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에베소서 5장 15-20절
어르신들이 가르쳐준 지혜로운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상처 난 개는 쓰다듬지 마라.” 위로한답시고 만졌다가 물릴 수 있다는 겁니다. 본문 15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지혜는 성령 충만과 직접 연결됩니다. 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의 첫 번째를 지혜로 말합니다. 성경은 지혜를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잠언 9장 10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회복을 묵상했습니다. 월요일엔 내가 회복되어야 함을 묵상했고, 화요일엔 첫사랑, 수요일엔 거듭난 삶, 목요일엔 하나님의 뜻, 금요일엔 삶의 질서를 묵상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회복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새사람 되는 겁니다. 그건 성령 충만과 연결됩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새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다”고 했습니다. 안 변한다는 말일 겁니다. <동치미>에 출연했던 정신과 의사 양재진이 말하더군요. 결혼할 때 폭력적인 남자, 바람피우는 남자, 가치관이 다른 남자는 피하라고 합니다. 때리는 남자가 또 때리고, 외도하는 남자가 또 한답니다. 정신과 의사는 사람은 안 변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경은 사람은 변한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단서가 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정말 영접하면 새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돈만 알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돈을 내놓습니다. 자기 신념으로 성도를 가두던 사울이 예수님 때문에 갇히는 바울이 됩니다. 지금 교회는 사람은 변한다, 안 변한다 중 어디에 손을 드는 것 같습니까? 저는 둘 다에 손을 들겠습니다. 사람은 잘 안 변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반드시 변합니다.
그 변화의 원인을 본문 18절은 “성령 충만”이라고 말씀합니다. 변화가 없는 이유는 이겁니다. 만나면 변한다는 지식은 있으나 만남의 경험은 없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최대 걸림돌은 예수 안 믿는 중직자입니다. 특히 목사, 장로가 그렇습니다.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경찰청과 시장과 구청장의 책임이 얼마나 크던가요? 교회가 그렇습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반드시 빠집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어둠의 자식과 빛의 자식의 차이는 소속이 다릅니다. 빛의 자녀는 어디에 속했는지 보십시오. 8절은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똑같은 말을 18절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안 받고는 내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할지 아닐지는 내가 합니다. 조정민 목사는 <왜 성령인가?>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성령으로 충만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일입니다. 성령의 감정과 설득과 의지를 존중할 것인지 그리고 순종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하는 일입니다.” 이유는 성령님은 인격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문과 기도가 왜 다른지 아십니까? 주문은 내가 어떤 사람이냐와 상관없이 ‘열려라 참깨’만 맞으면 도둑에게도 문을 열어줍니다. 하지만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탐욕을 부리면 열리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은 말씀합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사람이 안 바뀌면 기도가 응답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부터 구해야 할까요? 성령의 충만입니다. 충만하면 변화됩니다. 이게 새사람입니다.
새사람은 삶이 달라집니다. 무엇이 달라지는지 보십시오. 16절입니다. 세월을 아낍니다. 여기서 ‘아끼라’는 단어는 헬라어 ‘엑사고라조’입니다. 건져 올린다는 의미죠. 시간을 건져 올린다는 건 두 가지 의미입니다. 게으르지 않다, 의미 있게 산다입니다. 이것이 성령에 충만한 증거입니다. 게으름을 경계하십시오.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시간을 건져 올리십시오. 성령님이 그걸 원하십니다.
두 번째는 17절입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분별하는 이유는 기준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19절은 삶이 찬송이 됩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라고 했습니다. 입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말일까요? 마음이 기쁘면 삶이 춤춘다는 겁니다. 20절에서는 감사합니다. 언제 감사가 저절로 나올까요? 인정할 때입니다.
이번 이태원 참사 때 같은 현장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주변 상인이 자기 팔을 끌어당겨서 가게 안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막을 수 있었던 사고를 당하면 원망이 나오지만, 내가 죽을 상황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끌어준 손에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감사하라는 건 뭔가를 인정하라는 겁니다. 바로 네가 죽어갈 때 예수님이 너를 살리셨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이 생길 때 저절로 나옵니다.
이제 21절을 보십시오. 피차 복종하라고 합니다. 섬김을 말하는 겁니다. 성령 충만의 극치가 이겁니다. 꼭 나무와 같습니다. 먼저 나온 나뭇가지는 반드시 아래로 갑니다. 거기서 새로 나온 가지를 받쳐줍니다. 새로 나온 가지일수록 위로 올라갑니다. 하지만 그 가지도 또 다른 가지가 올라오면 내려갑니다. 이게 건강한 나무입니다. 성경은 그걸 가리켜 피차 복종이라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에베소 교회에 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게 바로 첫사랑입니다. 어느 순간 사랑이 희미해졌습니다. 그때 복종이 없어졌습니다.
진짜 행복한 교회는 건강한 나무와 같은 현상이 있습니다. 먼저 믿은 성도가 당연히 아래로 가고, 이제 믿은 성도가 올라갑니다. 이게 힘들까요? 쉬울까요? 대답이 둘로 나뉠 겁니다. 힘든 이유는 내 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갑’이 누군지 아십니까? 믿음이 약할수록 ‘갑’이 됩니다. 누가 ‘을’일까요?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을’입니다.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갑 중의 갑이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를 아십니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도 아실 겁니다. 사랑입니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에서 갑인가요? 을인가요? 이 질문은 나는 성령에 충만한가, 아집으로 충만한가를 묻는 겁니다. 우리 성령 충만을 정확하게 압시다. 성령에 충만하면 신비한 능력만 가지는 게 아닙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그의 인격이 변화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해집니다. 게으르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를 압니다. 삶이 춤을 춥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갑니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 변화의 열매가 우리에게 회복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