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함기석
밤사이 담을 넘어왔다
나팔꽃 일가족
아 어쩌나, 저 연분홍 밀입국자들
밤새 강을 헤엄쳐 온 걸까
제3국 거쳐 오늘 아침에 도착한
두근두근 불안한
어린 나팔꽃 심장 뛰는 소리
----함기석 시집 {모든 꽃은 예언이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단체와 국가와 민족들이 있다. 수많은 사상과 이론들이 있고, 수많은 종교와 신화와 직업들이 있다. 넓디 넓은 천하지만, 아무 곳에서나 둥지를 틀고 살 수가 없듯이, 모든 인간들은 그가 소속된 단체와 국가와 민족의 영역 속에서 그토록 처절하고 살벌한 생존경쟁을 통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의 근본법칙은 싸움이고, 이 싸움은 좀 더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종의 건강과 종의 번영에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 선의의 경쟁이든, 적대적 경쟁이든지간에, 싸움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약점을 다같이 극복하고 좀 더 강하고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싸움이 상호 인정과 상호 발전을 위한 스포츠와 오락처럼 진행된다면 좋겠지만, 그러나 무차별적인 생존경쟁을 위한 싸움은 우리 인간들을 더없이 잔인하고 비정하게 만든다.
‘너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것’, 이 싸움은 그러나 적과의 대등한 입장에서의 싸움일 수도 있지만, 더 넓은 영토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절대적 강자가 상대적 약자의 목을 비틀어 버리는 것처럼 반윤리적이고 파렴치한 싸움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과 ‘러시아 대 우크라이나의 싸움’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독일의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쟁탈전을 ‘스포츠 같은 전쟁’이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왜냐하면 ‘짐승 사냥이 아닌 인간 사냥이라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 ‘러시아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전쟁이 아닌 절대적 강자가 상대적 약자의 국토를 침략하고 무차별적인 약탈과 살육을 일삼는 전쟁이고, 따라서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는 그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 싸울수록 그들의 국토는 더욱더 피폐화되고 수천 년이 지나도록 씻을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기게 된다.
함기석 시인의 [나팔꽃]은 약소민족의 한을 노래한 시이며, ‘나라를 잃은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나팔꽃은 어떠한 안전장치와 보호장치도 없는 밀입국자들이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공포와 불안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밤사이 담을 넘어왔다”는 것은 국경수비대의 눈을 피해 담을 넘어왔다는 것을 뜻하고, “밤새 강을 헤엄쳐 온 걸까/ 제3국 거쳐 오늘 아침에 도착한”은 탈북한 난민이나 미국의 국경을 넘어온 제3세계의 난민들의 사생결단식의 고통의 가시밭길을 뜻한다. “아 어쩌나, 저 연분홍 밀입국자들”은 더없이 나약하고 헐벗은 난민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뜻하고, 그 결과, 함기석 시인의 마음이 더욱더 공포를 느끼고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공포란 구체적인 대상, 즉, 그들의 조국의 적과 그들이 밀입국한 국가의 사법질서에 맞닿아 있고, 불안이란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불안, 즉, 그들의 잠자리와 생계와 가난과 죽음에 맞닿아 있다.
“나팔꽃 일가족”, “아 어쩌나, 저 연분홍 밀입국자들”, “두근두근 불안한/ 어린 나팔꽃 심장 뛰는 소리” 등은 내가 읽은 시구들 중 가장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저절로 나오는 시구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산다는 것이 참으로 잔인하고 비정하며, 더없이 슬프고, 너무나도 눈물 겨웁다.
아아, 죽음이 여름날의 물놀이처럼 즐겁고 기쁘다면 이처럼 더럽고 치사하고 비참한 삶은 없을 것이다.
아아, 죽음이 여름날의 물놀이처럼 즐겁고 기쁘다면 더 이상 인간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