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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일주문을 지나 산책로를 들어섰다. 푸른 신록의 계절, 양 길가 힘 있게 쭉쭉 뻗은 전나무 길을 걷는다. 간간히 숲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높게 올려진 나무 끝머리 갈라진 하늘이 맑고, 길 따라 흐르는 월정천의 맑은 물은 그동안의 더위에 치쳐있던 몸 깊숙이 청량함으로 파고든다.
편편하게 다져진 길 위에 신발을 벗어들고 나무들이 품어내는 한 낮의 맑은 기운을 온 몸으로 받으며 그렇게 오르다보니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시기의 눈총이 뒤섞인 시선을 받는다. 물론 편하게 생겨먹은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그것은 맨발로 걸어본 사람만이 멈출 수 없는 매력이 있음이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 즈음 몇 백 년 세월을 지켜온 아름드리 전나무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볼을 스치고, 맨발로 걷는 발바닥의 촉감이 마냥 좋기만 하다.
문명의 이기인 바퀴달린 차로 횡 하니 절집 입구까지 갔다면 맛볼 수 없었을 터이니 한가로운 자만의 여유요 특권이 아닐 런지. 어차피 오늘의 일정은 상원사로 마감을 한다 생각하니 한결 여유롭다. 이것이 답사를 가는 진정한 참맛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월정사, 지금의 월정사는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되었다가 최근에 불사가 된 사찰이지만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은 신라 당대의 고승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듯 하다. 지금의 월정사는 그의 흔적이라곤 고구려양식을 계승한 초기 고려석탑 하나만 우뚝 솟아있을 뿐이지만....... 하긴 나는 지금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 석탑을 친견하러 가는 길이나 혹여 운이 좋다면 한국전쟁 때 화마에 녹아버린 신라시대 범종의 여운을 받아 챙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상념에 쌓여 걷다가 보면 벌개미취, 구절초, 이삮여뀌 등등의 야생화를 만나는 작은 감동 또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절집입구에 들어서기 전 다시 신발을 고처신고 속으로 빨려들 듯 들어선다. 2층 종루가 양팔을 벌리고 마주하고, 잠깐의 유혹에 종루 그늘아래 몇몇의 계단을 오르면 마당 한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석탑이 모든 시선을 빼앗아 버린다. 일반적으론 사찰구조나 내려오는 산세나 건물의 형태나 들어선 위치나 포근함이나 정겨움이나 뭐 이런 걸 먼저 느끼게 되지만 월정사에서만큼은 이것이 예외이고 새로운 환경이다. 물론 이것은 허허 벌판에 홀로 외롭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적광전을 마주하고 그 앞으로 적당한 여유 공간을 두고 있으니 시각적 동선이 자연스레 옮겨지는 것일 수 있다.
적광전 앞 넓은 뜰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팔각구층석탑(국보48호) 앞에 섰다. 15m의 높은 석탑을 마주하니 어지럼증이 밀려온다. 강렬한 햇살을 받아 맑은 하늘과 약간의 구름과 함께 커다란 돌을 깎고 다듬고 조합해서 올려진 장엄하고 경쾌하며 안정감 있는 완벽한 석탑이다. 튼실한 지대석위의 기단부와 켜켜이 올려진 몸돌과 팔각원당으로 흩트림 없이 놓인 돌들 위에 아름답게 마무리된 상륜부까지 하나하나 분리시켜 놓아도 멋진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양식에서 많이 보이는 석탑형식을 계승한 고려초기 작품이라 힘찬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엿보는 듯 하고, 하늘의 기운과 천지간의 균형을 위해 지금의 위치가 제자리를 찾은 듯하니 그간의 시련에도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며 당당한 품세가 영원한 모습이라 저절로 합장을 하게 만든다.
4장으로 맞춘 지대석위에 하부기단을 올렸다. 기단부 면석에 안상이 음각되어있고, 아래기단을 덮은 갑석에는 연꽃잎이 아래로 조각된 복련이 각각의 면에 4개씩 돋을새김 되어 볼륨감과 함께 불대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위에 고려 특유의 양식인 굄석이 하나 더 있어 상층 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부 8면 모서리에 기둥모양의 우주가 돋을새김 되어있어 훌쩍 큰 키에 부채질 한다. 상층기단 덥개석과 일층 몸돌사이 굄석이 하나 더 끼워져 있으며 팔각의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다른 돌로 짜여져 있으며 중간 몸돌과 지붕돌은 여러 개의 석재로 짜 맞춘 것도 있다.
1층 몸돌 중 사이사이 4면에 네모난 감실이 있으며, 아홉 단의 몸돌 전체에 깔끔하게 조각된 모서리기둥이 힘을 실어주었으며 지붕돌의 처마는 평면이지만 경사진 낙수면과 경쾌하게 올려진 반전이 자유롭게 날린다. 지붕돌 아래 추녀에는 빗물의 흐름을 모으기 위한 홈이 팔각으로 가지런히 둘러 처져 있으며 층급받침이 두 단 이지만 하나는 둥글고 하나는 각진 모습으로 음양의 조화와 힘과 부드러움의 상반된 조화로 꾸며놓아 온전한 정성이 돋보인다. 8각의 지붕돌 추녀아래 올망졸망한 풍경이 달려있어 화려하게 치장을 한 모습이나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미동 없는 풍경을 바라보다 손으로 툭 하고 건드려보았으면, 잡스러운 생각이 든다. 탑 전체를 흔들어 버리면 소리가 들릴 터인데, 혹은 손이 모자라니 기다란 장대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이내 피식 웃고 만다. 이것도 욕심덩어리인 것을, 이것이 내게 보여줄 수 있는 한계인 것을.......
사실 이 석탑의 마무리는 상륜부의 아름다움에 있다. 노반과 공양그릇의 복발과 연꽃의 앙화와 보륜이 석재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 보주와 찰추 외에 보관을 쓴 듯 청동장식이 화려하게 마무리 되어있다. 오래전 답사도반 선배가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을 보며 미스 고려석탑이라 칭하더라만 이 석탑은 아마도 미스터 고려석탑으로 보면 어떨까?
그러나 힘 있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석탑을 보고는 있지만 어딘가 허전함이 자꾸만 밀려온다. 석탑을 향해 불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던 석조보살상이 어디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석탑 앞에 무릎 꿇어 탑을 향해 공양하는 모습의 달콤한 미소의 보살상이 없어졌다. 빈 터만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잠시 쉬로 들어간 것인가? 아님 어디 박물관이라 하여 유리 틀 속에 박제해 놓은 것일까? 나는 자꾸만 고개를 돌려 처연히 앉아있을 보살상을 찾았으나 평평한 절집마당에 강렬한 햇살 만 내리 쬘 뿐이고, 눈을 멀리하자 건너 성보박물관이란 현판에 가슴이 철렁한다.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이내 그 마음이 실망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연이 닿는다면 친견할 수 있겠지, 스스로 다독이며 석탑 뒤로 서 있는 적광전을 향했다. 적광전이라 함을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것이나 이곳 월정사는 대웅전에 모셔져야 할 석가여래불을 모셔두고 있다. 그 이유야 미천한 내가 알 길이 없지만, 적광전이 대웅전 격이니 뭐 그리 불편할 것도 아닌 것을.
양팔을 벌려 날개짖 하는 건물을 올려다본다.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유려한 곡선의 맛은 우리 건축물을 감상하는 첫 번째 백미다. 용마루의 곡선과 처마의 끝선과 살짝 들린 뒤 다시 내려오는 내림마루와 귀마루의 멋스러움이 건물 전체의 크기와 높이, 전체 비율이 더없이 완벽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신발을 풀고 그 품속으로 들어 까치발을 하고서 살금살금 걷는다.
배례를 올리고 불상과 마주한다.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불상의 모습에 숙연해지고 까닭모를 슬픔이 밀려와 진저리를 친다. 이것이 내가 절집을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나 불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발복과 기복, 기자신앙이 아닌 종교의 유무를 떠나 믿음이란 가짐에 용기와 희망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는 분열을 획책하지만 믿음은 화합을 가져온다는 어느 황당한 할리우드 영화의 한 대사가 생각난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종교분쟁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현명한 우리 선조들의 순박한 믿음이 지금까지 뿌리내려 전해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한 우물천정에 극락조가 춤을 추고 불상아래 수미단에 조각된 연꽃과 연잎, 사자와 용이 힘차게 움직이고 있다. 형형색색의 색상이 아니라 고가구의 멋스러움에 가까이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햇살에 빛이 나고, 가끔은 움직이는 착각에 홀로 피식 미소 짓는다. 착각도 이정도면 수준급이라고.......
적광전 뒤뜰 축대위에 나리꽃이 댄스공연을 펼치는 듯 하다. 꽃 모양새가 그러하고 가지와 줄기의 모양새가 그러하고 색상이 그러하다. 어쩜 내 연필 선을 닮았으며 내 가끔 화작질 하던 붓의 질감과 터치의 각을 닮아있다. 정겨움도 넘치면 화이려니 고쳐도 불구일 수밖에 없는 그놈의 병이 다시 도졌나 보다.
성보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역시 그곳에는 석탑 앞 석조보살좌상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내가 본 미소는 미소가 아니고, 내가 본 공양상은 공양을 받들고 있지 않았다. 다만 구석진 틀에 갇힌 박재된 슬픈 보살상만 있을 뿐이었다. 이유야 있다. 워낙에 뭇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모두 감내하기 힘들었거나 오래도록 보존하려면 비바람도 피하게 하는 것이 도리일 수 있다. 또한 관리하기도 얼마나 편리한가? 그러나 어떤 이유였다 해도 제자리가 있는 법이다. 사찰이 불타 없어졌다면 모를까 여전히 건재하고 화려한 비상을 꿈꾸는 곳에 제자리를 잃어버린 보살상이 박제되어 있다니.......
유교이념의 조선궁궐 경복궁 옆 뜰에 초라하게 지금도 놓여있는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승탑이며 다른 불교 유물들을 한번 보라,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각된 석재라 해도 그기에 있음으로써 초라하고 또 외소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도굴꾼들의 등살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월정사 보살상이야 그 조성당시의 뜻이며 등공양 석조보살의 간절한 바램을 무시하며 이산을 만들 수 없는 것 아닌가? 보살상이 있음으로써 석탑이 더 소중하고, 석탑이 있음으로써 보살상의 절실한 마음이 우리 보는 이의 가슴에 녹아드는 것이니 지금이라도 제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눈보라를 맞으며 석탑을 향해 앉아있는 처연하고 가련(?)한 그 모습에 한층 더 깊은 불심이 우러나올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또 이런 쓸데없는데 정렬을 낭비하는 구먼....)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다시 오대산 아니, 청량산 상원사로 향한다.
가는 중간 한적한 곳에 산새소리 화음 하는 부도전을 찾았다. 전나무 사이로 밝은 햇살이 어느 무대조명 보다 아름답고 이채롭다. 이 한 세상을 정진하며 살다가 간 고승들의 무덤이기에 크기에 관계없이 모습에 상관없이 숙연해지고 잔잔한 마음이 된다. 이리저리 발길을 옮기며 이상하게 조각된 거북도 만나고, 토끼풀도 밟으며 사이를 걷다가 말벌의 공격에 놀라 돌아 나왔다. 부도전의 호위무사 같은 놈이라고.......
참말로 오랫만에 인사 올립니다^^*..
첫댓글 정말 오랫만에 접하는 초시님 글입니다. 지금쯤이면 저 부도밭에 잣송이들이 떨어져 있겠지요....미스터고려탑과 궁금하고 그기에 있지 못한 공양상도 보고싶고.....가을에 보는 초여름햇살도 그립고 그렇습니다.
별일 없으시지요??? 궁금했었습니다......
같이 떠나자는 넘이 혼자 갔다 왔는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