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가
자신을 구원함으로써만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
이제 개인이 위대한 행동을 보여 줄 때가 왔다.
그것은 재난 속의 향연이다.
자기 자신을 구원함으로써만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물론 영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 '봉인된 시간']
"최근의 세계 위기와 생존의 공포"
조금만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지구 행성의 위기 조짐은 도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인류는 지금 천길 낭떠러지에 앞에 서 있다.
이대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나가지도 못한다.
지구의 현 상황은 인류의 의식을 총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인류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이 우리 자신을 이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우리는 위험천만한 증상들을 알고 있고,
가부장적.물질주의적 사고 방식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의 실제 이름은 무엇이고, 그 병의 증세는 각자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불안과 공포
"인류의 가장 큰 공포는 '통합'에 대한 두려움이다"
에덴 동산이라는 낙원에서 쫓겨나고,
유목민들의 안식처였던 자연으로부터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인간은 생존의 공포에 휩싸였다.
우리는 원초적 신뢰와 내적 안정 그리고 스스로의 안식처를 잃어버렸고,
대신 공허와 허탈감과 생존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자연인으로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였다.
그 때문에 우리가 모태로서의 자연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학대한 것은
곧 우리 스스로를 학대하고 자기로부터 멀어지게 한 일과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연뿐 아니라
스스로의 육체의 지배자로서 행세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을 그렇게 분별없이 잔혹하게 폭력적으로 다루듯 스스로의 몸도 그렇게 잔혹하게 다룬다.
아무리 봐도 몸에 좋은 음식물이라 보기 어려운 것들을 마구 입으로 쑤셔 넣는다.
술, 담배 그리고 다른 기호품들을 섭취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몸을 망가뜨린다.
인간은 인생을 즐기는 법을 잊어버렸고 그래서 그 대용품으로 손쉽게 살 수 있는 기호품에 손을 댄다.
우리는 탐욕과 좌절로서 섹스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진실한 육체적 황홀감을 느낄 수가 없다.
무한한 인내로 참아 내던 육체도 언젠가는 질병과 무기력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고,
결국 마지못해 생명을 연장하다가 비참한 모습으로 일찍 스러지고 만다.
인간의 육체란 원래 120세가 넘도록 건강하고 생기 있고 할력이 넘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평균 수명은 80세를 넘기지 못한다.
이것은 곧 40세가 되면 이미 육체적 활력의 정점에 이르고, 이어 점점 활력을 잃어가다가
80세가 되면 고통과 가난 속에서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생의 40년 세월만 허송하는 것이 아니라 40세에서 80세 사이의 나머지 40년도
질병을 동반하는 비참한 생활로 마감한다.
이로써 우리는 '몸'이라는 우리 자신의 '사원'을 돼지우리로 만들어 버렸다.
육체적 활력과 건강을 스스로 책임지고, 몸의 신호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함에도
우리는 병과 질환에 시달리고 삶의 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몸은 우리가 그에 대해 공포를 가져야 할 정도로 우리 자신에게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튀어나와 우리를 삼켜 버리는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공포 말이다.
또한 우리는 자연을 파괴한 대가로 언젠가 반드시 자연의 복수를 받을 것이라는 공포도 갖고 산다.
인생의 다른 영역에서도 '삶의 감정'으로서의 불안이 도처에 존재한다.
일자리를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서부터 사랑하는 배우자나 가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재산을 잃고 회사가 도산하고 거리에서 폭력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 그리고
전쟁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은 무척 다양하게 나타난다.
공포는 삶을 답답하고 왜소하게 만든다.
공포란 사람을 웅크리게 하고 고립시키고, 자신에 이르는 내면의 길을 막고,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게 하고, 위험과 도전에서 도망가게 하고, 숨어서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고,
외부 안전책으로서 오로지 물질적 재산에만 집착하게 하며,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에너지이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큰 공포는 바로 '통합'에 대한 두려움이다.
가부장제의 원죄(산스크리트어에서 'sinte'라는 말은 '분리'라는 뜻이다)는 나누고 분리한 데에 있었다.
인간을 자연이라는 낙원에서 분리했고, 판단하고, 선과 악을 나누고,
소유물을 내 것과 네 것으로 가르고, "분리해서 다스려라!"는 지배 원칙을 만들어 냈고,
육체와 영혼과 정신을 분리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도 인류의 발전에는 당연히 축복으로 작용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인간에게 무의식의 형태로 남아 있는 낙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분리를 지양하고 통합을 이루어 내면 낙원의 블랙홀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토대로서 판단과 가름과 분리에 매달리고,
육체-정신-영혼, 남자-여자, 개체('분리할 수 없는 단위')-사회,
개인-인류(유기체로서의 인류)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에 완전히 문을 걸어 잠그고 산다.
물질주의
"우리는 노동을 사랑하지 않고 마지못해 일을 한다"
앞서 우리는
물질주의적 사고 방식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일종의 병이기도 하다.
자연과 분리됨으로써 내적 안정과 안식처를 잃어버린 우리는
그 뒤부터 외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이 창출해 낸 물질적 부에 광적으로 집착하면서 안식처를 찾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물질적 소유물로 공포를 덜어 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땅과 토지, 집, 회사, 자동차, 요트 혹은 비행기 같은 소유물에 가치의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별반 가치도 없는 시간들을 방종하게 즐기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물질세계에 집착하고 있다.
물질주의는 심적 공허감을 마비시키는 일종의 마약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람들은 돈에 대한 탐욕을 비판한다.
하지만 병적인 것은 탐욕이지 결코 돈이 아니다.
부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문제지, 부 그자체는 아닌 것이다.
소유물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이 병이지 결코 소유물은 병이 아니다.
돈과 물질과 외적인 부를 자기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소유하고 향유하는 것은 당연히 건전한 일이다.
그런데 물질주의적 인생관이 부른 최대의 재앙은 우리가 노동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가족을 부양하고 노후 안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직업을 갖고 일을 한다.
우리는 노동과 여가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여가 및 취미 생활은 즐겁지만, 노동은 "해야 되는" 일이기 때문에 즐겁지가 않다.
우리는 직장에서 해고될 빌미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열심히 일하는 척할 뿐이다.
하지만 이미 심적으로는 해고 상태나 마찬가지다.
휴일이 끝난 월요일 아침이 끔찍하고, 휴가에서 돌아와 처음 출근하는 날이 지옥 같다.
인생의 대부분이 우리가 싫어하는 일과 활동으로 채워져 있다.
직장 상사, 직장 동료, 출근길 그리고 상품을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는 노동을 사랑하지 않고 마지못해 일을 한다.
그러니 노동에 대한 등가물로서의 돈이 충분히 들어올 리 없다.
우리는 가능한 한 힘을 덜 쓰고 돈은 많이 벌려고 한다.
불안과 공포라는 질병 외에 노동에 대한 이러한 애착 없는 태도는
우리의 목을 죄는 두 번째 올가미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력과 활력을 심각하게 앗아간다.
마지못해 하는 일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날마다 자기 가치를 파묻고 품위를 뺏기는 일만 한다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혐오스럽겠는가?
이기주의
"이기주의라는 정신병의 뿌리는 '에고(Ego)'"
우리 사회처럼
무슨 일을 달성하려면 다른 사람을 반드시 제치고 나아가야만 하는 사회에서는
무조건 남을 제쳐야 성공할 수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같은 반 친구들을 제치는 법을 배운다(내가 다른 애들보다 낫지, 내가 최고야!).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직장에서 동료들을 제치고,
사업을 하면 다른 경쟁사들을 제치고, 국가의 경우라면 다른 나라들을 제치는 일에 몰두한다.
자기중심주의는 건강한 자기 사랑이 아니라 항상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동시에 일종의 병이다.
인간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 경쟁과 승부에만 열중한다.
협력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에너지를 창출하지만, 경쟁은 불필요한 마찰로 에너지 손실을 부른다.
이러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속에서는 늘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관심사다.
자신의 이익을 이기적으로 관철하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기주의는 비단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회사와 공동체와 민족과 국가들도 이기적이다.
단위로서의 모든 개체는 전체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권리와 이익만을 위해 투쟁한다.
이와 비슷한 행태로 움직이는 의학적 질병이 하나 있다. 암이다.
암에 걸리면, 병든 세포는 다른 세포와 조직과 기관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 살기 위해 급속도로 퍼져 간다.
이러한 이기적인 행태를 통해 암세포는 자신의 주인, 즉 몸에 피해를 주고,
결국 몸이 죽으면 암세포 역시 영양분의 근거를 잃고 파멸해 버리고 만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주의자는 아니었다.
이기주의란 자기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관철해야만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일 뿐이다.
이기주의란 정신의 문제다.
우리의 에고(Ego)는 진정한 자아가 아닌 오성을 우리 자신의 중심에 설정한다.
이것이 우리가 앓고 있는 이기주의라는 정신병의 뿌리다.
질병으로서의 이기주의는 장기적으로 전체를 깡그리 파괴시킬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한 채
오로지 단기적인 이득만을 추구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이기주의와 이기주의적 행태가 이득을 본 것처럼 보이지만,
종국에는 이기주의 자체도 전체의 괴멸로 파멸하고 만다.
조종과 조작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교육시키지 않고,
우리가 교육하는 것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자연과의 협력 관계를 포기하고
우리 스스로 자연을 조작할 수 있다고 인식한 이후부터
조종과 조작은 인간의 일상적인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타인과 직장 동료와 손님과 배우자와 자녀들을 조작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도 조작한다!
조작의 최대.최고의 도구는 당연히 교육과 학교 체제이다.
우리는 조작을 통해 우리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조작이 잘 먹혀들도록 훈련시킨다.
교육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우리의 질병을 계속 물려주는 과정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교육을 비판하면 즉각적인 항의가 돌아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조작이라는 이 질병에 얼마나 깊이 물들어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모든 독재 시스템은 그에 걸맞는 교육 체제를 갖추고 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가르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인격과 존엄을 갖춘 인간으로서 다루지 않고
훈련시키고 길들여야 하는 동물처럼 다루고 있다.
사실 아이들은 특별히 가르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본보기를 통해 배우기 때문이다.
그 애들은 우리 어른들을 모방하고, 어른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고 싶어한다.
아이들의 습성과 태도를 조작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본보기는 교육자적인 태도로 훈계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더 강력한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건강한 인생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런 가르침은 아이들에게 씨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교육시키지 않고, 우리가 교육하는 것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이다.
하지만 교육은 타인을 무시하고, 타인의 영혼에 간섭하고,
우리의 이해 관계에 따라 타인의 인생 프로그램을 바꾸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교육의 피해자로서 우리는 진정한 자아와의 교류를 잃어버렸고, 그와 함께
타율적이고 개성이 없으며, 복종적이고 예속적이고 조작되고 이기적인 인간이 되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교육을 통해
자신의 인생 과제와 인생 비전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학교 교육의 내용 면에서도 어른들은
내일의 문제를 풀어야 할 아이들에게 어제의 문제 해결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무관심
"무관심은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막는 병이다"
무관심은
이기주의의 이면이다.
냉담함이 인생의 새로운 감정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우리는 머리에 의해 조종되는 에고-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간다.
진정한 조화로운 감정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공포에 의해 차단된다.
공포는 진정한 감정이 아니라 사고의 가정이자 날조이다.
함께 복습해 보자.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은 병에 대한 어떠한 공포도 모른다.
병에 대한 공포란 공포로 가장한 어떤 심적인 태도이다.
몸의 측면에서 보자면 병(dis-ease)은 불편한 상태를 표시하고 알리는 메시지이다.
몸이 왜 질병에 대한 공포를 가져야 하는것일까?
공포란 답답한 생각이자 강한 에너지가 담긴 부정적 기대이다.
하지만 참 이상한 것은 공포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무관심하다.
우리는 다른 새로운 사고를 통해 공포와 같은 부조화의 감정들을 떨져 낸다.
이처럼 공포를 떨쳐 내는 과정을 보면 공포의 기원이 사고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공포는 사랑과 같은 진실한 감정을 차단한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것, 예를 들어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봉쇄된 사고를 통해 억압되어 있던 에너지가 자유롭게 표출된 것이다.
분노나 성냄 역시 진정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한 대로 뭔가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
탈출구를 못 찾은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과 같다.
인간, 특히 남자들은 조화로운 감정이나 직관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드물다.
오성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데,
교육을 통해 오성 속에 입력된 프로그램이 우리의 태도를 조종하고 있다.
동시대인들, 노인 그리고 어린이 혹은 동물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네 인생은 너의 것이다.
가난하고 실패한 인생은 모두 그 당사자 책임이다. 그건 네 문제야. 내가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지?'
무관심은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막고,
우리를 철저하게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병이다.
무책임
"무책임이라는 병은 분리와 고립, 무능과 무저항을 가져온다"
교육은
우리 인생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서 빼앗았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배웠다.
그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관심과 이익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우리에게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를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우리의 교육자들은 우리에게서 책임을 빼앗아 갔다.
우리는 대본에 따라 연기를 할 뿐이고, 그 대본의 작가는 우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역할을 맡기는 대본의 작가가 누구일까?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운명, 업보, 종교, 법, 건전한 오성 등이다. 다시 말해서
'저 높은 곳에 임하시는 존재들'이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단지 다른 존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만 좋아한다.
권력자들에겐 책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권력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에겐 책임이 없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비참하고 꼬이게 만든 모든 책임을 다른 존재에 돌린다.
모든 것과 모든 인간이 우리의 인생 상황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단지 우리 자신만 무고한 피해자일 뿐이다.
무책임의 다른 측면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해당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더 이상 어떤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무책임'이라는 병은 우리를 전체 사회 조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고립시킬 뿐 아니라
우리를 무능하고 저항력이 없는 존재로 만든다.
진단 : 인격 분열
"우리는 몸, 정신, 영혼으로 이루어진 3중의 존재이다"
'인격 분열'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게 되면
우리는 자기 소외감으로 시달릴 것이다.
진정한 자아가 우리 자신에게 낯선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기계 장치의 작은 톱니바퀴처럼 굴러가고, 배우처럼 주어진 역할을 따를 뿐이다.
우리는 인격이 세 가지 본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몸, 정신 그리고 영혼.
오늘의 우리는 이 세 가지 본질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고,
심지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것이 병이다!
몸의 욕구는 이렇다.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고, 유산소 운동을 통해 항상 활기에 넘치고, 심호흡을 통해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긴장을 풀고 푹 쉬고, 황홀한 성적 쾌감을 경험하고 싶어한다.
반면에 정신의 욕구는 이렇다.
새로운 것에 개방적이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의식과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도전하는 것을 스스로 해결하고,
자아 실현에 일조하고 싶어한다.
영혼의 욕구는 다음과 같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선행을 베풀고, 나누어 주고, 삶의 기쁨을 향유하고,
잠재력을 최대한 발전시키고, 자아 실현을 하고 싶어한다.
번잡하고 타율적인 삶이
우리를 영혼이 없는, 심적으로 공허한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외부의 주문 사항에 따라서만 반응하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이런 꼭두각시 역할에서 영혼은 아무런 발언권이 없다.
우리는 인생의 과제와 사명감이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간다.
우리의 세계라고 해봐야 가족이나 혈족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우리의 영혼은 '몸-정신-육체'라는 삼각 결합 속에서 비참하게 근근이 연명한다.
무책임과 무관심은 우리 인생에서
영혼의 가난함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영혼은 부(富)의 진정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오성의 사정도 이보다 더 낫지는 않다.
오성은 우리의 인생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만, 스스로 독자적인 생각을 일구어 내지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남의 생각을 그대로 좇는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에 자양분을 공급하지 못하고,
단지 남이 씹어준 정신적 양식만을 받아서 고스란히 삼킬 뿐이다.
이로써 우리의 에고(Ego)는 외부에서 입력된 타율적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 자신의 사고 수단이 아니라 타인의 이해 관계를 위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도구이다.
우리의 오성은 영혼의 탁월한 심복이자 외무장관이 아니라
남의 것을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가련한 하수인일 뿐이다.
이기주의와 조작의 병적인 태도도 바로 여기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어떤가?
우리는 몸을 인생의 사원이 아니라 쓰레기통처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의지해서 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이다.
몸의 물질적 욕구들이 인생의 중심이다.
자기 부양과 영양분 섭취, 일하기, 돈 벌기, 옷 입기, 자손 번식하기, 한마디로 말해서 생존 그 자체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적 욕구조차 왜곡시키며 산다.
육체적 욕구들이 오성과 영혼을 통해 병적인 탐욕과 집착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병적인 집착은
우리가 내면에서 닫아걸었던 것을 외부에서 찾도록 한다.
몸과 정신과 영혼 사이의 공생에서 나온 내적 안정이 유일한 치료책이지만,
분열된 인격은 심적 안정을 외적 소유물에서 구하고 있다.
'육체적인 것'에 제한된 우리의 인생은 공포와 물질주의를 벗어날 수가 없다.
미개 문화
"오늘날의 우리가 바로 '잃어버린 고리'이다"
우리가 인격 분열 상태에 있다는 진단이 너무 가혹한가?
우리 자신에 대해 좀더 우호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인가?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괜히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치료의 첫걸음은 우리 자신의 실상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을 실현하지 못하는 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함께 살펴보자.
인류는 오늘날까지도 분쟁과 갈등을 폭력 없이 해결할 줄 모른다.
폭력은 여전히 인간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합법적으로 용인된 수단이다.
공적인 분쟁이건 사적인 분쟁이건 간에 말이다.
평화와 행복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비전이자 희망 사항일 뿐이다.
인류는 아직도 공포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다.
공포와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에야 진정 정열적인 인생이 시작되는 법이다.
질병, 나이듦과 죽음, 가난과 실직,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모든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참다운 인생이 시작된다.
인류 가운데 공포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삶을 꾸려 가는 사람은 불과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은 생존에 대한 불안을 느끼며 산다.
인류는 오늘날까지도 사리사욕의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류'라는 통일적 유기체가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단세포 생물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결코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인류는 조건 없이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무관심과 미움과 무시와 공격성이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 인자이다.
우리의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자의식이 없고 인간적이지 않고 본능적이고 미개하다.
이제야 우리는
진정한 '인간됨'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고, 자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깨어나고 있다.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생물 진화 과정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구멍으로 남아 있는 생물 종 - 옮긴이)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놀랄 게 없다.
오늘날의 우리가 바로
그 '잃어버린 고리'이기 때문이다.
위기가 기회다!
"인간상호간의 연대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인류의 질병을
개별 인간의 측면에서 관찰해 보았다.
이를테면 전체 유기체의 병을 개별 세포에 비추어 고찰했다는 말이다.
1만 년 전의 농업 혁명은 우리 인간에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득을 안겨 주었고,
새로운 사고와 상상하기 어려운 부를 허용했다.
농업 혁명은 이른바 인류사의 여명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아직 새벽 어스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몽매하다.
우리는 가부장적.물질주의적 생활 방식의 부정적 측면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추상적인 사회 비판의 형식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 미개 상태에 있는 인간 문화의 이러한 부정적 측면을
자신의 인생에서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간에 문제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둘 사이의 인간적 소통 방식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안고 있는 위기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 상호간의 연대를 촉진시켜야 한다.
사소한 다툼들 속에 전체 인류의 문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성과 여성, 너와 나로서 서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
그로써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하는 셈이 된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인류의 위기를 체험하지만,
공통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통해 우리가 서로 하나로 엮여 있다는 연대감을 인식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고, 우리의 문제는 곧 다른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로써 우리는 인류라는 대가족의 한 부분임을 깨닫는다.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된 것이다.
전체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총체적인 위기감이
서로간의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연대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혹시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메시지로서의 병
"병은 우리가 그 메시지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라고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병이란
사형 선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키를 다시 움켜잡으려고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이 병의 메시지를 등한시하고
몸이 점점 더 큰소리로 비명을 질러 댄 연후에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사태의 심각성을 왜곡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당장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병은 우리가 그 메시지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라고 존재한다.
지구는 위기의 조짐을 도처에 내보이는 것밖에 우리에게 말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지구의 메시지와 지구의 비명소리가 들리는가?
지구가 앓고 있는 병의 메시지는 이렇다.
"인간들아,
너희는 지구라는 별에 사는 한가족이다!
너희 자신과 너희 인격(몸-정신-영혼)을 다시 조화롭게 만들고,
너희 인생을 조화로운 관계로 이끌고(남자, 여자, 어린이 부모 그리고 창조적 활동),
너희 공동체들의 조화를 일구어 내고(협력과 평화),
자연과 지구와 다시 하나되어 화합한다면
이 지구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
다시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산고와 성장통으로서의 고통
"이제 다시 스스로 두 발로 걷는 연습을 할 때"
온몸에 힘이 떨어지고, 좌절의 괴로움이 휘몰아치고,
몸이 일어나라고 우리를 흔들어 깨울 때의 고통은 종종 퇴행의 메시지가 아니다.
고통과 아픔은 성장 과정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하나의 시스템은 성장 과정에서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러면 그 시스템은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질병과는 여러모로 다르지만 출산 역시 고통스럽고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출산의 고통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차원의 새 인생의 출발을 의미한다.
인류가 산고를 앓고 있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는가?
그 고통 끝에 과연 새로운 생명을 출산할 것인가,
아니면 사산을 하고 말 것인가?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은 상처와 멍을 달고 산다.
걸음마를 배우려고 애를 쓰지만 아직 제대로 해낼 수 없는 시기의 아이들은
이따금 몹시 힘들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쓰러지고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걸으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되는 단계이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우리 모두 실수투성이의 걸음마 단계를 거쳐 이렇게 성인이 되지 않았는가?
이제 다시 스스로 두 발로 걷는 연습을 할 때가 되었다.
온몸이 멍투성이가 될 각오를 하고서 말이다.
정보화 시대에서 의식 시대로
"의식 시대부터 진정한 의미의 인류사가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방향을 틀 수 있다.
우리의 문화는 아직 미개하고, 건강한 유기체에 비하면 암세포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일 뿐 결코 비난하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교만함의 옷을 벗어던져야 한다.
가부장제는 진정한 인간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노정의 첫 단계이고,
농업혁명 이후 1만 년의 세월은 인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의 예비 과정이다.
가부장제의 마지막 단계로 산업화 시대는 그 시대의 인간들을 해고시켰다.
생산 방식이 자동화되고 산업이 기계화되면서 인간은 일자리를 잃었다.
고도의 전문 지식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만이 점점 전자동화되어 가는 생산 과정을 조종하고 관리한다.
제3세계 국가들은 이제 산업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속에서도 정보화 시대는 이미 힘차게 시동을 걸고 있다.
무엇보다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인터넷과 전 세계적인 전산망의 구축이 정보화 시대의 든든한 기반이다.
정보화 시대로의 전환은 인간의 노동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점점 더 많은 직장이 컴퓨터 관련 일자리로 바뀌었다.
이제 노동 장소가 사무실이건 집이건 상관없어졌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한 기업을 위해서만 쓸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는 집에서 독립 사업체를 차릴 수 있고, 여러 기업을 위해 일할 수도 있다.
정보화 시대는 새로운 독립 문화를 창출해 냈다.
그 옛날 농업 혁명에서 농민이라는 새로운 직업 계층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정보화 시대는 우리의 정신과 오성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다.
인간은 독립적 존재로서 독자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벌써
다음 시대의 싹이 움트고 있다.
바로 '의식 시대'이다.
우리가
개인과 인류로서 달성해야 할 의식 혁명은
우리를 새로운 문화로 인도하고,
정말 참된 인간 문화와 자연과의 새로운 조화를 창출해 낼 것이다.
의식 사회는
인간을 정신적으로 서로 묶는다.
의식 시대부터 진정한 의미의 인류사가 시작된다.
영혼의 지도 아래 말이다.
E
[쿠르트 테퍼바인 Kurt Tepperwein / '돈의 비밀 Das Geld geheimnis']
"오랜 세월
너희 시인과 철학자들이 정의하고자 애써온 주제가
바로 '사랑'이다.
그들의 정의 중에서 진리에 가장 가까운 건
양극성의 체험을 넘어서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할 때다.
그건
어떤 분리도 존재하지 않고,
분리란 건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됨의 체험,
합일의 체험이다.
그 체험에서는
양극성이란 관념은 환상이 되고
하나됨의 관념은
현실이 된다.
궁극의 현실은 이것이다.
이것이 만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너희는
서로에게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했다.
사랑은 이것을 증명하고 이것을 체험하고자 하는
인간의 충동이다.
모두의 최상의 이해관계는 하나임을 확인할 때,
너는 자신이 너 자신과 남들에 대한 사랑을
체험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닐 도널드 월쉬 / '10대여 세상을 바꿔라 Conversation with God for tee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