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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 21. 몇 번이나 용서하리까? 22.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까지라도
3.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 18: 21-35 )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 21. 몇 번이나 용서하리까? -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형제가 우리에게 무슨 잘못을 범한 후 그것을 사과하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한다. 물론, 용서는 상대방의 사과와 회개를 전제한다.
만일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말도 무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앞 절에서 형제가 사과하지 않을 경우 권징의 절차를 따라 행하고 만일 그가 교회적 권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교제를 끊으라고 교훈하셨다.
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현재의 죄 문제(15-20절)와 결부된 죄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도들의 의무는 죄인을 권면하는 일과 더불어 죄인을 용서하는 이 양자를 조화 시켜야 한다. 평행 본문인 눅 17: 3-4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너는 용서하라"로, 회개가 용서의 전제이며 일곱 번이 최종 숫자로서 거론되어 있다.
마태의 본문은 용서의 전제가 결코 회개는 아니며 베드로가 언급한 일곱이라는 숫자도 예수에 의해 단번에 부정되었다.
마태는 용서의 법은 누가의 그것에 비해 관대하고 너그러운데 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마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서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동사 '아페소'(*)는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는 의미로 악행자가 회개하여 죄 자백을 우리에게 하든 아니하든 즉시 모든 악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의 적극적인 제안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 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數値)화하는 습성이 있었다.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다(외경 집회서 19:13-17).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Jome 86b).
* 암 1: 3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 암 2: 1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음이라.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완전수 내지는 거룩한 수에 해당하는 '7'번의 용서를 제안했다.
그러나 3번이든 7번이든 제한적인 용서는 무한수로서의 일흔 번씩 일곱 번에 의해 거부되었다.
3] 사랑은 용서이다
사람이 쓰는 말 중에서 제일 아름답고 좋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덕목 중에서도 가장 큰 덕목이 사랑이다.
* 고전 13: 13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사람은 음식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이다. 따라서 사람은 정을 먹고 자란다. 즉 사랑을 먹고 자라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이 사람답게 자란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도 고린도전서 13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사랑을 한 마디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본인은 그것이 바로 용서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용서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인들이 용서받고 사랑받는 것이다.
(1) 다윗을 살펴보자.
이스라엘 건국의 초대 왕인 사울 왕국 시대에 블레셋의 침공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와졌을 때 소년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의 안부를 알려고 갔었다.
그때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뭇 장수를 쳐부셔 누구 하나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소년 다윗이 사울 왕에게 간청하여 골리앗과 싸움이 벌어졌다.
골리앗은 칼과 창을 가지고 나왔지만, 다윗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과 물매의 실력을 가지고 나가 골리앗을 단 한 알의 물맷돌로 쳐서 부수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에게는 "천천"을 돌렸지만,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는 환성이 있은 다음부터 사울 왕은 자기의 왕권을 다윗에게 빼앗길 것을 염려하여 국가의 공헌자인 다윗을 살해하려고 했다.
다윗이 사울의 딸을 연모하는 것을 기화로 다윗에게 전하기를, "블레셋 군인 100명만 살해하고 오면 자기의 딸을 다윗에게 주어 사위로 삼겠다"고 하였다.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싸우게 하여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 적진에 들어가 자기 딸을 주겠다는 사울의 말을 믿고 100명이 아니라 200명을 죽이고 그 증거를 가져다가 사울 왕에게 바쳤다. 사울 왕은 할 수 없이 약속대로 자기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어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사울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다윗을 잡아 없애려고 3,000명의 군인을 동원하였다. 다윗은 할 수 없이 몇 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도피 생활을 시작하였다.
(2) 엔게디 황무지에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의 토굴에 숨어 있을 때의 일이다. 사울과 3,000명의 군인들이 이곳을 포위하여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울 왕이 피곤해지자 쉴 장소를 찾은 곳이 다윗이 숨어 있는 굴이었다. 밖에서는 굴 속이 잘 보이지 아니했으나 굴 속에 있는 다윗에게는 사울이 잘 보였다. 사울 왕이 깊이 잠들자 다윗의 부하가 말했다. "내가 단칼에 저 원수를 없애버리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었다. 그리한 후에 다윗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일이다"라고 하며, 사울의 옷자락을 벨 때 마음에 찔렸다고 말했다.
사울이 굴에서 나갔다. 다윗은 뒤따라 나가면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에게 말하기를 "오늘 여호와께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내 신하는 왕을 죽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왕을 해치지 아니했다. 다만 왕의 옷자락을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가 없었음을 아실 것입니다. 왕이여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이 말을 들은 사울이 감동하여 울며 말하기를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구나"하며 화해를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마음은 다시 완악하여져서 또 다시 3,000여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다윗을 잡으려고 하였다.
(3) 하길라 산에서
다윗은 또다시 도피 생활이 시작되어 하길라 산에 숨었다. 사울은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왔다. 밤이 되었다. 다윗은 용감하고 모험을 즐기는 용사였다. 부하 아비새를 데리고 사울이 진친 곳에 들어갔다.
낮에 수색을 하느라고 지친 군인들이 곤드레만드레 잠들고 있었다. 사울 왕의 장막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울은 진 가운데 누워있는데 창이 머리 곁에 꽃혀 있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오늘은 주인의 원수를 우리에게 붙이셨습니다. 내가 단번에 찔러버리겠습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말하기를 "죽이지 말자. 누구든지 손을 들어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되느니라!" 다만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갔다.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꼭대기에 서서 외쳤다. "아브넬 장군이여, 네가 어찌하여 네 주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중 한 사람이 네 주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너는 마땅히 죽을 죄를 지었으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아라!"
이때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듣고 말하기를 "내 아들 다윗아 내가 범죄 하였도다. 돌아오라. 네가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잘못하였도다."
다윗이 대답하기를 "왕이여! 부하를 보내어 창과 물병을 가져가소서. 주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라." 사울이 다윗에게 말했다. "내 아들 다윗아. 네가 복이 있을찌니라.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하리라.“
다윗은 사울 왕을 해칠 수 있었으나 용서해주었다. 얼마 후에 사울 왕조는 블레셋과 전쟁에서 전멸하고 다윗이 제2대의 왕으로 즉위하여 이스라엘의 다윗 왕조를 이루게 되었다. 사랑은 바로 용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리까? 하고 물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부하를 데려오매 그 부하가 엎드려 빌므로 왕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부하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빚지지 아니한 자를 붙들어 옥에 가두었다.
이에 왕이 불러서 부하에게 말하기를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너의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너의 빚진 자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하고 왕이 노하며 그의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너희한테 이처럼 하시리라고 하였다. 이 용서가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이다.
용서해준다는 말처럼 희망을 주는 말이 없다. 나를 새롭게 해주는 말이 없다. 용서는 사랑에서 나오다. 우리도 남을 용서해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마 18: 22.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까지라도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
우리는 사과하는 형제에 대해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실상 일곱 번이나 반복해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용서해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단지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고 사과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다.
상대가 진심으로 사과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를 언제든지 용서해야 한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습이나 랍비들의 가르침, 심지어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새 지평을 여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에 대해
Ⓐ 70*7(490)로 보는 학자도 있고(Erasmus, Jerome, Alford, Grotius등)
Ⓑ 70인 역(LXX)에 의한 창 4: 24에 나오는 라멕에 관련된 77배의 형벌과 연관지어 70+7(77)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Augistine, Ewald, Origen, Bengel 등).
* 창 4: 24 -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90번이든, 77번이든 본문의 숫자는 강한 상징성을 내포한 말로서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인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Wycliffe)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친 말이다.
형제들 사이의 용서는 결코 횟수나 일정한 정도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23-35절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용서의 갈등을 겪고 있는 형제들은 그들이 용서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용서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가 가르친 용서의 횟수는 철저한 복수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창 4: 24의 복수의 횟수(일흔 일곱번)보다 또는 구약적 복수의 한계 규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넓고 큰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보복과 형벌이 끝없는 용서의 모범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비와 용서도 더 한층 끝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A. W. Argyle).
* 엡 4: 32 -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골 3: 13 -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진정 예수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대치(代置)시켜 놓으셨다(McNeile).
용서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슨 잘못을 범한 후에 그것을 사과하고 회개할 때 하는 것이다. 즉 용서는 사과와 회개를 전제(前提)한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내게 잘못을 범하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말도 무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앞부분에서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권면이나 권징의 절차를 따라 행하고 만일 그가 교회적 권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교제를 끊고 그를 이방인, 즉 불신자로 여기라고 교훈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회개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일곱 번이나 반복해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용서해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이라기보다 회개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상대가 진심으로 뉘우치기만 한다면 그를 언제든지 용서하라는 것이다.
2] 일곱 번씩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본문은 용서에 관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다.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의 회수는 당시의 사회에서 매우 충격적이고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최고의 미덕으로 알고 있던 그 당시에는 용서의 개념은 극히도 희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회수를 말씀하심으로 완전한 용서라는 새로운 사랑을 말씀해 주셨다.
이러한 본문을 살펴보면서 용서에 대한 성도의 의무와 완전한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용서와 선행
① 용서는 죄를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죄를 묵인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죄와 연합하는 것이요, 죄와 하나되는 것이며, 죄와 함께 하는 협잡질이요 방조다.
용서는 결코 죄를 용납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자에게만 적용되는 적극적인 사랑이다.
사랑은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인 용서는 불법과 짝할 수도, 그리고 불법과 하나 될 수도 없다.
용서는 모든 죄를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죄를 배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용서하기 위해 먼저 용서할 수 있는 자격부터 갖추어야 한다.
② 용서는 이웃을 살리는 길이다.
정죄는 사랑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으며 좌절감 속으로 빠져 아예 생명을 포기하게 하는 무형의 살인이다.
그러나 용서는 사람을 살린다. 용서는 상처난 곳을 싸매어 주는 것이며, 허물을 덮어주어 가리는 것이다.
용서는 죄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며,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었듯이 우리의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생명을 부여해 준다.
희망과 생명에로의 인도, 그것은 용서만이 지닐 수 있는 아름다운 열매다.
③ 용서는 자신을 살리는 일이다.
용서가 없는 마음에는 미움이 자리 잡는다. 사랑이 자리할 수 없다. 용서가 없는 마음은 따스함이 없다.
반면에 사랑이 없는 마음은 죽음이 자리 잡는다. 기쁨과 즐거움이 아닌 침묵과 고요, 그리고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듯한 결박한 고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용서는 이 모든 환경을 바꿔 놓는다. 사랑에 기쁨이 충만하듯이 용서에는 측량할 수 없는 샘솟는 기쁨이 있다.
용서는 자신의 마음을 환한 빛으로 가득 차게 하며, 싱싱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고 진리와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한다.
그러므로 고독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그리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용서의 특성이다.
(2)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① 인간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몇 번이나'. 이것이 인간의 기준이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정해놓고 있다. 그리고는 그것을
최대치로 생각하며, 그것을 초과하거나 뛰어넘으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에는 인간의 교만이 잠재되어 있어 자신의 의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내 의는 이 정도면 되겠지', '내 사랑은 이 정도면 되겠지', '일곱 번씩이나 용서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라는 생각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인간적 수준과 계산을 뛰어넘기를 원하신다. 자신의 의를 생각하고 내세우기보다도 하나님의 의와 수준에 맞추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사랑이다.
② 하나님의 용서는 무한한 용서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무한이다. 그에게는 기준이 없다. 그의 사랑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 즉 무한대의 사랑이다.
그의 사랑과 용서는 제한이 없다.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으며, 모든 죄를 융화시킬 능력이 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주의 용서는 바로 이러한 용서, 즉 무한대의 사랑과 용서다.
③ 진정한 용서는 기억하지 않는다.
진정한 용서는 다시는 그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는다. 다시금 그의 잘못을 되씹지 않는 용서다. 영원토록 그의 범죄를 잊어버리는 용서다.
주님은 이러한 용서를 실천하셨다. 그는 원수 된 우리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심으로 완전히 우리의 죄악을 도말(塗抹)하셨다.
예수의 용서는 우리의 죄를 자신의 앞에 두는 용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자신의 뒤로 던져버리는 완전한 용서다.
주께서는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로 던지셨다.
* 사 38: 17 –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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