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위 성지 방문미사 강론
김규봉 신부님의 뜻밖의 요청으로 강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영광이지만 준비 없이 하게 되어 혹 부족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강론이라기보다 오늘 미사본문에 상관 없이 고백의 형식을 띤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사실 신학원에 다닐 때 공부에는 열성을 내지 못했습니다. 불량학생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두꺼운 성경책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해서 진리 하나만 딱 붙들고 불교의 화두처럼 파고 들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진리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몇 십년이 걸리더라도 죽는 날까지 한번 파볼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네 이웃은 누구인가? 처음에는 사람에게서 찾다가 어느덧 온갖 동물 나아가 눈앞의 풀과 바위 조차도 이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네 몸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 몸을 연구하면서 살게 되어있더군요.
50대 60대 노화가 진행될수록 그 나이대에 맞는 운동과 병에 대한 대처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요가가 제 몸에 맞는다고 생각해서 30여년 동안 열심히 했고 폴더 폰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척추협착증과 디스크 탈출증으로 고생하는 지금은 요가가 저에게는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년 전부터는 지인의 권유로 암벽등반의 실내운동인 스포츠 클라이밍을 하고 있습니다.
제 몸을 잘 살피고 관찰하는 것이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인간은 어차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사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이 사랑이란 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살면 살수록 매우 어렵고 평생 공부가 필요한 난제임을 알게되었습니다.
내가 남에게 하고 있는 사랑, 타인이 나에게 해주는 사랑, 그 내용과 방법이 인류숫자만큼이나 다르더군요.
또 나 자신이 그렇듯 타인도 사랑에 대해서는 정확히 잘 모르니 혼돈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기도 하구요.
저는 오늘 끝도 없는 제 인생공부의 실패담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나이가 마흔에 점점 다가가고 있을 때 저는 방황하다 뒤늦게 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강론준비를 해서 임하는데 어느날 제가 존경하는 신심 깊은 사목회장님이 저에게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
평신도들은 사회에서 전쟁을 하듯이 살다가 오직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꼭 한겨레 신문 사설 같은 강론을 하면서 부정적 관점으로 문제점만 잔뜩 늘어놓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이 복잡해지기만 하고 화만 난다는 것입니다. 힘드시겠지만 강론을 좀 은혜가 충만하게 해 줄 수는 없는거냐는 겁니다.
이런 노골적 불만을 처음 들었을 때는 사제가 하느님의 음성을 전하는데 어딜 감히 덤벼드는 거냐고 화를 불같이 냈습니다.
마을 전체를 두 바퀴나 돌며 분을 삭히느라 애를 썼는데 문득 이분들이 뼈골이 빠지게 농사를 지어 바치는 헌금으로 먹고 살고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아.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친구들에게서도 어느덧 전화가 뚝 끊어져 있었습니다.
모두들 저에게 질려버린 것입니다.
어설픈 운동권 논리로 무장하고 매사에 문제점만 찾고 지적질만 하는 저의 딱한 모습을 그때 보게 된 것입니다.
미련한 저에게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매일 자기 전에 그날 뱉은 말 중에서 제 마음의 그물에 걸린 부정적인 말들을 찾아내고 그 말들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두꺼운 공책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그뒤로 세월이 꽤 흘렀습니다. 10년 정도는 꽤 열심을 내서 노력을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5년이 지나면서부터 지인들로부터 전화가 자주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주로 새벽 1시부터 3시까지 알콜중독자분들이 집중적으로 전화가 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겁니다.
비록 자다 깨서 받는 전화라 귀찮기도 하지만 저를 좋아해주니 기쁘고 행복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의 격려가 듣고 싶고 제 말이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제가 결심한 것은 정초에 의례히 하는 덕담을 1년 내내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덕담을 하다 보니 저의 문제점도 더 분명해졌습니다.
친구 본인도 잊어먹고 있거나 잘 인식하지 못하는 자기의 약한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을 저의 장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저의 입에 붙은 말버릇 중에 ‘너는 성인이 될 그릇이다. 그런데 딱 고거 하나만 고치면 되는데 왜 그걸 끊어버리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남이 해주는 충고를 듣는다고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있나요? 그런 위대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저 자신도 많은 약점을 갖고 살면서 말입니다.
사실 친구들이 그런 약한 모습이 되어있는 것은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고 남이 모를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가 딱할 정도로 부족했던 거죠.
제가 상대방의 약점을 지적하고 충고하는 쾌감에 취하다 보니 마주한 상대방의 얼굴이 상처를 받아 창백해지고 안색이 바뀌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남들에게서 ‘예리하다 논리가 뛰어나다 머리가 좋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하다 보니 그렇게 괴물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저를 피하고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저의 잘못을 깨닫고 난 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가 너무 철이 없었다. 그러니 용서해주면 안되겠니?”
친구들은 저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자기 몸에 날아와 박힌 화살을 빼내려면 자기 살을 다시 찢어야 합니다.
용서 안 해주는 게 당연하죠.
이미 관계는 금이 갔고 회복은 되지 않았습니다.
괜찮은 친구들이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당시 제가 맡은 교회 사목에 있어서도 강론도 문제였지만 골치 아픈 난제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저보다 꽤 나이가 많으신 뿌리 신자 한 분이 술만 취하면 사제관에 찾아와서 저를 붙들고 두세 시간 정도 역대 사제들의 비행을 늘어놓다가 술이 깨면 일어나 나가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있는 분이 계셨습니다.
신자들도 10여 년 전부터 늘 있어 왔던 오래 묵은 일이라 다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명)를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사목의 관건이 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역대 사제들 욕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맞받아칠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러면 싸움이 될 것이고 교회가 어두워질 게 뻔했습니다.
저는 기도 끝에 이분의 장점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심한 알콜중독자인 그는 교회의 우환거리로 치부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기껏 생각해 낸 것이
“베드로는 코가 어찌 그리 잘 생겼소! 내 코가 그리 잘 생겼다면 신자가 지금 보다는 훨씬 늘었을 터인데. 나는 키도 작지. 얼굴도 못 생겼지. 참 비관이 되네요. 베드로도 날 보면 좋은 말이 안 나오죠?”
그러면 베드로도 사제들 험담을 하다말고 웃어요.
저는 그런 대화를 5년 내내 계속하다 임기가 다 되어 그 시골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때 교우들이 저도 다른 사제들처럼 베드로와 싸우게 될까 봐 마음이 불안불안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임지인 천안성당으로 갔을 때 뜻밖에도 베드로가 해마다 찾아와서 자신의 잘못을 빌었습니다.
“신부님. 저 밉죠? 저 용서해 주지 않으면 지옥 가요. 용서해 주는 거죠?”
“무슨 소리? 지옥에는 성질 못 된 나 같은 사람이 가는 거지. 잘 생긴 베드로가 왜 가? 걱정하지 마.”
단지 코가 잘 생겼다고 말했을 뿐인데도 베드로는 사제들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를 많이 회복했던 것이니 그도 사실은 심성이 고운 분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덕담도 잘만 하면 효과가 꽤 있습니다. 물론 빈말이 되어서는 안되겠죠. 그래도 상대가 느껴질 만큼 진심이 담겨 있어야 되겠죠?
그런데 최근에 제 가까운 후배가 그런 말을 하데요.
“형! 술이 많이 들어가면 언어가 날카로와지면서 공격적이 되는 거 알아?”
“그러냐? 내가 그렇구나.”
그렇습니다. 잘해 보려고 노력은 하지만 방심하면 또 다시 마음의 깊은 어딘가에 숨어있던 버릇이 튀어 나옵니다.
그래서 수행은 평생 계속할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특히 법기가 아닌 저는 간장종지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항상 조심조심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혹 저의 강론으로 마음이 오히려 어지러워졌다면 마귀의 장난이니 성령님의 도움을 요청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하시길 빕니다.
2022년 4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