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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三年山城] 충북 보은
산줄기 : 한남금북탄부단맥
들머리 : 보은읍 성주리 보은사입구 삼년산성
위 치 충북 보은군 보은읍
높 이 ***m
충북 보은군 보은읍 북쪽 2km 지점의 오항산(烏項山)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사적 제235호. 면적 22만 6000m2.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이 산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성하였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하며, 신라는 이곳을 백제 공격을 위한 최전방기지로 삼았다.
성문(城門)은 보은읍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서쪽 수구(水口) 부근에 있다. 성벽은 주위의 능선을 따라 견고하고 웅대하게 구축하였는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13m에 달하고, 너비는 5∼8m이며, 전장(全長) 1,680m에 이른다. 성벽의 구축 방법은 내외면 모두 석축으로 수직에 가까운 벽면을 이루게 하였고, 전형적인 협축공법(夾築工法)을 채용하였는데, 특히 이 협축성벽은 토사(土砂)를 전혀 섞지 않고 내부까지 전체를 석축으로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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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이끼 앉은 바위에 스며 있는 영욕의 세월... 보은 삼년산성
태풍이 지나간 뒤의 대지는 푸르르다. 바람은 눅눅한 대지를 후비듯 지나가고 청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은 사뭇 멀고도 멀다. 보은하면 속리산이다. 속리산 자락 보은하면 예로부터 질 좋은 대추가 많이 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런 연유로 보은의 처녀들은 대추를 많이 먹어서 입이 대추씨 같이 뾰족하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하지만 그 처녀들은 세월 속에 대다수가 도시로 떠나버리고 밭두렁마다 대추나무만 여기저기 눈에 띌 따름이고 이젠 민요 속에만 대추와 처녀들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비야 비야 오지 마라 대추 꽃이 떨어지면 보은 청산 시악시들 시집 못 가 눈물난다'
보은읍을 벗어나자 속리산과 상주로 가는 길 너머로 야트막한 오정산이 보이고 그 산에 신라시대 축조된 우리나라 산성을 대표할 만한 석축산성인 삼년산성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 13년(470년)에 쌓았고 소지왕 8년(486년)에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아 경상도 일선(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일대)의 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개축하였다고 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민가 스무 가구쯤이 살아서 성안의 마을을 '삼년성', 그리고 성 밑의 마을 '성밑' 이라고 불렀다는데 민가는 성밖으로 옮겨가고 현재 성안에는 보은사라는 절이 한 있을 뿐이다.
차를 세우고 성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는 산성의 위용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켜켜이 무너진 것을 새로 쌓은 성의 구조는 물론이려니와 그 높고도 웅장한 산성을 쌓았을, 그들의 신음소리와 그들이 흘렸던 피와 땀이 가슴 서늘하게 적셔옴을 느꼈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 대지는 온통 푸르름의 세상, 바람은 이른 가을날 저녁처럼 불어오고 그 부는 바람결에 나뭇잎이 흔들린다.
가버리고 오지 않는 그 세월들이 문득 소스라치듯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세월의 이끼가 앉은 바위 위에서 우리들은 저마다의 상념에 젖어든다. 나는 불고 지나가는 그 바라결에서 지나간 역사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행정구역상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오정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산성인 삼년산성은 둘레가 1,680m에 이르고, 사적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정산의 능선을 따라서 문지 4개소, 옹성 7개소, 우물터 5개소와 수구지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삼국시대에는 보은 일대를 삼년군 또는 삼년산군으로 불렀기 때문에 성 이름이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 하나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동국여지승람>,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에 있다고 하여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 보은지역은 대전, 청주, 산주, 영동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영토를 다투던 접경지역이었다. 상주의 사벌성을 점령한 신라는 보은으로 나와 백제의 남진에 대비하여 이 성을 쌓았다는데, 그 무렵의 백제는 한성에 도읍을 두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개로왕이 죽임을 당한 후 백제가 웅진(공주)으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에도 삼년산성은 신라가 백제에 대비하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서북지방으로 진출하는데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였다. 즉 삼년군 지역의 확보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산성은 포곡형으로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정자(井字) 모양으로 쌓았다. 한켜는 가로쌓기, 한켜는 세로쌓기로 축조하였으므로 성벽이 견고하기 이를 데 없다. 동쪽과 서쪽의 성벽은 안으로 흙을 다져서 쌓았으며, 바깥쪽은 돌로 쌓는 대신 내탁외축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남족과 북쪽은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는 내외협축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문이 있던 자리는 동서남북의 네 곳에 있으나 지형상 동문과 서문을 많이 이용한 듯 하며, 그 너비는 대개 4.5m에 달한다.
1980년 7월22일 네시간 동안에 337mm가 내린 보은지방의 집중호우로 인하여 서문지 부분이 무너져 내리면서 유구가 드러나 발굴한 결과 성문에 사용했던 신방석과 주초석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성문은 신라 초기와 말기에 축조된 것으로 문지방석에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분석한 결과 중심거리가 1.66m에 달하는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1983년에 발굴 당시 삼국시대에서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토기편과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것으로 보아 이 성이 시대를 뛰어넘어 계속적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나당연합군의 합세로 백제를 무너뜨린 뒤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후에 백제 유민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당의 고종이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파견하였을 때 김춘추(태종무열왕)가 왕문도를 맞이하였던 곳이 이곳 삼년산성이었다.
그 뒤 또 하나 삼년산성에 크나 큰 족적을 남긴 사건이 김헌창의 난이었다. 통일신라 헌덕왕 14년(822년)에 웅천주(공주) 도독이었던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의 반란세력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면서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 이라 하였다. 지금의 충청, 전라, 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세력에게 장악된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이었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 의하여 반란의 중요거점인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한 달이 못되어 진압된 이 난은 작게는 원성왕계 귀족들과 태종무열왕계 귀족들간의 제2차 왕위 계승전이었고, 크게는 신라 말기에 계속된 크고 작은 왕위 계승 전들 중의 하나였다.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김주원은 785년에 선덕여왕이 죽자 무열왕계 왕족 중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한 김주원은 명주(지금의 강릉)지방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 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계속적으로 헌덕왕의 측근들로부터 견제를 받아 813년(헌덕왕 5년)에는 무진주(지금의 광주)의 도독, 다시 816년에는 청주(지금의 진주)의 도독이 되어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821년에는 옹천주도독으로 전보되자 그 이듬해에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함은 당시 김헌창이 반란의 명분으로 삼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귀족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왕위에 추대된 김주원이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했음을 공격하는 것은 원성왕의 즉위에 대한 합법성 및 당시의 원성왕계 왕실의 합법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거사에 대한 합리화인 동시에 과거 김주원을 지지하였던 귀족세력들에게 자지를 호소하는 명분 때문이다.
이 난은 무열왕계인 김주원 일파와 다른 방게인 김씨 왕족의 충돌이었던 만큼, 전국을 휩쓴 난으로 전개되었다. 반란세력은 순식간에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지금의 상주) 등 4개 주를 장악하고, 국원경(지금의 충주), 서원경(지금의 청주), 금관경(지금의 김해)이 사신(소경의 장관) 및 여러 군, 현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들을 순식간에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각 지역에서 반란에 참여한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주에서는 도독 향영이 추화군으로 비상탈출을 하였는데, 이같이 반란세력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은 피신하거나 탈출하여 중앙정부에 김헌창의 반란을 밀고하였다. 김헌창의 세력이 장악했던 지역은 신라 9개 주 가운데 4개주에 이르고 반란의 중심거점이 웅천주라는 지방에 위치하였지만, 반란에 동조하는 새력과 중앙왕살에 동조하는 양대세력으로 신라 전체가 양분되어 충돌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큼 대규모의 내란이었다.
중앙정부는 우선 원장 8명을 보내 왕도의 8방을 수비하게 하였다. 그 다음 반란군의 진압을 위하여 계속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결국 원성왕 직계후손들의 결속으로 김헌창의 난은 진압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시 토벌군이 출동하자 김헌창은 전략상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삼년산성 방면의 반란군이 도동현에서 장웅의 부대에게 격파되고, 이어 장웅의 부대와 합류한 위공, 제릉의 연합군에게 삼년산성이 함락당한 뒤 속리산에 배치된 병력까지도 섬멸당하였다. 그리고 왕경에 가깝게 깊숙이 위치하였던 성산(지금의 성주)의 반라군도 김균정 등이 이끄는 주력부대에게 패하고, 웅진에 진을 쳤던 반란군도 공격을 당해 10일 정도 버티다가 함락되었다. 김헌창의 난이 진압되자 반란세력에 대한 무장해제와 대규모의 처형이 잇따랐다.
반란세력의 병사로 동원되었던 귀족의 사민들이나 일반 양민들은 풀려났지만 김헌창은 참시되고, 이에 동조한 종족과 당여 239명은 사형에 처하였다. 그때 사형에 처해진 김헌창의 종족들은 반란에 직접 가담한 친척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경우, 김헌창의 형제와 자손과 근친도 그 뒤 그대로 살아남아 중앙에서 활약을 하였다. 김헌창의 반란이 신라 정게에 미쳤던 영향은 수많은 태종무열왕계 귀족들이 몰락한 것을 들 수 있다.
즉, 반란에 가담하였던 많은 귀족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그밖에도 사형은 면제되었지만 골품제에 있어 신분이 강등되거나 장원 등의 경제적 기반을 몰수당한 세력들도 상당히 있었다. 김헌창의 아들 범문은 이때 피신하여, 그로부터 3년 뒤인 825년에 고달산의 산적 수신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가지 못하고 진압되면서 태종무열왕계 후손들은 왕위계승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그뒤 삼년산성은 후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918년 후백제왕 견훤이 고려의 경계를 넘어 쳐들어오자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가 점거하고 있던 삼년산성을 치려다가 끝내 실패하고 청주로 물러난 적도 있다.
무너진 성벽을 따라 고개를 넘는다. 몇 송이 핀 붉은 패랭이꽃이 망초꽃에 뒤질세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산등성이를 넘어서자 너덜처럼 무너진 성터가 아마존 밀림 속에 묻혀있던 옛성이 발견되듯 눈이 부시게 펼쳐져 있다. 푸른 바위손들이 가파른 석벽에 잔디처럼 얹혀져 있는 성길은 온갖 굴곡진 세월의 무게에도 무너지지 않은 채 찾아온 길손들을 기다렸던 듯 서있다. 성벽아래 민가처럼 서있는 보은사를 쳐다만 보고 산성 길을 걷는다.
올라온 성벽 아래로 여름산들이 춤을 추듯 달려든다. 오지 않을 듯 했던 일행들이 흔전만전 열려있는 딸기를 따먹으면서 우리가 있는 곳까지 따라온다. 그렇지. 서두를 것도 없고 연연해할 것도 없지. 저마다의 의지대로 저마다의 길을 가다가 어느날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내려가는 길에 보은사로 가기로 한다.
보은사 못미쳐 삿갓 모양의 앙증맞게 생긴 부도 한기가 세워져 있다. 이쁘기도 하지.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돌이 아니고 시멘트로 만든 것이 아닌가. 이 성에 있었다던 아미지라는 연못에는 두들잎이 푸르고 부들대는 붉은 색으로 솟아있고 망초꽃은 온 성안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성 아랫마을 채마밭에선 장끼 까투리 한쌍이 종종거리며 걷는 다섯 마리의 새끼들을 데리고 여름 한낮 산책길에 나서고 있다.
삼년산성에서 지척인 외속리면 장내리에서 1893년 동학교도들 8만여 명이 모여서 보은집회를 열었었다. 해월 최시형을 비롯한 수많은 동학교도들을 구병산 자락에서 태어난 어윤중이 내려와 해산시켰던 보은 장내리는 푸르름으로 넘실대고 1919년에서 1921년 사이 당대 제일의 목수들이 지었던 선병국 가옥은 고시원과 도솔천이라는 찻집으로 변해 오고가는 길손들을 맞고 있었다.
*교통
서울 남부 서초동터미널에서 보은까지 06:30~18:30까지 30분 간격으로 요금은 9,200원이다. 보은에서 삼년산성은 가까워서 걸어갈 만하고 속리산 가는 시외버스를 타도 된다.
*잘 데와 먹을 데
보은 읍내로 가거나 산성 바로 아래쪽에 식당이 몇 군데 있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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