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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4월19일 부활 제3주일
[수도회] 유령인가? 땅 위의 신앙인인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3,13-15. 17-19
◎ 제2독서 1요한 2,1-5ㄱ
† 복음 루카 24,35-48
오늘 전례
◎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분께서 제자들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어,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고난을 겪고 다시 부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는 그들을 증인으로 파견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도 비추어 주시기를 청하면서 그분의 제단
앞으로 나아가 주님을 찬미합시다.
★ 베드로 사도는 유다 백성에게, 그들이 무지한 탓으로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이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권고한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바쳐지셨기 때문에,
의로우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제2독서).
★ 복음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말씀에
따라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 이제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선포되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회개, 화해, 속죄’는 주로 사순 시기에 어울리는 듯한 단어이지만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자의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본기도의 내용에서 부활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이 세상의 악에 대한 어두운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동안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의인들, 그리고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 안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뜻밖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고난을
포기하시거나 거부하셨더라면 그것이 오히려 인간의 죄악에 대한
패배였을 것입니다.
고난의 잔을 끝까지 받아들이신 그분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온갖 조롱과 박해를 묵묵히 받아들이신 그분은
참임금이셨고, 승리자셨고, 메시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사도 3,18).
영광스럽게 돌아가신 그분 덕분에 이제는 ‘그분의 이름으로’ 회개와 용서가
선포됩니다. 우리가 부활의 기쁨과 평화와 생명에 참여하려면 먼저
회개하여 그분의 용서를 받고 동시에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 그분 생명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유령인가? 땅 위의 신앙인인가?
2015년 나해 4월19일 부활 제3주일 루카 24,35-48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
유령인가? 땅 위의 신앙인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의 수만큼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어떤 이들은 땅에 발을 딛고 하늘만 쳐다보며 살아간다.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을 꿈꾸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하늘에 마음을 두되
땅에서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길을 찾아보자! 루카 복음 전체의 결론에 해당하는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발현’ 이야기와 더불어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할 증인임을 말해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24,37). ‘유령’은 정신 또는
영혼을 가리키는 말로서, 루카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바로 그 몸 그대로 지금 실제로 살아 계시므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말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살과 뼈가 있음을 보여주시고(24,39) 또 제자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심으로써 당신의 부활하신 분의 몸이
곧 사도들이 십자가상에서 보았던 고통을 당하신 몸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부활 이전의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같은 분이시며,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구원사건임을 말해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 가르치고
행하셨던 그 모든 것과 십자가 신비를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봐야 함을
확인시켜주시면서, 성경을 깨닫도록 마음을 열어주셨다(24,44-45).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체험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의 회개를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는 일’
(24,47-48)이다. 부활의 신비는 제자들의 복음선포 사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 ‘죄의 회개’의 선포란 바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다. 이는 부활의 신비를 어떻게 바라보고 부활하신 분의
삶에 어떻게 참여하느냐 하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저 먼 하늘’
이나 ‘초월의 신비’ 속에 유령처럼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죽음 전과 후가 다름없이 실제로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 안에서 나의
생각의 전환, 행동의 개선을 이루어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 ‘죄의 회개’의
증거일 터이다.
어떻게 '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땅’(세상)에 살면서 땅을 보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며 그릇된 영신주의나 신비 속으로 도피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현실의 고통, 사회적 불의, 정치권력과 기업가들의 부정부패, 인간
존엄성의 말살 앞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죽으시어 부활하신
것처럼 ‘하늘’을 품고 ‘땅’에서 그 사랑을 노래하고 그 사랑이 현실화되도록
죽어야 한다. 나 자신의 건강과 유익을 앞세우고, 자기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는 온갖 정성을 다 쏟으면서도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고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신앙의 이름으로
국가수호를 표방하며, 입으로는 세상과 교회를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실천은 하지 않는 모습이 곧, ‘유령’을 찾고 있는 거짓
신앙, 신앙의 탈을 쓴 연극이 아니고 무엇일까? 나는 ‘땅’에 발을 딛고
멍하니 하늘만 보며 살아가는 ‘유령’인가? 아니면 ‘하늘의 뜨거운 사랑’을
품고 땅위에서 더불어 고민하고 아파하는 세상 속의 부활한 신앙인인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2015.04.1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47-48)
부활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사건은
잘못된 일이었음을 드러내 줍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모든 이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사도들은 설파합니다.
세월호 참사로 수많은 아이들을 죽게 만든 사건은
비단 선박회사나 해경이나 선원들만이 아니라
이제 그냥 덮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청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부활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무조건 기뻐해야할 일은 아닙니다.
정말로 무죄한 이들이 억울하게 죽게 해서는 안된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보속하고 회개한 사람만이 이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증인이듯이
우리 모두도 세월호 죽음과 부활 사건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은 세월호 사건을 직접 목격한 목격증인들입니다.
이제 그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책임있는 행동을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활은 나에게 참 기쁨이 될 수 없으니까요.
오늘 세월호를 인양하여 사건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이제 아이들이 부활의 길로 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그리고 제발 책임있는 이들이 회개할 수 있는 은총도 구합시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평화가 너희와 함께!“ -손을 잡아 주십시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4월19일 부활 제3주일
사도3,13-15.17-19 1요한2,1-5ㄱ 루카24,35-48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3-15.17-19
제2독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5ㄱ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평화가 너희와 함께!“ -손을 잡아 주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복음에서와 똑같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부활 제3주일 미사를
통해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나의 에피소드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수도원 정문을 통과해 오다 보면 십자로 중앙, 단풍나무 아래,
예수부활상 밑 커다란 바위 판위에 글자를 보았을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어제 복음에서 새벽 어둠 중에 호수위를 걸어오시며
풍랑에 시달리던 배안의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원래 제가 원했던 예수부활상 아래 돌판에 성구에 쓰여질 성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러나 수도형제들이 모여 의논하여 투표한 결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로 결정되었습니다. 두 말씀 모두 두렵고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감로수(甘露水)같은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인 '평화의 빛'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우리 모두 이 부활 제3주일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평화를 선물 받습니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베드로의 강력한 권고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의 선물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게 회개입니다.
믿는 이들의 우선적 출발점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게 하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한 마음의 병, 무지(無知)의 치유요 자기발견입니다.
주님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알게 모르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지음으로
생명의 영도자인 주님을 죽이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무지한 탓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에 최고의 특효약이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앎과 생명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하는
본기도문이 참 아름답고 은혜로워 전문을 그대로 다시 나눕니다.
"아버지, 저희 죄를 씻어 주신 성자의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 주셨으니,
저희가 마음을 열어 참으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기도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 주시는 동시에,
마음을 열어 참으로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게 해 주시는 미사은총입니다.
회개를 통한 '깨달음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이 또한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다음 복음의 묘사가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
닫힌 마음을 열어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성령입니다.
새삼 '회개의 여정'은 '깨달음의 여정'임을 깨닫게 합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깨달음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지혜에
이르지 않으면 많은 지식들은 쓰레기더미에 불과할 뿐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깨달음의 은총이 '무지의 병'을 치유하여
우리를 더욱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모시켜줍니다.
회개할 때 주님을 알게 되고 저절로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나는 주님을 안다."하면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참 두렵고 무서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진리가 있습니까?
회개가 없는 삶은 진리가 없는 거짓된 삶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함으로 진리와
사랑이, 겸손과 지혜가 그 마음을 가득 채움으로 '참 나'의 실현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내적부요의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죄를 짓더라도 회개에 주저하지 마십시오.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새삼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변호자 예수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끊임없이 회개를 통해 죄를 용서 받음으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입니다.
하여 평생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죄를 용서 받음으로 주님과의 우정이
회복되고 깊어지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주님 앞에 갈 때, 지니고
갈 것도 바로 주님과 우정의 관계 하나뿐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몸소 찾아주셔서 평화를
선사하시며 의심스럽거든 손과 발을 만져 보라 말씀하십니다.
이어 주님은 분명 제자들의 손도 잡아주셨을 것입니다.
어제 읽은 기사가 생각납니다. 세월호 참사이후 진상 규명을 위해 애쓰는
어느 희생자의 25세 언니 자매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지난 1년 사람의 끝을, 세상의 밑바닥을 한꺼번에 다 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아직도 손을 내밀고 있어요.
사람들 한테, 잡아 달라고."
어느 심리상담가의 위 자매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조언도 생각납니다.
"심리치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누군가 함께 있어준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같이 아파하고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는 주님이요,
우리 역시 손을 내밀어 아파하는 이웃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의 손을 잡아주시고 평화와 더불어 기쁨을 선사하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해 주십니다.
또 우리 모두 당신 부활의 증인이 되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삶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주님,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인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더 이상 극단적 선택은 안 됩니다!
2015년 나해 4월19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3-15.17-19
제2독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5ㄱ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더 이상 극단적 선택은 안 됩니다!
요즘 돌아가는 정치판을 바라보면서 개인적으로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사람 목숨이란 것, 하늘이 주신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스스로 결단을
내리나요? 그리고 또 다른 한 분,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힘을 줘야
할 사람인데...‘목숨’까지 담보로 내거나요? 참으로 암담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시대 악령이 부추기는 ‘죽음의 문화’가 우리
사이에 스며들어왔습니다. 여차하면 극단적 선택을 마다하지 않은 오늘날
우리 이 사회가 원망스럽습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인간의
고귀한 생명인데...어떻게 그렇게 너무나도 쉽게 한 존재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는가요?
이유야 어떠하던 간에 더 이상 또 다른 가슴 아픈 사건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잘못을 했던지 더 이상 하느님의 고귀한
품성이 깃든 한 인간 존재가 홀로 쓸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이 시대, 나름 잘나간다고 어깨 힘 좀 주는
정치인들에게 고하고 싶습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그릇도 차면
넘칩니다. 달도 차면 기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권세나
영화! 대단한 것 같지요? 십년 이상 못갑니다. 불과 몇 년 안에 내리막길을
걸을 겁니다. 그때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그래서 정치인들에게도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되면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절대자 앞에 겸손해집니다.
‘이 지상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다 지나가는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종교는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리는 것은 더 늦기 전에 신앙에 귀의하라는 것입니다. 절대자
하느님 품에 안기라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정치인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지나가면 이 세상보다 훨씬 풍요롭고
아름다운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래서
당부드리는 말씀, 여러분 자신의 비참함도 견뎌야 합니다. 참혹한 현실도
견뎌야 합니다. 견디고 견디다 보면 하느님께서 또 다른 희망과 가능성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활 전과 다른 특별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당신의
부활을 기점으로 이제 더 이상 예수님께서는 이 지상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사이에 끼어드신 예수님, 그리고
갑작스럽게 열한 제자들 사이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제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 더 이상 공간의 법칙과
공간 내 이동의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인간의 지각 능력을 뛰어넘는 초월자가 되신 것입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엠마오로 향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리 앞에 갑작스럽게
다가오십니다.
때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사고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때로 우연한 한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급작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때로 책장을 넘기던 중 우연히 마주친 한 글귀를
통해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때로 부드러운 봄바람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그분을 맞이하려는 우리들의 태도입니다.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그분의 심오한
뜻을 헤아리기 위해 우리가 좀 더 깨어있어야겠습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
티 없이 순수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때에, 꿈에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고통스런 현실과 더불어, 참혹한 이 세상의
현실과 더불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그 참혹하고 고통스런 시련 안에서도
엄연히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며, 그분께서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신다는 것!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가장 좋은 상황이라는 것.
2015년 나해 4월19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3-15.17-19
제2독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5ㄱ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바다를 항해하던 여객선이 심한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객선에
타고 있던 겁 많은 어떤 여자 승객이 선장에게 달려가서 안전에 대해
물었습니다.
“선장님! 우리가 지금 큰 위험에 처한 것인가요?”
그러자 선장은 이 여자 승객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천주교인임을
알았기에 미소를 띠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걱정 마세요, 부인. 우리는 결국 하느님의 손 안에 있으니까요.”
이 말을 들은 그녀는 겁에 질렸는지 하얗게 얼굴이 변하면서 말합니다.
“오!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요?”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 과연 나쁜 상황일까요? 선장은 이 승객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손 안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부인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나쁜 상황이 아닙니다. 아니 매 순간
하느님의 손 안에 있음을 깨닫고, 그 사실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가장 좋은
상황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요즘에 우리들은 아름다운 꽃이 피는 좋은 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전인 추운 겨울에도 이 꽃이 거리에 만발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점점 추워지면서 잎사귀가 떨어져나갔고 그래서 수액이
완전히 빠져버린 메마르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무에서 다시 꽃이 피리라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추운
겨울만 지나고 따뜻한 봄이 되면 꽃이 피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음을 확신하며 산다면 어렵고 힘든 상황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뒤, 회개와 죄의 용서를 선포하라고 명하시며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손 안에 있음이 가장 행복한
자리임을 세상에 알리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자리가 행복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나쁜 상황이 아니라, 가장 좋은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가장 좋은 상황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좋은 밤만을 찾다가 좋은 낮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네덜란드 속담).
신학생 때의 사진 한 장. 재판 받는 장면인데, 왜 이런 표정일까요? ㅋㅋㅋ
결코 모자라지 않단다(지장홍, ‘사랑이 사람을 밀고 간다’ 중에서)
한 엄마가 유치원 학부모회에 참석했다. 선생님은 엄마에게 다가와
하소연했다.
“아이가 한시도 가만있지 못해요. 책상에 3분도 앉아 있지 못하니 원.”
집으로 가는 길에 엄마는 마음이 착잡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이 걱
정스럽게 말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눈물이 흐를 뻔했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널 칭찬했어. 원래는 1분도 책상에 앉아 있지 못하던 네가 지금은
3분이나 앉아 있잖니?”
그날 저녁, 아들은 처음으로 반찬 투정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엄마가
먹여주지 않아도 반찬을 흘리지 않았다.
1년 뒤 엄마는 다시 초등학교 학부모회에 참석했다.
“이번 수학 시험에서 아드님이 50명 중 49등을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아들은 어머니가 무슨 얘기를 할까 몹시 불안해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아들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너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으시더구나. 넌 결코 모자라지 않아. 조금만 집중하면 네
짝꿍보다 잘할 수 있다고 하셨거든.”
그러자 내내 어두웠던 아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튿날 아들은 평소보다
더 일찍 등교했다.
엄마는 중학교 학부모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늘 아들을
격려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아들은 편지와 함께 명문 대학 합격
통지서를 건네며 울먹였다.
“엄마, 사실은 제가 똑똑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어릴 때부터 알았어요.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저를....”
아들을 보던 엄마의 눈에 그동안의 슬픔과 기쁨이 스쳐 갔다. 손에 쥔 편지
위로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 인간 각자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요?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다투고 싸우는 모습에 또한
비교하고 무시하면서 인정하지 않는 모습에 얼마나 한심하게 느끼실까요?
우리의 눈으로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들
각자는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괜히 도토리 키 재기
식의 관점으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맙시다.
엄청나게 큰 찻잔과 티스푼. 비교 대상이 없으니 잘 모르겠죠?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죽음을 품은 삶
2015년 나해 4월19일 부활 제3주일
<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복음: 루카 24,35-48
< 죽음을 품은 삶 >
전에 어떤 자매가 남자친구와 자주 헤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실은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워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관심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면 재빨리 다른 남자와 소개팅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헤어짐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헤어지기 전에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자는 그 여자에게 관심이 줄어든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지례짐작으로 헤어짐을 두려워하여 다른 남자를 먼저 만났던
것입니다. 남자를 만날 때도 여자는 헤어짐이 두려워 자신과 같이 훌륭한
사람을 만나는 것을 고맙게 여기라면 남자를 깔보기도 하고, 때로는
헤어지지 않게 준비도 안 된 남자에게 빨리 결혼해버리자는 식으로
괴롭혀 왔었습니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모습에 지쳐 있다가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되면 확실히 돌아서버리게
됩니다.
대부분 이런 자매는 어렸을 때 집에 혼자 남겨져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었거나 혹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던 기억들을 무의식중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려지는 것이 두렵고 그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만나는 사람을 괴롭히고 그래서 진짜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면 먼저 이별하는 법부터 배워야합니다. 이별하여도
아무렇지도 않을 때 상대를 괴롭히지 않고 온전한 성인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남녀 간의 만남에서처럼, 삶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황창연 신부님의 강연 중 신학생 아들을 둔 글라라라는 자매의 사례가
나옵니다. 글라라 자매는 암이 뼈까지 전이되어 6개월 선고를 받았지만
군대 간 아들이 서품을 받는 것을 꼭 보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4년을
살기는 했지만 끝내 아들의 서품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황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병원에 찾아갔을 때 글라라 자매는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전과는 다르게 빨리 죽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글라라 자매가 죽었다가 아들의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었을 때는 굉장히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나니 생의
고통을 고스란히 다시 느끼게 된 것입니다. 보통 죽어서 하늘나라의 맛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다시 이 세상의 삶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남겨진 사람들만 슬퍼하는 것이지
정작 몸을 빠져나온 영혼은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기 때문에 슬프지
않다는 증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죽었다가 돌아와서의 삶은 죽기를 원치 않으면서 이 세상에 매여
살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아들의 서품을 하늘나라에서도 볼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 삶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의 삶이 진정 두려움 없는 삶인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갔다 온 성지순례 계획을 세울 때 시나이산을 제외하게 된
이유는 한국 순례자 한 분이 시나이산 올라가다가 낙타와 함께 절벽으로
떨어져 사망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여행사에서는 낙타로
시나이산 올라가는 프로그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낙타타고 올라갔던 기억이 나무 좋아서 시나이산 가려고 했던 것인데
모두가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고 하니 아예 가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낙타들은 항상 절벽 끝으로 걷습니다. 그래서 낙타를 처음 탄 사람은
낙타가 절벽으로 굴러 떨어질까 봐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낙타에게 자신을 맡기고 하늘의 별들을 보며 순례를 즐깁니다. 낙타에서
굴러 떨어진 그 분은 두려운 나머지 낙타의 목을 꽉 껴안았고 낙타가
중심을 잃어 함께 덜어지고 만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살아있을
때도 영향을 미쳐서 온전히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스키를 배울 때 타는 법부터 가르치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법부터
가르칩니다. 넘어지는 것이 두려우면 그 두려움 때문에 엉덩이가 뒤로
쏠려 진짜로 크게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아야
몸을 앞으로 내어던져 체중이 뒤로 쏠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넘어질
줄 모르는 아이는 걸을 줄도 모릅니다. 아이는 넘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아야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을 연습합니다. 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두려우면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어 모든 걷는 근육들이
퇴화하게 됩니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우면 삶에서도
이 걱정 저 걱정 하다가 사는 건지 죽은 건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껴안을 수 없으면 삶도 껴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평생
불로초만 찾아다녔던 사람들은 그 시간을 즐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몰라보았던 것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가발을 쓰신 날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진짜 아줌마로
불렀습니다. 예상하지 못하면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이라 소리 지르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그분의 죽음을 껴안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머물렀던 것처럼, 지하의
땅 속에서 사흘 간 머무시다가 부활하셔야 하는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모두가
도망을 쳤고 또 죽기를 장담하던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분을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활을 이해하려면 죽음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라는 기록을 이해시켜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통과의례라는 것을 깨닫게 된 후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부활을 믿으려면 먼저
죽음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죽음과 부활의 연속입니다.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입니다.
팽창과 수축의 연속입니다. 하나 됨과 쪼개짐의 연속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증언합니다. 하느님 삼위일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를 떠나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습니다. 막달레나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지려고 할 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려고 하니 잡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를 만나려면 상대를 떠나보낼 준비까지 해야 합니다. 이별이
두려워 내 사람이 되라고 잡고만 있으려고 하다보면 지금 있는 사람은
금방 지쳐버릴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삶 또한 죽음과 떼려야 뗄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기 위해 죽으시는 것이고, 죽으시기 위해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온전히 살아가려면 죽음을 품어야 하고, 온전히 시작하려면
마지막을 품어야 하고, 온전한 만남을 위해서는 이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죽음처럼 보이는 것도 언젠가는
다시 부활하여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치 쇠가 풀무 불에
달구어져야만 망치와 맞닿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불에만 있어도 안
되고 망치만 맞아도 안 됩니다. 이 관계의 역동성, 삶과 죽음의 역동성을
이해하면 죽음을 끌어안으셨던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을 누리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죽음이
우리가 결코 두려워해야 하고 멀리해야 할 무엇이 아니고 애인처럼 꼭
껴안고 살아야 할 과정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부활 제3주일
2015년 나해 4월19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3-15.17-19
제2독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5ㄱ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오늘은 부활 제3주일이고, 4월 19일입니다. 국민이 주체가 되어 나라의
권력을 바꾼 날입니다. 국가는 막대한 권력을 지녔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키지 못하면 처벌할
수도 있습니다.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 세금을 징수하고,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합니다.
4월 19일은 국가란 국민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 날입니다.
부당한 국가의 권력은 마땅히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날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이 무모하게 보이지만 거대한
국가 권력을 향해서 힘찬 목소리를 낸 국민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모진 고문을 온
몸으로 이겨낸 민주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0여 년 전, 자유를 향한
처절한 외침이 있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이 있었고, 박 종철, 이
한열이라는 젊은이들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4월 19일을 지내면서,
자유를 위해서, 민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자유라는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지금 제가 사제로서 사목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100년 가까이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길을 바꾸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길은
아무도 간 적이 없는 좁고 험난한 길일 수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동안 누렸던 안락과 기쁨을 포기하고 고난과 슬픔을
각오해야 하는 길일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이 이제
주인도 없는 길잡이도 없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주인이 그렇게
허망하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던 그 길을 다시 선택했습니다. 그 길은
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길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간 길과는 다르기도
합니다.
그 길의 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그 길이
진실한가를 따진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그 길이 선한가를 따진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그 길을 지금 꼭 선택해야 하는가를 따진다고 합니다.
오늘의 제 2독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길 합니다.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자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 선택의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 길을 사도들이 걸어갔습니다. 그 길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걸어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부활 3주일에 바로 그 길을 걸어가도록
해야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돌판에 새겨 기억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4월19일 부활 제3주일 (루카24,35-48)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3-15.17-19
제2독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5ㄱ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돌판에 새겨 기억하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아니 그 허물과 잘못을 없애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크신 사랑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옛 말에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두지 말고 혹 새기려면 모래에
새기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돌 판에 새겨 잊지 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빨리 잊고,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되씹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최선을 다해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당신을 내
맡기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구세주라고
생각했건만 어찌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 그를 피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언제 어느 때 그 불똥이 튈지를 모르는 상황인 만큼
제자들도 도망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과거의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두려움을 넘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오히려 다시 살아난 당신을 유령을
보는 줄로 알고 놀라며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손과 발을 만져 보라
하시고, 음식을 잡수시며 무뎌진 마음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까지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제자들이 왜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봤을까요?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무엇으로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있으면 아직까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힘이요, 능력이 되어야 하는데 아는
것이 오히려 병입니다.
주님께서는 허물은 기억하지 않으시고 한결 같은 사랑으로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이사43,25).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이사55,8.9)하신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 우리를
평화와 사랑에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푼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여 돌 판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분이 행한
방법으로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랑은 평화를
얻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 회개하면
죄를 용서 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고 또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회개는 허물을 기억하지
않는 “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하고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옛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께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제발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기억하고 남의 허물은 잊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의학, 신학, 법학,
수학, 천문학등 다양하게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성직자로서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을 따라 그의 묘지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오른쪽 강도에게 주신
용서(구원)를 원할 뿐입니다. "
우리가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 앞에서의 용서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위한 용서를 얻어야 하고 또 그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누구의 허물을
기억하기 전에 주님 앞에 나 자신의 흠 없는 삶을 봉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비를 청해야겠습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으로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저 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
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주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의 부활 목격자들의 업적
2015년 나해 4월19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3-15.17-19
제2독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5ㄱ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예수님의 부활 목격자들의 업적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이를 목격한 분들의 증인역할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역할이 세상에 끼친 바를 생각해 보면 감탄이 절로 납니다.
서력기원, 구원, 평화, 용서, 평등, 희생, 사랑 등의 새 지평이 열렸습니다.
이에 국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끼친 영향 무시 못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류사에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는 점.
더구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류가족사상까지 펼친 걸 보면 더 그래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46~48)”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알게 모르게 지은 죄(루카 24, 35-48. 04. 19)
2015년 나해 4월19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3-15.17-19
제2독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5ㄱ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알게 모르게 지은 죄(루카 24, 35-48. 04. 19)
오늘 사도행전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아는 고난을 받음으로써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죄중에
있는 사람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죄가 지워지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 1서에서도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아는 바로 세상의 죄를 없앰으로써 구원을,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속죄 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용서를 위해서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거듭 강조를 하고
계십니다.
미사 경문에서도 수차례 죄의 용서와 회개에 대한 기도문이 반복됩니다.
미사를 시작할 때도 ‘우리 죄를 반성하며 고백했고,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대영광송에서도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하고 기도하고, 사도신경에서도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하고 기도합니다.
예물준비기도에서도 사제는 “주 하느님,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오늘 저희가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또 성찬례 때,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기도에서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기도합니다.
이어서 사제는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이라고 세 번이나
외치며 자비와 평화를 구하고, 영성체 전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고 성체를 높이
들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미사와 신앙생활은 죄를 용서받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심으로 회개하여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미사 때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에 대하여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아멘.
- 수원 교구 죽전1동 하늘의 문성당 윤민재 베드로 희망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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