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960-70년대 시위, 시위운동과 관련된 박사논문이 나왔다. 『박정희 정권기 시위 진압 체계의 형성과 변화』( 2022.8.). 사실은 시위운동 그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시위 진압을 통해 군부통치의 법적·제도적·기구적 배치와 국가폭력의 역사적 구성 과정을 살펴봤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에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 '시위'라는 '무색무취'한 용어가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시위라는 표현이 지금처럼 사용된 것은 근대 이후 일 듯하다. 시위는 밖으로 나타내어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전통사회에서는 주로 군대나 의례, 刑具 등을 늘여세워 위엄이나 엄중함을 보이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한말 일본군이 시위차 행진을 한다든가, 국군의 날에 병력이 늘여서 있는 장면을 생각하면 될 듯하다.
나아가 실제 전쟁에서도 병력이 늘어서 공격하는 모습도 시위인 듯하다. 가령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 이 배가 대동강변에 정박하고는 몇 명이 작은 배를 타고 올라오자 평양성안 인민들이 “弓·石을 亂投하였고 城下 防守校卒들도 弓·銃으로써 示威하였다”고 한다.(승정원일기 고종 3.7.21) 무력으로서 대응한 것인데, 너희들을 막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이른바 민중운동으로서 시위는 3.1운동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지난 1월 27일 황해도 안악군에서 시위운동이 폭발하다. 수천명의 군중이 읍내에 회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선언서, 경고문을 살포하다.”(<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12호, 1920.2.12.) 3.1운동과같이 거대한 운동뿐 아니라 학교, 서당 등 학생들의 소수 활동에 대해서도 시위라고 붙였다. 가령 “그는 XX 학당의 학생으로 시위 운동에 앞장을 서서 지휘하든 여자였는데...”(<조선일보> 1930년)와 같은 식이었다. 임시정부나 우리 신문에서 사용하였으므로 나름 그 의미를 평가하려 하였고, 부정적인 표현은 결코 아니었다.
서구의 데모, 데몬스트레이션의 번역이 ‘시위’가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듯하다. “無産大衆의 世界的 데모인 五月 一日의 데모도 잇는대 이러한 데모는 政治的 데모로서 社會運動의 重大性을 띄운 것이다.”(<동방평론>) 또는 “메이데이에 行하는 데몬스트레이슌”((鮮和兩引)모던朝鮮外來語辭典[漢城圖書株式會社])과 같이 데몬스트레이션을 쓰기도 하였다. 시위와 데모를 글 속에서 비슷하게 사용하였다. “米國의 「메이데-」의 起源이 八時間勞働制 要求의 示威罷工에서 생긴 것은 넘어도 有名한 事實이다”(<비판>) 데모는 주로 외국 관련 기사에 보이는데, 그렇더라도 역시 객관적인 용어로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해방 이후 특히 6,70년대에는 우리나라의 시위를 '데모'라고 쓸 때는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점이 차이가 있을 듯하다(아래에서 거론한 소요, 심지어 난동 정도?).
그런데 전통사회, 1862년 농민항쟁에서도 ‘시위’라는 표현을 하고 있지 않다.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여 행동을 하였지만 당시에는 ‘민요’라고 하여 그저 소란스럽게 했다고 적고 있다. 3.1운동도 일제가 기술할 때는 ‘소요사건’이었다. 비교하자면 오늘날 경찰이 시위대를 대하듯이 하는게 아니라 군대가 폭도들의 소요(또는 난동)를 진압하는 식이었다. 물론 우리 현대사에서는 극히 최근까지도 경찰도 비슷한 방식으로 진압했지만... 아무튼 백성들은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요구사항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시위를 벌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을 전체적으로는 ‘농민항쟁’이라고 규정짓더라도 이 과정의 구체적인 행동은 '소요'가 아닌 시위, 시위운동을 벌였다고 표현하는 것이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