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지의 재벌 총수가 3번이나 사과했다. 허리를 90도 각도로 꺾고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라고 읊조렸다. 한 사안을 갖고 이렇게 3번이나 사과한 재벌 총수가 있었을까. 횡령이나 배임 등으로 구속되면서도 총수들은 ‘형식적인’ 사과만 했었다. 한화 그룹 김승연 회장은 3번,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2번이나 교도소 생활을 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기자들에게 대놓고 형인 이맹희 회장에게 ‘막말성’ 얘기를 쏟아 부은 적이 있다. 이들 총수들은 대국민 사과를 하지 않았다.
롯데 신동빈 회장은 횡령이나 배임 등 범법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가족간의 볼썽 사나운 ‘전(錢)의 전쟁’을 일으켰을 뿐이다. 재벌가에서 형제간 골육상쟁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재산싸움을 하지 않은 재벌을 찾는 것이 쉬울 만큼 재벌가의 분쟁은 일상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물론 시민단체, 심지어 정부까지 ‘롯데 때리기’에 나섰다. 신 회장으로서는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재벌 총수가 사과자리에서 직접 기자들의 일문일답을 주고 받은 것은 신 회장이 처음이다. 그런데도 성난 민심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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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2015년 8월 11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롯데의 불투명한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의지를 밝히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머리 숙여 사과하고 있다. / 오종찬 기자
왜 롯데와 신 회장에게 비난 여론이 빗발치고 있을까. 신 회장으로서는 조금은 ‘억울’해 할만도 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타이밍이다. 광복절을 앞둔 시점에 일본에서 성장한 2세들의 골육상쟁은 국민들을 화나게 만들고 말았다. 분란을 일으킨 장남은 한국말이 아닌 ‘일본어’로 인터뷰하는 장면이 여과 없이 전파를 탔다. 이는 롯데가 한국기업이냐 일본기업이냐의 논쟁으로 옮겨갔다. 신 회장은 분명한 어조로 ‘우리나라 기업’이라고 강조 했다. 한국 롯데는 국내 매출이 80%를 넘고 고용 역시 협력업체 포함 35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를 두고 어떻게 국내 기업이 아니냐는 논리다. 어눌한 신동빈 회장의 한국어 발음은 그렇다 쳐도 가족간 대화는 모두 일본어라는 사실에 민심은 다시 화나게 했다.
지하철 노선도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순환출자 구조 역시 한국기업과 거리가 먼 것 아니냐는 얘기가 더 신 회장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특히 한국 롯데를 지배하는 호텔 롯데의 주주가 일본 롯데홀딩스와 L투자 회사라고 밝혀져 국민들은 의구심을 갖는다. 이들 회사는 신격호 총괄 회장 일가와 일본 계열사, 사원주주 등으로 구성돼 사실상 일본 회사가 아니냐는 얘기다. 이를 의식한 신 회장은 빠른 시일 내에 호텔롯데를 국내 주식시장에 상장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배 구조를 단순화 하겠다면서 진화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