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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 출장길에 - 수덕사 2007.8.20
간혹, 먼길 다녀오는 길에 지쳐진 심사를 잠시 뉘이려는 마음으로
들렸던 (해미읍)푸른노트라는 작은 카페가 있습지요.
언젠가...동공도 풀리고 촛점도 흐린한체 커피 한잔을 홀짝이면서 중얼거렸던 생각이 납니다.
"여기 .... 해미 공군부대에 상수도 공사나 하나 터져라... 그러면 그핑계로 둘러가게시로...."
헛허허허허....그랬었지요.
그런데 용케도 부대안에 상수도 공사가 터졌고 옳커니 하여 유난스런 마음으로
몇번의 출장으로 공(^^)을 들였더니만 우여곡절속에 상당한 규모의 자재를 납품하게
되었습니다. 헛허허허
계약을 마치고서 해미에서 수키로 떨어진 예산 수덕사를 들려봅니다.
수차, 지나치면서도 정작 들려보지 못한터 내심 홀가분한 마음으로 들렸습니다.
해미 출장 길
몇차례 들렸던, 읍성국밥집의 추어탕이 참 정갈하여.....티각^^
부러 서울에서 출발할때 점심을 안먹고 출발했던터라 늦은 점심을 맛나게 해치웠습니다 ^^
출장을 자주 다니다보니..."그곳에 가면 그집이..." ...하여 혼자 반가와 합니다.
혼자먹는 식당밥이 쭈뼛하거나 외롭지 않고 넉넉한....바로 그집은
숨겨놓은 애인 같습니다 그려 헛허허허
수덕사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
정문과 진입로....기념품점 식당가
덕숭총림방장 원담스님의 방
잠시 그늘에서....
덕숭총림방장님의 설법을 묵상합니다.
"구름이 걷히면 저절로 하늘은 드러납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아득바득 살아갑니다.
"일탈" - 그만한 경지에 이른다는것이.... 그 알량한 심뽀 때문에....헛허허허
만공대선사 오도송
흰구름 맑은바람 스스로 오고가누나....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엔 해가 오르네......
감히 다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을 겸허히 묵상하며 또박 또박 읽어 내립니다.
달마가 서쪽으로 간 이유는....(문득 넌센스 퀴즈가 떠올려지는...우스개 소리로)
조계종 발령을 받아서리....
(큰스님 , 어르신의 화두를 우스개로 농담하는것은 결코 아님을 밝혀둡니다)
2층 누각과 아래층에 성보박물관
성보박물관엔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유품들과 기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웅전 마당에서 내려본 누각 전경
누각 2층은 찻집으로 운영
잿빛 가사에 차 한잔을 드리우는 스님의 모습이 참 정갈하고 고즈녁합니다.
스님일까? 비구스님일까....
언젠가 어느 누구(블로그)께서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도 있고 평소 동경하는
마음에서 수덕사를 들렸더니 .... 웬걸, 비구승들은 없더라고 투덜대는것을 들었지요.
헛허허허허
대웅전 ( 국보 제49호 )
비록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시대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백제의 기술적 토양 위에 만들어진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맞배지붕 대웅전 내
수덕사의 대웅전은 맛배지붕 형식으로 팔작지붕에 비하면 상대적 왜소하게 보여지지만
오랜 풍상의 자태로 단정하고 의연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덕사 대웅전은 기둥이
배흘림 기둥으로서 영주 부석사의 배흘림 기둥과 더불어 알려져 있습니다.
댓동위에 하얀고무신....지팡이
그 자체로만으로도 정숙 입니다.
덕숭총림 수덕사 승가대학
수덕각시 전설이 어린 관음바위
스님들의 내실을 끼고 도는 담장길
이 길로 오르면 정혜사등의 암자와 사찰이 있고 덕숭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입니다
"여 유"
잠시...그늘속에서 땀을 식히며 쉬어 머무르는 작은 여유는
이차저차하게 얽혀진 마음을 한결 홀가분하게 멈추게 해줍니다.
숲내음속에 바람지나는 소리를 들으며....
범종과 고목나무
경내를 쉬엄 둘러보시는 하얀 모시옷의 노 스님의 뒷모습
원통보전 앞에 앙징스러운 정자 앞에서
팔을 쭉 늘이어 혼자 찍는 모습이 안스러웠는지
젊은 커플이 자청하여 사진을 찍어 줍니다. 고맙지요.
원통보전의 문살
부도탑
풍경소리
비온 뒤끝의 말끔한 하늘... 청명합니다.
추녀에 달랑거리는 풍경은 천년의 바람이 스치며 속삭이는 교감이랄까요?
하루해가 뉘엿해지는 석양....
"흰구름 맑은바람 스스로 오고가누나..." 고
오도송을 읊조리신 만공대선사님은
어쩜, 추녀끝에 풍경소리를 지긋한 마음으로 담아내셨을듯합니다.
수덕사... 구경 잘하셨습니까?
헛허허허
진즉에 다녀가신분들이나 아직은 들려보지 못하신분들...모두가
쉬엄 쉬엄 경내를 돌아보며 잠시의 여유를 가져 보십사 하여 사진을 올렸습니다.
토요일 오후....
비온뒤끝에 상큼한 바람과 청명한 하늘....
모처럼의 정지된 시간에 가을바람을 담아 커피 한잔 저어냅니다.
한잔 하시지요. 헛허허허
그리고....이 가을엔...
커피향 더불어 가을心도 향긋하게, 뽀송하게 챙기세요^^
2007. 9. 8 토요일 오후
까망가방하양필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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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노래와 수덕사에 얽힌 일화를 퍼 와서 옮깁니다
수덕사의 일화에 나오는 세 여인의 이야기가
가슴에 저릿하게 다가섭니다.
당시의 신여성들의 사랑과 애환을 숨어 보는듯 합니다.
광풍영우회 카페에서 퍼옴
수덕사의 여승 - 송춘희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 ~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 ~ 수덕사에 쇠북이
<"수덕사의 여승"에 얽힌 일화>
60년대 중반 발표되어 꽤나 힛트한 대표적 대중가요다.
속세에 두고 온 애절한 사연을 잊지
못해 흐느끼는 비구니가 그려지는 조금은 단조로운 가사내용이다.
그런데, 당대의 사람들은 이 애절한 비구니의 사연을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그처럼 큰 반향 을 일으키며 힛트할 수 있었을까?
그런 애절한 사연이 있을법한 수덕사 여승의 실제 모델은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는 누구일까? 이야기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때,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세분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최초 의 대중가요로 불리는“사의 찬미”로 너무나 유명한 윤심덕이 그 한명이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이 그 한명이고,
나머지 한명은 시인으로 유명한 김일엽이다.
이 신여성 세 사람은 조선사회 남존여비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 호히 거부하고 불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인들이다.
나혜석은 사랑에 버림을 받고,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과 함께 했으며,
김일엽은 스스로 사랑을 버린 여자다.
윤심덕과 나혜석의 이야기는 다음기회에 더 하기로 하고
여기선 실제로 수덕사의 여승이었으 며 한국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추앙받는
김일엽의 이야기를 해보자. 김일엽의 본명은 “김원주”다.
일엽(一葉)이란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그녀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이다.
그런 사연 때문인지 둘 사이의 스켄들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연애대장이라는 별명 을 들을정도로 자유 분망하게 살아갔으며
진취적인 자신의 삶을 여성운동으로 승화시켜 “자 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장하게 된다.
그녀가 80몇년전에 주장했던 신 정조론을 살펴보자.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정신적으로,
남성이라는 그림자 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을 인정 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것이 바로 나 다.” 한마디로, 남녀가 나누는 육체적 사랑을 순결
또는 정조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 는 이야기다.
당시 꽤 파격적인 주장으로 받아 들여졌지만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 보더라도 앞서가는 신세 대의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모든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그녀도 극심했던 남존여비(지금도 그러하지만)라는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 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몸소 겪었다.
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자와의 결혼하는데
남자가 의족을 한 장애인 이었 다.
남자가 이 사실을 숨겼으므로 지금이라면 사기 결혼을 당한 셈이다.
신뢰에 기반 하지 못한 결혼생활은 일찌감치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의 생활은 더 더욱 자유 분망하 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김일엽은 한국최초 여자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일본인 “오다 세이 조”와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
오다 세이조는 아버지를 은행총재로 둔 일본최고 명문가의 아들이며
당시 규수제국대학생 이 였다.
남자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
이때 둘 사이에 아들 이 하나 태어난다.
이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사람이 한국 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일당스님이며 이름이 “김태신”이다.
일당스님은 지금도 김천의 직지사에서 활동 중이며 해방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김 일성 종합대학에 지금도 걸려있다 한다.
당시 그 일로해서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 활동 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다 세이조와의 사랑도 아픔으로 겪은 그녀는 곧, 일본에서 돌아와 수덕사의 여승이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
또 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 자의 길로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불자가 되였으니,
“속세에 맺어진 너와나의 모자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므로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 하며 모질게도 모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에 재웠다 한 다.
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 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가 슴에 쌓여 해탈로 녹아내렸을까?
비구니로써 그의 인생이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길 만큼 성공적인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가수이자 음성포교사인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송춘희씨를
기념하기위하여 절 앞에 있 는 주차장에 노래 기념비를 세웠으나
2-3일후 수덕사의 스님들이 이 기념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그 연유는 아마도 노래의 가사 내용이 스님들의 비위에 맞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 해도 중생을 구제하고 아픔을 함께 해야하는
스님들께서 속세의 작은 정표하나 가슴 으로 안아주지
못하는 처사가 못내 아쉽기만 한 것은 내가 불자가 아니어서 그런걸까?
일엽 스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기념비는 어찌 되였을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무심히 부르고 흘러버릴 대중가요일 뿐인 “수덕사의 여승”에 이렇게 딴지를 걸어 보는건,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가 60년대이니 이때엔 일엽스님께서 수덕사에 살아 계실 때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노랫말을 쓴이가 일엽스님의 인생을 안다면 아마도
그런 가사가 나왔음 직 하지 않은가.
이 글에 인용된 사실적 기록들은 일엽 스님의
아들 일당스님(김태신)이 최근 발표한 자전소 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에서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풍산초등학교 42회동기회 카페(글쓴이 : 양태호) 에서 퍼옴
첫댓글 그런 일화가 있었군요 ㅎㅎ 사진과 글 잘보고갑니다
어라? 저한테 보고도 안 하시고 해미읍성이며 수덕사를 다녀가셨다구요? 이런.....다음엔 더욱 튼튼한 바리게이트를 쳐 놔야지~~~~!!!!
해미읍성 앞 도로변에 국수집이 2층에 있습디다......배고픈 김에.....국수 곱배기를 시켰다가......정말로 .....배터져 죽는줄 알았습니다.....ㅎㅎㅎㅎ .......(근데....한 시대를 풍미하던 분덜은...모두가 저렇게 "사랑"이 복잡한게벼유....우리같은 민초들은...참으로 단순한데...쩝~......까방님....도 ...단순 하시쥬?....ㅎㅎㅎㅎㅎㅎ))
잘 지내시지요? 걸어간 발자국 하나하나가 향기가 되었군요. 남에게 기쁨을 주는 향기가 으뜸이지요.
까망님 안가시는데가 어디세요 !~~~방랑자 같으십니다요 ㅎ 잘지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