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측 병사들이 끊임없이 피를 쏟는 대혈투가 절정에 달할 때쯤,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김종현의 1만 병력이 10만 거란군 등 뒤에 별안간 나타난다. 길을 헤매는 바람에 전장에 늦게 도착했다고는 하나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혹은 부대를 다시 재정비하느라 늦었을 수도 있다. 사실 고대에서 중세까지 길을 헤메는 것은 거의 당연지사였고 지리를 잘 알아야하는 것이 지휘관들의 전투 전의 최우선 과제였다. 기병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인데 이동 중 말의 식사 시간과 전투를 위해 체력을 많이 아껴두어야 하는 만큼 늦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단 기병은 전투에서 강력하지만 관리가 많이 필요해 전쟁사에서 기병을 잘 관리해 이용하는 지휘관들이 몇 손가락 꼽을 만큼 대단히 어려운 병종이다.
여하튼 이렇게 장대하고 정교한 전략을 총 지휘한 강감찬이라 하더라도 이런 타이밍까지 의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절묘한 출현은 통신 수단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쉽지 않고, 또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에 가급적 해서도 안 된다.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자칫 대패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30]
김종현의 1만 병력의 등장은 전방의 고려군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던 거란군을 상대로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김종현과 1만의 고려군은 30만이 뒤엉켜 싸우는 전장으로 주저없이 돌격해 들어간다. 쌍방간 주력이 격돌하는 대회전에서는 조그마한 변수도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데, 1만씩이나 되면 조그마한 변수가 아니다. 더군다나 김종현 부대는 거란군의 추격이 목적이었으므로 병력을 기병 위주로 편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란군도 김종현 부대의 등장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마침 갑자기 비바람이 남녘으로부터 휩쓸어와서 깃발이 북으로 나부꼈다.
아군이 이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니 용기가 스스로 배나 더해졌다.
이거보다 1.5배가량 더 많은 고려군 본대
(제작진이 밝힌 오크군 13만, 기록상 귀주에 집결한 고려군 본대 20만)
이거보다 12배가량 많은 거란군 기병대
(제작진피셜 로한기병 6000,
실제 기록상 거란군 10만이지만..
중간의 소모병력제외하면 귀주대첩 당시는 대략 7만가량으로 추정하며
기동전으로 빠르게 개경을 점령하기 위해 대부분이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음)
전투 3일째
거란군의 후방을 기습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은 고려군 중기병대는 이 짤 병력의 1.5배(1만)
그러고보면 은근히 귀주대첩은 반지의 제왕3의 펠렌노르 평원전투와 흘러가는 상황이 비슷했음...
팽팽하지만 고려가 조금 밀리는 상황에서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던 지원군 1만이 적의 뒤에 불쑥 튀어나와서 전투를 종결시켜버렸으니 말임
귀주대첩을 그린 민족기록화에서도 귀주대첩의 가장 결정적이었던 순간을 그리고 있음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거란 기병대의 후방으로 돌격하던 1만의 고려 중기병대의 모습 말임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로한 기병대가 오크군의 옆구리를 향해 돌격했듯이 ㅇㅇ
기록으로만 보면 반지의 제왕 스케일은 귀주대첩에 비하면 그까이꺼 수준임...
괜히 귀주"대첩"으로 한국사 3대 대첩으로 불리우는게 아님
참고로
전투가 한창일때 후방을 기습당한 거란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그 사이 본대가 양 측면을 벌려 거란군을 포위섬멸함
일부 살아남은 거란군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지만
수십km나 고려군이 추격해와 거의 몰살당함
생존자는 전체 병력의 10퍼센트도 안됐다고 함
이 전투의 승리로 30여년을 이어오던 거란과의 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끝났고
이후 100여년의 평화기와 고려의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