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상북도 왕건과 견훤의 싸움터였던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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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03:20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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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과 견훤의 싸움터였던 안동
또한 송현동 향전다리 동쪽에 있는 말구리재는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싸울 때 견훤의 말이 뒹굴어서 크게 패하였던 곳이라 하고, 무나무골 북쪽에 있는 물개골에선 왕건과 견훤이 싸울 때 견훤의 군사가 몰살당했다고 한다. 솔티고개 동쪽에 있는 마을인 합전다리에서도 고려와 후백제의 큰 싸움이 있었다. 930년 1월 21일 태조 왕건은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후백제 견훤은 석산(石山)에 진을 쳤다. 격전 끝에 왕건이 동차(動車)를 타고 이곳에서 견훤을 크게 이겨 후백제 군사 8천여 명을 죽이고 시랑(侍郞) 김락을 잡아서 고창군(古昌郡, 안동)을 평정하였다. 이로 인해 매년 정월 보름날에 안동 지방에서는 동차놀이를 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안동 지방에서 유행하는 놀이로는 차전놀이와 놋다리놀이 그리고 석전놀이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과 열엿새에 부내에 사는 사람들이 부의 중앙에 있는 내를 경계선으로 하여 좌우편으로 패를 나누어 돌을 던져서 서로 싸워 승부를 결정한다. 정오년 왜적을 토벌할 때에 석전 잘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선봉으로 삼았더니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안동에서 북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태백산이 있고 그 산 밑에 지금은 봉화군에 편입된 내성(奈城), 춘양(春陽), 소천(召川), 재산(才山) 네 마을이 있다. 모두 깊은 두메에 있어 경상북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궁벽한 곳으로, 특히 봉화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중 재정 자립도가 가장 약한 군 가운데 하나다. 조선 영조 35년(1759)의 호적대장에 기록된 가옥 수는 1,106호고, 인구는 5,798명이었다. 그중 남자는 2,435명이고, 여자는 3,363명이었다.
한수정
태백산 밑에 자리한 봉화는 경상북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궁벽한 곳으로,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중 재정 자립도가 가장 약한 군 가운데 하나다.
고구려 때의 이름이 고사마현(古斯馬縣)이고 신라 경덕왕 때는 옥마(玉馬)였으며, 고려 때 지금의 이름을 얻은 봉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 「풍속」조에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며, 누에치기, 뽕나무 가꾸기에 힘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깊은 산골로 잣과 송이버섯, 석이와 석청이 유명한 봉화에 철길이 놓이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말인 1944년이었다. 납과 아연 그리고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백중석(白重石)이 나오는 이곳에 영주에서 춘양까지 철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가 경상북도 북부지방 사람들을 강제 동원하여 놓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봉화까지 뚫렸다.
닭실마을 전경
봉화 유곡리에 있는 닭실마을은 안동 권씨의 집성촌이다. ‘닭실’은 금빛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청암정
권벌은 1526년(중종 21) 이곳 닭실마을에 청암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연못 가운데 놓인 너럭바위 위에 정자를 세워 거북이 위에 정자가 있는 형상이다.
광복 후 중단 상태에 있다가 1949년에 다시 춘양까지 잇는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두 번이나 철길 공사가 중단되자 봉화 지방에서는 “억지로 춘양까지 철길을 놓으려고 들면 변란이 일어난다”라고 하여 ‘억지 춘양’이라는 유행어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다 1953년에 춘양을 거쳐 삼척 탄전 지대까지 잇는 공사가 벌어져 2년 만에 완공되었다. 영주에서 철암까지 이어져 영암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철길은 광복 후에 우리 기술로 처음 놓은 철길이었다.
철길이 뚫림에 따라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외진 지방의 물산 집산지였던 봉화는 그 세력을 교통의 요지가 된 영주에 빼앗기고 말았다. 물자도, 상권도, 사람도 그리고 1962년에는 세무서도 영주로 옮겨졌다. 군청 소재지인 봉화면이 읍이 된 것도 1979년에 군청 소재지를 모두 읍으로 승격시킨다는 국가 방침 덕분이었다. 철길이 뚫렸을 무렵만 해도 이 지방에서는 봉화의 옛 이름을 따서 여전히 ‘내성장’으로 통하는 봉화장에 모이는 장사꾼이 5백 명을 넘었으나, 1980년대에는 백 명쯤이 모여 한적한 장이 서다가 지금은 겨우 장터의 명목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건과 견훤의 싸움터였던 안동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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