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 김진호 서울아산병원 교수
“김정룡 선생님께서 저를 추천하셨다고요? 다른 훌륭한 분이 많은데….”
은사의 추천이 믿기지 않은 듯,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김진호(59) 교수는 연방 미소 띤 얼굴에 수줍음이 한가득하다.
그가 김정룡 이사장과 인연을 맺은 건 30년 전, 서울대병원 내과 전공의 시절이다. 당시 소화기내과 과장이었던 김정룡 이사장은 김진호 레지던트를 “4년간 한결같이 환자에게 정성을 쏟았던 전공의”로 기억한다.
글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 강정현 기자
1983년, 내과 전문의 김진호는 고려대 구로병원에 전임강사 발령을 받으면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발령 후 처음 1년간은 병원에 오는 모든 환자의 내시경 검사를 혼자서 했지요, 바빴지만 의사로서 보람을 듬뿍 느끼던 시절이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80년대만 해도 위암은 물론 위·십이지장궤양 환자가 정말 많았다고 한다. 제산제로 궤양을 일단 치료하더라도 대다수가 재발돼 ‘난치병’ 으로 분류됐던 시절이다. 응급실엔 위가 헐다 못해 구멍이 나 복막염이 돼 실려오는 환자도 허다했다.
‘재발을 막는 치료법을 찾아야 한다’. 그는 고통받는 환자를 볼 때마다 매번 이런 결심을 했다. 10여 년 뒤, 그는 국내 최초로 학회에서 소화성 궤양 환자에게 헬리코박터를 박멸해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
“94년부터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선 헬리코박터를 박멸해야 소화성 궤양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합의가 있었어요. 당시 국내에선 스트레스나 위산에 대한 치료에 비중을 두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이후 논란을 거쳐 국내에 소화성 궤양 환자에게 헬리코박터 치료 지침이 정해진 건 98년이다.
지난 30여 년간 내시경을 통해 각종 소화기질환을 진단하지만 매번 환자를 보는 일은 조심스럽다.
“위암은 암세포가 위의 점막 아래층에 퍼지는 ‘보만(Borrmann) 4형’ 환자를 진단할 때가 가장 힘들어요. 대부분의 위암은 암세포 주변이 흉한 모양으로 헐거나 혹처럼 튀어나오는 식으로 증식하며 모습을 드러내죠. 초기라도 내시경을 보면 진단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보만 4형 위암은 점막 아래에 광범위하게 암세포가 증식해 자칫 ‘위염’ 으로 오진하기 쉽습니다.”
위염이다 싶으면 환자는 병을 방치하게 마련이고, 결국 시간이 지나 말기가 돼서야 병원을 재차 방문하는 비극이 발생한다는 것. 김 교수는 최근 진료한 45세 여성의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한다. 그녀는 속쓰림과 소화불량증으로 20개월 전부터 몇몇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번번이 ‘만성 위염’ 진단 아래 제산제와 소화제만 복용했다. 약을 먹으면 소화불량 증상이 일시적으로 좋아졌다. 대증 치료가 병을 감추는 데 일조한 셈이다. 결국 세월이 지나면서 통증이 심해져 김 교수를 찾아야 했다.
“명의라 하더라도 전신에 암세포가 퍼져 있는 4기 환자를 치료할 묘안은 없습니다. 그녀는 전형적인 보만 4형 위암이었어요.” 김 교수의 목소리엔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이런 위험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속 불편한 증상으로 두 번 이상 위내시경 검사를 받고 치료를 해도 차도가 없을 땐 대학병원에서 재검을 받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들려준다.
내시경 설명을 듣자 이따금씩 사고 소식을 접하는 수면내시경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환자의 혈중산소 농도를 모니터링하면 괜찮아요. 물론 깬 상태에서 환자의 협조를 구하는 게 나은 경우도 가끔은 있지요”라고 유연하게 답변한다.
그는 지난주에 발생한 63세 환자의 얘기를 들려준다. 해마다 수면내시경 검사를 받았지만 유독 이번 수면내시경 검사에서 문제가 발생했단다. “내시경을 넣자마자 호흡기가 과민 반응을 보이면서 산소 농도가 40% 이하로 떨어졌어요. 정상적인 산소 농도는 95% 이상이거든요.” 순간 김 교수는 얼른 내시경을 뺀 뒤 해독제를 주사했고, 환자의 산소 농도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깨어난 환자는 “다 끝났나요”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과연 이 환자가 다음에 와서도 수면내시경을 할 수 있을까.
“환자는 매일매일 컨디션에 따라 변화된 반응을 보이는 생명체예요. 항상 조심하면서 시술해야지, 위험하다고 진료나 치료를 안 하면 어떡합니까.” 그의 질문 같은 대답이다.
김 교수는 환자 진료뿐 아니라 동료들 사이에서 국내 소화기학회를 국제 무대에 선보이고, ‘장과 간(Gut and Liver)’이란 국내 최초의 소화기내과 영문잡지를 창간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잡지는 올해 2월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 SCIE에 등재됐다.
김진호 교수는 누구나 인정하는 소화기내과 명의 대열에 서 있다. 하지만 인터뷰를 시작할 때 했던 말, “내가 다른 의사들보다 뛰어난 게 뭐 있다고 명의 인터뷰를 하나 모르겠네, 정말 민망해요. 난 항상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평범한 의사예요”를 반복했다.
추천한 김정룡 교수는 B형 간염 바이러스 세계 처음 혈청서 분리
한국인의 ‘간(肝)박사’로 통하는 한국 간연구재단 김정룡(73·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사진) 이사장. 그는 대한민국 국민병이었던 B형 간염을 선진국 수준으로 낮춘 1등 공신이다.
전 국민 10%가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였던 시절인 1971년,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B형 간염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혈청에서 분리했다. 이후 녹십자사와 백신을 공동 개발해 83년엔 미국·프랑스에 이어 한국산 B형 간염 백신(헤파박스)을 출시하는 데 성공했다. 값싼 국산 백신 출현은 신생아를 중심으로 백신 접종 인구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현재 국내 20세 미만 인구의 B형 간염 보유율은 2% 미만으로 선진국 수준이다.
그는 학문적 업적뿐 아니라 환자 잘 보는 명의로도 이름을 날렸다. 간이 나빠 입원한 모든 환자는 특진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진찰하고, 주치의를 비롯한 담당 의료진들에게 필요한 검사와 치료를 지시했을 정도로 환자 진료에 대한 사랑과 노력이 지극했다.
그는 과연 명의를 어떻게 정의할까.
“진료실에 들어오는 환자를 관찰해 그간의 병력(病歷)과 증상을 듣는 과정에서 90% 이상 진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검사는 나머지 10%, 즉 확진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 이 경지에 오르려면 환자의 사소한 문제점도 집중·관찰하는 꾸준한 성실성이 필수 요건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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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절개로 간 이식하는 ‘따뜻한 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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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서울아산병원 교수 → 서경석 서울대병원 교수
“전화가 늦어져 미안합니다, 저녁 때 응급수술 환자가 생겨서요.”
밤 10시가 넘어서야 기자와 통화한 서울대병원 장기이식센터장 서경석(49) 교수. 간암 수술 전문가인 그의 환자 명단엔 간이식 대기자가 빼곡하다. 이들에게 공여하기 적합한 뇌사자는 갑자기 발생하게 마련인데 “공여할 간이 생겼다”는 연락이 오면 언제라도 응급수술이 시작된다. 이날은 그의 그런 일상 중 하루다.
글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 강정현 기자
1984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할 때만 해도 서 교수는 내과의사인 부친을 따라 내과를 전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턴 때 작은 병원 응급실에서 파견 근무를 하다가 손등에 깊은 상처가 난 환자를 지혈만 한 채 인근의 큰 병원으로 보내는 사건이 계기가 돼 외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서울대병원에서 보낸 외과 전공의 시절 5년을 “병원을 직장 겸 잠자는 집으로 생각하며 근무했던 때”라고 회상한다.
환자의 사소한 불평도 놓치지 않으려는 집요한 성실함은 전공의 시절부터 교수들의 인정을 받았다. 은사였던 박용현(현재 두산건설 회장) 교수는 조카딸을 소개해 이 만남이 결혼으로 이어졌다(서 교수는 두산그룹 박용곤 명예회장의 맏사위다).
외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그는 고난도 수술을 하고 싶어 국내 최초로(88년) 간이식 수술에 성공한 김수태 교수 밑에서 4년간 전임의로 일했다. 93년 모교의 교수가 되면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는 간암 환자 수술을 주도했다.
90년대만 해도 생체 간이식 때 크기가 작은 왼쪽 간을 사용했는데 환자의 수술 후 사망률이 20~30%나 됐다. 하지만 2000년 들어 오른쪽 간을 이식하면서 수술 성공률은 획기적으로 개선돼 지금은 95%를 웃돈다.
기자가 “본인의 어떤 점이 좋은 의사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하자 그는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며 수줍은 미소를 띤다.
서 교수의 학문적 업적을 보면 환자 사랑에 대한 진심이 엿보인다. 1998년 국내 최초로 한 명의 뇌사자에게서 얻은 간을 두 명(어른과 어린이)의 환자에게 이식하는 수술에 성공했다. 흉터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도 그의 관심사다. 2007년 4월엔 세계 최초로 오른쪽 간을 복강경 수술로 10㎝ 미만으로 절개한 뒤 절제하는 수술에 성공했다. 난도 높은 이 수술법은 과학논문인용색인(SCI) ‘월드 저널 오브 서저리’에 실려 국제적인 공인도 받았다.
서 교수는 지난해에도 국내 최초로 심장이 정지된 여성의 간을 56세 환자에게 이식하는 수술, 생후 60일 된 최연소 아기에게 아빠의 간 일부를 이식하는 수술 등에 성공했다.
환자를 수술하다 보면 안타까운 사연도 생긴다. 서 교수는 4년 전, 간부전(肝不全)이 심해 배에는 복수가 가득 차고, 의식도 혼미한 상태로 입원한 56세 환자를 잊을 수가 없다. 수술 준비를 했지만 수술실에 도착한 공여자의 간은 상태가 너무 나빴다.
“지방간이 심하거나 뇌사한 지 1주일이 지난 뒤 적출된 간은 상태가 나빠요, 그런데 공수된 간은 이 두 가지가 겹쳐 있었죠.”
그는 보호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는데 보호자는 ‘실패해도 좋으니 일단 이식해 달라”고 했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수술했지만 이식한 간은 작동하지 않았다. 실패였다. 그러자 이번엔 아들(25세)이 자신의 간을 이식하겠다고 나섰다. 서 교수는 말렸다. 환자의 간 상태가 이미 너무 나빠 생체 간이식을 해도 생존율은 50% 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들은 이식을 고집했고, 결국 그는 집도했다. 하지만 한 달 뒤 환자는 사망했다.
‘더 적극적으로 말렸어야 했는데…’. 이 환자를 계기로 간 이외에 심장이나 폐에 문제가 생긴 환자 등 수술 성공률이 높지 않은 환자에겐 보호자가 원해도 생체 간이식 수술을 안 한다.
생체 간이식을 하면 공여자에게 문제가 있는지를 물었다.
“그간 생체 간이식 수술을 500명 이상 했지만 사망은 물론 공여자가 수혈을 받았던 적도 없어요. 수술 후 간기능도 모두 정상이었고요. 간혹 상처 부위에 약간의 염증이 생기는 등 사소한 문제는 있지만 금방 좋아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환자의 생사가 달린 문제인데, 일단은 시도해볼 만하지 않나요?”(기자)
“공여자 역시 수술 후 7~10일간 입원해야 하는 큰 수술이에요. 배에 상처도 남고…. 게다가 이식 땐 보험이 적용돼도 환자 부담이 수천만원이에요. “
그래서 그는 수술해야 할 간암 환자를 대할 때면 늘 간암 절제수술을 먼저 고려한다. 실제 그는 국내에서 간암 절제술을 가장 많이 하는 외과의사다.
“우리나라엔 효녀·효자가 너무 많아요. 수술 후 배에 커다란 벤츠 모양의 흉터가 남는다고 해도 10대 또는 20대 어린 딸들이 서로 자신의 간을 제공하겠다고 나섭니다. 수능을 앞두고도 아버지에게 간을 기증하는 아들도 있고요.” 의학적으로 만 17세 이상이면 간 공여자가 될 수 있다.
끝으로 서 교수는 최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후 증가한 뇌사자 장기기증 분위기가 지속됐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했다 .
김진호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수술해준 환자의 병원비까지 걱정해줘요”
김진호(서울 아산병원 소화기내과·사진) 교수가 서경석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 학회에서였다.
“학회장엔 늘 최고를 지향하는 전문가들이 나와 신기술,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내용을 발표하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서 교수가 치료 내용을 발표하는 말미에 환자의 통증, 수술 후 흉터 자국, 환자가 부담해야 할 비용 등을 논의하는 모습을 봤어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김 교수가 서 교수를 명의로 추천한 가장 큰 이유는 환자에 대한 배려다(실제 서 교수가 간이식 수술을 하는 병원은 환자가 부담하는 비용이 저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한번은 김 교수가 “고난도 수술을 하고 수술 후 환자 상태를 치료하는 것도 힘든데 일일이 의료비 걱정까지 할 여력이 있느냐”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서 교수는 “간암 환자는 대부분 수십 년간 만성간염, 간경변을 앓았던 환자라 가난한 사람이 많습니다. 환자를 대하다 보면 ‘비용을 줄일 방법이 없을까?’란 고민을 안 할 수 없던데요” 란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 일류 병원에서 전문가를 자청하는 의사라면 진료 내용은 세계적 수준이라고 봐야 해요. 진정한 명의가 되려면 의료 기술뿐 아니라 환자와 공감하고 환자의 경제적인 면까지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지요.” 김 교수는 명의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이렇게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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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가쁜 나날 ‘심장 지킴이’ … 세 번 만에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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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건강한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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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 서울대병원 교수 → 이영탁 삼성서울병원 흉부외과 교수
그와의 만남은 두 번의 헛걸음 뒤 세 번째 방문 때 이뤄졌다.
첫 만남이 예정된 것은 지난 화요일 오후 4시였다. 차창 밖으로 삼성서울병원이 거의 보일 무렵 수술장에서 전화가 왔다. “이영탁 교수님 수술이 복잡해져 6시는 넘어야 끝날 것 같다”는 전언이다. 저녁 때 또 다른 취재 약속이 있었던 사진기자와 나는 다음 날 정오를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 날에도 약속시간 30분쯤 전에 전화를 받았다. 이번엔 “응급 상황이 발생해 아무래도 오늘 중에 만나기 힘들다”는 내용이다.
글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 최승식 기자
목요일 오후, 마침내 대면하게 된 그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내가 하는 일이 원래 그래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래도 세 번째 발걸음인지라 약간은 심술이 났다.
“아직도 그렇게 정신 없이 사세요?”라며 살짝 면박을 주자 그는 “아직도…라뇨? 지금이야말로 한창 일할 나이 아닙니까?”라며 큰 소리로 웃는다.
삼성서울병원 흉부외과 이영탁(54) 교수의 하루하루는 이렇듯 숨가쁘게 돌아간다.
그가 흉부외과를 선택한 계기는 본과 4학년 때 수술장 실습을 돌면서다. “수술장에서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보면서 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어요. ‘내가 갈 바로 이 분야다’란 생각이 들었죠.”
이 교수가 흉부외과에 입문했던 1985년은 국내 심장수술이 도약을 준비하던 시기다.
“그땐 선천성 심장병 환자, 류머티스성 심장판막증 환자가 정말 많았어요. 반면에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 사람이 부지기수라 심장수술은 엄두도 못 내는 가정이 흔했지요.”
심장병 환자에게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것은 당시 영부인이었던 이순자 여사가 ‘새세대 심장재단’(현재 한국심장재단)을 설립해 수술비를 지원하면서부터다.
무료수술의 길은 열렸지만 장기간 방치된 환자가 워낙 많았다. 막상 병원엔 수술조차 못할 상태로 오거나 수술 날짜를 기다리다 사망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주치의 시절, 환자 집에 전화를 해 ‘○○○환자댁이죠? ○○일에 입원하세요’라고 통보를 하면 ‘지난달에 죽었는데요’라는 식의 대답을 듣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88년 실시된 전국민의료보험은 심장병 환자에게 수술 기회를 높여주는 또 한 번의 계기가 됐다. 89년 흉부외과 전문의가 된 그는 심장수술 전문병원인 부천 세종병원에 근무하면서 매년 150~200명의 선천성 심장병 환자를 수술했다. 본격적인 흉부외과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세종병원 근무 초기엔 선천성 심장병 수술이 훨씬 많았어요.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태아 초음파 진단 기술이 발달하면서 선천성 심장병 환자는 급속히 줄었습니다. ‘태아에게 심장 기형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겁을 하면서 낙태하는 부모가 적지 않습니다. 사실 지금은 의술이 발달해 제때, 제대로 수술받으면 아무런 지장 없이 살 수 있는데….” 말끝을 흐리는 이 교수의 표정엔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선천성 심장병 환자가 줄자 이번엔 성인 심장병 환자가 많아졌다. 서구식 식습관이 보편화하면서 심장혈관을 손상시키는 비만·고지혈증·당뇨병 환자가 급증한 데다 스트레스도 많아지고 활동량은 준 탓이다. 특히 흡연 인구가 많은 중·노년층은 심장병 위험이 가중된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심장혈관이 막힌 성인 심장병 환자를 수술할 땐 일단 심장을 정지시키고, 인공심폐기를 돌린 상태에서 수술을 했다. 이 교수는 외국의 수술 사례를 연구한 끝에 96년 국내 최초로 인공심폐기 없이 심장이 뛰는 상태에서 수술하는 ‘무펌프 관상동맥 우회술(막힌 심장동맥을 다른 혈관으로 이어주는 수술)’을 집도해 성공한다. 이 수술 기법이 도입되면서 관상동맥우회술 때 초래되는 뇌졸중과 부정맥 후유증은 현저히 줄었다. 또 수술 시간도 1~2시간 단축됐다.
2001년 삼성서울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성인 심장병 수술만 전담한다. 현재 해마다 400명 정도 집도하는데 수술의 90%는 ‘무펌프 관상동맥 우회술’로 한다.
2003년 응급순환보조장치(EBS)를 국내 최초로 도입한 것도 이 교수다. 이 기계는 갑자기 심장이나 폐 기능이 멎다시피 한 환자에게 산소를 공급해 한동안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장치인데 지금은 전국의 큰 병원에 도입돼 있다. 요즘은 피부 절개를 5~6㎝만 한 상태에서 수술하는 최소 침습적 우회술도 100명 이상의 환자에게 시술해 성공했다.
이 교수는 제자들 사이에서 좋은 스승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솔직담백한 데다 정이 많아서다. “이 환자를 어떻게 치료했으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까?” 회의 땐 자신이 집도해 성공한 환자뿐 아니라 결과가 나빴던 환자 사례도 항상 토론 대상으로 삼는다. 전공의들은 스승의 이런 태도를 높이 사 2004년 삼성서울병원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수’로 그를 선정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수술을 너무 싫어해요. 심장혈관이 막혀도 환자에 따라 약물, 스텐트 시술, 관상동맥 우회술 등 최선의 치료법은 달라요. 미국에서는 스텐트 시술 환자가 수술 환자의 3배인 반면 우리나라는 11배나 많아요. 가급적 수술을 피하고 일단은 스텐트 시술부터 받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재발 위험이 높거나 혈관이 심하게 막힌 환자는 곧바로 수술을 받는 게 좋습니다.”
현재 이 교수가 집도한 심장혈관 수술 환자 중 사망률은 200명 중 한 명, 즉 0.5%에 불과하며 사망자는 대부분 말기 심근경색 환자다.
서경석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햇병아리 시절, 환자 걱정에 밥도 제대로 못 먹더라고요”
‘열정적이고 정 많은 의사’. 서경석 교수(사진)의 머릿속에 새겨진 이영탁 교수의 모습이다.
25년 전 햇병아리 의사 시절 이야기다. 전공의 시절 두 사람은 선배의 주선으로 우연히 저녁을 함께한 적이 있었다. 막 굽기 시작한 삼겹살을 두세 점 먹던 이영탁 전공의는 슬그머니 숟가락을 놓고 카운터로 가 전화를 걸고 돌아왔다(당시엔 휴대전화가 없었다). 자리에 다시 앉은 그는 선배 의사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환자가 걱정돼 병실로 돌아가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물론 병실엔 당직 의사가 있다. 또 전공의인 그가 수술을 집도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다들 “먹던 밥이나 마저 들고 가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시골에서 오랫동안 병을 방치해 고생했던 환자인데 오늘 받은 수술 결과도 별로 안 좋다. 아무래도 주치의인 내가 옆에 있으면서 손이라도 한번 더 잡아 줘야겠다”며 끝내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전공이 달랐던 두 사람은 별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저 ‘이 교수가 새로운 심장 수술법을 연구하고 성공도 했다’는 식의 소식만 간간이 전해 들었다.
한번은 이 교수와 함께 일하는 의료진이 그를 지칭하며 “그 많은 수술을 하면서도 결과가 좋을 땐 매번 어린애처럼 큰소리로 웃고 신나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순간 이전의 이영탁 전공의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명의란 질병 치료뿐 아니라 환자와 함께 웃고 울 줄 아는 감성도 풍부해야죠.” 서 교수가 밝히는 명의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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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보호자 마음 헤아리며 하소연 끝까지 들어주는 소아외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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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건강한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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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부 지역의 어린이 수술은 내가 책임진다’. 아주대 의대 소아외과 홍정(53) 교수는 경기도 수원에 아주대병원이 개원하던 1994년부터 지금까지 1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 생각을 견지한다. 의대생의 꿈은 모교 교수다. 물론 이 꿈을 이루는 졸업생은 희소하다. 의사들은 ‘인연’이 닿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홍 교수는 90년 연세대 의대 외과 교수로 발령받으면서 그 꿈을 이룬 사람이다.
글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최승식 기자
1991년부터 2년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대 부속병원에 교환교수도 다녀왔다. 그런데 귀국 후 그는 돌연 신설 대학병원이던 아주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북 지역에는 오래된 유명 대학병원이 많습니다. 하지만 경기 남부 지역만 해도 흔히 말하는 ‘큰 병원’이 없었어요. 아주대병원에 근무하는 것은 환자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란 생각이 들었어요. 신설 병원을 개척하는 마음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생각도 있었지요.”
홍 교수는 의사 집안에서 자랐다. 부친은 전 연세대 의대 흉부외과 홍승록 교수로 77년 4월 국내 최초로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성공시킨 명의다.
아버지를 존경했던 홍 교수는 어릴 때부터 오직 한 길, 의사 될 꿈을 꾸며 살았다. “ ‘죽을 환자를 잘 치료해 살렸을 때 느끼는 기쁨과 보람은 의사가 아니면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는 특혜’라는 아버님 말씀을 항상 떠올렸죠.”
74년 연세대 의대에 입학한 그는 인턴 생활을 거치면서 외과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내과는 완치보다 나빠지는 속도를 늦추는 만성병 환자가 많잖아요. 반면 외과는 구급차로 실려온 환자도 수술 후 웃으며 걸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그래서 그는 전공을 외과로 택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가 전공의로 일하던 80년대 중·후반만 해도 대학병원 외과 수술은 암환자가 대부분이었다. 또 20년 전만 해도 암수술 성적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다. 고생고생해서 수술을 받아도 1년, 혹은 2년 뒤 사망하는 환자를 보면서 의술의 한계를 느꼈다.
반면 항문이 막혀 태어난 어린이, 튀어나온 장이 꼬여 사경을 헤매는 어린이, 장에 신경절이 없어 대변을 못 보는 어린이 등 소아외과 분야는 수술로 생사가 바뀌는 질병이 많았다. 게다가 수술만 잘되면 여생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
다양한 질병을 수술하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대학병원 외과의사는 위면 위, 장이면 장만 수술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소아외과는 온 몸에 발생하는 다양한 질병을 수술해요.” 그래서 그는 외과전문의 취득 후 소아외과로 전공을 결정했다.
현재 대한소아외과학회 정회원은 전국에 45명이다. 외과 전문의 중 따로 2년 이상 어린이 수술 훈련을 받고 해외 연수 경험도 있어야 하며, 수술 실적도 학회에서 정하는 기준에 맞아야 정회원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소아외과는 기형을 갖고 태어나는 신생아 수술, 미숙아 수술이 각광을 받는다.
“미숙아는 수술실 환경도 인큐베이터처럼 28도에 맞춰 의료진은 비지땀을 흘리면서 수술을 하게 됩니다. 또 1㎏도 안 되는 환자의 장을 절개하고 꿰매야 하는데 실의 굵기는 0.1~0.2㎜로 아주 가늘어요.”(홍 교수) 이 정도 굵기의 실을 익숙하게 사용하기 위해 소아외과 의사들은 평상시 실제 장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실리콘이나 고무로 된 모형을 대상으로 꿰매는 연습을 수시로 한단다.
“몇 년이나 했습니까?”(기자)
“10년 이상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했어요. 지금요? 지금은 연습을 안 해도 감이 있지요.”(홍 교수)
수술을 하다 보면 가슴아픈 사연도 있기 마련이다. 홍 교수는 18개월 때 장이 꼬여 응급실을 찾았던 환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선천적으로 장 회전에 이상이 생겨 장이 꼬인 병인데 방치하면 장이 썩어 사망한다.
초록색의 담즙 섞인 구토, 혈변, 촬영한 복부 X선 검사에서 가스가 꽉 찬 소견이 특징이다.
“이런 환자는 곧 죽을 것 같아도 발견 즉시 응급수술로 꼬인 장을 풀어주면 평생 잘살 수 있어요. 반면 수술 시기를 놓치면 사망합니다.”
홍 교수의 뇌리에 박힌 환자는 장 회전이 불완전해 1년 반 동안 장이 꼬였다 풀렸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급기야 장이 안 풀리는 상황에 처했고, 홍 교수를 찾았을 땐 이미 거의 모든 장이 썩어 있었다. 혹시 하는 기대감에 응급수술을 했지만 환자는 사망했다.
보호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많다. 특히 수술 후 환자가 곧바로 좋아지지 않고 충분히 적응하는 시간이 지난 뒤 정상 생활을 하는 병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장 일부에 신경이 분포되지 않은 ‘선천성 거대결장’이란 병이 있어요. 1차 수술은 배를 통해 대변을 보게 하는 방법을, 6개월 뒤 2차 수술은 문제의 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합니다. 2차 수술 후 대변과 처음 접한 항문의 피부는 처음 한두 달간 짓무르기 마련이에요. 이 기간에 보호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좋아질 것’이라는 담당 의사의 말을 믿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해요. 믿고 찾은 의사의 말을 자꾸 의심하면 환자도 보호자도, 또 그런 환자를 대하는 의사도 불안만 가중될 뿐이거든요.”
환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홍 교수는 밤 늦은 응급수술이라도 반드시 병실로 올라가 직접 보호자에게 모든 설명을 다시 한다. 집도의의 기본적인 의무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매년 40여 개 질병에 걸린 600명 이상의 환자를 수술하는데 현재까지 집도한 어린이 환자만 8000명이 넘는다.
강성웅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환자·보호자 마음 헤아려 … 하소연 끝까지 들어줘요”
강성웅(사진) 교수와 홍정 교수는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없다. 연배도, 진료과도, 근무하는 병원도 달라서다. 그래도 강 교수는 후학들에게 “환자가 있기에 진료도 있고 수술도 있다. 의사는 환자가 있기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설사 부당한 주장을 하는 환자나 보호자라도 경청하고, 요구사항은 최대한 반영하라”고 가르치는 홍 교수의 신념을 높이 산다.
치료를 한다고 해서, 모든 환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상태가 나쁜 환자라도 환자와 보호자는 기적을 바라고 들어오는 곳이 병원이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치료를 받아도, 또 의사가 공들여 치료해도 결과가 나쁘면 환자 입장에선 의사를 원망하기 쉽다. “한번은 병 자체가 모질어 수술을 해도 환자 상태가 나빴던 환자와 보호자가 ‘애당초 포기하라고 그러지 그랬느냐?’고 홍 교수한테 심하게 따졌는데 홍 교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고 해요. 옆에 있던 레지던트가 나중에 ‘위험한 수술이라고 누누이 말했는데도 수술을 부탁했던 사람이 왜 저러느냐’고 하자 홍 교수가 ‘저분은 그간 아이 때문에 고생했고, 지금은 수술 결과가 나쁜데 치료비는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다. 누구라도 붙잡고 화풀이하고 싶은 심정일 텐데 의사가 하소연이라도 들어줘야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환자와 보호자의 아픈 마음까지 읽고 대처하는 홍 교수야말로 참된 명의가 아닐까요?” 강 교수가 홍 교수를 명의로 추천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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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출혈은 무섭다 그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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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건강한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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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혈은 무섭다. 뇌출혈은 특히 무섭다. 뇌혈관이 꽈리처럼 부푼 뇌동맥류는 파열 직후 30%가 즉사한다. 다행히 생명줄이 유지된 상태로 병원 치료를 받아도 절반은 사망하거나 심각한 후유증이 남는다. 중풍으로 알려진 뇌졸중 역시 혈관이 막혔건 터졌건 발병 직후 몇 시간 동안의 치료가 명운을 가른다. 이런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은 긴장의 연속이다. 병세도 위중하고 발병도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료계에선 대표적인 ‘3D 업종’으로 분류된다.
전통적 개두술, 첨단 뇌혈관 수술법에 능숙
의대생 시절부터 뇌혈관 수술을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희열을 느끼는 일”로 생각했고 뇌졸중센터장이 된 지금도 “의술의 꽃”으로 찬미하는 의사가 있다.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신경외과 신용삼(45) 교수가 주인공이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자칫하면 세상을 등졌을 사람을 열심히 치료해 생명을 구하는 일은 매일매일 하느님의 생명 존중 사상을 실천하는 길”이라며 자부심을 표명한다.
“20년 전 신경외과에 입문하면서 지금까지 365일 매일같이 환자를 진료하는 걸 원칙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입원한 환자·보호자들은 언제나 의사의 방문을 환영하잖아요? 나를 필요로 하고, 또 만나고 싶어 기다리는 누군가가 매일 존재한다는 사실, 정말 축복받은 인생 아닌가요?”(신 교수)
그가 신경외과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학생 실습 때 의식불명으로 입원한 환자가 수술 후 밥 잘 먹고 말도 잘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다. 졸업 후 신경외과를 지원하자 “평생 긴장해야 하는 분야라 의사 중에서도 평균 수명이 가장 짧다는 사실은 알고 있느냐”는 말로 말리던 선배가 많았다.
그래도 그는 신경외과를 고집했다. 전공의 과정 4년 동안은 집에 온 날이 손꼽을 정도다.
전문의가 된 그는 1994년부터 용산의 미8군 121병원에서 미군과 군속을 대상으로 하는 신경외과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군의관 시절을 보냈다. “미국의 신경외과 전문의는 연봉이 높은 데다 특히 한국 군대에 근무할 자원자가 드물어 한국 군의관 중에서 한 명이 차출돼 미군부대에 근무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당시에도 신경외과 의사의 연봉은 50만 달러 정도였다).
미국을 오가며 만난 뇌혈관 전문가들을 통해 그는 “훌륭한 뇌혈관 치료 명의가 되려면 신경외과적 수술법뿐 아니라 방사선과의 중재적 시술도 배우라”는 조언을 듣게 된다.
뇌혈관 이상으로 출혈이 생겼을 때 신경외과에선 뇌를 직접 열고 병변 부위를 들여다보면서 문제의 혈관을 묶어 재발을 막는 치료를 한다. 반면 방사선과에선 허벅지 동맥으로 관을 집어넣은 뒤 뇌혈관까지 진입시켜 코일로 문제의 혈관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차단시키는 중재적 시술을 택한다. 어떤 치료법이 더 좋은지는 환자의 혈관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이후 그는 ‘국내 최초로 두 가지 치료법을 모두 적용할 수 있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제대 후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그는 일단 세브란스병원에서 신경외과 임상강사로 근무하면서 심층적인 뇌혈관 수술법을 익혔다. 이후 또다시 방사선과 강사로 근무하면서 뇌혈관 중재술을 배웠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2000년 국내 최초로 양날을 사용하는 뇌혈관 치료 전문가가 됐다.
그는 중재적 시술의 최신 기술을 좀 더 익히기 위해 2004년 이 분야 창시자인 베렌스타인 교수가 근무하는 미국 컬럼비아대 부속병원에서 1년간 연수하기도 했다.
“두 가지 치료법에 모두 익숙해지면 어느 치료법이 더 좋다는 식의 경직된 생각보다는 ‘이 환자에게는 어떤 치료법이 더 적합하다’는 식의 판단이 가능해집니다. 최선의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거죠. 뇌혈관 치료는 단순한 치료가 아닌 고난도 기술이 요구되는 ‘복합 예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현재까지 약 1500명의 뇌동맥류 환자를 치료했고 사망률은 2% 미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1500명의 환자 중 뇌동맥류를 미리 알고 예방적으로 치료했을 때 사망했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사망자는 모두 뇌출혈이 발생한 뒤 병원을 찾았던 환자죠.”
이런 이유로 신 교수는 가족 중에 뇌동맥류 환자가 있었던 사람, 40세 이후의 고혈압 환자,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듯한 두통이 발생한 환자는 뇌혈관 CT를 찍어 볼 것을 권한다.
“한 번의 뇌촬영으로 병원에 오기 전 30%가 사망하는 무서운 병을 평생 제거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현대의학이 주는 혜택 아니겠어요?”
뇌혈관 치료 명의인 신 교수가 일반인들이 꼭 알았으면 한다며 들려주는 조언이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강정현<기자sehee@joongang.co.kr>
홍정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교수 대접받을 수 있는데 새 치료법 배우더군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누구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의대 6년이 그렇고 밤낮 없이 병원에서 숙식하며 보내야 하는 인턴·레지던트 과정이 그래요. 그래서 의사들은 전공의 과정을 마친 뒤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면 일단 한시름 놓지요. 물론 이후에도 전임의 과정, 해외 연수, 끊임없는 환자 진료와 토론 등 기나긴 훈련 과정을 밟아야 하기는 해요. 그런데 신 교수는 전문가가 해야 할 필수 과정을 모두 끝마친 뒤 또다시 낯선 과(방사선과) 교수를 설득해 중재적 시술을 배웠어요. 대학의 전임교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새로운 과에서 새로운 치료법을 배우기 위해 고난의 훈련 과정을 새로 시작하는 건 명의가 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선택하기 어려운 결정입니다. 결국 그는 이 과정을 통해 국내 최초로 뇌혈관 환자에게 필요한 두 가지 분야의 치료법을 모두 습득하게 된 겁니다.”
홍정(사진) 교수가 신용삼 교수를 명의로 추천하게 된 첫째 이유다.
둘째 이유는 고된(?) 의사의 길을 가면서도 항상 웃음을 띠고 사는 신 교수의 태도다. “신 교수는 1년 내내 바쁘게 사는 자신의 삶에 늘 감사하며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말을 달고 살아요. 의사가 늘 밝은 표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자를 진료하면 환자들은 상태가 위중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협조하게 마련이죠. 중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신 교수의 이런 자세가 명의가 갖춰야 할 덕목이 아닐까요?”
홍 교수는 신 교수의 신앙심이 지금의 그를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란 생각을 할 때가 많다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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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류머티스 병원장 배상철, 그의 숫자들… 10세·12번·130편 그리고 7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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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건강한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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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1박2일, 아니 1박3일 영국 출장을 떠납니다. 귀국하는 날 저녁 때 병원에 가서 입원 환자 회진을 돌려고 해요. 그때 만날까요?” 한양대 류머티스 병원장인 배상철 교수와 인터뷰 날짜는 이렇게 정해졌다. 병원에서 임상 의사로서의 환자 진료, 학자의 의무인 학회 활동, 병원장으로서 행정적인 업무까지 봐야 하는 배 교수의 1년 365일은 그의 심장 박동과 더불어 쉴 틈 없이 돌아간다. 하지만 환자 진료는 언제나 배 교수의 머릿속에서 ‘0순위’로 자리 잡고 있다.
‘환자 없는 임상 의사란 존재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하루라도 환자 얼굴을 안 보면 마음이 안 놓인다”는 배상철 교수. 그래서 그는 꼭 참석해야 하는 국제학회도 소규모로 진행될 땐 1박2일, 1박3일 하는 식으로 회의에만 참석한 뒤 곧 비행기를 타고 병실로 달려온다.
배 교수의 장래 희망은 어릴 때부터 의사였다. “초등학생이 되면 위인전도 보고 소설도 보면서 꿈을 키우잖아요? 그러다 존경받는 어른들에게서 ‘남을 돕는 삶을 산다’는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직업 자체가 남을 돕는 일을 찾다가 의사란 직업을 찾았어요. 열 살 무렵, ‘나를 찾아오는 환자는 누구라도 열심히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자 마음이 뿌듯해졌어요. 이후 다른 직업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황무지’ 류머티스 분야에 지원
배상철 어린이의 1단계 꿈은 1984년 한양대 의대 졸업과 더불어 의사면허를 취득하면서 이루어졌다. 졸업 후 내과의사의 길을 걸으면서 처음엔 심장병을 전공하고자 마음먹었다. 맥박이 불규칙해 죽음의 공포를 느끼던 환자가 인공심장박동기를 장착한 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다. 하지만 “심장병은 서양에 많은 병이라 많이 발전한 학문이다. 반면 류머티스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은 분야고, 똑 부러지는 치료법도 없어 고생하는 환자가 너무 많다. 미개척 분야에 뛰어들어 일해보지 않겠느냐”란 선배의 권유를 받아들여 류머티스 전문의가 됐다. 실제 배 교수는 국내 류머티스 분과 전문의 면허번호 12번인데 현재도 이 분야 전공자는 200여 명에 불과하다.
막상 류머티스 전문의가 되고 보니 미제의 연구 과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류머티스 분야의 현실을 절감한 배 교수는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96년 도미해 하버드의대 교환교수로 근무하면서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임상연구 방법론의 대가인 리앵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귀국 후 시작한 첫 번째 작업은 류머티스 환자의 진료와 연구를 연결하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이다. 98년 시작된 DB 만들기를 토대로 환자의 데이터가 컴퓨터에 집대성되면서 연구 실적도 좋아졌다.
실제 이를 토대로 그는 현재까지 국제적 수준인 SCI 논문만 130여 편을 발표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신치료법을 적용하는 일을 ‘실험적 치료’라는 식으로 폄하하는 일은 너무 비관적인 견해예요.” 이렇듯 배 교수는 미개척 분야의 치료에 대해선 공격적인 치료만이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10여 년간 DB 축적, 연구 실적 좋아져
실제 그는 2002년, 경피증 환자에게 국내 최초로 ‘조혈모 세포이식’을 시도해 성공했다. 경피증은 혈관 주위가 딱딱해지다가 결국 피부와 내장의 결합조직까지 굳어지는 병인데 처음엔 몸을 못 움직이지만 나중에는 폐도 딱딱해져 숨쉬기조차 힘들어진다.
3~4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조혈모세포이식의 첫 단계는 환자에게 항암 치료를 해 백혈구의 면역세포를 모두 죽이는 일이다. 당연히 정상세포도 파괴되게 마련인데 한동안 환자는 무균실에서 관리를 받아야 한다. 이후 조혈 생성 인자를 환자에게 주사해 환자의 골수에서 정상에 가까운 면역세포가 만들어지면 이를 혈액에서 추출해 냉동 보관을 하는 게 다음 단계다. 이 과정을 끝낸 환자는 한 달간 휴식을 취하면서 전신 상태가 좋아지길 기다려야 한다. 상태가 호전된 환자는 냉동 보관했던 물질을 주입받게 된다.
루프스로 신장이 파괴되고 배가 남산만큼 부른 상태에서 배 교수를 찾았던 한양대 신입생도, 심장과 폐에까지 루프스가 진행돼 시한부 인생을 살던 22세 미혼 여성도 모두 이 치료를 받고 지금은 정상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특히 얼마 전 치료 당시 22세이던 환자가 28세에 건강한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너무 기뻐 눈물까지 나왔다고 한다.
“훌륭한 연구와 치료 결과는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신념을 가진 명의 배상철 교수. 그는 병원장이 된 지금도 매일 아침 6시30분이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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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지칠 줄 모르는 임상연구, 국제무대서 알아주죠”
“좀 더 낳은 치료법을 적용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흔히 ‘연구’하면 실험실에서 약물이나 시약을 사용해, 혹은 쥐를 사용한 동물 실험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임상의사는, 특히 내과 의사는 환자를 진료한 결과 통계 자료만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임상 연구를 할 수 있어요. 배상철 교수는 이런 새로운 임상연구법을 미국에서 배워 국내에 적용시킨 분입니다. 국제적인 유명 학술지에 많은 논문을 게재하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죠. 지금은 국내 의료 수준이 아무리 높다 해도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배 교수는 한국 의료계에 큰 역할을 한 분이에요. “고대 성형외과 박철(사진) 교수가 배상철 교수를 명의로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다.
“나는 개인적으로 배 교수를 몰라요, 만난 적도 없고요. 하지만 의대 교수로 있다 보니 배 교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하도 성실하고 준비성이 철저해 주변에서 의사들이 붙여 준 별명이 ‘준비 배’라고 하더라고요.
환자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한겨울에도 출근시간이 7시를 넘긴 적이 없다고 하잖아요? 이 정도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해 열심히 환자를 보다 보면, 그것도 20년 이상 대학병원에 근무하면서. 어떻게 명의가 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배 교수를 명의로 추천한 박 교수의 확신에 찬 대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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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앉은 환자의 행동을 보고 그의 뇌를 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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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건강한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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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개에 달하는 뇌세포를 연구하는 일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 신비롭다.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뇌를 연구하는 뇌과학은 매력적인 고차원적 연구다. 하지만 정작 뇌 연구를 하겠다는 의사는 많지 않다. 21세기 현대의학도 뇌만큼은 모르는 게 훨씬 많다. 그래서 전문가들도 뇌 연구는 ‘뇌에 쥐나는 일’로 간주한다. 학생 때부터 뇌 연구에 일편단심인 의사가 있다.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나덕렬 교수다. 그는 뇌 연구를 통해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하나씩 설명될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
어릴 때부터 뇌에 관심이 깊었던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뇌덕렬’로 불렸다.
햇병아리 의사인 인턴 시절 그는 작은 지방 병원에 파견 나갔다. “주말에 밥보다 술을 좋아했던 50대 남성이 의식불명으로 동네 사람 등에 업혀 응급실로 왔어요. 환자를 찬찬히 진찰해 보니 책에서 본 ‘베르니케 뇌증’이 의심되더라고요. 비타민B1(Thiamine)이 부족한 알코올중독자에게서 나타나는 병인데 처음엔 근육이 마비되고 횡설수설하다가 얼마 안 가 혼수상태에 빠지죠. 다행히 부족한 비타민을 정맥 주사하면 놀랄 만큼 빨리 회복됩니다.”
실제 비타민 주사를 맞은 환자는 다음 날 의식이 돌아왔고, 3일 후엔 걷기 시작했다. 환자 상태는 좋아졌지만 나 교수 외의 의료진 모두가 그를 기피했다. 그는 담당 간호사를 통해 “그 환자는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서 꺼리게 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즉시 그는 환자를 병실 샤워장으로 데려가 깨끗하게 목욕을 시켰고 그날 이후 환자는 간호사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몇 달 걸쳐 비디오 촬영 연구, 학계서 호평
1986년 신경과 전공의로 입문한 나 교수는 본격적인 뇌 공부를 시작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게 뇌 질환”이라는 그는 기자에게 이런저런 사례를 들어준다.
“오른쪽 뇌가 손상된 사람은 시계를 그릴 때 오른쪽 반만 그려요. 언어중추에 뇌졸중이 온 환자라도 말하는 부위가 손상되면 남의 말은 이해해도 정작 자신은 하고 싶은 말을 못하죠. 반면 이해를 담당하는 뇌 부위가 손상되면 본인은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만 남의 말은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전공의 1년차부터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행동 신경학에 관심을 집중했고, 결국 국내에선 이 분야 선구자가 됐다.
뇌의 신비를 알리기 위해 그는 이상 행동을 보이는 환자를 몇 달씩 비디오로 촬영해 학회에 발표함으로써 동료의 감탄을 자아냈다.
“좌우 뇌가 서로 협조하며 작용하려면 소통을 담당하는 뇌량(腦梁)이라는 부위가 건강해야 해요. 만일 이 부위가 병들면 좌우 뇌가 각각 딴 기능을 합니다. 예컨대 오른손으로는 라이터를 켜는데 왼손은 이 라이터를 뺏으려는 식이죠. 이런 상태는 아무리 교과서에서 봤더라도 환자의 동영상을 통해서만 가장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연구 분야가 무궁무진한 뇌를 연구하려면 국제적인 학술적 교류가 필수다. 이를 위해 그는 1993년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대학에서 실어증의 대가인 앤드루 커테즈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미국 의사면허 자격증이 있어 직접 환자 진료도 했던 나 교수는 다음 해엔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케네스 헤일먼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오른쪽 뇌를 연구했다.
“행동 잘 보면 첫 만남서 진단 척 나오죠”
나 교수의 지도교수가 된 두 교수의 환자 진료 분야는 치매다. 나 교수 역시 귀국 후 자연스레 치매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됐다.
“환자의 행동을 잘 관찰하면 첫 대면에서 진단이 내려집니다. 예컨대 초기에 기억력을 담당하는 뇌가 파괴되는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는 인사도 잘하고 수치심도 느껴요. 기억력 검사에서 틀리면 얼굴도 붉히죠. 반면 앞쪽 뇌가 망가지는 전두엽 치매 환자는 진료실에 빵을 먹으면서 들어와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는 식으로 수치심을 못 느끼고 충동적인 행동을 합니다.”
나 교수의 업적 중엔 한국형 실어증 진단 도구(1997년)와 한국형 치매진단 검사(2000년) 개발을 빼놓을 수 없다.
“문화가 달라서 언어 관련 진단 기준은 외국 것을 그대로 국내에 적용할 수가 없어요. 일례로 우리나라 사람은 대부분 ‘주판(abacus)’을 알지만 서양인은 고학력자만 알거든요.”
한국형 진단도구를 정착시키는 전제조건은 노인층의 평균적인 인지 기능 수준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나 교수는 몇 년에 걸쳐 연구원과 함께 노인정을 돌아다니며 노인들의 인지기능을 검사했다. 나 교수 연구 목적의 종착역은 양질의 환자 진료. 그래서 그는 실험실 연구보단 환자를 통한 임상연구를 주로 한다.
“환자는 병이 들면서 자존심을 잃기 쉽습니다. 특히 치매 환자와 보호자는 더 그래요. 좋은 의사란 환자를 질병 자체가 아닌, ‘질병에 걸린 귀한 존재’로 대하는 태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임상연구를 통해 환자를 좀 더 잘 파악하는 만큼 양질의 진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나덕렬 교수. 그 생각의 뿌리엔 환자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강정현 기자
[나덕렬 교수는]
1956년 출생
1982~1983년: 서울대 의대 졸업, 서울대병원 인턴
1986~1990년: 서울대병원 신경과 전공의 및 전임의
1991~1992년: 서울대병원 임상교수 요원
1993년: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대학 신경과 연수
1994년: 미국 플로리다대학 신경과 연수
1994년 12월~현재: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
2005년 ‘Brain’에 실린 ‘초로기 치매와 노년기 치매의
대사장애 차이’ 등 SCI 논문 98편 게재
배상철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연구팀 한 명 한 명 파악하고 운영하더라고요”
“3년 전,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하는 임상연구 과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받아 나덕렬 교수가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는 치매 임상연구를 심사한 적이 있어요. 그때 나 교수가 연구원 한 명, 한 명의 연구 업적을 파악하고, 적절한 연구 과제를 할당하는 설명을 들으면서 ‘저렇게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연구팀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구나’라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공 분야가 전혀 달라 그전에는 대면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날 이후 주변 평가를 들어 보니 한결같이 ‘환자를 무한한 성실성과 진지함으로 진료하는 의사’로 알려져 있더라고요. 사실 그래서가 아니라 저도 의료계에 발을 담근 지 30년은 됐잖아요? 굳이 주변 평가가 아니더라도 연구팀을 그 정도 잘 운영하는 분이라면 진료실에서 환자를 어떻게 대할지 짐작이 가지요.”
배상철 교수의 머릿속에 나 교수가 명의로 각인된 계기다.
이후 배 교수도 보건복지가족부가 주관하는 류머티스 임상연구 책임연구원으로 발탁돼 나 교수와 간혹 개인적으로 대면할 일이 생겼다. “처음 만날 때나 3년이 지난 지금이나, 또 회의장에서건 차 한 잔 마실 때건, 나 교수의 환자와 임상 연구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은 그의 잔잔한 미소처럼 한결같아요. 아마 그의 모습만 봐도 환자들은 큰 위로를 얻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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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만든 스텐트 … 식도암 환자는 즐겁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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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덕렬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 → 송호영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교수
괴테의 『파우스트』에 감동받았던 시골 학생은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에 유학 가 독문학을 전공할 꿈을 꿨다. 공부방 하나 없는 가난한 집안 탓을 하기 보단 청소를 해주는 대가로 얻은 독서실 한편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도 성적은 썩 좋았다. 하지만 농사꾼 아버지는 아들이 서울에서 대학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가당찮은 일’로 일축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그는 서울 유학을 포기하고 인근 지역에서 가장 성적 좋은 학생들이 간다는 전북대 의대에 진학했다. 선배가 “입시 때 합격선이 높은 학과에 다니는 대학생이라야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 쉽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시골 소년의 눈에 비쳤던 의사 선생님의 멋진 이미지도 의대 진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훗날 세계 최초로 식도에 삽입하는 스텐트를 개발해 국제 학계에서 인정받는 과학자가 된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송호영(사진) 교수의 의료계 입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의대를 졸업한 그는 중재적 시술을 하는 영상의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학생 실습 때 장이 겹친 환자를 대장을 촬영하는 방법으로 손쉽게 낫게 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부터다.
“소장 일부가 대장에 끼어들어 간 ‘장중첩증’은 통증이 심해 아이는 심하게 울고, 부모는 새파랗게 질리죠. 그러다 영상의학과 의사가 항문에 바리움이란 물질을 넣고 대장 촬영을 하고 나면 장이 펴져 금방 방긋방긋 웃는 거예요.”(송 교수)
영상의학 중에서도 송 교수는 장중첩증처럼 환자를 치료하는 중재적 시술에 관심을 뒀다. 또 그가 전북대 의대 영상의학과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던 1980년대 중반은 좁아진 혈관과 담도를 스텐트로 넓혀주는 치료법이 태동하던 시절이다. 스텐트 치료란 철사로 만들어진 가는 관에 그물망을 끼운 뒤 좁아진 부위까지 집어넣고 관을 빼는 시술이다. 그물망은 형상합금으로 돼 있어 그 안에서 저절로 펴져 기능을 하게 된다.
식도암 환자에 삽입, 수술 성공해 명성
87년 미국의 MD 앤더슨 병원 시찰 중 스텐트 시술을 관찰한 송 교수는 ‘식도에도 적용해 보자’는 발상을 했다. 당시만 해도 식도암 등으로 식도가 좁아져 밥을 못 먹는 환자는 25㎜ 튜브를 삽입하는 시술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지름이 커서 시술 도중에 식도가 터지면서 사망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귀국 후 식도 삽입 스텐트 개발에 몰두한 그는 89년 드디어 스텐트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재료는 철물점에서 적절한 크기의 동파이프와 호스를 구해 마련했다. 스텐트가 만들어진 뒤 동물에 적용해 보는 실험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시골 농가에서 개를 키운 뒤 주말마다 연구실로 데려와 실험을 했다.
동물실험 결과는 매번 만족스러웠다. 효과를 확신한 송 교수는 18㎜ 직경의 스텐트를 식도암 환자에게 삽입해 성공을 거두었다. 세계 최초다.
이후 94년까지 모두 119명의 환자에게 적용, 전신마취 없이 시술했고 사망자도 전무했다. 이 결과를 모아 국제 무대에서 발표했는데 이때부터 선진국 학자들이 송 교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97년엔 스텐트 시술을 식도에 발생한 양성 협착증 환자에게 적용했다. 첫 환자는 어릴 때 실수로 양잿물을 마신 뒤 식도가 좁아져 60년간 미음과 우유만 마시면서 살아온 할머니였다. “평생 죽기 전에 밥 한 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할머니는 “시술 후 떡과 쇠고기도 먹을 수 있게 됐다”며 송 교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이후에도 송 교수는 스텐트의 성능과 기능을 향상시키는 연구를 계속해 지금은 7세대 스텐트가 개발돼 있다. 또 적용 범위도 식도를 넘어 위 십이지장·눈물샘·기관지·요도 등으로 넓혔다.
스텐트 벤처사 차려 … 1년 500만 달러 수출
지속적인 연구를 위해 2000년 6명의 연구원과 함께 사비를 털어 벤처회사를 창립한 것도 송 교수의 업적이다. “처음 시작할 땐 ‘몇 년 안에 문을 닫을까’란 생각을 했어요. 수익을 낸다는 건 상상 밖의 일이었죠.” 하지만 ‘송 스텐트’에 대한 수요는 나날이 늘어 2006년엔 500만 달러를 수출했고, 지금은 국내 4개 회사와 더불어 500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가 받은 특허만 26개다.
하지만 그는 일반인의 생각과 달리 개인적인 수입을 올리지는 못했다. 개발에 참여하는 국내 기업이 영세하기 때문에 로열티를 받지 않고 무료로 기술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학자가 돈 버는 일에 관심을 보여서 되겠느냐”고 반문하는 송호영 교수. 그는 오늘도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출근해 더 효과적인 스텐트 시술을 위해 연구와 환자 치료를 계획한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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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덕렬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개인생활 포기하다시피 하며 연구에 몰두하죠”
“의사가 환자를 위한 의료 기구를 개발하는 일은 반짝 아이디어나 상상력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환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환자 입장에서 증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게다가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선 ‘왜 이런 증상이 발생하는지’ ‘증상을 없애주기 위해선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등 부단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합니다”. 나덕렬(사진) 교수는 이런 지난한 과정에서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면 좋은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강조한다.
“의사는 사실 환자 진료하기에도 바쁜 직업이잖아요. 게다가 의대 교수는 강의를 하면서 학생과 전공의를 가르쳐야 하고, 환자의 병적인 소견을 분석하고 토론하는 회의를 매일 열어요. 또 학회도 주관하고 발표도 해야지요.” 이처럼 주어진 일만 감당하기에도 의사의 하루 해는 짧다. 하지만 송 교수는 잠을 줄이는 식으로 몇 시간 안 되는 개인 생활을 희생해 스텐트 같은 장비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스텐트와 같은 첨단 기술 연구는 오랜 세월을 노력해도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송 교수는 ‘나도, 내 가족도 언젠가는 저 환자와 똑같은 입장에 처할 수 있다’, 또 ‘내가 이루지 못해도 내 실패를 디딤돌로 삼아 후학 중 누군가는 이 일을 완성하겠지’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나 교수의 명의 추천 이유다. 나 교수는 “이런 노력의 산물이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큰 기여를 했으니 송 교수야말로 참된 명의”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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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암 조기진단법 개발에 20년 … 환자 이야기 담은 시집 5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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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영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교수 → 김대곤 전북대 의대 소화기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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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꿈 많은 여고생 같은/환자 김웅씨 부인…(중략) …/김웅 선생 학교를 쉬고/자기는 이 장사를 한다고…(중략) /뜨거운 수제비 목에 걸려/ 넘길 수가 없어/나는 수제비 그릇만 바라보았다’(대수리 수제비 중에서) 의대 교수이자 5권의 시집을 출판한 전북대 의대 소화기내과 김대곤 교수가 환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은 시의 한 대목이다. 보릿고개를 실감하던 시절 남원 소년 김대곤은 12세 때 슈바이처 전기를 읽고 감동을 받는다. ‘의사가 돼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고등학생 때 부모님께 의대 진학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부모님은 “6남매의 장남에겐 ‘사치스러운 꿈’”이라며 질책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의과대학인 전북대 의대에 시험을 쳤고 합격했다. 숙부가 학비는 장학금으로, 숙식은 부잣집 자녀를 가르치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의대생이 된 김대곤 학생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고 결과는 수석 졸업으로 나타났다. 원하는 전공을 선택할 권리가 0순위로 주어진 것이다. 그는 환자를 가장 폭넓게 진찰할 수 있는 내과 전공을 선택했다.
당시에는 간염이 ‘국민병’으로 불릴 정도로 환자가 많았던 시절이다. 실제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만성 간염 후유증으로 인한 간암 발생률이 세계 1위였다.
86년 전북대 의대 내과 교수로 발령이 나면서 김 교수는 간 질환을 전공하는 학자의 길을 걸어왔다. 당시만 해도 전 국민 의료보험이 정착되지 않았다. 의료비가 비쌌고, 특히 지방에는 전문의도 귀했다. 개원을 하면 적잖은 부를 축적할 수 있던 시절이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개원을 해 가족을 호강시켜 보겠다는 생각은 안 했나요?”(기자)
“하하, 제가 아직도 돈의 위대함(?)을 몰라요. 그리고 지금 저는 가족이 편히 머무를 수 있는 내 집에서 끼니 걱정, 자녀 교육 걱정 크게 안 하고 살아요. 이 정도면 부자 아닌가요?”(김 교수)
그는 교수로 재직하면서 간환자를 진료할수록 안타까운 사연은 쌓여갔다고 한다.
“간 질환, 특히 간암 발생 시기는 40대, 50대가 피크예요. 청년 시절부터 죽어라 일해서 이제 조금 기반을 닦을 만하면 간암 선고를 받는 거죠.”
진단법 특허 출원…간암 맞춤치료제 개발 꿈도
전임강사 시절 20년간 간척지를 개발하며 벼농사를 해 온 52세 농부가 간암 말기 진단을 받은 뒤 김 교수의 손을 붙잡고 울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하다. “그 환자 분이 ‘그간 정말 착하게 열심히 살았어요. 지금 죽기엔 너무 억울한 인생이니 꼭 살려 달라’고 애원했어요.”
하지만 간 전체에 암세포가 퍼진 상태였고 결국 치료 한번 제대로 못 받은 채 석 달 후 사망했다.
‘조기 진단만이 살 길이다’.
이후 김 교수는 간암 조기 진단법 개발에 매진해 왔다. 89년 미국 MIT 화이트 헤드 연구소 연수가 계기가 됐다.
“미국에 가서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생소하던 분자생물학 분야의 대가인 한국인 과학자 신희섭 교수의 지도를 받는 행운이 찾아왔어요. 그 이후 줄곧 이 기술을 간암 조기 진단에 적용해 2008년 ‘시스타틴 B(CST)’란 간암 진단법을 개발했습니다.”(김 교수)
이 기법은 기존에 사용되던 알파태아단백질(AFP) 방법을 보완하는 진단법인데 이미 국내에선 특허가 출원됐고 미국·일본·유럽 등에서도 특허 등록을 밟고 있다. 또 김 교수는 현재 MSE2라는 발암 유전자를 통해 간암 맞춤치료제를 개발하는 꿈을 키우고 있다.
간암 치료 교수로 23년간 재직한 김 교수는 나날이 발달하는 간 질환 치료법에 큰 희망을 건다. “병색 짙던 간경변 환자나 간암 환자가 간이식 수술 후 몰라볼 정도로 젊고 건강한 모습으로 외래를 방문해 놀란 적도 적지 않습니다.”
그는 “간 건강을 위해선 몸에 좋다는 약이나 민간요법을 남용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제발 전문가를 믿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치료법을 따르세요.” 간질환 명의 김 교수가 건강한 간을 지키기 위한 묘안으로 제시하는 당부의 말이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송호영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지방병원서 끝없는 노력으로 정상 올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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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은 서울보다 연구 여건이 나쁜 게 사실이에요.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 의사의 경우 서울의 초대형 병원은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오잖아요? 짧은 순간에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질병 발현 상황을 경험합니다. 반면 지방은 대학병원이라도 주변 지역의 환자가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을 환자와 연구에 쏟아부어야 해요. 연구 상황은 오히려 더 열악합니다. 연구비만 해도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집중되는 게 현실이죠. 그런데 김대곤 교수는 전주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미국 연수를 통해 익힌 분자생물학 분야를 활용해 결국엔 간암을 조기 발견하는 진단 기법을 개발했어요. 물론 세계 무대에서도 인정받았고요. 우수한 두뇌와 끊임없는 노력, 단 한 명의 환자라도 더 살려 보겠다는 집념이 조화를 이룬 결실이죠.” 송호영(사진) 교수는 김 교수의 연구 업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연이어 “김 교수는 문학과 미술에 관심을 가져야 환자의 정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환자의 질병을 앓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정서를 표현하는 고귀한 인격체로 보려는 태도죠. 의학계에 몸담고 있는 동료 중 한 사람으로서 김 교수를 가장 존경합니다”며 명의 추천 사유를 설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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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메스 대지 않는다 웬만한 허리 통증 다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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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곤 전북대 소화기내과 교수 → 심대무 원광대 정형외과 교수
정형외과 의사는 수술이 본업이다. 그런데 수술을 받겠다고 찾아온 환자를 가능하면 수술하지 않고 치료할 방법을 찾는 정형외과 의사가 있다. 원광대 의대 정형외과 심대무 교수다. 그도 처음엔 수술이 좋아 정형외과를 전공했다. 그러곤 열심히 노력해 대학병원 교수로 발탁됐다. 세부 전공도 수술 환자가 가장 많은 척추 분야를 택했다. 하지만 환자를 치료하는 햇수가 늘수록 가급적 ‘비(非)수술적’ 치료법을 찾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이 들고 가난한 환자를 많이 치료한 결과”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심 교수가 의사의 길을 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어릴 때 저를 비롯한 거의 모든 친구는 한결같이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유독 아버지가 의사인 친구만이 아버지를 존경한다며 직업도 대물림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의사가 정말 좋은 직업인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심 교수 부모님은 아들이 숙식과 학비가 제공되는 2년제 기술전문학교에 가길 원했다. 그래서 의대 진학을 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전북대 의대 진학을 강행했다.
의대생이 된 이후에는 실망감이 컸다고 한다.“병원에 온 환자는 치료를 받고 좋아져서 나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정확한 진단조차 못 내리는 병이 태반이었어요. 그래도 정형외과는 X선 사진을 찍은 뒤 ‘어디가 부러졌다’는 식으로 곧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정형외과를 전공으로 택했다.
수술할 형편 안 되는 노인 환자 많아
심 교수가 정형외과를 시작할 무렵 우리나라는 급속한 산업화로 자동차와 공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자연히 각종 사고로 정형외과를 찾는 젊은 환자도 급증했다. 1980년대엔 수술을 할 때 나사 등 기구를 삽입해 뼈를 고정하는 신기술도 한창 보급됐다.
심 교수가 원광대 교수로 발령받던 무렵이다. 그 역시 서울대병원 등에서 수술법을 전수받고 외국 연수도 받았다. 모두 새로운 수술법을 익히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배운 기술을 환자에게 적용시키려니 걸림돌이 많았다.
“저를 찾아오는 분들 중엔 시골에 거주하는 노인이 많아요. 대부분 허리가 아파 인근 병원에 들렀다가 수술하라는 말을 듣고 온 분들이죠. 하지만 대부분 ‘수술할 형편이 안 되니 주사로 안 아프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해요.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심 교수는 차츰 수술하지 않고 통증을 줄이는 치료를 찾기 시작했다.
수술 대신 통증 차단하는 치료법 찾아
“디스크를 비롯한 척추에서 생기는 통증은 대부분 척추 신경절에서 팔과 다리로 뻗칩니다. 여기에 착안해 수술 전 일단 통증을 유발하는 신경절을 차단하는 주사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수술 날짜를 받아 입원한 환자에게 일단 이 치료를 했다. 이후 통증이 좋아지지 않으면 그제야 수술을 했던 것이다.
심 교수 나름의 이런 치료법으로 4명 중 1명은 치료 후 5년 후에도 수술하지 않고 지낸다. 심 교수는 자신의 치료법을 대한정형외과 학회지에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인정도 받았다.
손가락 접합술 등에 활용되던 수술 현미경을 척추 수술에 도입한 것도 심 교수다. 그는 “수술 시야를 밝고 정확하게 확보해서 절개를 조금만 하고도 수술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지금은 이 수술법이 보편화됐다.
심 교수는 “삶의 목적을 유명한 의사가 되는 데 두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근사한 논문을 국제 무대에 발표하는 일에도 욕심이 없다(실제 그는 논문 70편을 모두 국내 학술지에 기고했다). 그저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의 형편을 고려해 환자 개개인의 상황에 맞는 치료를 할 수 있다면 만족한다.
“힘들고 어려운 수술, 최신 수술 기법은 세계 각지의 우수한 정형외과 의사들이 다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마련이에요. 저의 소임은 저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 환자들이 가장 편안해하는 치료법을 찾아 만족하도록 제공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심 교수는 환자와의 만남을 필연적인 인연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환자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불만을 충족시켜주는 일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는다.
“환자를 나 자신, 내 가족으로 생각하면서 치료법을 찾으면 환자와 좋은 인연을 맺는 데 어려움이 없어요.” 명의로 추천된 심 교수의 환자 사랑은 바로 여기에 비밀의 열쇠가 있는 것이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최승식 기자
김대곤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의사 사이에서 최고 보다 환자에게 최고 의사 택했죠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전문가들 사이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꿈이랄까, 야망이랄까 그런 게 생겨요. 그래서 늘 첨단 치료, 첨단 기술을 하루라도 빨리 배워 환자에게 적용하고 싶어하지요. 그래야 시대를 앞서가는 멋진 의사가 되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심대무 교수는 환자를 진료하는 태도가 참 특별해요. 전문가로서 환자에게 신치료법을 이해시키기보다는 ‘환자들의 편의를 위해 무엇을 해줘야 할까’란 생각을 먼저 하거든요. 수술이 본업인 정형외과 교수가 된 뒤에 자신이 근무하는 지방에서는 ‘선생님! 수술 안 하고 고칠 방법은 없을까요?’라고 호소하는 환자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그 이후로 심 교수는 줄곧 ‘수술 안 하고 고칠 방법은 없을까?’란 명제를 고민해 온 정형외과 의사입니다.” 김대곤(사진) 교수는 심 교수를 이렇게 소개한다.
김 교수와 심 교수는 같은 지역에서 교수 생활을 하기 때문에 종종 만난다고 한다. 그때마다 병원이나 환자 이야기만 나오면 심 교수는 “우리가 지금도 학생 때 가슴에 새겼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지키고 있는 걸까”란 질문을 한단다. “꼭 국제적인 유명 학술지에 연구 결과를 발표해야만 명의가 되는 건 아니지요. 심 교수처럼 자기가 선 위치에서 환자의 요청에 부응하려고 평생 노력하는 의사야말로 의사의 귀감이 되는 명의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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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환자 손잡고 따뜻한 이야기 절망있던 자리에 희망 심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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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건강한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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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무 원광대 의대 정형외과 교수 → 권성준 한양대병원 암센터 소장
암 진단을 받은 환자는 두렵다. 특히 간혹 동네 의원에서 감기처럼 가벼운 병 치료만 받다가 암 때문에 처음 대학병원을 찾은 환자는 복잡한 병원 구조, 권위적인 진료 절차, 담당 교수의 명성에 주눅까지 든다. 한양대병원 암센터 소장인 권성준(외과) 교수는 이런 환자를 위해 첫 만남 때부터 손을 잡고 대화한다. “어떤 관계건, 체온을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위로와 신뢰를 주게 됩니다. 환자와 의사 간에도 손을 잡고 이야기하다 보면 신뢰가 쌓이죠. 환자의 체온이 감지되는 순간, 저 역시 의사로서의 보람을 느끼고 힘든 위로도 받습니다.”
암 전문의 스터디그룹 활동
“흰 가운에 청진기를 목에 건 채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모습에 반해” 의대에 입학한 그는 치료 효과가 가장 빨리 나타나는 외과의사의 길을 택했다. 1988년 모교의 외과교수로 발령을 받은 뒤엔 국내에서 가장 빈발하는 위암수술을 세부전공으로 정했다.
91년에는 위암수술 연구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일본 국립암센터의 마루야마 교수 연구실에서 한국인 의사로서는 최초로 1년간 연수하는 행운을 갖기도 했다.
“일본 체류기간 중 마루야마 교수에게 단기 연수 온 한국 교수가 열 명 있었어요. 모두 가족과 떨어져 혼자 온 분들이었지요. 저 역시 연수생활을 혼자 했기에 함께 숙식을 하고 지냈습니다.”
이때의 인연을 계기로 92년 5월, 이들이 모여 전임강사·조교수들로 구성된 순수한 스터디 그룹인 ‘대한위암동우회’가 탄생했다.
“젊은 학자들의 모임이다 보니 학습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습니다. 매주 일요일 아침부터 모여 저녁까지 하루 7~8시간씩 위암 연구를 했지요.”
수험생처럼 공부를 1년 반쯤 하고 나자 회원 간에 “이제 위암에 대해 꼭 필요한 공부는 어느 정도 마친 것 같다” 는 합의가 이뤄졌다. 그래서 이후론 월례 모임으로 바꿨고,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는데 현재 회원은 29명이다.
전국 각지의 교수들과 함께 공부를 하다 보니 학자들이 각자의 병원에서는 열심히 환자를 치료하고 데이터도 발표하지만 이를 총괄해 한국인 전체의 위암 관련 연구 결과를 집대성하는 데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위암도 전문가마다 수술법과 치료 결과가 조금씩 달라요. 그런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는 위암 환자는 다 같은 배달민족이잖아요? 그래서 한국인에게 적합한 치료법을 설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권 교수)
이를 위해 그는 97년, 국내 최초로 보건복지가족부 지원 하에 ‘위암수술의 표준 술식을 정립하기 위한 다기관 연구’를 시작했다.
국내 위암 연구 자료 집대성
“진행된 위암수술 때 비장을 절제할 것인지, 대동맥 주변의 림프절은 얼마나 제거해야 할지, 제거할 암덩어리 크기는 얼마가 적당한지 등 세 가지에 대한 수술 기준을 정하는 게 1차 목표였어요.”(권 교수)
이 연구를 통해 진행된 위암 환자 수술 땐 비장절제술이 꼭 필요하지 않다는 가이드라인이 제정됐고, 이는 2005년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열린 ‘국제 위암학회’에도 발표됐다. 암 같은 중병을 치료하는 의사일수록 환자 치료에 따르는 보람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경험한다.
2004년, 소세포 위암이란 희귀하고 치명적인 병에 걸려 자신을 찾아온 은사가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은 뒤 지금까지 건강하게 생존하고 있는 사실은 그에게 “기적 같은 기쁨”을 안겨줬다. 반면 10년 전, 소화불량 증상을 오랫동안 민간요법으로 대처하다 위암 말기에 자신을 방문했지만 수술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채 죽음을 바라봐야 했던 32세 젊은 엄마의 모습은 아직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는 조기 위암 치료율 98% 시대의 가장 적극적인 위암 예방법은 정기검진임을 강조한다. “폭증하는 사회적 스트레스, 발암물질 섞인 공해 등으로 20·30대 위암 환자가 전체 위암의 5%를 차지합니다. 그러니 가족 중에 위암 환자가 3명 이상 있거나 30대에 발병한 사람이 2명 있을 때, 또 한 명이라도 20대에 위암이 발병한 적이 있으면 젊을 때부터 위암 유전자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보통 사람도 40세 이후엔 매년 위내시경 검사가 필요합니다.” 손잡는 의사 권성준 교수는 기자에게 이 말을 꼭 써달라며 거듭 당부했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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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무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환자들이 형님동생처럼 느껴진다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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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저마다 제 잘난 맛에 살아요. 자기 연구가 최고다, 자기 치료 기술이 최고다 하는 식이죠. 그러다 보니 학회에서도 병원별로 제각각의 연구 업적, 치료 결과를 발표합니다. 하지만 국민 건강 차원에서 보면 전국 각지의 병원 데이터를 종합해 분석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누군가가 사명감을 가지고 나서서 각 대학병원 교수들, 대형병원 전문가들을 설득해 자료를 통합하고 평가를 해야 합니다. 번거롭기 짝이 없는 과정이지요. 권성준 교수는 국내에서 최초로 이 역할을 해낸 의사라 할 수 있어요. 소탈한 성격과 환자 치료에 필요한 지침을 마련하겠다는 학자로서의 집념이 결합된 성과입니다.” 권 교수를 명의로 추천한 심대무(사진) 교수의 설명이다. 권 교수의 이런 친화력은 환자 진료 때 더 빛을 발하게 마련이라고 한다.
“대학병원의 암 치료 의사와 환자는 대부분 초면이잖아요? 환자·보호자는 암 진단으로 인한 걱정뿐 아니라 낯선 병원, 낯선 의사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겨야 하는 두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이때 권 교수는 마치 환자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단골 의사보다 더 친밀한 느낌을 갖도록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어요. 환자들이 권 교수가 ‘형님이나 동생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합니다. 국내 위암수술 전문가의 치료 수준은 최고잖아요. 여기에 환자가 가족으로부터 치료받는 느낌을 주는 권 교수야말로 정말 명의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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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총수라고 봐주지 않는다. 환자는 원칙대로, 평생 봐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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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건강한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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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준 한양대병원 암센터 소장→박일형 경북대 의대 정형외과 교수
‘1구, 2족, 3약(一口, 二足, 三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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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첫 번째 임무는 입을 통해 환자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설명하는 일. 두 번째 임무는 아무리 바빠도 발을 움직여 환자를 자주 찾아야 하며, 세 번째로 약을 비롯한 각종 치료 기술을 처방해야 한다는 뜻이다. 경북대 의대 정형외과 박일형(54) 교수는 병아리 의사 시절부터 명의 소리를 듣는 지금까지 매일 아침, 이 말을 되새기며 하루를 시작한다. “현대의학이 발달할수록 치료법에만 매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의사 생활이 길어질수록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가장 먼저 원하는 것은 의사로부터 ‘따뜻한 위로의 말’이란 사실을 알게 됐어요. 입원 환자는 담당 의사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는 걸 좋아해요. 치료는 어차피 원칙대로 하는 거잖아요.”
집안의 권유로 1974년 경북대 의대에 진학한 박 교수는 본과 2학년 때 손의 구조를 통해 인체의 신비를 느끼면서 정형외과를 선택했다.
“로봇을 보세요. 손이 자연스럽게 굽혀지려면 손가락 마디 중 손바닥에서 가까운 쪽이 가장 작고 끝마디가 가장 커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반대잖아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탄생시킨 손의 기능을 설명해 주는 정형외과야 말로 무궁무진한 학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졸업 후 정형외과 수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과에서 ‘교수 요원’으로 지목돼 90년, 경북대 의대 정형외과 조교수로 발령 받으면서 학자의 길을 걷었다.
“정형외과 의사들은 대부분 환자가 많은 고관절이나 무릎관절을 전공하고 싶어해요. 의국에서도 제가 고관절 수술과 연구를 담당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명을 좌우하는 ‘골육종’ 치료 전문가가 되겠다고 우겼어요.” 골육종 수술 전문가는 당시에도 드물었지만 지금도 10~15명에 불과하다.
종이학 1000마리 접어준 소녀 사망에 눈물
막상 암 치료 의사가 되다 보니 가슴 아픈 사연이 너무 많았다. 특히 90년대 초만 해도 수술 후 항암 치료법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해 환자 세 명 중 한 명은 사망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무릎에 생긴 암 수술을 받고 5년 이상 잘 지내다가 고 3때 암세포가 폐에 전이된 걸 알게 된 여학생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전이된 후에는 흉부외과에 입원해 폐를 절제하고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투병 생활을 했어요. 당시 제가 담당한 환자는 아니었지만 5년 동안 진료하던 환자라 매일 병문안을 갔지요. 그런데 석 달쯤 지나 그 학생이 병실에 입원해 있으면서 학을 1000마리 접어 제게 주면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거예요. 어찌나 슬프던지… 곧바로 ‘고맙다’란 인사를 한 뒤 연구실에 와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결국 그 환자는 며칠 후 평화로운 미소를 띠면서 사망했지요.”
지금은 그 환자의 어머니가 골다공증 환자가 돼 박 교수의 진료실을 찾는다.
골육종 앓은 환자에 뼈 이식수술 성공
의사로서 보람을 느꼈던 순간도 많다. 특히 97년, 국내 최초로 골육종 수술을 받은 여덟 살 소녀에게 다른 사람의 뼈를 이식하는 수술을 성공시킨 일은 자랑스럽다. 암 때문에 도려낸 허벅지 뼈 부위에 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뇌사자의 허벅지 뼈와 관절을 영하 40도로 급속 냉각시킨 상태로 비행기로 공수해 와 이식한 것이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모 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박 교수에게 전화를 하며, 당시 무릎관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총수에게 생체 골관절 이식수술을 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하지만 박 교수는 거절했다.
“생체 골관절 이식수술은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뤄지는 엄숙한 일이기에 나이 어린 암환자처럼 수십 년을 살아가야 할 환자가 치료 대상”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아무리 재력가라도 노년층은 10년 이상 기능을 하는 인공관절 등 다른 치료법을 선택하는 게 윤리적으로 타당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12년이 지난 현재, 수술을 받았던 그 소녀는 잘 자라 명문대 법대에 다니고 있고, 기업 총수는 몇 년 전 사망했다.
박 교수의 학문적 업적은 2001년, 과학기술부 지원을 받아 세계 최초(정형외과학회 공증)로 뼈가 제거된 부위를 수술하지 않고 주사기를 통해 칼슘이 제거된 특수 처리된 뼛가루를 이식하는 기술을 개발한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안타깝게도 이 기술은 당시 특허를 받지 못했다. 이듬해 같은 방법의 주사 치료제가 미국 기업에 의해 상용화돼 현재까지 널리 이용되고 있다.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이익은 다국적 기업이 가져간 셈이다.
끝으로 박 교수에게 “스스로를 명의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머쓱한 미소와 함께 “명의인지는 몰라도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 좋은 의사를 양성하는 좋은 선생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인 건 맞다”고 대답했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신인섭 기자
-------------------------------------------------------------------------------- 권성준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한번 진료한 환자, 다른 병동 옮겨도 보살펴 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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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매주 나환자 진료를 하는 건 쉽지 않아요. 박일형 교수는 경북대 교수로 발령 받은 1990년부터 대구 ‘예수의원’이 없어질 때까지 12년 동안 무료로 나환자를 진료했어요. 박 교수는 ‘의사가 어려운 사람을 무료 진료할 때처럼 보람 있는 순간이 또 있을까?라며 ‘사실 내가 그분들을 도와줬던 게 아니라 따뜻한 눈길을 주는 그들로부터 내가 받는 혜택이 더 컸다’고 말해요”
박 교수를 명의로 추천한 한양대 의대 외과 권성준(사진) 교수의 설명이다.
‘한 번 진료한 환자는 평생 내 담당’이라는 박 교수의 신념도 존경스럽다고 한다. 대학병원은 과도 다양하고 세부 전공도 많아 한 환자가 이 과, 저 과를 다니면서 치료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박 교수는 일단 자신이 진료하고 수술한 환자는 다른 과에 전원이 돼도 해당 교수에게 일일이 부탁을 하고 다른 과 입원 병실을 찾아가기도 한다는 것.
“2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주로 어린이 암 환자를 치료했던 박 교수가 요즘엔 ‘15년 전에 수술했던 환자 결혼식에 갔다 왔다’ ‘10년 전에 치료했던 환자가 ○○대학에 입학했다’면서 기뻐할 때가 종종 있어요. 환자 치료에 열심인 것은 물론 치료를 끝낸 환자의 삶까지 신경 쓰는 박 교수야말로 인술을 베푸는 의사의 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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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일 가톨릭의대 내분비내과 교수→박형무 중앙대의대 산부인과 교수
폐경 여성 행복 찾아주는 보람도 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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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의사’로 불리는 박형무(중앙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가 가장 존경했던 사람은 통영에서 의원을 운영하던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될 꿈을 꿨다. 1970년 서울대 의대 입학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평생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전공을 택하라”는 조언을 했다. 의대생은 본과 3학년이 되면 각 진료과를 순회하면서 환자 치료 과정을 배우는 임상실습을 시작한다. 박 교수의 첫 임상실습은 분만실에서 출산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머리를 내밀고 세상 구경을 위해 애쓰던 아기가 첫 숨을 들이쉰 후 ‘응애~’ 하며 우는 모습은 생명의 탄생 과정을 함께했다는 감동을 줬습니다.” 그는 그날로 산부인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불임 치료서 폐경 치료로 바꿔
86년, 중앙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로 발령받은 그는 아기를 갖지 못하는 지인의 고통스러운 사연을 접하면서 불임 치료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연수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불임 교실에서 받았다. 또 85년 국내에서도 시험관 아기가 탄생한 이후, 불임치료는 최첨단 의술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박 교수는 불임 대신 폐경 치료에 전념했다.
“미국 연수 중 성당에 다니며 신부님과 자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런데 신부님이 “인간의 탄생은 자연의 섭리이자 하느님의 뜻이다. 인간의 출생을 조작하는 불임 치료는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행위인데 주님의 자녀인 당신이 왜 굳이 신앙에 위배되는 길을 가려고 하느냐”며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셨지요.”
물론 박 교수도 처음엔 신부님께 “불임 부부의 고통을 생각해 보셨느냐. 고통받는 사람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며 반박했다. 하지만 신부님의 거듭된 설교에 결국 감화를 받아 전공을 바꾼 것이다.
불임 치료를 포기하자 자연스레 산부인과 호르몬 치료의 또 다른 분야인 폐경 치료가 눈에 들어왔다.
이후 그는 자신이 “하루하루 보람을 느끼는 의사가 됐다”고 들려준다.
“폐경으로 여성호르몬이 급감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불면·심장 두근거림 같은 갱년기 증상이 나타납니다. 또 콜라겐 섬유가 줄어 피부 노화와 골밀도 감소가 눈에 띄게 진행하면서 온몸에 찌뿌듯한 느낌이 들어요. 이런 증상을 직면한 여성은 ‘노화가 급속히 진행된다’며 좌절하게 됩니다. 그런데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면서 증상이 호전되면 환자는 ‘젊음의 샘물을 마신 듯 기분 좋은 하루하루를 보낸다’며 기뻐합니다. ”
호르몬·약물 요법으로 행복한 삶 가능
한국 여성들이 칼슘 섭취를 돕는 비타민D 수치가 낮아 골다공증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낸 것도 박 교수의 업적이다.
“처음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땐 통계에 오류가 있을 거란 생각마저 했어요. 골다공증 여성의 비타민D 부족 비율은 통상 3분의 2 정도예요. 그런데 우리나라 여성들은 유독 80%로 높습니다. 한국 여성들이 햇빛 노출을 지나치게 꺼린 탓이죠.” 비타민D는 자외선을 받아 피부에서 합성되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폐경을 단순한 생리 현상으로, 혹은 호르몬 치료의 부작용을 우려해 불편한 증상을 인내심으로 견뎌내는 폐경 여성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강조한다.
“폐경 증상으로 고통받는 여성이라면 호르몬 치료를 5~10년간 받는 게 좋습니다. 만일 유방암 환자처럼 호르몬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경우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등 다른 약물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지금은 여성의 평균 수명이 증가하면서 폐경 기간도 35년으로 길어졌어요. 이 긴긴 세월 동안 여성들이 건강하고 편하게 지내야 사회 전체의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것 아니겠어요.” 스마일 의사 박형무 교수는 폐경 치료에 대한 필요성과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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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일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환자가 무리한 치료 요구해도 언제나 스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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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병으로 고통받기 때문에 병원에서 밝고 따뜻한 위안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막상 의사 입장이 돼보면 치료가 힘든 환자도 있고, 의외의 합병증이 발생해 고민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박형무 교수도 이 모든 상황을 피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런데도 언제나 미소 띤 얼굴로 환자를 진료해 ‘스마일 의사’로 알려져 있어요. 한번은 박 교수한테 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힘든 일도 겪을 텐데 어떻게 늘 밝게 웃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환자를 대할 때마다 ‘하느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정도로 최선을 다한 뒤 결과는 하느님 뜻에 맡긴다’는 다짐을 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할 수 있다고 답하더라고요. 이런 의사에게 진료받는 환자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강무일(사진) 교수는 박 교수를 명의로 추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박 교수는 학자로서 지식을 전파하려는 의지도 대단해 새로운 지식이 소개되면 이를 다른 의사들과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런 열정은 환자에게도 똑같이 쏟아붓는다.
“박 교수는 환자를 위해 책자를 만들고 공개 강좌를 여는 일에도 열의를 쏟아요. 명의란 바로 박 교수처럼 모든 진료 과정과 병에 대한 정보를 환자와 공유하기 위해 다가가는 의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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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가 좋아” 노인 위한 의사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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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건강한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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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가 추천한 명의] 박형무 중앙대의대 산부인과 교수 → 김희상 경희대의대 재활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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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절에만 가면 마음의 평화를 느꼈던 소년은 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양로원과 고아원에 봉사활동를 하러 다녔다.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뜻을 실천하는 길이란 생각이 들어 너무나 행복했다”는 그는 평생 그들과 함께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대학 진로를 정해야 하는 순간, 그는 가족에게 자신의 뜻을 설명했다. 당시 병원을 운영하던 삼촌이 “의사야말로 평생 너의 꿈을 실천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조언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봉사활동을 할 때, 아픈데도 치료 한번 제대로 못 받고 방치된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곧바로 그는 의사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의대에 진학했다. 이후 지금까지 그는 청소년 시절 품었던 생각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산다. 경희대 의대 재활의학과 김희상 교수가 주인공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봉사활동하고 노인학 배워
의대 졸업 후 그는 낙후 지역인 경북 안동시 녹전동에 공중보건의 근무를 자청했다. “전화 한번 하려면 면사무소에 가 교환원에게 부탁해야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낙후지역일수록 의사가 할 일이 많아요. 부임하자마자 동네 이장들을 초청해 ‘각 이(里)에서 의사 진료가 꼭 필요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금방 11명의 환자를 추천받았는데 모두 몸이 아파도 보건소 방문조차 하기 힘든 노인분이었어요” 그때부터 3년간 그는 매주 그들을 방문해 쌀·라면·우유·비타민·링거 수액 등을 전달했고 필요한 치료도 했다. 이 경험을 통해 재활의학이야말로 노인 환자에게 꼭 필요한 치료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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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보건의 생활을 마친 뒤 경희대병원에서 재활의학을 전공한 그는 특히 노인 재활 치료에 관심을 뒀다. 연수도 미국 UCLA에서 노인학을 배웠다.
“재활의학을 전공하다 보면 치료는 의사와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까지 합심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돼요.”
전공의 시절, 50대 중반 남성이 호흡 중추가 있는 연수(延髓)의 뇌출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돼 입원했다. 입원 직후부터 환자의 아내와 두 딸은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의사에게 배운 재활 치료법을 온종일 환자에게 적용했다. 김 교수 역시 한 달 이상 병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보호자와 함께 환자를 돌봤다. 입원 45일 째 환자는 기적처럼 의식이 돌아왔고, 몸도 자기 관리는 스스로 할 정도로 회복됐다. “퇴원할 때 불편하지만 스스로 걸어 나가면서 감사 인사를 전하는 환자를 보면서 의사가 된 보람을 만끽했지요.”
물론 치료를 해도 상태가 나빠지는 안타까운 환자도 적지 않다. 특히 점점 근육이 위축돼 끝내 숨을 못 쉬게 되면서 사망하는 근육 위축병 환자는 오랜 세월 환자의 자세를 교정해 주고 관절운동을 시키면서 휠체어를 조절해 주는 식의 치료를 하기 때문에 사망할 때마다 가슴에 묻게 된다.
근골격계 재활치료 전문가로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김 교수는 소외계층을 위한 봉사활동을 지속했다. 특히 중증 뇌성마비 환자가 있는 경기도 광주의 ‘한사랑 마을’ 방문은 1992년부터 2007년까지 계속했다. 2년 전 왕진 치료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은사가 정년 퇴임 후 그곳 환자를 정기적으로 돌보면서다.
근골격계 재활 치료 전문가인 김 교수는 요즘 들어 부쩍 젊은 층 환자의 방문이 증가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신문에 젊을 때부터 매일 아침·점심·저녁으로 맨손체조나 스트레칭을 15분씩 생활화하라는 말을 꼭 써 주세요. 작업 중엔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컴퓨터는 모니터를 눈과 50㎝ 떨어진 곳에 놓고 의자는 컴퓨터 상단이 눈과 수평이 되게 높이를 조정해야 합니다. 자판을 사용할 땐 어깨가 공중에 매달리지 않도록 팔꿈치를 기댈 수 있는 팔걸이 의자가 필요하지요”
절에서 느낀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김희상 교수. “죽는 날 까지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얼굴엔 인터뷰 내내 자비로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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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무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학생 때도, 교수 돼서도 한결 같이 봉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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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된 사람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막상 현업에 종사하다 보면 바쁜 일상에 치여 의료 봉사는 어린 시절 품었던 막연한 꿈으로 가슴 한편에 접어 두지요. 그런데 김희상 교수는 달라요. 학생 때는 물론 공중보건의 생활을 하면서도 늘 봉사하는 의사의 길을 걸었어요. 교수 발령 직후 음성 꽃동네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고, 2년 뒤엔 심한 뇌성마비 환자가 모여 있는 ‘한사랑 마을’ 진료도 다녔어요. 2003년 이후엔 다른 병원 의사들과 연대해 서울역 노숙자 무료 진료도 주도하고 있습니다. 한순간도 의료 봉사를 잊지 않고 실천하는 의사라면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에겐 또 얼마나 정성 어린 진료를 하겠어요?” 김희상 교수에 대한 박형무(중앙대 의대 산부인과·사진) 교수의 설명이다.
박 교수는 김 교수와 진료과도 다르고 근무지도 다르다. 서로 만날 일도 거의 없다. 그런데 한번은 우연히 학회에서 김 교수와 대면할 기회가 생겨 봉사를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에 대해 물어 봤다.
그랬더니 김 교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소외계층 환자의 얼굴에서 부처님의 사랑과 자비심을 느낄 수 있어요. 내게 의사로서의 보람과 마음의 평화를 주는 그들이야말로 내 인생의 원동력이죠”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의사가 진짜 명의 아닌가요?” 박 교수는 명의 추천 사유를 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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