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의 사원, 사원의 도시, 앙코르와트
1860년 초 프랑스 박물학자 알베르 앙리 무오(Albert Henry Mouhot)는 진기한 나비를 채집하기 위해 현지 안내인 네 명과 함께 캄보디아의 밀림 속을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 도착하자 안내인들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더 들어가면 몇 백 년 동안 텅 빈 도시가 나오는데 그곳에는 주술에 걸린 수많은 유령들이 들끓고 있다고 했다. 무오는 텅 빈 도시가 있다는 말에 흥미를 느끼곤 직접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안내인들을 설득해 밀림 속으로 계속 들어가던 무오는 갑자기 펼쳐진 장관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일기에서 그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의 청색, 정글의 초록색, 건축물의 장엄함과 우아한 곡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리스와 로마가 남긴 그 어떤 유적보다도 위대하다. 세계에서 가장 외진 곳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무오가 발견한 곳은 400년 전에 멸망한 옛 도시 앙코르의 폐허로 현재 캄보디아의 북서부 시엠레아프의 톤레사프호수 북쪽 일대(일명 앙코르 지방)에 있는 돌과 벽돌로 지어진 앙코르와트 유적군이다. 앙코르와트는 ‘도시의 사원’이라는 뜻으로, 그 일대 수많은 앙코르 건축물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유적지인데 때로는 일대 유적군 전체를 ‘앙코르와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오가 앙코르와트를 발견할 당시 그곳에는 1000여 명의 승려가 기거하고 있었다.
앙코르와트가 위치한 시엠레아프는 캄보디아 3대 도시 중 하나로 한국의 경주 같은 고대 도읍지이다. 앙코르와트에는 폭이 넓은 도로가 동서로 질서정연하게 뻗어 있고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정교하게 건축한 사원 600여 개가 세워져 있다. 그중 10여 개는 크기가 이집트의 룩소르대신전이나 중세 유럽의 대성당과 비교할 만하다.
12~13세기에 앙코르왕국은 두 왕의 강력한 통치로 번성했다. 태양의 수호자로 일컬어진 수리아바르만 2세는 지금의 타이 영토 정도로까지 세력을 떨쳤고 ‘도시의 사원’ 앙코르와트를 건설했다. 앙코르와트는 동서 1500미터, 남북 1300미터의 웅장한 사원으로, 약 2만 5000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 37년 동안 건설했다. 몇 겹의 성곽이 앙코르와트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마지막 성곽 바깥은 다시 폭 190미터의 거대한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앙코르 유적 중에서는 드물게 서쪽에 정문 입구를 두었으며 큰 탑문이 있다. 탑문에서부터 사당까지는 너비 9.5미터, 길이 475미터인, 돌이 깔린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이 유적은 수리아바르만 2세가 힌두교 비슈누에게 바친 것으로, 그가 죽은 다음에는 묘로 쓰인 것 같다.
사원을 제대로 보려면 3생(전생 · 현생 · 내생)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 1층은 미물계, 2층은 인간계, 3층은 천상계를 상징한다. 건물은 세 겹으로 된 회랑과, 이 세 겹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중앙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겹의 회랑은 중앙 사당 쪽으로 들어갈수록 한 단씩 높아져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를 이룬다.
제1회랑은 동서 215미터, 남북 187미터이고 총 800여 미터인데 회랑벽면에는 크메르제국의 신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벽화가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역사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캄보디아에서는 역사교과서와 같다. 박물관 유물을 훑어보듯 돌아보아도 족히 1시간은 걸리는 이 엄청난 ‘4단 병풍식’ 부조에는 힌두교의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와 〈라마야나(Ramayana)〉에 나오는 카우라바(Kaurava)족과 판다바(Pandava)족 간에 벌어진 쿠루크세트라(Kurukshetra) 전투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수리아바르만 2세가 코끼리를 타고 병사들 사이를 지나가는 장면도 있고 힌두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을 표현한 장면도 있다. 88명의 아수라와 92명의 신이 장생불로약을 추출하려고 ‘넓은 우유의 바다를 휘저어’ 버터를 만드는 신화 속의 한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 800여 미터에 이르는 부조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신의 영역인 높이 65미터의 중앙탑은 70도가 넘는 가파른 성벽 그 자체로 담력이 없는 사람은 오르기를 포기할 정도다. 능숙한 등산가라 할지라도 두 손 두 발을 써서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를 신에 다다르기 위한 예의라고 한다. 모서리에 네 개의 탑이 서 있는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탑은 앙코르와트를 상징하는 곳이다. 이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궁궐처럼 화려한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앙코르와트는 신의 세계를 지상에 구현한 사당인데 중앙탑은 힌두교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받드는 수미산(須彌山)을 나타내고 참배 길은 세계의 기축(基軸) 도로를 모방하며 둘레를 에워싼 벽은 히말라야산맥을, 해자는 세계의 끝인 깊은 바다를 상징한다. 사원 안의 곳곳에는 비슈누에 관한 신화가 조각되어 있고 국왕들의 모습을 비롯하여 코브라 · 무희의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수리아바르만 2세의 후계자인 자야바르만 7세는 30년을 통치하면서 세력을 최대로 확장시켜 현재의 캄보디아 · 라오스 · 타이 · 베트남 남부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고 도읍인 앙코르톰을 재건하고 병원 · 숙박시설 · 도로를 건설했다. 그가 건설한 건물에 이런 글귀가 남아 있다. “임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이다.”
앙코르왕국이 최전성기를 구가할 때 앙코르는 동서 29킬로미터, 남북 10킬로미터에 100만 명이나 거주하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당시의 상황은 1296년 중국의 사신으로 와 앙코르에 1년을 머물렀던 주달관이 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잘 나와 있다. 그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왕은 밤마다 황금 탑에서 잠을 자고 황금 창문이 있는 방에서 국사를 본다. 이곳에는 엄청난 보물이 있다고 들었다. 왕궁 곳곳에 경비가 삼엄하다. 왕은 황금 관을 머리에 썼으며 재스민 나뭇잎으로 머리를 두를 때도 있다. 또 목에는 1.3킬로그램쯤 되는 진주 목걸이를 팔에는 금팔찌, 발에는 호랑이 눈으로 장식한 황금 고리를 찼다. 왕은 황금으로 만든 검을 들고 외출을 했다. 왕은 백성을 보호하는 마법을 전해 받은 존재로 간주되었다. 왕은 왕국의 평화를 위해 여자로 변신한 머리 아홉 달린 뱀과 매일 밤 섹스를 했다. 왕궁 밖을 행차할 때는 황금 칼을 차고 코끼리를 탔으며 수많은 수행원이 뒤를 따랐다. 왕궁에는 다섯 왕비들이 있는데 왕비들은 다른 여자들처럼 맨발에 머리를 틀어 올리고 우유처럼 하얀 유방을 드러내고 다녔다. 대다수 사람들은 살색이 아주 까맣지만 이들 왕비들은 햇빛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 왕성’이란 의미의 앙코르톰 역시 신의 세계를 모방해 건설했는데 높이 8미터, 한 변이 3킬로미터인 정방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폭 100미터의 해자가 주위를 두르고 있다. 규모만 보면 앙코르와트보다 더 크다.
해자를 지나는 다리 난간은 ‘유해교반(乳海攪拌, 우유바다 휘젖기)’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한쪽에는 54명의 신이, 다른 한쪽에는 54명의 악마가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의 몸통을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유해교반이란 남녀교합을 우주창조의 모습으로 표현한 힌두교의 창조신화이다.
앙코르톰 중앙부에는 높이 54미터의 바이욘사원(납골당이 있는 불교 사원)이 있다. 바이욘사원에는 54기의 사면탑(四面塔)이 있는데 사면이 부처 얼굴인 사면불안(四面佛顔) 관세음보살을 탑의 당상부에 안치한,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사면불안은 사방팔방을 자비로써 비춘다고 하는데 자야바르만 7세는 스스로를 관세음보살과 동일시하면서 사면불안을 만들었던 것이다. 사면불안은 사방정토를 상징하며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바이욘사원은 세계의 중심과, 왕의 지배가 전 세계에 미친다는 것을 상징한다.
바이욘사원을 지나면 벽에 새겨진 코끼리 조각에서 이름을 딴 코끼리 테라스가 있다. 코끼리 테라스는 병사들을 사열할 때 이용했던 긴 회랑으로, 중앙의 국왕 전용 테라스에는 반은 새(독수리)고 반은 사람인 가루다 조각상이 있다. 그 앞으로 동쪽 승리의 문을 향해 행군용 도로가 곧게 뻗어 있다. 나병왕(Leprous King)의 테라스는 7미터 높이의 기단에 부조가 뛰어난 다섯 개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크메르 왕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일부 크메르 왕이 나병을 앓은 것으로 추정한다. 바이욘사원의 북쪽에 있는 바푸온사원은 힌두사원인데 앙코르톰보다 앞선 시기에 건설되었다. 원래는 바이욘사원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바푸온사원 북쪽에 접해 있는 왕궁 터에 피미아나카스사원이 있는데 이 사원도 앙코르톰 이전에 건설된, 피라미드 형태의 힌두사원이다. 상당 부분이 붕괴되었지만 계단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앙코르톰 동쪽에 거대한 나무뿌리로 유명한 타프롬(Ta Prohm)사원이 있다.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톰을 건설하기 전에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불교사원이다. 이 사원의 방 한 곳에는 벽면과 천장을 각종 보석으로 장식해 크메르왕조의 영화를 한껏 뽐냈는데 현재는 모두 도굴되어 보석이 박혀 있던 구멍만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타프롬사원은 전성기 때 3000여 마을을 통치했고 8만 명이 사원을 관리했다고 한다. 이 사원은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툼레이더〉의 촬영무대로도 유명하다.
크메르인들은 석재를 쉽게 구할 수 없는 밀림에다 어떻게 앙코르와트 유적의 건축물들을 세웠을까? 앙코르와트 유적군에 사용된 건축 재료는 연와(벽돌) · 라테라이트 · 사암이다. 벽돌(12인치×6인치×4인치)은 서로 마주대고 비벼서 모서리를 매끈하게 한 후 조심스럽게 쌓고 라임 · 야자 · 설탕 · 덩굴식물의 수액으로 접합했다. 벽돌을 쌓은 후 벽 표면을 문지르거나 석회와 모래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조각한 후 치장했다. 대부분의 벽돌은 직경 2.5센티미터, 깊이 3센티미터의 구멍을 뚫고 철제로 보강했는데 이것은 벽돌이 지정된 위치에 견고하게 설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매우 두꺼운 벽인 경우 내부를 벽돌 조각과 흙으로 채웠다. 회반죽 사용은 9~12세기에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 쇠퇴했다. 후기에는 주로 라테라이트와 사암을 사용하여 건설했다. 라테라이트는 크메르 지역의 특수한 재료로, 공기와 만나면 단단해지고 절단하기 쉬운 철분을 함유한 점토이다. 주로 건물의 토대나 평평한 단, 계단이나 담을 쌓을 때 사용한다. 대체로 두께 16인치, 폭 12~20인치, 길이 23~32인치로 제작했는데 때로는 보다 커다란 형태로도 만들었다. 사암은 바위를 가열하여 약 4톤의 덩어리로 잘라 사용했다. 사암으로 건축할 경우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매끈하게 표면을 갈아 밀착시켰다. 문틀 · 창문 · 문턱 · 조각의 하단부는 편암과 현무암을 사용했다.
앙코르와트 유적군의 건축은 아치를 사용하지 않고 돔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돔 형태를 내어쌓기법을 사용하여 해결했는데 돔은 올라갈수록 두께가 얇아진다. 결론적으로 앙코르와트의 유적군의 대형 건축물은 빈틈없는 설계와 유효적절한 재료 사용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탄생할 수 있었다. 앙코르와트 유적군은 파괴의 흔적이 완연하다. 과거 도굴꾼들이 무차별적으로 유물들을 도굴해 엄청난 가격으로 팔았는데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도 자신이 도굴에 참여했다고 시인했을 정도이다. 앙코르와트 자체의 면적이 워낙 넓어 철저한 경비가 어렵기 때문에 현재도 많은 예술품이 도난되고 있다. 그래서 무려 7000여 점이 넘는 문화재를 박물관에 보관하면서 현장은 복제품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잦은 내전으로 인해 문화재를 제대로 보관할 여력도 없는 상태이다. 현재 앙코르와트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위기에 처한 유적 목록에도 등재되었다.
수리아바르만 2세
종교개혁과 사원건축으로 유명하다. 통치하던 기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건축물인 앙코르 와트를 세웠다. 1113년 무렵 경쟁자를 물리치고 왕위에 올라 50년 이상 계속된 혼란상을 끝내고 분열된 국가를 다시 통합하여 캄보디아 전역에 걸쳐 절대 지배체제를 정착시켰다. 호전적이고 야망이 컸던 그는 현재의 타이 영토와 비슷한 정도로까지 영토를 넓혀놓았다. 왕국의 경계는 서쪽으로 멀리 파간의 미얀마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타이 해안, 동쪽으로는 지금의 베트남 남부지역에 있는 참파 왕국에까지 이르렀다. 말레이 반도 동부해안 일부도 자국영토로 만들었다.
수리아바르만은 자신의 정신적 지도자로 강력한 권한을 가진 사제였던 디바카라판디타의 도움으로 1113년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최고신인 비슈누와 시바를 모시는 힌두교의 여러 신비종파를 결합시켰으며 과거 얼마 동안 번영한 불교 대신 비슈누교를 공식국교로 선포했다. 비슈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세운 앙코르 와트는 수리아바르만의 통치 초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그가 죽을 때까지도 완성되지 못했다.
벽과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있는 사원 건물들은 그를 비슈누 신으로 묘사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다. 조각들은 그가 군대를 사열하고 사람들을 접견하는 등 군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1116년 수리아바르만은 9세기 이후 중단상태에 있던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회복시켰다. 중국은 1128년 공식적으로 캄보디아를 중국의 속국으로 인정했다. 중국에 공물을 보냄으로써 그는 주변 동남아시아 왕국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동맹자를 얻었고, 중국이 크메르 국내문제에 개입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1123~36년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939) 베트남 왕국 다이 비에트[大越]를 정벌하기 위해 계속 원정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1128년 라오스를 거쳐 응게안까지 육로공격을 했으나 패하고 말았다. 몇 달 뒤 수리아바르만의 정크선(船) 700대가 통킹 만에서 해안을 따라 베트남에 대한 장기적인 침공을 시작했다. 그는 참파 왕국에 원조를 강요했으나 1136년 참 왕 자야 인드라바르만 3세는 망명하여 베트남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따라 수리아바르만은 1144년 참 왕을 폐위하고 이듬해 참파를 합병했다. 참족은 새로운 왕인 자야 하리바르만 1세의 지휘 아래 베트남 남부 판랑 근처의 차클링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메르군을 격퇴했다. 수리아바르만은 처남 하리데바를 참 왕으로 옹립했으나 자야 하리바르만 1세는 그를 폐위하고 자신이 왕위에 앉았다. 1150년 수리아바르만은 다시 참파 정벌에 나섰다가 도중에 죽었으며 백성들은 전쟁으로 지쳤고, 한때 피정복민이었던 참족으로부터 반격을 받아 앙코르까지 약탈당했다.
자야바르만 7세
자야바르만 7세는 크메르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켰으며, 앙코르 톰을 비롯한 사원과 도로, 휴양소, 병원 등의 건설 사업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앙코르 왕가 출생으로 참파 왕국의 침략을 받은 크메르 제국의 독립투쟁을 성공시키고, 6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30년의 재위 동안 황금치세를 펼쳤다. 이 기간에 제국은 황금기를 누렸다. 계속된 정복사업을 펼쳐 참파, 남부 라오스, 말레이 반도와 미얀마 일부를 지배하에 두었다. 왕성한 종교적, 정치적 건설 사업을 벌여 바욘을 비롯한 많은 멋진 사원을 새로 건립했다. 현재의 앙코르 톰인 앙코르 시를 재건했고 간선도로도 확대했으며, 이 도로들을 따라서 100개 이상의 휴양소와 100개 이상의 병원이 만들어졌다.
개요
크메르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켰으며 앙코르 톰을 비롯해 사원·도로·휴양소·병원 등의 건설사업에 힘을 쏟았다.
초기생애
앙코르 왕가 출생이며 자야라자데비 공주와 결혼했다. 그녀는 신심이 깊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과 재위 초에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죽자 자야바르만 7세는 그녀의 언니와 결혼했다. 언니 역시 신심이 깊었으며 학식이 있어 이전에 그녀는 불교사원의 수석교사로 임명된 적이 있다. 자야바르만 7세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현재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참파 왕국 근처에서 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1150~60 재위)가 사망했을 당시 그는 참파에서 군사 원정 중이었으며 그의 형(사촌인 듯함) 야소바르만 2세(1160~66 재위)가 즉위하자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에 그대로 남았다.
뒤에 그는 궁정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캄보디아로 돌아왔으나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트리부바나디티아바르만(1166~77 재위)이 야소바르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고, 고향에 머물면서 왕위를 계승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약 12년 후 자야바르만 7세가 5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참파 왕국이 침입하면서 그 기회가 생겼다. 참파의 침입으로 트리부바나디티아바르만은 죽고 앙코르는 약탈당했으며 외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자야바르만 7세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5년이 채 못 되어 침략자를 내몰았으며 캄보디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181년 그는 드디어 61세의 나이로 그는 재건된 크메르 제국의 왕위에 올랐으며 30년에 걸친 황금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이 기간에 제국은 그 영역 판도나 왕실 건축 분야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건설사업
자야바르만 7세는 재위 동안 정복사업을 계속 벌여 참파, 남부 라오스, 말레이 반도와 미얀마 일부를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자신의 정력이나 조직 능력을 선대의 왕들이 해왔던 종교적·정치적 건설 사업에 쏟았다. 그는 바욘을 비롯한 많은 멋진 사원을 새로 건립했다. 사원은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대승불교식 피라미드 사원으로서 왕실신앙의 중심점이자 자야바르만 자신의 능묘로 지은 대승불교식 장례사원으로 자야바르만의 부모에게 헌정되었다. 수많은 지방 사원에는 부처의 상징과 함께 자야바르만 7세를 묘사한 왕실 불상의 축소 모형을 두었는데, 그 원형은 바욘에 안치했다.
그는 현재의 앙코르 톰인 앙코르 시를 재건했고 간선도로도 확대하여 도로는 바욘과 왕국으로부터 각 지방으로 뻗어나갔다. 이 도로들을 따라서 100개 이상의 휴양소가 지어지고 100개 이상의 병원이 만들어졌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왕국의 전역에 병원들을 설치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위대한 부처인 바이샤지아구루 바이두리아프라바의 가호 아래 두었다. 그의 시대에 건설된 사원들에서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자야바르만 7세는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건설사업을 진행하는 데 집착했던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자야바르만 7세가 사원 건설에 조급한 마음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많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부족한 시간이나마 효율적으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학자들은 대부분 불교건축물인 방대한 건설계획은 불교, 특히 불교사원 건축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아내 자야라자데비와 그녀의 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나병환자로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학자들의 추측이 맞는다면 자신의 죄를 덜고 공덕을 쌓음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겠다는 마음이 그의 신심과 종교적 열정에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크메르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자야바르만 7세가 이룩한 정도의 업적을 남긴 왕은 거의 없다.
현대의 명성
앙코르 왕국의 역사에서 자야바르만 7세가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었는데도 후대 캄보디아 역사책에는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근대에는 그의 치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흥미를 끌면서 자야바르만 7세는 모범적인 민족영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캄보디아 국가 영토를 가장 넓게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캄보디아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보다 공정하다. 학자들은 자야바르만 7세가 성취한 거대한 업적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왕조의 인적·물적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했기 때문에, 이후에 크메르 제국이 창조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몰락하게 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