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7일 토요일
“야!. 오늘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축제날이다. 모두 생맥주 마시러 가자.”
학교 교문은 철옹성처럼 닫히고, 장갑차들이 학교를 둘러싸고 있었다. 누구도 학교에 들어갈 엄두를 못 냈다. 그때, 누군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오늘은 경축일이다. 모두 생맥주 마시러 가자.”
일단의 무리들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나도 덩달아 홀린 듯 쫓아갔다. 신촌역 주변의 생맥주집은 이미 초만원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생맥주잔들이 돌았다. 대낮부터 빈속에 마신 맥주 몇 잔에 취기가 돌았다. 정외과 이극찬 교수님이 강의실 칠판에 “C'est un coup d' Etat? (쿠데타가 일어났다) 라고 써 놨다는 믿기 힘든 루머가 학생들 사이에 난무했다.
대체 하룻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가슴이 쿵쾅거렸다. 분명한 것은 대학생들이 그토록 목숨 걸고 반대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 1979년 10월27일 토요일, 필자가 대학 3학년 때의 생생한 기억이다. 그날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전해진 전날(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학교 앞으로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대다수 일반 국민들의 충격과 애도 분위기와는 달리 대학생들은, 적어도 27일만큼은, ‘박정희의 죽음’을 한치의 의심 없이 대한민국의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그땐 그랬다.
선후배, 친구들이 모두들 즐거워하니 분명 기쁜 날인 것 같긴 한데, 상황 정리를 할 수가 없었다. 고 육영수여사의 서거 때(74년 8월 15일, 당시 필자는 여고 1년생)와는 또 다른 불안감이 엄습했다. 생각해보라. 필자가 59년생이니 태어난 이후 기억이 있을 때부터 청년기인 대학 3학년 때까지 “대통령=박정희”라는 등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8년이란 장기집권은 박정희 대통령 외에 다른 대통령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상상력조차 감히 용납치 않았다. 그런데 견고한 벽과 같던 그가 갑자기 사망했다니. 학교 주변은 온통 축제 분위기인데 홀로 얼떨떨했다. 그날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대학 문은 오랫동안 굳게 닫혀졌다. 다니던 학교에 폐교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끝도 모를 민주화 투쟁들….
그렇게 허겁지겁 박정희라는 인물을 잊었다. 용기 없는 소심한 대학생이었던 필자는, 대학 시절 데모로 잡혀간 적도 없어 그의 죽음에 왈가왈부할 만큼 지분도 없었지만, 이후 이어진 질곡의 정치사 또한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로 숨가쁘게 몰아쳐, 차분히 과거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이제 30년이 지나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돌아본다. 역사가가 아니니 그를 역사적으로 평가할 입장도 되지 못하고, 한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 사적인 인연 또한 있을 수 없으나,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대한민국 곳곳에 산재해 있으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를 회고해 본다.
가난한 조국의 설움을 외국에서 깨닫다
▲60년대 청계천의 가난. 1965년 8월 17일 복개공사가 진행중인 청계천 변의 판자집들. ⓒ 국가기록원
1977년 여름, 대학 1학년이었던 필자는 스페인의 발렌시아에 있는 발렌시아 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잠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저개발국가의 선진국 견학 프로그램에 선발된 덕이었다. 서울의 4대문 밖도 나가본 적이 없던 서울 촌뜨기가 비행기를 다섯 차례나 갈아타고 스페인 남쪽 끝에 위치한 발렌시아로 날아갔다. 당시 스페인은 독재자인 프란시스 프랑코 총통이 서거한지 2년이 지났고, 후앙 카를로스 국왕이 취임한 후 민주화 요구가 봇물처럼 터지는 정치적 변혁기였다. 스페인은 전 지역이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 하에 놓여 있었다. 필자는 파리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거쳐 마드리드를 통해 발렌시아로 들어갔다. 스페인의 모든 공항에서는 기관단총으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검열을 하고 있었다. 공항 감시대에서 검열을 받을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만18세의 겁먹은 동양 여자애를 그들은 위험 인물 취조하듯 뒤져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발렌시아에서 필자가 본 것은 뜻밖에도 ‘너무도 잘 사는 스페인’이었다.
당시 스페인의 부(富)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1977년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빨래비누로 머리감고, 샴푸가 뭔지도 모를 때, 필자가 기거한 하숙집의 아주머니는 욕조 가득 거품 목욕제를 풀어주며 목욕을 권했다. 서울만 해도 인구의 3분의 1~5분의 1에 해당하는 100만~300만명이 판자촌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스페인의 백화점들은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고, 가는 곳마다 먹을거리가 풍성했다. 그때 우리나라의 1인당 GNP는 1,000불이 못 되었고, 스페인은 4,500불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나? 만18세 어린 계집애는, 우리가 못사는 것이 너무도 서러웠고, ‘잘사는 대한민국’이 가슴에 맺혔다. 동양 어느 구석에 붙어 있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가난한 나라’, Sud de Coree에서 온 깡마른 여학생이라는 존재감이 너무도 싫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안된 내 나라 사람들이 너무도 눈물겨웠다.
그때 수도 없이 결심했다. “귀국하면 대한민국이 잘사는 나라가 되도록 하기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가난을 딛고 ‘기술입국’에 기여한 젊은이들. 박 대통령이 1967년 8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16차 국제기능올림픽에 처녀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귀국한 선수들을 치하하고 있다. ⓒ 대한뉴스 화면 캡처
“완전히 역전됐다, 모두 박정희 덕이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2003년, 25년여 만에 다시 찾은 스페인은 잠자는 노국(老國)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대한민국의 경이로운 경제발전에 부러움을 표했다.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교역 10대 대국으로 우뚝 선 것이다. 필자는 위상에 걸맞는 대접을 받았다. 속으로 크게 외쳤다.
“완전히 역전됐다”고. 그리고 인정했다. “모두 박정희 덕이다”라고. 그들도 그렇게 말했다.
“청계천 다리 밑에 사는 사람도 거기서 나와 보통의 집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말했다고 한다. 과학자 김완희 전 컬럼비아대 교수가 중앙일보(2009년 6월 3일자)와의 인터뷰에서 “가까이에서 본 박 전 대통령의 최고 통치권자로서의 꿈과 희망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김 박사는 1967~79년 한국정부 요청으로 ‘전자공업 육성 진흥책’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제3,4차 전자공업 육성 5개년 계획’ 작성을 보조한 인물이다. 그는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13년(67년부터 서거 직전까지)에 걸쳐 ‘전자공업’이라는 주제로 103통의 친필 서신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고 증언했다. 첫째는 박 전 대통령이 60~70년대 정부나 경제계에서도 거의 관심이 없었던 전자공업에 일찍 눈을 떴다는 점이고, 둘째는 전문가나 기업인의 자문과 조언을 들으면 곧바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이 기승을 떨치던 가운데에서도 전자공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며, 그의 서거로 전자공업 발전이 4~5년 더디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외화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수출 드라이브정책을 강도있게 추진했고, 그 중심축에 중화학공업과 전자공업을 두고 박정희 특유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철학으로 뚝심 있게 밀어붙인 것이다.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탁월한 혜안과 리더십이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끈 것이다. 그는 한국경제의 틀을 디자인했다.
장하준 캠브리지 경제학과 교수의 중앙일보와의 인터뷰(2006년 8월 23일)―“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독재와 경제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1960년대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아프리카 가나의 절반 수준도 안되었습니다. 유치산업보호 및 국내자본의 국외유출 반대 등 박 대통령의 한국경제 공헌에 대한 평가가 너무 가볍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는 박 대통령에 대한 공정한 평가였다고 본다.
서민을 가난에서 탈출시킨 유일한 대통령 박정희
도대체 박 대통령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1963년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의 마지막 쪽에 다음과 같이 썼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이는 결국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길, 병원에서 시신을 만진 의사는 “시계는 허름한 세이코이고 넥타이핀은 도금이 벗겨지고 혁대는 해져 있어 꿈에도 대통령이라고 생각 못했다”고 증언했다(조갑제 글, 〈박정희〉에서 인용). 결국 박정희를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화두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가난 구제’였다.
혁명가였던 박 전 대통령은 1960년대 대한민국의 ‘절대 가난’을 고민했다. 빈농의 아들 박정희, 교사 박정희, 군인 박정희는 민간 정권의 무능과 부패, 혼란을 보면서 혁명을 꿈꿨다. 그리고 목숨 건 쿠데타에 성공했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경제성장이 가장 중요하고, 자유와 인권은 잠시 유보한다는 이른바 ‘한국식 민주주의’를 선언했고, 모질게 ‘가난 구제’를 추구했다.
마침내 그는 산화했지만, 대한민국은 끼니 걱정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이후의 모든 대통령은 박정희를 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코 그를 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역대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를 조사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는 것이 그 증거다. 모든 대통령이 ‘서민들이 잘살게 되는 나라’를 꿈꾸었지만, 진짜 서민을 가난으로부터 탈출시킨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뿐이다. 그는 ‘서민적인 대통령이었고, 서민을 위한 대통령’이었다.
이우영 박사는 그의 박사 논문(‘박정희의 통치이념과 지식사회학적 연구’, 1991, 연세대)에서 박 전 대통령의 통치이념을 민족주의와 성장주의, 집권주의(集權主義)로 규정했다. 이 박사에 따르면, 그의 ‘민족주의’는 대외의존을 통해서라도 국익증진을 추구하며 민족주의를 달성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실리적 민족주의’였고, ‘성장주의’는 분배와 복지를 유보하고라도 불균형 성장과 대외지향적 성장정책을 수행하여 자립경제를 이룩코자 했다는 점에서 ‘성장제일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집권주의’는 고도의 권력집중을 기반으로 궁극적으로는 사회 구성원 전부의 이익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권력의 분권화나 국민 개인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관심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통치이념은 한국사회가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자본주의화와 산업화를 진척시키는데 크게 기여했고, 오늘의 대한민국의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고, 중산층의 성장으로 가능하다는 것까지 증명했다.
5.16은 전세계적 5대 구국혁명 중 하나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붉은악마’의 응원 장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은 우리의 경제성장이 가져다준 값진 결실이었다. ⓒ 자료 사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외국의 평가를 보자.
19~20세기에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결과적으로 나라를 구해낸 혁명이 5개 있다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김진의 시시각각, 중앙일보, 2009년 4월 5일자). 일본의 메이지 유신, 터키의 케말 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그리고 대한민국의 박정희다. 그 중에서도 ‘기적’으로 분류되는 경제성장은 ‘대한민국’뿐이다.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신생독립국 중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국가다.
지금 아시아 각국에선 박정희 열풍이 불고 있고, 각 나라 수반들은 앞 다퉈 박정희식 성장모델과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박정희’라고 불리는 훈센 총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담(2009년 6월1,2일)에 참석해서 “한국은 전쟁 후 빈손으로 일어난 나라이고, 캄보디아 역시 내전 후 재건을 위해 노력중”이라며 “캄보디아 경제발전을 위해 여러 사례를 연구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델을 많이 따르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중국도 박정희 모델을 벤치마킹한 많은 연구물과 실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 요즘 대학가에는 아시아 각국은 물론 서방국가에서도 대한민국을 배우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와 있다. 필자의 대학 시절엔 상상도 못했던 풍경이다.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치지도자들에게 바란다
이제 우리는 ‘Beyond 박정희’를 이뤄야 한다. 기성세대들은 20~30년 후의 대한민국, 30~50년 후의 국제사회의 변화를 내다보고, 젊은이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미래의 신성장 동력을 찾아내 지속가능한 성장모델로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을 이어나가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가치 또한 중요하다. 국민투표로 정권이 교체된 것이 1987년부터다.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의 틀을 갖춘 연륜이 고작 22년인 것이다. 북한의 폭력적인 세습정권은 3대째를 추구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가 핵을 만들고 로켓을 쏘아 올려 세계를 공분에 떨게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은 복잡한 나라다.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정치 지도자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두고 더욱 더 처절히 고뇌하고 고민해야 한다. 이들에게 부탁한다. 박정희를 극복하려면, 박정희의 역사적 정통성을 인정하고, 통합된 한민족의 미래만을 위해 한목숨 다 바치라고. 소명의식을 가진 정치인에게 개인의 삶이란 없다고….
필자 약력
1959년 서울생.
연세대 졸, 서강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연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논문학기 중
(전)중앙일보 전문기자 및 전문위원
(전)청주대 정치사회학부 겸임교수
(현)컬럼버스 홀딩스 그룹 서울사무소 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