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형제님께서 제 강의를 듣고 배우자인 아내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자마자 “여보,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아내의 반응은 어떻게 돌아왔을까요?
“나 몰래 뭐 잘못했어? 그것도 아니면 뭐 잘못 먹었어? 무섭게 왜 그래?”
이런 아내의 반응에 남편은 깜짝 놀랐습니다.
진심 어린 자기의 사랑 고백을 이렇게 받아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한다는 말은 남편이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다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랑의 말, 따뜻한 말,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말을 아끼지 않고 해야 상대방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말하는 것에 돈이 드는 것도 또 자기 체면이 깎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말을 하면 자기에게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좋은 말은 아끼고 나쁜 말은 과감하게 토해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모습이 사람과의 간격을 더 멀게 만듭니다.
주님과의 간격도 좋은 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불평불만, 원망의 말만 하면서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미사 때 이루어지는 응답에 전혀 진심을 담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제 마음 다 아시죠?’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었나요?
주님과의 기도 내용에 따라 주님과의 관계도 쉽게 파악됩니다.
전혀 믿음 없이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또 급할 때만 주님을 찾으면서 바치는 기도, 자신의 청원을 들어주시면
자기도 무엇을 하겠다는 협상의 기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기는 의인이라면서
당연히 들어줘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협박의 기도 등등…. 모두 믿음 없는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오늘 나병 환자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 앞에 다가간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나병 환자는 일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자기 뜻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당신 앞에 나아오고, 그리고 자기 뜻보다 주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그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나병 환자의 용기 있고 주님의 뜻을 먼저 따를 수 있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다(미치 앨봄).
사진설명: 인천 교구의 신부님 어머니께서 선종하셔서 장례미사를 위해 청라성당에 다녀왔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