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30일 찾아가서 사진도 찍고 살펴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글씨가 번졌지만 누군가 글자가 씌여진 부분을 문질러 놓아다고 봅니다. 일부 한자는 판독하기 어려워 다듬었습니다.
이 정려각을 소유한 문중에 관련 자료가 있을 겁니다.
2017년 8월 30일 사진.
<2017년 8월 30일 사진>
심하게 훼손되어 있어 보기가 흉하고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웠다.
<원문>
孝婦 學生 鄭秀棟妻 孺人全州李氏之門 崇禎后 再癸亥 三月 日 命下旌掲(숭정후 재계해년은 1743년(영조 19)이다.
孝婦李氏旌閭重刱記(刱은 創의 이체자)
按(문장 앞에서 살펴보건데의 뜻으로 쓰인다)英廟辛酉三月 忠原前縣監 金宇楫等 呈文 畧曰 本縣居故學生鄭秀棟妻 李氏孝行出人 往在己未 正月 其姑以疾不起 人疑染患 其舅出避家後 書堂亦臥席 況緜李母 曉頭躬侍藥餌 踵其夫往省 質明則歸拜几筵 涕淚滂沱 夕亦如之 夜深而歸 衰麻不脫 哭泣不絶 竭誠祭奠 極其精潔 別鑿一井 以爲朝夕祭奠之用 其舅嗜飮 常置美酒 雖嚴冬雪寒 必鷄鳴而起煖酒手進 未嘗間斷 其舅當遇 毒瘧三歲不瘳 轉輾危劇 絶食多日 李氏泣請所思 則曰 鰲湯在念 而時當氷合何處覓得 李氏泣請往叩剖氷得大鰲以接食味平居和顔愉色 先意養志 罔或少怠 其舅
鰥居累年 垢汚之衣 必自手澣 朝夕之供 必自親具 寒煖飢飽 不知其苦 丁卯其舅病臥 晝夜侍湯 不解衣裳 漸至危劇 氣絶逾時 其夫割指亦割指 分痛絶而復蘇 延壽數日 及其歿也 始終持喪之節 一如內難時 哀毁過度 漸綅骨立脈閔後 仍成難醫之疾病革之 日泣謂子弟曰 在家而未得盡事父母之誠 出家而未得盡 事舅姑道 是吾恨也 吾嘗賣田數畝收穫別置汝背 須體此意 精備祭需 而往參父母諱日 永久不替則 雖死無憾也云云 遂於英廟癸酉命旌 前此肅廟壬辰 呈巡撫御史李晩成蒙命復戶呈文則 遂菴權先生所術而事載輿覽 辛丑權增等呈御史 庚申趙綏甫等 上言陵幸時 辛酉二月 崔命述等呈本官 餘見上今 其耳孫文憲時憲等 不忘肯構 詢謀門中 輸誠重修 於戱 孝子不匱 永錫爾類 不其然乎 囑余 摭識顚末如右
崇禎後六甲申 十月 十六日
幼學 烏川 鄭雲澤記
<표점>
孝婦學生鄭秀棟妻孺人全州李氏之門。崇禎后再癸亥三月日,命下旌揭。
孝婦李氏旌閭重刱記
按,英廟辛酉三月,忠原前縣監金宇楫等呈文,略曰:
「本縣居故學生鄭秀棟妻李氏,孝行出人。往在己未正月,其姑以疾不起,人疑染患,其舅出避家後,書堂亦臥席。況緜李母,曉頭躬侍藥餌;踵其夫往省,質明則歸拜几筵,涕淚滂沱;夕亦如之,夜深而歸,衰麻不脫,哭泣不絕。
竭誠祭奠,極其精潔,別鑿一井,以為朝夕祭奠之用。其舅嗜飮,常置美酒;雖嚴冬雪寒,必雞鳴而起,煖酒手進,未嘗間斷。
其舅當遇毒瘧,三歲不瘳,轉輾危劇,絕食多日。李氏泣請所思,則曰:『鰲湯在念,而時當冰合,何處覓得?』李氏泣請,往叩剖冰,得大鰲,以接食味。
平居和顏愉色,先意養志,罔或少怠。其舅鰥居累年,垢汚之衣,必自手澣;朝夕之供,必自親具;寒煖飢飽,不知其苦。
丁卯,其舅病臥,晝夜侍湯,不解衣裳。漸至危劇,氣絕逾時,其夫割指,亦割指分痛,絕而復蘇,延壽數日。
及其歿也,始終持喪之節,一如內難時。哀毁過度,漸綅骨立。脈閔後,仍成難醫之疾病革之日,泣謂子弟曰:
『在家而未得盡事父母之誠;出家而未得盡事舅姑道,是吾恨也。吾嘗賣田數畝,收穫別置汝背。須體此意,精備祭需,而往參父母諱日,永久不替,則雖死無憾也。』
云云。遂於英廟癸酉命旌。
前此肅廟壬辰,呈巡撫御史李晩成,蒙命復戶。呈文則遂菴權先生所述,而事載輿覽。辛丑權增等呈御史,庚申趙綏甫等上言陵幸時,辛酉二月崔命述等呈本官,餘見上今。
其耳孫文憲、時憲等,不忘肯構,詢謀門中,輸誠重修。
於戲!孝子不匱,永錫爾類,不其然乎!
囑余摭識顚末如右。
崇禎後 六甲申 十月 十六日。
幼學 烏川 鄭雲澤記。
<번역>
효부 학생(學生) 정수동(鄭秀棟)의 아내 유인(孺人) 전주 이씨의 정려문.
숭정기원 후 두 번째 계해년(1863) 3월에 정려를 내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효부 이씨 정려 중창기
살펴보건대, 영조 신유년(1741) 3월 충원 전 현감 김우집 등이 올린 장계에 대략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본현에 살던 고 학생 정수동의 아내 이씨는 효행이 남달랐다.
기미년(1679) 정월에 시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사람들은 전염병으로 의심하였다. 이에 시아버지는 집을 피해 나가 있었고, 서당에서 병으로 누워 있었다.
이씨는 새벽마다 몸소 약을 달여 시어머니를 간호하고, 남편을 따라 문병하였다. 새벽이 밝으면 돌아와 시어머니의 영전에 절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밤늦게 돌아와서도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제사는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받들었고, 더욱 정결하게 모시기 위해 따로 우물을 파서 아침저녁 제사에 사용하였다.
시아버지는 술을 즐겼으므로 항상 좋은 술을 준비하였다. 한겨울 눈이 내리는 추운 날에도 닭이 울면 반드시 일어나 술을 데워 손수 올렸으며,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시아버지가 독한 학질을 앓아 3년 동안 낫지 않고 병세가 점점 위독해져 여러 날 음식을 들지 못하였다.
이씨가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울며 여쭈니, 시아버지가 '자라탕이 생각난다. 그러나 지금은 강이 얼어 있으니 어디에서 구하겠느냐.' 하였다.
이에 이씨는 눈물로 빌며 나가 얼음을 깨고 마침내 큰 자라를 구하여 끓여 드리니, 비로소 음식을 드실 수 있었다.
평소에는 언제나 온화한 얼굴빛으로 시아버지의 뜻을 미리 헤아려 봉양하였고,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시아버지가 홀아비로 지낸 지 여러 해였으므로 더러운 옷은 반드시 손수 빨았고, 아침저녁 음식도 모두 친히 마련하였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배부름도 돌보지 않아 자신의 고생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았다.
정묘년에 시아버지가 다시 병석에 눕자 밤낮으로 약시중을 들며 옷도 벗지 않았다. 병세가 점점 위독해져 숨이 끊어진 지 한참이 지나자 남편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렸고, 이씨 또한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니 다시 소생하여 며칠 더 수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상례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어머니 상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지켰다. 슬픔이 지나쳐 몸은 점차 여위어 뼈만 남게 되었고, 끝내 고치기 어려운 병이 되어 임종에 이르렀다.
그날 자녀들에게 눈물로 말하였다.
'친정에서는 부모를 섬기는 정성을 다하지 못하였고, 시집에 와서도 시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끝까지 다하지 못한 것이 나의 한이다.
내가 일찍이 논 몇 마지기를 팔아 그 수확을 따로 마련해 두었으니, 너희는 반드시 내 뜻을 이어 제수용품을 정성껏 준비하고, 부모님의 기일마다 빠짐없이 제사를 받들어라. 영원토록 끊이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
이와 같은 효행으로 마침내 영조 계유년(1753)에 정려가 내려졌다.
그보다 앞서 숙종 임진년에는 순무어사 이만성에게 장계를 올려 복호의 은전을 받았으며, 그 장계는 수암 권선생이 지은 것으로 『여람』에도 실려 있다. 신축년에는 권증 등이 어사에게 장계를 올렸고, 경신년에는 조수보 등이 임금의 능행 때 상언하였으며, 신유년 2월에는 최명술 등이 본관에 장계를 올렸으니, 그 나머지 내용은 앞에서 이미 보았다.
그 후손인 문헌과 시헌 등은 선조의 뜻을 잊지 않고 종중과 의논하여 정성을 모아 정려를 다시 수리하였다.
아, 효행은 다함이 없으면 그 복이 자손에게 길이 미친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러하지 아니한가.
이에 나에게 그 전말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므로 위와 같이 적는다.
숭정기원 후 여섯 번째 갑신년(1884) 10월 16일.
유학 오천(烏川) 정운택(鄭雲澤)이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