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면 들을 필요가 있을지도 모를 수사 경험담
지금도 내가 검사로서 처음 부검(剖檢) 지휘를 나갔던 때를 생각하면 머리끝이 바싹 설 정도로 긴장된다. 교도소 외진 한구석에 임시로 마련한 을씨년스러운 부검실, 생전 처음 보는 냉동 처리된 시체, 부검의가 메스로 복부를 가르자 얼지 않은 내장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 두개골 절단 시 전기톱이 내는 기분 나쁜 쇳소리와 뼈와 살이 타는 역한 냄새…. 나는 몇 번이고 구역질을 참아내야 했고, 그날 이후 3일간 밤마다 피투성이가 되고 두개골이 벗겨진 그 시신의 모습이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정말 힘든 통과의례였다. 나보고 대신 현장에 가서 지휘해 보라고 시킨 선배 검사가 밉기도 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일종의 깨달음이랄까…. 검시와 부검, 검찰 업무 중에서 중요한 업무이긴 한데 시체를 봐야 하는 일이라 검사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걸 내가 제대로 한번 해 보자. 다른 검사들이 싫어하는 그런 일을 내가 나서서 함으로써 내 존재감을 드러내 보자는 욕심 같은 것이 생겼다. 그래서 이후 자청해서 검시나 부검을 많이 나갔고, 법의학 책과 관련 논문들을 밑줄 쳐 가며 정독했다. 그리고 이렇게 사인을 밝히는 일을 자꾸 하다 보니 살인 사건도 욕심이 생겨 차장검사님을 졸라 초임 검사지만 골치 아픈 살인 사건도 몇 건 해 보았다.
5개월쯤 지나서 내 전담이 뜻밖에도 ‘보건’으로 바뀌었다. 전담을 맡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건’은 의료·약품·식품·공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것이었고 대개 중참 이상이 맡아왔었는데, 아마도 내가 검시나 부검을 하고 작성해 올린 보고서를 보신 차장검사님이 내가 의학지식이 제법 있는 것으로 알고 보건 전담을 맡겼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 보건 전담을 맡는 바람에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들어가 전문적으로 공부를 한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나는 보건의료 전문이라기보다는 검시와 부검, 그리고 살인 사건 수사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아무튼 그 이후 계속 검시와 부검을 자주 나가고 그 경험을 토대로 사례 발표와 논문 작성도 하는 바람에 나는 어느새 시체 하나는 정확히 보는 검사라는 평판을 얻게 됐다. 그 덕분에 연세대생 이한열 군 최루탄 사망 사건, 서울대 대학원생 한국원 씨 권총 유탄 사망 사건, 오대양 집단 변사 사건(재수사) 등 그 사인을 꼭 밝혀야 할 중요사건을 많이 맡게 됐는데, 이쯤 되면 나름 검찰에 꼭 필요한 검사가 된 셈이니 그때 현장에 대신 부검 지휘를 나가라고 한 선배 검사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나는 살인 사건에 남달리 ‘애정’을 갖고 있는 편이다. 초임 검사 때부터 배당받은 사건의 죄명이 ‘살인’이면 괜히 좀 흥분되기도 했다. 다른 청으로 전근 가서도 강력 전담을 자청해서 맡기도 했는데, 부산지검 근무 시에는 근 2년간 강력 전담을 맡으면서 각 경찰서 수사과장(그때는 수사과장·형사과장으로 분화되지 않았음)에게 살인 사건 발생 시 부산시경에 보고하는 것과 동시에 나한테도 보고하라고 해서 한밤중이나 꼭두새벽에 내가 직접 포니2를 몰고 현장에 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검사가 직접 강력 사건 수사에 나서면 100% 후회한다는 속설이 있지만, 나는 법무연수원 등에서 후배 검사들에게 특강을 할 때 강력 사건은 검사가 직접 현장에 나가 수사에 임하고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춰 정확히 지휘해야만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이 제대로 확립할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내가 지청장으로 부임할 때 제일 먼저 챙겼던 것도 관할 각 경찰서 별 살인 사건 미제 현황이었다.
자, 이제 진짜 수사 경험담을 이야기해 보자.
사람의 목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그 소중한 것은 국가가, 치안과 범죄자 처벌을 담당하는 경찰과 검찰이 책임지고 보호해야 하고, 그것을 불의에 잃었을 때에는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가해자를 가려내어 철저히 사후조치를 해야 한다. 그런 일을 하는 것 중 중요한 것이 수사인데 실제 상황은 반드시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아주 오래 전 부산에서의 일이다. 연말의 어느 추운 날 달동네에 사는 부부가 함께 자다가 아침에 부인은 정신을 잃고 일어나지 못한다. 다행히 남편은 괜찮아 리어카에 부인을 싣고 급히 근처의 병원으로 데려갔으나 부인은 이미 사망한 상태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경찰에서도 경찰 공의(公醫)의 ‘일산화탄소 중독’이라는 시체검안서를 첨부하여 변사사건 발생 보고를 해 왔는데 나는 바로 의심이 들었다. 한 방에서 중년 부부가 함께 잠을 잤는데 여자는 죽고 남자는 말짱하여 리어카를 끌고 병원까지 갔었다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경찰은 단순 변사 사건으로 보고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한두 가지 의문점도 더 있어 보여 부검하여 사인을 밝히라고 지휘를 했다.
그랬더니 담당 경찰관이 직접 나를 찾아와 유족들이 두벌죽음은 절대 안 된다면서 부검을 강하게 반대하니 다른 방법이 없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지휘 내용에 토를 다는 것에 다소 기분이 언짢았지만 경찰의 입장을 고려하여 시신의 피를 채취해서 혈중 일산화탄소 헤모글로빈(COHb) 농도를 측정한 다음 검토하자고 하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부산에는 대학병원을 다 뒤져도 COHb 측정을 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보고를 해 온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의 아는 곳에 급히 연락할까 하다가 개인적으로 법의학에 관심 있다는 한 의사에게 전화를 해 보니 자기에게 마침 그 검사 키트가 있다고 하기에 그곳에서 검사를 하도록 조치했다. 그 검사 결과는 내 예상대로였다. 3회나 했는데 모두 CO가 0%로 나왔다. 그래서 원래 지휘한 대로 부검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웬걸, 이제는 유족이라는 사람들이 10여 명 가까이 검사실로 몰려와 왜 억울하게 죽은 사람 한 번 더 죽이려고 하느냐고 큰소리를 치며 소란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이 아닌 내 방의 수사관한테 호통을 쳤다. “아니, 뭐 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들 주민등록증 다 압수하세요! 이건 살인 사건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이고 그 혐의를 벗겨주려고 부검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 부검을 못하게 하려는 사람은 바로 범인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내가 큰소리고 수사관을 야단치니까 거기 있던 유족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꼭 그런 것은 아니고요….” 하는 식으로 꼬리를 내리며 나가버렸다.
그 부인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사인은 ‘외상성 지주막하 출혈’이었고, 이를 토대로 수사하여 그 남편은 신발공장에서 야근 후 늦게 귀가한 부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기자 말싸움 끝에 머리를 장롱 모서리에 짓이겨 죽게 만든 혐의로 구속되었다.
나는 이 사건에서 경찰이 처음부터 피해자의 남편과 짜고 거짓으로 꾸며댄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내 방에 와서 호통을 쳤던 유족 중에는 피해자의 친정 오빠라는 사람도 있었고, 경찰 공의가 그런 조작에 가담할 리는 없다고 본다. 담당 경찰관이 경험과 전문지식이 부족한데다가 경찰 공의라는 사람의 무성의가 더해져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사인이 ‘외상성’ 지주막하출혈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여성이어서 머리카락이 길더라도 검시요령에 따라 두피 외관을 잘 관찰했더라면 외부의 상흔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 사람의 죽음이 너무나 소홀히 취급되고 있음을 절감하고 매·화장신고서에 첨부된 18,000여 건의 사망진단서와 시체검안서를 확보하여 전수 정밀 검토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의사가 직접 진료하거나 검안하지도 않고 마구 발급한 것으로 보이는 사망진단서와 시체검안서가 너무나 많이 보였다. 병원이 금정구에 있는 의사가 시체를 검안하러 영도구까지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며, 사인을 무조건 ‘뇌졸중’으로만 써주는 의사도 있고, ‘노환’이라고 기재한 한의사도 있었다. 40여 명의 환자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심장판막증’으로 사망했다고 사망진단서를 작성한 의사에 대하여는 정말 경악스러웠다. 모두 다 입건할 수는 없어서 22명만 입건하고 4명을 구속했다.
경찰이 조작을 하지는 않겠지만 의심이 가는 경우도 가끔 있다. 역시 오래 전 내가 수사지휘 당직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밤 9시 반경 경찰에서 변사사건 발생 보고가 올라왔다(굳이 경찰서를 밝히지는 않겠다). 40대 초반의 여인이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것으로 보여 시체를 유족에 인도하겠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망 장소가 유흥업소 남자 종업원의 자취방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다소 의문스럽고 마침 발생 장소가 내 숙소로 가는 길목에 있기에 내가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지휘하겠다고 했다. 현장에 당도하니 수사과장이 먼저 와서 안내를 하는데 방에 들어서자 시체가 막 부패하기 시작할 때 나는 그런 역한 냄새가 그 안에 가득했다. 농약 용기는 있냐고 했더니 지금 찾고 있다고 했다. ‘이 냄새를 농약 냄새로 보았나?’ 하면서 시신의 상태를 살피는데 목덜미에 손으로 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액흔(扼痕) 같은 것이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이불 같은 걸 덮고 누른 것 같았다. 나는 대뜸 “이거 목 졸라 죽였구만!” 했다. 그러자 수사과장이 “검사님이 직접 나오신다고 해서 제가 와서 현장을 점검하다 보니 이런 게 나왔습니다.” 하며 쪽지 하나를 내미는데 탁상 달력 뒷장 같은 데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하고 갈겨 쓴 것이었다.
순간 나는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누가 봐도 살인 사건이다. 그러나 일단 단순 변사사건으로 보고하고 처리한다. 그 뒤 담당 경찰관이 계속 수사하여 범인을 추적하되 못 잡아도 애초에 살인 사건으로 보고가 안 된 것이니 미제 사건으로 잡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운 좋게 범인을 잡으면 검사까지 단순 변사로 보아 시체를 유족에게 인도하라고 한 사건을 노련한 형사의 ‘후각’이 은밀하게 계속 수사를 하여 범인을 검거하는 쾌거를 이뤘다고 떠들어댈 것이다. 이 여인을 살해한 유흥업소 종업원은 5일 후 멀리 떨어진 외지의 한 여관방에서 줄넘기 줄에 목매단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이 잘못한 일만 이야기해서 좀 미안하다. 그러나 한 사례만 더 말하겠다.
역시 오래 전 내가 서울지검으로 전근 와서 미제 강력 사건을 챙기는데 모 경찰서에서 모자 살인 사건 하나가 해결이 안 되어 애를 먹고 있다고 보고했다(이 역시 굳이 경찰서를 밝히지는 않겠다). 젊은 부인과 백일 갓 지난 남자 아기가 살해된 사건이고 모종의 이유로 상부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100일이 다 되도록 범인에 대한 윤곽도 잡히지 않은 상태라 서장이 문책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형사계장이 직접 두툼한 수사기록을 가지고 내 방으로 왔다. 이른바 ‘송치품신’을 받겠다는 것이다. 5인조 금은방 전문 털이범 일당을 검거했는데 이놈들이 모자살인 사건의 범인이기도 하니 ‘강도살인’죄로 송치할 수 있게 ‘가’에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 자백을 하더냐고 물으니까 사람 죽였다는 것을 누가 자백하겠냐며, 이미 특수절도 등 죄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있는 애들이니까 일단 송치받으셨다가 혐의 인정 안 되면 무혐의 결정하시면 되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경찰은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만 하면 그 사건은 해결된 것으로 보는 모양이다). 나는 말도 안 된다며 ‘부’에 도장 찍겠다고 했더니 형사계장이 이 서류는 아직 사건과에 정식 접수시킨 게 아니니 그냥 도로 가져가겠다고 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현장에 가 보기로 했다. 현장은 시체들만 치웠을 뿐 나머지는 그때까지 잘 보전되어 있었다. 나는 혹시나 경찰이 빠뜨린 건 없을까 하고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재래식 한옥의 방이라 침대가 없고 한가운데에 경대가 하나 있는데 거울 모서리에 밝은 표정으로 웃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부부의 사진이 보였다. 날짜와 ‘백일 기념’이라는 글자가 들어있었다. 그 경대 앞에 방석이 하나 눈에 띄었는데, 눌린 자국으로 보아 누군가 거기 앉아 꽤 오래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라고 뒤늦게 현장만 보고 바로 뭐를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기에 나는 그곳을 나오면서 담당 반장에게 그 당시 인기리에 방영되던 형사 콜롬보 흉내를 내며 “이건 가장 범인이 아닐 거 같은 사람이 범인이겠는데….” 했다. 그랬더니 반장이 “가장 범인이 아닌 것 같은 사람은 피해자의 남편입니다. 예비군 동원훈련 갔었거든요.” 했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긴 하지만 바로 내 의견을 부정당한 듯해서 다소 기분이 상해서 “동원훈련 갔었다고 부대에서 못 나오라는 법은 없는 거요. 같은 내부반에 있었던 사람들 조사는 했습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반장이 필요 없을 것 같아 그 조사는 안 했다고 하기에 나는 바로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하곤 헤어졌다.
그런데 3일 후 한밤중에 내 집으로 전화가 왔다. 반장이 흥분된 목소리로 남편이 다 자백했다는 것이다. 동초를 섰던 같은 내부반의 예비군 대원이 자기 근무 시에 그 남편의 자리가 비어 있었던 것을 얘기해줘서 바로 남편을 데려다가 신문을 했더니 남편이 예비군 부대 뒷담을 몰래 넘어와 법행을 하고 다시 돌아갔다고 다 자백을 했다고 한다. 경찰은 바로 영장을 넣겠다고 했지만 자백만 있지 이를 뒷받침할 뚜렷한 보강증거가 없다. 나는 강도를 가장하기 위해 가지고 나왔다는 라이카 카메라와 피해자의 결혼반지를 꼭 찾아낸 다음 영장 신청을 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만 하루가 더 지나서야 그 남편이 진술을 제대로 해주어 하수구 맨홀 오니(汚泥) 속에서 부인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찾아냈다. 나는 영장에 서명을 했고, 그 사건이 송치된 날 피의자인 남편은 내 얼굴을 보더니 자기를 이해해줄 것 같다면서 경찰에서 말하지 않았던 범행 동기까지 자세히 털어놓았다(구체적 범행 동기 등은 생략하겠음).
결국 이 사건은 내가 범행 현장에서 방석의 눌린 자국을 보고 형사 콜롬보 식의 ‘엉뚱한’ 말을 하는 바람에 풀리게 된 셈이다.
내가 앞의 세 가지 사례를 열거한 이유는 경찰을 비난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래도 경찰은 검찰보다 서민적이어서 사건관계인들에게 친화력이 좋고 정보원 활용도 스스럼없이 잘하며 소재 파악이나 범인 검거 능력은 다른 기관이 따라갈 수 없다. 절도나 강도 같은 사건을 보면 이른바 범죄에 대한 ‘후각’이 좋아 감만 가지고 수사를 해도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대부분의 경우에 경찰이 잘 하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직역의 특성에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경찰은 매일매일 현장에서 뛰고 여러 사람들을 직접 만나 시달리다 보니까 경험은 쌓이지만 차분히 연구할 기회는 거의 없고 결국 이론적인 뒷심이 약하다. 그러나 검사는 이와 달리 공판에 들어가 판사와 법리 논쟁을 하고 무죄에 대비하여 판례도 철저히 검토하며 관련 학회나 세미나에 참여하여 이론적인 연마도 한다. 그래서 전문성을 갖추게 되고 법원과 거의 대등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굳이 의료계에 비유하자면 경찰은 일반의이지만 검사는 전문의다. 일반의가 하다가 버거우면 전문의에게 이송하여 제대로 전문적인 진료를 받게 해야 하고 뇌종양 등 질병에 따라서는 바로 전문의가 수술 등 전문적인 처치를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지금 ‘검수완박’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다. 이제부터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문제는 벌써 큰일이 터졌다. ‘6대 범죄’ 수사를 지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살인 같은 범죄의 수사에 이미 검사는 아무런 권한이 없게 돼 버렸다. 내가 앞서 열거한 세 가지 사례의 경우, 검사는 수사권이 없기에 이제는 검사에 의해 바로잡힐 기회를 잃은 채 경찰이 잘못 처리하는 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게 됐다. 검사가 한밤중에 살인 사건 현장에 가 보는 것은 ‘아,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지…’ 하는 ‘수사의 추억’으로만 남게 됐다.
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검수완박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그 동안 검찰의 잘못된 행태에서 비롯된 점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그 점 과거 검찰에 몸담았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검찰의 통렬한 자기반성 없이는 검수완박에 대한 반발이 검찰의 기득권 수호로만 비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다. 수사권 완전 박탈이란 것이 그렇게 시급한 일인가? 정치인들은 민생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든다. 그런데 ‘민생(民生)’이 뭔가? 기본적으로 국민의 생명이다(‘민생’의 일반적인 뜻이 국민의 생활이지만 ‘생명을 가진 백성’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 사건 수사를 제대로 해야 한다. 살인 사건 수사는 외과 수술과 같다. 그런데 모든 수술은 전문의가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일반의가 해야 하고 전문의는 거기에 뭐라고 조언하는 등 끼어들어서도 안 된다는 법률이 지금 강제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긴급한 수술이 필요한 많은 환자들이 죽어 나갈 상황이다. 아니, 이제는 완전히 전문의 자체를 없애자는 식이다. 전문의 제도가 없어지면 의학 수준이나 의료의 질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 뻔하고 그 피해는 국민이 오롯이 입게 되는 것이다. 수사의 전문가가 수사를 못하면 그 피해는 누가 볼지 명약관화한 일이다.
지금 검수완박의 완결편이라 할 법안을 제출한 여당의 의원들이나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날름 받아들인 제1야당의 원내대표는 자기들이 검찰의 직접 수사로 큰 피해를 보았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들어 법 개정의 당위성을 논증하려고 한다. 그들ㅇ이 검찰 수사로 받았을 고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정치인은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섣불리 이를 일반화하여 정책 결정을 해서는 안 되고, 특히 보편타당성을 갖춰야 하는 입법에 있어서야 더욱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내가 외과 전문의한테 충수돌기염(속칭 ‘맹장염’) 수술을 받았는데 잘못됐다고 해서 앞으로 모든 수술은 전문의가 해서는 안 된다는 법률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번 형사소송법일부개정법률안이 위헌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는 학자들과 법제처, 그리고 헌법재판소에서 가려줄 것이겠지만, 불명확한 점이 너무 많다. 내 주변의 관심이 많은 친구나 지인들이 예컨대 부패범죄라 해서 검사가 수사를 하다가 공직자범죄(직권남용 등)가 발견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3,000만 원 이상의 뇌물죄라 해서 검사가 수사를 하던 중 2,999만 원만 증거가 확보됐다면 경찰로 사건을 보내어야 하는지, 검사가 3,000만 원 이상의 뇌물을 수수했다고 기소했는데 법원에서 재판 결과 3,000만 원 미만만 인정될 때 적법절차에 의한 수사가 아니기 때문에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지 등 세부사항을 물어오는데 나는 아직 연구가 부족하여 확실한 대답을 못해주고 있다.
이번 법률개정안이 얼마나 졸속이고 엉터리인가 하는 확실한 실례를 하나 들 수는 있다. 내 관심사항인 형사소송법 제222조 변사체 검시에 관한 조항인데, ‘변사자 또는 변사의 의심 있는 사체가 있는 때에는 그 소재지를 관할하는 지방검찰청 검사가 검시하여야 한다.’는 제1항은 그대로 두고 그 처분을 ‘사법경찰관에게 명할 수 있다.’는 제3항만 ‘요구할 수 있다.’로 개정하겠다고 하고 있다. 참으로 우스운 입법이다. 변사체 검시라는 것은 수사 개시의 단서인데 수사권을 박탈하면서 수사 개시를 하기 위한 변사체 검시의 권한은 검사에게 그대로 준다는 것이다. 변사체 검시를 해서 검사는 무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살인 범행으로 인한 것으로 판단되면(법적으론 그 판단을 한 권한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도 못하고…. 검사보고 그냥 검시관(檢屍官) 노릇이나 하라는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악법을 만들어도 체계는 갖추어야 하지 않은가.
로스쿨 제도가 시행되어 종전과 달리 법대 출신만 법조계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 컴퓨터공학, 의학, 도시계획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부 전공자들이 변호사 자격을 따고 또 검사로도 많이 임관되고 있다. 이들은 각기 자기 전공 분야를 살려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수사 능력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나도 보건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요즘 젊은 검사들 중에는 법학 외의 분야 학위 소지자가 제법 많다). 검찰은 가능한 한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각 분야의 수사 전문가를 기르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각 검찰청에 국민의 생명을 제대로 지킬 살인 사건 수사 전문 검사가 최소한 1명 정도는 근무하며 수사지휘를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본다.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이 이번에 참으로 희한한 중재안을 내놓았다. 이른바 ‘6대 중요범죄’라는 것 중 4개를 빼고 ‘경제와 부패’ 2개만 일단 한시적으로 남긴다는 나름 묘수를 내놓은 것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을 대표하는 그가 진정 국민을, 민생을, 국민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뺄 것이 아니라 6대 중요범죄에 진짜 중요한 민생범죄인 살인 사건도 검사가 수사할 수 있도록 추가하는 진짜로 멋진 묘수를 내놓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오래 전 검사 생활을 했던 한 사람의 진솔한 경험담을 그냥 넋두리로 흘려듣지 말고 한 번쯤 경청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
첫댓글 필독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