅값은 이 때문에 하락하였지만 종자나 농기구 조차 구입할 수 없었던 당시의 농민들은 그것 조차도 매입할 수 없었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것은 악성 인플레이션이었다. 이것은 전쟁이 가져온 결과로서 물론 상업이 융성하였던 중세 성기에도 존재했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인플레이션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중세 성기의 점진적이며 완만한 화폐주조로 진행되었던 인플레이션은 상업 혁명 시대에 인구나 경제 팽창을 위한 연료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인플레이션은 근본적으로 전쟁에 의한 것이었고 방대한 전쟁 비용을 치르기 위해 군주국이나 도시 국가들에 의해 지폐가 발행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폭넓은 질불 수단이 못되었다. 더욱이 이 시대의 전쟁은 대규모로 대포를 사용하였으므로 전쟁 비용 역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쟁 상태에 있는 국가들은 인플레이션 만으로는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금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것은 농민이나 지주들에게 뿐 아니라 거액의 현금을 가지고 있던 브르조아 계급에게 많은 부담을 가져다 주었다. 토지의 황폐화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생활이 궁핍하였던 당시의 사람들은 가중되어 가는 세금에 의해서 더욱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어 가자 중세부터 활발하였던 도시의 발전은 쇠퇴하여 도시의 자치권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금융업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위축되자 많은 은행들이 파산하게 되었지만 일부 파산을 모면한 은행들은 방법을 개선 시키므로서 그 규모는 전보다 더 거대해져 갔다. 그러나 이것은 상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게으른 상류 계급이나 도는 빈번하게 교전중에 있는 국가에게 대부를 해 주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자본의 양도 거대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투자는 일종의 투기사업과 같은 것이어서 단기간에 걸쳐서 높은 이자를 가져다 준 반면 채무자가 원금을 갚을 능력이 ㅇ벗을 때는 실패하였다. 대표적인 예로서 플로렌스의 바르디가나 페루치가와 같은 은행들은 영국왕이 용병을 채용하기 위하여 이 은행에서 빌렸던 대부금을 갚지 못하게 됨에 따라 파산하였다.
이상과 같은 경제적인 조건과 정치적인 상황은 몇몇 사람들에게 부를 집중시켜 주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즉 몇몇 사람들에게 있어서 경기 침체나 극심한 재난은 이득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부자와 빈자 사이의 간격은 더욱 멀어져 갔다. 때문에 상인들이나 제조업자들은 다수의 대중을 외면한 채 소수의 부유한 고객의 비유를 맞추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빈곤에 허덕인 반면 소수의 부유층은 재산의 증식에 힘입어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사치 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로서, 의류 산업이 쇠퇴하였던 중심지에서 비단 산업이 급증하게 되었던 것은 사치품 산업의 성장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대중을 위한 생산이 쇠퇴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부자와 빈자 사이에 차츰 거리가 멀어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놀라울만한 징표들로서 화려한 왕궁의 축성이 이 시대에 성행하였다. 織物산업의 쇠퇴와 인구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15세기에 플로렌스의 메디치가는 50만 듀카트라고 하는 재산을 소유하였는데 이것은 한 세기 이전에 플로렌스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었던 페루치가 재산의 세배 이상 되는 것이었다. 또한 은이나 구리 광산을 통제하였던 푸거가는 인플레이션으로 많은 이득을 보았으며 값싼 토지나 값싼 인력은 대기업가들의 재산 증식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유사한 대규모 사업체들이 처음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를 중심을 등장하였다. 이같은 부의 편중은 외관상의 화려함을 나타내 줄 수는 있었지만 전체적인 경제 상황을 호전시킬 수는 없었다.
부가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르네상스 문화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부분을 이룰 것이다. 역사상 보기 드물게 찬란하였던 르네상스 문화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시대에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르네상스 문화의 새로운 면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14세기 초반의 재앙이나 흑사병, 그리고 전쟁으로 인하여 일어났던 르네상스 시대의전반적인 경기 침체 외에도 르네상스 시대의 경제를 불황으로 이끌어 간 다른 요인들이 있었다.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기 직전에 국제적인 상호 관계가 붕괴되었던 것이 그것이었다.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었던 중세 성기의 특징은 광범위한 국제 무역에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국제적인 무역 관계와 유사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모험적인 상인들은 북유럽과의 무역은 물론 동방을 오고가는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같이 국제 무역이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은 11세기말부터 시작된 십자군 운동의 덕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유럽이 가장 위대한 세기(13세기)를 지나고 있는 동안에 십자군이 점령했던 동유럽과 서유럽의 지역들은 동방으로부터 새로운 침략을 받기에 이르렀다. 투르크족은 십자군이 정복한 나머지 지역을 점령했으며 타타르인들은 러시아를 복속시켰다. 이러한 침략으로 동방과 서방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그 간격이 심화되어 갔다.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더 이상 동방 무역에 종사할 수 없었다. 동부 시작의 축소와 국내 시장의 위축은 상업 혁명이 가능하게 하였던 요인들을 반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북부 유럽은 유행병과 빈번한 전쟁으로 혼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남부 유럽 상인들의 진출을 좌절시켰다. 오늘날과 같은 완전한 하나의 세계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었지만 민감한 세계 시작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같은 국제 관계의 변화는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국제 시장의 변화에 따라서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분야는 모직물 산업이었다. 특히 국제적인 시장을 보유하고 있었던 이탈리아의 모직물 산업은 이 시대에 급격히 쇠퇴하였다.
무엇보다도 국제 관계의 약화로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는 무역양의 감소에 있었다. 무역의 수치 이외에도 르네상스 시대 국제 관계의 악화를 볼 수 있는 것은 금융 분야에서이다. 금융업이야 말로 중세 성기이후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많이 내포한 분야였다. 그러나 많은 은행가들이 이 시대에 파산되거나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특기할 만한 사회 현상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또다른 것들이 있었다. 이 시대 전반에 걸쳐서 서유럽 각지에서 끊임없이 분출하였던 농민 반란이 그것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과는 달리 르네상스 시대의 경제적인 침체를 유도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농민 반란은 이 시대의 경제 상황을 더욱 어렵게 이끌어 가고야 말았다. 이 끊임없는 반란이 그들의 의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면 부의 분배 문제에 있어서 보다 낳은 조건이 형성되었을 것이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농민의 지위는 더욱 하락해야만 했다. 농민뿐만이 아니라 자본가나 은행가들의 그늘에서 살아야 했던 도시의 노동자 계층도 사회적인 변혁을 요구하며 반란에 가담하였다. 그것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1370년대 말 플로렌스에서 일어난 치옴피(Ciompi)의 난이었다. 물론 부유한 자본가들이나 지배 계급은 농민 및 노동자들의 반란에 대응하여 이것을 무마시키기 위한 여러가지의 양보를 하였지만 결국에는 하층민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7
(2) 르네상스시대 문화와 경제관계
르네상스는 서유럽의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의 시대였다. 만약 이 시대가 경제적으로 융성한 시대였다면 이 문화에 대하여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문화를 생각할 때 문화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에 개화되는 것인가? 경제적인 조건과 문화의 발달 사이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가?
이런 두가지 의문은 각각 어떤 뚜렷한 결론으로 맺어질 수 없는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인류가 있어온 이래에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인류의 정신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르네 상스 문화를 생각할 때 그 문화의 규모가 다른 어느 문화의 그것보다 큰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와같은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는 이러한 것들을 의문시 하는 것 자체가 허용될 수 없다고 본다. 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와 경제와의 상관관계를 고찰하는 것이다.
한 시대의 경제적 조건과 문화발전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지는 흥미 있는 관심거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문화는 경제적으로 풍요한 시대에 개화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언급한다면 반드시 문화는 경제적으로 풍요한 시대에 개화하는 것도 아니며 도한 경제적으로 침체된 시대에 개화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시대의 문화는 비록 그것이 그 시대의 경제상황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 시대의 경제적인 조건과 어느 정도의 관련하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자체로 돌려서 언급해 보면 당시의 메디치나 푸거같은 은행가들은 다른 어느 시대와는 달리 미켈란 젤로와 뒤러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을 배출해 냈었다. 이것을 우리 시대와 연결시켜 언급한다면 우리 시대의 거대한 기업가들은 미켈란젤로 보다도 더 위대한 예술가들을 배출해 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생존의 최저 한도는 예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지능의 최저 한도는 사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위대한 예술가들이나 기업가들이 같은 집단이나 같은 세대에서 탄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문화의 탁월성으로 인하여 제시되었던 몇 가지의 의문점들은 간단한 요약으로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번째의 것으로서 결코 문화는 경제적인 불황기에 개화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르네상스 문화는 역사 속에 예외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두 번째의 의문에 대한 해답 역시 같은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 경제적인 크기와 문화의 발전 사이에는 그것을 측정할만한 어떤 계량적인 기준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경제 상황과 그 문화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위와는 또 다른 의문들을 제시할 수 있다. 경기 침체 시대에 어떻게 해서 르네상스 문화는 발전할 수 있었는가? 르네상스 문화의 성격은 무엇인가?
르네상스 시대를 경제적 침체의 시대로 규정한 점 때문에 어떻게 해서 르네상스 문화가 개화되었는지의 문을 갖게 되는데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르네상스 시대의 경제구조를 면밀히 검토하지 못한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경제는 전반적인 경기 침체의 늪에 있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가 편중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많은 사업가들이 파산을 맛보았지만 일부의 사업가들은 보다 많은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소득구조의 불합리성은 오히려 소수에게 치부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재력가들은 신분상으로는 귀족에 속하고 있지 못했으므로 재산을 통하여 정치 권력과 지적인 특권을 얻으려 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사회는 새로운 재력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였다. 오로지 이들에게만 경제적이며 지적이고 정치적인 기회가 제공될 수 있었다. 이제 많은 재산을 모았던 그들은 새로운 방면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신분적으로 귀족의 혈통을 이어받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보다 품위 있어 보이는 예술에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 이외에 많은 재력가들이 문화에 투자하였던 또다른 경제적인 배경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경제적인 불황속에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였던 그들은 뚜렷하게 투자하여야 할 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불황시대의 경제구조는 활발한 투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재력가들은 문화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돈은 경제적인 출구가 미약할 때 예술에 투자 된다]라고 한 로페즈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르네상스 문화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귀족적이었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경제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3) 르네상스시대의 사상
1) 휴머니스트 운동(인문주의 운동)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철학적 경향이나 체계가 아니라 중요하되 영역이 한정된 연구를 강조하고 발전시킨 문화적, 교육적 프로그램이었다.8
르네상스 휴머니즘에서 문학적 관심이 갖는 중요성은 휴머니스트의 직업적 지위에 의해 설명될 수 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중등학교와 대학의 인문학 교수로서 혹은 군주들이나 도시국가들의 서기로서 활동했다.9
2) 아리스토텔레스 전통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는 르네상스 중에 여러 이유들로 인해 여러방식으로 도전 받았지만 여전히 강력한 특히 자연철학 분야에선 강력한 요소로 남아 있었다.10
3) 르네상스의 플라톤주의
르네상스시대의 플라톤 주의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대표자는 피치노였는데 그에 의해 중세의 철학적 종교적 유산과 그리스 철학의 교훈이 새롭게 결합되었다. 피치노의 플라톤적 사랑이론은 16세기의 여러 소네트와 여타의시에서 그리고 문학적 학원의 주변에서 성장했으며 독서 대중과 더불어 위대한 거대한 산문체 문학, 즉시 에서도 되풀이되고 발전했다.11
4) 르네상스의 인간배경
르네상스 사상의 인간 강조 및 인간의 우주에서의 위치 인식방법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유사한 관점 - 어떤 경우 르네상스 사상가들에게 -고대와 중세의 저자들에게로 발견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12 르네상스 사상은 경제사상에 비해 반드시 덜 종교적이지는 않았지만, 보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이었다고 하는 관점에는 적어도 진리의 정수가 있으며 그것은 인간적 문제들에 더 몰두했다.
5) 계몽주의 (Aufklarug)
17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민계급의 해방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계몽주의에서는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반봉건주의 운동이 절정에 달하고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세계관이 극복된다. 계몽주의는 시민계급의 민주화 및 사유화 경험을 다양한 형태로 포함하고 있으며 그 발전 단계도 다양하다.13
(4) 르네상스시대의 정치상황
도시가 발생하였고 발달하였다.14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농업에서 분리되어 자신들의 노동을 전문화 시킴으로서 노동의 문화가 발생하고 도시가 성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이와 더불어 상품 교환을 목표로 하는 시장이 발생하고 상업을 전담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도시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과학적인 세계관은 동시에 폐쇄된 봉건제도에 맞서는 새로운 사회 질서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15
당시 유럽의 적은 나라에 속해 있으면서도 열강에 끼어 식민지 생활에 가담하였던 네덜란드는 어느정도 통일전 국가를 형성하여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허용할 수 있었고 유럽의 계몽주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되었다.16
3. 성장과정
(1) 출생
16세기 말경 네덜란드로 이주한 부유한 포르투갈 출신 유대계 상인의 아들로 1632년 11월 24일 암스텔담에서 태어났다.17 그의 선조들은 아마도 마라노(Marrano) 즉, 15세기말경 종교적 박해를 대하기 위하여 겉으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체 하였지만 실제로는 계속 유대교를 믿고 있었던 유대인들이었던 듯하다. 국어인 스페인어와 포루투갈어를 배웠고 어린시절의 교육은 주로 구약성서와 탈무드의 연구에 집중되었다. 독일인으로부터 라틴어의 기본을 배웠고 개인지도로 수학, 데카르트의 철학도 탐구했다. 아울러 프랑스, 이탈리어, 헤르루어, 네덜란드어로 학습하였다.18
유대철학에서 별다른 만족을 얻지 못했다.19 1656년 24세에 종교적인 파문을 당했다.20 1663년 레이덴 근처로 이사, 이때부터 영국 왕립 학술원의 간사였던 헨리올덴이그로 거처를 옮겼다. 1676년 라이프니츠의 방문을 받고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했고 1677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는 라틴어 학교에서 라틴어를 공부한 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리우스등을 거쳐 부르노와 데카르트 철학에 전념하였다.21
라틴어 학교의 선생이었던 엔데(franz Van den Ende)는 유능한 라틴어 교사였을뿐만 아니라 사유 사상사였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가슴에 무신론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22 스피노자는 천사는 환상이며 영혼을 생명체 안에만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23
1656년 7월 27일 유태교단으로부터 저주를 받으면서 파문되었다.24 "저주의 말을 읽는 동안 때때로 큰 호른의 느리고도 비통한 듯한 곡조가 들렸다. 식이 시작할 때 환하게 켜 있던 등불은 식이 진행됨에 따라 하나씩 차례로 꺼지고 드디어 파문당한 사람의 영적 소멸을 상징하는 듯이 마지막 등불이 꺼졌다. 장내는 칠흑같이 어둠에 파묻혔다". 유대교단의 파문은 종교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25
1677년 나이 44세를 갓 넘어 스피노자는 죽음을 바라보게 되었다. 먼지가 많은 골방에서 얻은 폐병으로부터 그는 결국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임종은 그의 삶처럼 조용하고 안정되었으며 죽음의 모든 공포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평소의 태도대로 아무런 변화도 없이 조용하게 그의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26
4. 시대적 배경과 성장과정 속에 나타난 사상
문화적 격동의 시대적 배경과 성장의 어두움 과정속에서 표현된 그의 사상은 신에 있어서는 범신론 적으로 사상을 지니게 되었다. 신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8가지로 설명하고 있다.27
그의 책 [에티카] 1부 신에 대하여, 2부 정신의 본성 및 그 기원에 대하여, 3부 감정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4부 인간의 예속 혹은 감정의 힘에 대하여, 5부 지성에 능력 혹은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는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논증되었다고 하였다. 자유로운 사상가 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상의 자유와 [에티카]의 집필을 위해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철학 정교수로 초빙하였으나 거절하였다.28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아무리 타당한 주장이라 할 지라도 스피노자의 일원론이 데카르트의 철학으로부터 직접 도출되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29 스피노자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사상적 근원은 그가 범신론적인 경향을 지닌 르네상스기의 철학자들에 대하여 연구하였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30
"스피노자"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적 논증이 갖추어야 할 올바른 질서는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보다 앞선 것 즉, 신의 본질과 본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 가능한 단계들을 밟아 나갈 것을 요구한다.31
5. 맺는말
한 시대에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받는 영향은 매우 크다.
16세기에서의 스피노자는 매우 부유한 가정에서 부족한 것이 없이 자라났다. 그 가운데 그는 유대교의 정통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왜 그는 유대교의 교리를 받아 들 릴 수 없었는가 ?
그 시대에 유대교의 전통은 한낮 옛 고서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시대를 앞선 책이 아닌 그저 옛선인들의 이야기로 들린 것은 그 시대와 함께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와 현실이 다르고 현실과 미래가 다르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유대교의 전승을 무시하고 여러 사람의 간구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자신의 신념을 말할 수 있지 않았는가 생각되어진다. 바로 이것이 그 시대를 나타내는 양식인 것이다.
스피노자를 조사하면서 그 시대가 너무 광범위하고 그 분류하는 작업에 있어서 제약이 많이 있었다. 그 중 르네상스중심으로 하여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았으며 스피노자의 신의 사상에 국한하여 알아보았다.
그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그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은 한사람의 인생의 척도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어느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라 어떠한 사고를 하는 가에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의 양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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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iskimin, Harry A., The Economy of Early Renaissance Europe 1300-146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2 Ibid., p.26.
3 Ibid., p.27.
4 Pounds, N. J. G., An Economic History of Medieval Europe, Longman, p.440.
5 Miskimin, Harry A., op.cit., p.28.
6 Kirchner, Walther, ( 서양 중세사 개론( , 고려대 대학원 중세사 연구실 역, 서울: 대학문화사, 1984. P.288.
7 Ibid., p.307.
8 P.o. Kristeller 저, (르네상스의 사상과 그 원천( , 진원숙역, 대구: 계명대출판사, 1995.p.42.
9 Ibid., p.43.
10 Ibid., p.73.
11 Ibid., p.84.
12 Ibid., p.210.
13 강대석저, 서양 근세철학, 서울: 서광사, 1995, p.83
14 Ibid., p.19.
15 Ibid., p.30.
16 Ibid., p.277.
17 F. 콜플스톤, ( 합리론( , 김성호역, 서울, 서광사, 1994.p.329.
18 Ibid., p.330.
19 프랭크 틸리, (서양철학사( , 서울 현대 지성사, 1998, 레저우드개정, 김기찬 옮김.p.408
20 F. 콜플스톤, op.cit., p.330.
21 강대석저, op.cit., p.278.
22 Ibid., p.278.
23 Ibid., p.279.
24 Ibid., p.330.
25 Ibid., p.279.
26 K, Fisher, Baruch Spinoza's Leben und charakter(Heidelberg, 1746),p.51.
27 B. Spinoza저, ( 에티카 ( , 차근호역, 서울: 혜원: 1991.pp.8-10.
28 Ibid., pp.326-333.
29 F. 콜플스톤, op.cit., p.333.
30 Ibid., p.336.
31 Ibid,.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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